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가다]<6> 식민지 엘리트 교육, 경성제대의 흔적들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5. 27.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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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가다]<6> 식민지 엘리트 교육, 경성제대의 흔적들
식민지 엘리트 등용문… 근대 대학-식민통치 기관 '명암' 갈려
조선인 입학생 한 해 50명… 예과생 '검은 망토'는 선망의 대상
"공릉동 이공학부서 로켓연료 개발 연구"… 건물들 문화재로 지정
해방 이후 경성대학 거쳐 서울대로…' 이식 된 근대' 역사속으로
이왕구기자 fab4@hk.co.kr
정준영 한림대 일본학중점연구소 연구원
현재 한림대 의대 강의동으로 쓰이고 있는 옛 경성제대 예과 본관 건물. 경성제대 예과의 다른 건물들은 한국전쟁 당시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주근원 서울대 명예교수가 서울대 의대 의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서 경성제대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jsnight@hk.co.kr
1930년대 중반의 경성제대 캠퍼스 전경. 사진 가운데 부분 현재의 대학로를 중심으로 의학부(위쪽)와 법문학부가 마주보고 있다. 서울대 의사학교실 제공
정준영 한림대 일본학중점연구소 연구원
"서양식 교육이 수입된 지 30여 년에 아직것 최고학부를 가지지 못하야 중학이나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외국에 유학을 가지 않으면 그 이상 연구를 하기 어렵던 조선에서 대학을 가지게 된 것은 문화상은 물론이어니와 기타 각 방면으로 보아 대단히 반갑고 깃분 날이다. 그러나 나는 문간을 드러가면서부터 이상스러운 늣김을 가지게 되였다… 그 이유는 일언으로 폐지하면 '이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는데 지나지 아니한다."('개벽' 1924년 7월호 기사 '경성제국대학 예과입학식을 보고서'에서)
일제는 식민지 젊은이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20년대 초까지 조선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간은 8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3ㆍ1 운동은 일제를 뒤흔들었다. 통치 위기를 겪은 식민지 당국은 당시 조선인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대학 설립을 주도, '근대문명의 시혜자'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다. 도쿄, 교토 등에 이어 일제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이자 일본 밖의 첫 제국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은 이렇게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1924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의 유일한 대학으로 존재했던 경성제대는 3개의 캠퍼스를 거느렸다. 의학부가 현 서울대 의대 자리인 종로구 연건동에, 법문학부가 지금의 마로니에공원 자리인 종로구 동숭동에 자리했다. 이공학부는 현 서울산업대 캠퍼스가 있는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경성제대 졸업생들이 각별한 추억으로 떠올리는 곳은 학부 캠퍼스가 아니라 일종의 예비학교인 '예과'다. 당시 수험생들은 바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예과시험에 합격한 뒤 2년(1934년부터는 3년) 동안 이곳에서 외국어 등 기초교양을 쌓고 학부로 진학했다. 한해 200명 안팎만 뽑았고 조선인 학생들은 50명 정도에 불과해 예과 합격자 발표는 라디오로 생중계될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최고의 엘리트인 만큼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예과생들이 걸쳐 입고 다니던 검은 망토는 '마술의 망토'라고 불렸다. 이 망토를 걸친 예과생들이 전차를 타면 차장이 한번 더 쳐다보고 장안의 아가씨들은 오금을 펴지 못했다고 한다.
유서깊은 경성제대 예과 건물은 많은 이들이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재도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1동 235번지. 청량리역사 북쪽에 위치한 한림대 치과병원 부속건물이 1924년 세워진 경성제대 예과 본관 건물이다. 당시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청량한 느낌을 줬다는 교사 뒷편의 소나무숲은 아파트 단지로, 당대의 최고 수재들이 드나들던 정문 자리는 치과, 안과, 부동산, 비만클리닉, 고시학원 등이 밀집한 복합상가로, 조선인 학생들이 축구와 농구를 하며 민족의 울분을 달래던 운동장 자리는 세무서로 변모했다. 하지만 붉은 벽돌과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예과 본관 건물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방 후 잠시 경성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이후 국립 서울대학교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된 경성제대의 운명처럼 이 건물 역시 신산한 역사를 겪었다. 해방 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울대 치의예과 부속 연구소로 이용됐고, 이후 한 민간종합병원 병동으로 사용되다가 1999년 폐원된 뒤 식당, 세무서, 찜찔방이 들어선 상가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2007년부터 한림대 의대가 강의실, 세미나실로 이용하며 건물의 역사성을 되살렸다. "건물이 고풍스러워 발을 디딜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이민우(23ㆍ한림대 의대 본과 3년)씨는 "당대의 수재들이 수학했던 곳에서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니 느낌이 새롭다"고 말했다.
15만4,000평이라는 넓은 부지에 자리잡은 서울산업대는 1941년 경성제대 이공학부 캠퍼스로 조성됐다. 대학 개교 후 17년이나 지나 이공학부를 세운 것은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한 뒤 기초과학 분야의 인력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9㎞나 떨어진 곳에 캠퍼스를 조성한 이유는 지금도 캠퍼스 인근에 철도(경춘선)가 지나가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질소비료공장이 있던 평남 흥남시, 수력발전소가 있던 평남 부전군 등 북선(北鮮) 지역은 일제시대 최대의 공업지대였는데, 공릉동 일대가 북선으로 연계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