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6
3월21일[사순 제4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ke3fca1pCU (서웅 마오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에 반드시 함께하여 주실 것입니다!>
벳자타 못 환자의 치유 사건은 다양한 병고와 상처로 신음하는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 환자는 1년, 2년, 10년도 아니고 장장 38년 세월 동안 심각한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겨우겨우 기어 다닐 수 있었던 그는 매일 벳자타 연못가로 나왔지만, 치유는 희망사항일 뿐, 그 오랜 세월 그저 들것에 드러누워 누군가의 손길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40세 전후였습니다. 사실 우리도 몇십 년 전만 해도 60세가 되면 오래 살았다며 회갑 잔치까지 했었습니다. 어쩌면 그 환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평생토록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병고에 시달려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의 삶에 대한 의지,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인간답게 살아보겠노라며 발버둥쳤습니다. 매일 벳자타 못가로 나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치유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이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순간, 벳자타 못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의 은총을 입는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지체 장애로 인해 동작이 굼벵이보다 더 느렸던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다고, 이런 그에게 기적처럼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세상 가련한 그의 앞에 멈추시고, 천천히 내려다보십니다. 허리를 굽히시고 눈을 마주치며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설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예수님께는 한 인간 존재의 극심한 고통 앞에 율법이나 안식일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주님, 우리의 눈물 앞에 눈물 흘리시는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에 반드시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38년이 아니라 50년도 더 된 우리의 심각한 고통 앞에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실 주님께 감사드리며,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며 그렇게 이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4iaoiBoxiI
++++++++++++++++++
<진심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진심’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누군가에게 제가 사과할 때 그 사람은 사과받아주지 않으면서 ‘진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과에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감정이 진심일까요?
이탈리아의 전 총리 실비오 베루스코니는 그의 불륜 및 성폭력 혐의 등 여러 가지 비위 사건들로 인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며 “모든 이탈리아 국민과 특히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저의 불성실한 행동과 말들, 그리고 이에 대한 사과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이는 그가 여성 대상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때의 발언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진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그 사과가 받아들여지자 사람이 바뀌었을까요? 다시 정치적 생명이 연장되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의 진심을 감정만으로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구나 눈물은 흘릴 수 있습니다.
영화 ‘사일런스’(2017)에 보면 기치치로는 로드르게스 신부를 끊임없이 배신하면서도 또 끊임없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합니다. 이것이 지나칠 정도로 반복됩니다. 감정은 그때그때 살아남기 위해 솟아날 수 있는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생존을 위해 언제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마귀에 씌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면 어떤 때는 집의 모든 물건을 밖에 가져다 버린 상태이고 어떤 때는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을 볼 때 매우 불안한 상태인 것은 알았으나 이성적인 사고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태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좋아지기를 원한다면 하루 한 시간씩 하.사.시.를 읽으며 성당에 앉아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지 안 할지는 미지수였습니다. 만약 원한다면 지금의 감정이 아닌 ‘의지’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매일 하.사.시.를 읽고 성체조배를 하셨고 지금 한 달 이상은 된 것 같은데 표정이 매우 평화로워졌으며 죽을 때까지 성체조배를 멈추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가족에게 걱정을 끼쳤던 그러한 증세가 더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성체조배 한 시간씩 꾸준히 해서 남편이 돌아오거나 자신이 그렇게도 밉던 사람이 용서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선물 받은 분들은 다 꾸준할 줄 알았던 분들입니다.
