속리산에 있는 바위
백제 古土 부여를 찾아
‘아득한 봄날에 동무들과 / 백제의 옛 서울 찾으니 /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 바람은 예대로 부누나’
북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6⋅25 난리 통에 피란 내려온 큰형님은 이따금 이런 노래를 혼자 부르곤 하셨습니다. 누구의 노래를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형님조차 기억을 못한다고 합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그 노랫말이 지금껏 잊히지 않습니다. 조금 커서 학교에 다니면서 비로소 노랫가락이 엉뚱하게도 미국 노래 ‘산골짝의 등불(When It's Lamp Lighting Time in the Valley)’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우리 노랫말과 미국 노랫가락이 한 치 어김없이 잘 맞았습니다.
열흘 전 자유칼럼 필진들과 바로 그 백제의 옛 서울 부여를 찾았습니다. ‘부여(扶餘)’, 듣기만 해도 온갖 감상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을 정작 제 발로 찾아온 건 처음입니다. 그래서 남다른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한편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여 읍내 곳곳에 백제 땅임을 알리는 간판들이 비쳤습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기슭 식당 안에는 ‘환영 대백제국 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에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산성 솔숲 길에 시비(詩碑) 두 기가 나란히 서서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낙화암(落花巖)’이라는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놓은 구절이 자못 비감했습니다.
‘백제 신민의 눈물 수건을 흠뻑 적셨겠지만 / 당당하고 충성스런 이 몇이나 될까? / 만약 당시에 낙화암이 없었더라면 / 옛 나라 강산은 쓸쓸한 봄이겠지.(百濟臣民漏滿巾 堂堂忠義有何人 若無當世落花巖 古國江山寂寞春)’
‘부여’라는 제목을 붙인 또 하나의 시비가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바로 그 옛날 어릴 적 큰형님이 부르시던 바로 그 노랫말이었습니다.
‘백마강 맑은 물 흐르는 곳 / 낙화암 절벽이 솟았는데 /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 길고 긴 원한을 멈췄으리’
이렇게 끝난 시의 작자는 아쉽게도 미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안고 궁녀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을 낙화암은 정말 백마강(白馬江)이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1929년 어느 시 모임에서 백제 여인들의 순절을 기려 지었다는 팔각정자 백화정(百花亭)이 있었습니다. 낙화암에서 물러나는 길목에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시비도 하나 서 있었습니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똑같이 망국의 한을 씹으며 애상에 젖었을 춘원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낙화암 절벽 아래 고란사(皐蘭寺)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백마강을 타고 내려가 구드래나루터에 이르렀습니다. 도성 한복판에 자리한 백제의 호국 사찰 정림사지(定林寺址)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웬걸, 그야말로 휑한 빈터에 탑 하나가 달랑 서 있을 뿐입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이 땅에 시집온 백제의 문화관광해설사 오가야 마사코(鋸屋正子) 씨는 “정림사지야말로 백제 사찰의 정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유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중문과 부처님의 사리나 불경을 모신 탑, 본존불을 모신 금당, 승려들을 교육하는 강당을 남북 자오선 상에 일치되게 배치하는 독특한 가람 구조가 일본에까지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표본이 유명한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라고 합니다.
그런 복잡한 설명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마음은 온통 1천 수백 여 년 홀로 절터를 지켜왔을 오층탑에만 쏠렸습니다. 알맞은 키의 각층 기단과 네 귀가 살짝 들린 지붕돌[屋蓋石]의 애교, 균형 잡힌 탑 전체의 모양이 아마도 백제 여인들의 소박한 맵시가 저렇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저렇듯 단아한 석탑을 두고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불국사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만 읊어댄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탑으로 불리기 전 이 탑은 한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오명(汚名)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 20년(660년) 나당 연합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전공을 탑신에다 새겨 넣었기 때문입니다. IS의 바빌로니아 유적 파괴를 연상케 하는 만행입니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 쓰인 기공문(紀功文)에는 나당 연합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이던 신라 무열왕 김춘추(武烈王 金春秋)의 아들 김인문(金仁問)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1942년 절터에서 고려 현종(顯宗) 때(1028년) 만들어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석탑도 오늘날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옛 백제 때의 이름이 정림사인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습니다. 백제의 슬픈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국보 9호로 지정된 높이 8.3m의 이 석탑은 국보 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오늘도 묵묵히 백제 고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부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 더 많은 곳입니다.