이제 명확해집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 진심인 사람은 꾸준합니다. 지금의 감정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으로 진심을 측정하는 것은 오류에 빠집니다. 저는 눈물을 믿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던 많은 이들은 마치 잊기 위한 눈물인 듯 저를 금방 잊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이들이 오히려 꾸준히 연락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벳자타 연못의 치유 기적 사화입니다. 벳자타는 베데스타로도 불렸는데, 자비의 집 혹은 은총의 집이란 뜻입니다. 누가 은총을 받을까요? 은총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은총만이 영원한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는 ‘40’이라는 숫자로 상징됩니다. 이런 새로 태어남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은총과 진리’를 주십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내리는 집이 베데스타입니다. 벳자타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은혜를 받습니까? 38년을 꾸준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치유되기를 원하는지만 물으십니다. 우리는 38년 동안 매일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앙체험수기’ 공모를 하였고 ‘대상’을 선정하였습니다. 저는 대상으로 선정된 수기를 읽으면서 고통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어려서 백혈병을 앓았습니다. 누나의 골수이식으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들은 첫영성체를 하였고, 미사복사를 하였습니다. 아들은 예비신학생이 되었고, 사제가 되고 싶어 하였습니다. 아들은 천사와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키가 훌쩍 커진 아들을 위해 본당에서 따로 복사복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들의 백혈병은 재발하였습니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이 아들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아들의 수의는 아들이 좋아하였던 ‘복사복’으로 하였습니다. 본당신부님은 강론 중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모두가 그렇게 울면서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엄마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천사와 같은 아들을 너무 일찍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나가기도 싫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할까?’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엄마는 몸을 추스르고 성당으로 갔습니다. 본당신부님과 신자들이 엄마를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생각하며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 아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순교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지순례를 하였다는 도장이 늘어나면서 초췌했던 얼굴도 점차 밝아졌습니다. 이웃들과 대화를 하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서 더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본당 레지오에 입단하였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모두 엄마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도 글을 읽으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라파엘과 죽은 모든 교우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는 38년 동안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던 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짜타’라는 연못에 몸을 담그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도 있었지만 그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건강을 회복하길 원합니까?” 환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원하지만 아무도 저를 저 연못으로 데려가 주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연못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직접 고쳐주셨습니다. 연못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분들은 하나씩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치 누워있던 환자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 없다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부님 제가 하는 일이 조금 잘 되면 성당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자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가난해도, 지금 힘들어도 하느님을 찾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가족들을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나오겠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남편이 나가면 함께 나가겠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지만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우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이 있어서 성당에 안 나온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분들과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크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재정적인 이유가 있어도, 가족들과의 문제가 있어도, 이웃과의 문제가 있어도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16: 건강해지고 싶으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이나 고생한 병자가 등장한다. 환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38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보시고 다가가신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해지고 싶으냐?”(6절) 하고 물으신다. 환자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7절) 사랑이 없는 곳에는 도와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청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선뜻 다가가신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신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8절) “일어나라!”라는 것은 치유를 내린다는 뜻이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는 말씀은 치유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들것을 들고”라는 것은 지금까지는 죄에 억눌려 있었지만, 이제는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너 자신을 잘 다스리면서 가만히 있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여 사랑해야 하는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아직 주님께 도달하지 못했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있다. 그 이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들것을 지고 걸어갔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요.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10절) 한다. 즉, 치유를 기다릴 순 없었다 해도 왜 들것을 지고 가라고 하였는가? 이다. 그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의 권위 뒤로 숨는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11절) ‘나를 치유해 주신 분의 명령을 내가 따르지 않을 이유가 뭐요?’라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치유 받았음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유다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치유 받은 남자를 성전에서 만나신 예수께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14절)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온 그가 죄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어 그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그가 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신다는 뜻도 내포되어있다.
어제까지 우리는 들것에 누워있던, 물이 출렁거려도 우리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곁에 계시다. 우리를 들것에서 일으키셨다. 또한 들것을 들고 우리가 입은 은혜를 확인했다. 다시는 들것에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된다. 항상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걸어가야 한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배은망덕>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의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이고, 배경 상황이 좀 특이하긴 해도 다른 치유 이야기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은 그의 ‘배은망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병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몰랐으니까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은혜를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를 받고 건강해진 다음에도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한참 뒤에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그 일은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안다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믿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을 알고 나서 배반했습니다. 만일에 모르는 채로 있었다면 배반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는 처한 상황은 거의 같은데, 신앙 면에서는 5장에 나오는 병자와 완전히 정반대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요한 9,36-38)
그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도 바리사이들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나를 고쳐 주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다.”라는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요한 9,30-33) 그러나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5-9ㄱ)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무슨 기적이 얼마나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지금 이야기 속의 병자의 말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도 원망하느라고 제대로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그가 너무 딱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먼저 병든 몸을 고쳐 주고, 그다음에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병자는 청하지도 않은 은총을 갑자기 받았는데, 기뻐하는 모습도 없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모습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9ㄴ-1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던 사람이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되었는데도, 그들은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꾸짖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자의 말은, “내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 탓이다.”