서력기원 전후 위례성(慰禮城; 한강 유역)에서 개국한 백제는 고구려 세력에 밀려 475년 문주왕(文周王) 때 웅진(熊津; 公州)으로 천도했습니다. 538년 성왕(聖王)은 도읍을 다시 사비성(泗泌城)으로 옮겨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습니다. 건국 시조의 본향 ‘부여’(扶餘)를 상기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부름으로써 오늘날의 지명도 그렇게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년 넘게 왕도로 융성했던 부여의 지금 모습은 영락한 시골일 뿐입니다. 봄가을로 일반 관광객은 물론 학생들의 수학여행으로 적잖게 붐빈다지만 읍내는 물론 주변에 변변한 숙박시설이 별로 없습니다. 유적지 가까운 모텔은 예약해 둔 방마저 제멋대로 다른 투숙객에 내어주고는 딴소리를 합니다. 청소도 하지 않은 방을 내주기도 합니다. 관광버스를 세울 만한 주차장이 별로 없습니다. 큰 차를 돌릴 만한 곳도 마땅찮습니다. 충청남도나 부여군이 백제의 역사를 알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성의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부여를 떠나기 직전 큰길가 고추밭에 물을 주는 아낙과 마주쳤습니다. 농사일에 대해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낯선 나그네를 안마당까지 불러들여 꽃처럼 예쁘게 달린 블루베리를 맘껏 따먹으라고 권합니다. 집도 예쁘고 키우는 꽃도 예뻤지만 아낙의 맘씨가 더 예뻤습니다. 고맙다 인사하며 또 오겠다 했더니 언제든 다시 오랍니다. 서산 마애불(瑞山 磨崖佛)처럼 화사하던 아낙의 미소가 그 후로도 자꾸 생각납니다. 다음엔 마애불을 찾아가 백제 미소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펌] / 필자소개; 방석순(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 2016년 06월 21일 (화) 01:13:03
배지
‘배지’ 하면 국회의원의 ‘금배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지름 1.6㎝에 무게 6g짜리 금속 덩어리. 99%의 은에 금을 얇게 입혔으니 실제로는 ‘은배지’다. 예전엔 순금이었으나 11대부터 바뀌었다. 돈으로 따지면 3만5000원밖에 안 한다.
이 배지를 다는 순간 부수적으로 생기는 특권은 200가지가 넘는다. 가장 센 것은 면책특권과 불체포 특권이다. 원래는 군사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국회의원을 함부로 구금하자 자유로운 입법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에 조항을 둔 것이다. 현행범이 아니면 회기 중에 국회 동의 없이 체포나 구금되지 않는다. 비리에 연루돼도 검찰이나 경찰의 소환에 불응하고 국회 뒤에 숨을 수 있다. 그래서 ‘방탄국회’라는 말까지 생겼다.
돈도 마음껏 쓴다. 국회의원 세비만 연 1억4000만 원에 이른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조사 결과 국민소득 대비 국회의원 세비는 OECD 국가 중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그에 비한 효과는 최하위권으로 나타났다. 사무실 유지비와 기름값 등 지원경비 9000만 원도 별도로 받는다. 보좌진 보수까지 합치면 연간 7억 원에 육박한다.
금배지는 국회의원 300명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광역의원 789명, 기초의원 2898명까지 합치면 3987명이나 된다. 광역이나 기초의원들의 특권의식도 국회의원 못지않다. 시의원 배지는 국회의원보다 지름이 0.2㎝ 긴 1.8㎝다. 최근 일부 기초의회는 군의원 배지를 45만원짜리 순금으로 제작해 논란을 불렀다. 중앙 정치무대보다 더한 특권의식이다.
이러니 ‘배지 공화국’에 ‘배지 갑질’이란 소리가 나온다. ‘의원 나리’뿐만이 아니다. 전관예우 파동으로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변호사 배지’를 단 사람만 2만 명이 넘는다. 4800여 명에 이르는 판⋅검사까지 합하면 ‘배지’가 3만 명에 육박한다. 물론 이들을 모두 비난할 수는 없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사심에 가득찬 입법을 남발하는 의원이나, 브로커 해결사로 전락한 검사가 수두룩하다.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다 그 수하로 들어가 ‘주먹 변론’을 맡는 촌극까지 일삼는다.
그렇지 않아도 배지를 없애자는 여론이 많았다. 마침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이 국회의원 배지를 떼자고 공개 제안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면책특권과 불체포 특권을 재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말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배지라는 형식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특권 내려놓기와 ‘입법 갑질’ 방지대책도 함께 내놓기 바란다.
[펌] / 출처; 한경닷컴 / 고두현(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6-06-21 00:03:32
타라코새
금배지의 항변
요즘 그대들이 사는 여의도 정치권에서 내가 논란이 된다지요. 옷깃에 달린 금배지를 두고 말이오. 그저께 백재현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이 이런 제안을 했다고 들었소.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상징적 의미로 의원 금배지를 떼자”고요. 금배지가 책임과 봉사의 상징이 아닌 특권과 예우의 상징으로 비친다는 게 그분의 우려인 듯하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나는 억울하오.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내가 왜 한국 땅에서 이런 홀대를 받아야 한단 말이오. 사실 그대들의 옷깃에 달린 배지는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오. 은이 99%이고 금은 고작 1%에 불과하오. 은 위에다 금만 살짝 발라놓은 거요. 그걸 금배지로 둔갑시키고는 욕까지 해대니 내 심정이 어떻겠소.