라고 변명하면서 책임을 예수님에게 떠넘기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처벌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기쁨보다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 나쁜 일’은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몸의 병’은 ‘나쁜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더 나쁜 일’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라는 말씀은,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한 일이고, 몸의 건강에만 만족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겠다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일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던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치유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생명이 위급한 사람을 살리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날에도 고칠 수 있는 병자를 치유하는 것은 금합니다. 병자의 행동은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도 안식일 규정을 어기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치유된 사람은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라고 묻는 유다인들에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에야 그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이 나은 이는 처음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그분을 알게 됩니다. 요한 복음에서 안다는 것은 믿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수많은 질문이 등장합니다. 복음은,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그분이 누구이신지’ 묻습니다. 그 답은 이미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건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당시의 의미에서는 완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육체의 병만이 아니라 내적인 상태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분이시며, 육체의 병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하게 되도록 길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
[대구대교구 박정근 테오디모 신부님]
"낫기를 원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베자타 못에서 38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 한 사람을 고쳐주고 계십니다. 38년이라면 무척이나 긴 세월이라는 것을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래도 살고자 하는 노력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배자타라는 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 그 못의 물을 휘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이 출렁거릴 때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떠한 병이라도 나았기 때문에 그 못가에는 항상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께서 이 못가에 오셔서 많은 환자들 중에서 38년을 앓았던 사람을 보시고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병자는 대답하기를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게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기회는 주어지지만 그 기회는 자기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무려 38년동안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생하고 아파하는 그에게 주님은 다가가시어 그를 낫게 해주신 것이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는 병으로 누워 있었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낳지 못하는 그였지만 주님은 아파하는 이에게 다가가 필요한 것을 주시면서 당신의 자비로움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병을 치유받았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주는 따뜻함과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까지도 함께 받게된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사람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찾고 있으며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민과 걱정, 아픔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나에게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묻고 계십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에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
[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걸어가라“ (요한 복음 5장 1절-16절 참조)
예수님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서른 여덟 해나 들것에 누워서 앓고 있는 환자에게 물으셨다. 환자에게 이 말은 복음이다. 이 환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 환자뿐만 아니라 베짜타라고 불리는 못 주변에는 눈먼 이, 절름거리는 이, 팔다리가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왜냐하면 물이 출렁거릴 때에 그 못 속에 들어가면 혹시 병이 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고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느니까. 누구나 환자라면 그곳에 와서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제일 먼저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 희망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모여 있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인간이다. 어떤 사람도 나름대로 희망을 갖고 있다. 그 희망이 또 오늘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나의 희망은 무엇인가? 나의 꿈은 무엇인가? 지금 나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면 그 바램이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이, 절름거리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은 누구인가? 꼭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어쩌다가 가끔 물이 출렁거릴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병이 낫는다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그래도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기다리고 있는 이 병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먼 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지 못하고 절름거리는 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의 양식을 먹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여서 영양실조에 걸려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신자들의 모습이다.
병이 낫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못에 와서 언제 물이 출렁거릴 지도 모르면서 그 물이 출렁거릴 때만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이 바로 오늘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그곳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이들이다.
베짜타라는 못은 또한 율법을 가리키기도 한다. 옛날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서 오직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다.
오늘날 베짜타라는 못은 복음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즉 병든 우리를 낫게 해주는 것은 복음이지 교회 건물이 아니고 신자라는 이름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 35장 10절)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샘인 말씀을 먹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지 나의 병을 고쳐주시겠지 하고 형식적이고 수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일어나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서른 여덟 해 동안이나 누워있던 환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한 것은 베짜타라는 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었듯이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미사 참례를 하러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아니고 또 활동이 아니다.
정말로 우리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들것에 누워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은 시체라는 말이다. 일어나라는 말은 부활하라는 말이다. 무엇이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가? 그것은 그가 누워있는 들것이 아니다. 그를 부활시키는 것은 "일어나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던 말씀이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걸어간 것은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고 그가 그 말씀대로 따랐기 때문에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를 그 동안 누워있게 만들었던 들것은 무엇인가? 복음에서 말하는 들것이란 율법을 말한다. 율법은 결코 그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이 그에게 들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에게 들것은 여러 가지 일 수가 있다.
나의 고정관념, 나의 악습. 나의 잘못된 신앙생활, 게으름 등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얽매여 있어서 일어나 걸어가지 못하고 있다.
일어나 걸어간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살릴 수 있고 병든 나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나를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의 샘이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먹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의 못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치유 받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생명의 샘인 말씀의 못에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고 치유시켜 줄 수 없는 베짜타라는 연못에 누워 낫게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신앙 생활해온 기간이 어느덧 서른 여덟 해가 되는 사람도 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 35장 10절)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제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자. 아무리 말씀이 중요하다고 제가 누차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 서른 여덟 해 동안 누워지내야 할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오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하신다.
=====================
[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나를 살리러 오신 예수>
요한 복음 사가는 수학자 같습니다. 요한 복음은 전반부에 “세상을 살리러 오신 예수님”, 후반부에 “그 살리는 방법으로 사랑을 택하심”으로 나뉘며 전반부 예수님의 활약상은 유다이즘에서 완전을 뜻하는 일곱 가지 표징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일들이 다 놀라운 일이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일곱 가지 사건을 배치하는데 그 세 번째가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살리심을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병자가 양의 문 옆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아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38년을 앓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질병과 오랜 병고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그만큼 깊었음을 얘기합니다.