한번 생각해 보시오. 내가 왜 심판의 단두대에 올라야 하오? 국민이 원하는 건 내가 아니잖소. 정작 처형대에 오를 것은 그대들이 누리는 특권이오. 그대들의 특권은 200가지가 넘는다고 들었소. 억대 연봉과 두둑한 보너스, 9명의 보좌진은 기본이오. 전화를 공짜로 쓰고 철도와 항공기도 무료로 타고 다니잖소. 공항 귀빈실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재외공관에선 칙사 대접을 받고 있지요.
민의의 전당이라던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알고 보면 특권의 전당이오. 돔처럼 생긴 본관 건물로 가보시오. 그대들이 주인으로 받드는 국민은 정문에 얼씬거릴 수도 없다오. 본관의 널찍한 정문은 오직 금배지를 단 당신들의 전용통로일 뿐이오. 신분증을 패용한 국회 직원이라고 하더라도 옆에 있는 쪽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오. 일반국민이라면 그조차 언감생심이오. 건물 뒤편으로 빙 돌아가 까다로운 절차를 마쳐야 겨우 특권의 전당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소.
옛날 공자의 제자가 “요즘 정치인이 어떠냐”고 물으니 공자가 이렇게 탄식했다지요. “아아! 한 말 두 되들이의 좁은 소견을 지닌 사람을 말해 뭣 하는가.” 유교의 전통이 깊은 한국의 정치 실상은 어떻소. 문득 이런 생각이 드오. 그대들의 언행과 소견을 보면 말이나 되는커녕 컵으로 재야 할 판이오.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책임과 봉사의 상징인 금배지를 떼는 게 아니오. 온갖 정치 갑질의 패악이 시작되는 특권의식을 내려놓는 것이오. 자기를 낮추고 국민을 높이는 ‘하심(下心)’으로 내면을 채우기 바라오. 제발, 죄 없는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들의 옷깃에 단단히 붙어 앞으로 그대들의 언행을 낱낱이 지켜볼 참이오.
[펌] / 출처; 세계일보 / 배연국(세계일보 수석논설위원) / 2016-06-20 22:46:36
아버지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
미국에서 19일은 아버지의 날이었다. 5월 둘째 일요일은 어머니의 날, 6월 셋째 일요일은 아버지의 날이다. 유럽에선 중세부터(since the Middle Ages) 아버지의 날 개념이 있었다고 하는데, 미국에선 20세기 들어 생겨났다.
첫 행사는 1910년 6월 19일 워싱턴주(州) 스포케인 YMCA에서 소노라 도드라는 여성이 열었다. 어머니를 여의고(be bereaved of her mother)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그녀는 교회에서 어머니의 날에 대한 설교를 듣고(hear a sermon about Mother's Day), 여섯 남매를 홀로 키워내신(bring up six children alone) 아버지 같은 분을 위한 날도 있어야 한다고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목사님도 선뜻 그 제의에 동의했지만(readily agree to her proposal), 그녀가 제시한 아버지 생일 6월 5일은 설교 준비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서 6월 셋째 일요일로 미뤄졌다(be deferred to the third Sunday).
다음은 아버지의 날에 여기저기 오른 '아버지께서 주신 교훈'을 간추려본 것.
"그럴싸한 교회를 찾으려 하지 마라. 너 자신이 교회다. 기도라는 것이 눈을 감고 손 움켜쥐고 있어야만(be with eyes closed and hands clasped) 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어떤 때는 부질없어 보일(seem futile) 때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열심히 해라(be persistent in your hard work). 장기적으로는 보상받는다(pay off in the long haul)." "일이든 공부든 어영부영하거나(cut corners) 지름길로 가려(take short cuts) 하지 마라. 고비를 넘어서야 성과를 얻는다."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 마라.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말은 흉기(deadly weapon)다. 남도 다치게 하고 나도 다친다. 튜브에서 나와버린(be out of the tube) 치약은 도로 집어넣을 수 없다." "누군가에 대해 좋은 말 할 것이 없으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마라(don't say anything at all)." "큰 문제에 닥치면 조각으로 쪼개서(break them down into pieces) 생각해라. 코끼리를 어떻게 먹을 것인가. 통째로는 못 먹어도 조각을 내면 먹을 수 있다. 크기에 겁먹을(be intimidated by the magnitude) 필요 없다."
"시간도 예산을 세워라. 시간은 돈보다 귀한데(be more precious than money) 더 빨리 더 쉽게 써버린다." "정직은 최상의 방책(the best policy)이 아니다. 유일한 방책(the only policy)이다." 시간 없다 하지 말고 한 시간 일찍 일어나라(get up an hour earlier)." "도랑을 파든(dig ditches) 못을 박든(pound nails) 남들보다 하나만 더 해라."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중에 더 중한 것은 좋아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고 간다. 하지만 좋아하는 이를 잃으면 기댈 곳이 영영 없게 된다(have nothing to fall back on)." "아내를 여자 친구 대하듯만 하라."
[펌] / 출처; 조선닷컴 / 윤희영(조선뉴스프레스 부장대우) / 2016.06.21 03:05
활짝 핀 아몬드 나무 (1888년) / Vincent van Gogh(1853-1890. 네덜란드)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