또한 요한 복음사가의 전형적인 인간 심리 분석 방법인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만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구원을 바라는 인류 안에, 가장 보잘것없는 이, 바로 38년이란 오랜 세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버려진 불쌍한 인간, 바로 내 자신을 살리러 오심을 얘기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안에 자리하는 세상 속의 하느님 나라를 알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방향 상실, 매일 이어지는 공허한 삶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등에 업고 베짜타 못가로 향하고 계십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 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송도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의 주임신부로 생활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저는 열심한 본당 교우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인사이동 발표가 났을 때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송도 신도시에서 꽤 큰 규모의 성당인데 저와 함께할 보좌신부도 없었고, 본당이 생긴 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할 일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왔기에 솔직히 이번에는 작고 안정적인 곳에 보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주교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조신부는 일 없는 곳에서는 답답해서 잘 살지 못할 거야. 성 김대건 성당은 한 5년 동안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거다.”
저를 이렇게 단정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 김대건 성당에 와서 보니 주교님 판단이 맞았음을 깨닫습니다. 일이 많아서 약간 몸은 피곤했지만, 교우들과 함께 신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저를 바라보는 제삼자였음을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자극받아 더 나은 자신이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상대방의 말을 걸림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디딤돌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병을 고쳐줬다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말하고,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병을 고친다는 말도 했습니다. 특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이들의 말에 의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말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지만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특히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병으로 앓고 있었고, 이 병의 치유를 위해 벳자타 못을 떠나지 못하는 병자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도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에 집중할 때,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는 성전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물이 살아난다는 내용이고, 복음은 주님께서 바로 그 생명의 물이시고 그래서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치유가 일어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성전의 물이 흘러가는 곳은 어디이고, 주님께서 찾아가시는 곳은 어딜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오늘 복음에 벳자타 못의 주랑에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겐 가지 않으시고 오직 중풍 병자에게만 가서 치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병자는 덜 불쌍하고, 중풍 병자가 더 불쌍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다른 병자들은 스스로 가는 데 비해 중풍 병자는 스스로 갈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지만, 아무도 도움 주지 않으니 그가 제일 불쌍하고 그래서 주님께서 가신 거지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그러니 낮은 곳이 물이 흘러가는 곳입니다.
생명의 물이 흘러가고, 사랑이 가는 곳도 마찬가집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한 사람에게, 그런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람이 돕지 않으니 하늘이 도울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가십니다.
그래서 나를 돌아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존재인지. 낮은 자인지,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자인지.
다른 반성도 또한 합니다. 나는 성전에 흘러나오는 물인지. 나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사랑인지.
매일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미사에서 주님의 사랑을 영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매일 파견되는 나는 진정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주님의 사랑인지.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 늘 새로운 시작 -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얼을 지니셨기에
세상의 영화를 업신여기고
버렸도다.”
오늘 미사 시작전 입당송이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어제 우리 수도원의 수호자인 ‘성 요셉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입니다. 흡사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가 영원히 보고 배울 롤모델인 양대 수호성인을 배경으로 모신 듯 하여 마음 든든하고 뿌듯합니다.
성인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도전이자 하루하루 날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하는 성인들입니다. 요즘 새로이 깨닫고 확인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삶은 반복이다.
삶은 선택이다.
삶은 여정이다.
삶은 훈련이다.
삶은 습관이다.”
1989년 사제서품 이후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을 쓰면서 깨닫는 진리들입니다. 지금도 ‘마리아의 집’ 피정집에는 34년 전 첫미사 때 앉은뱅이 제대가 있어 피정자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새로운 감회에 젖곤 합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단조로운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반복뿐 아니라 선택도 여정도 훈련도 습관도 똑같습니다. 늘 새로운 선택에 거룩한 선택입니다. 늘 새로운 여정에 거룩한 여정입니다. 결코 똑같은 날은 없습니다. 코헬렛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써오면서 제목이나 내용을 봐도 새로운 것이 없는 반복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떠남의 여정-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마 이 강론 제목도 수차례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9년 전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저에게는 획기적 전기가 되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 하루하루 날마다 가장 기다렸던, 또 기뻤던 때는 강론 쓰고 미사 후 새벽 떠날 때였습니다. 늘 설렘의 기쁨 중에 새벽길을 떠났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수도원 정주의 삶이 제자리에서 하늘 본향을 향해 형제들과 더불어 내적 순례 여정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가 ‘여정’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의 여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많이 나눴던 삶의 여정에 대한 조언이 생각납니다.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있겠는가? 일년 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제 경우 하루로 하면 넉넉잡고 오후 4시, 일년 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확인이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깨닫게 합니다. 환상이나 거품이,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진실과 겸손,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루하루가 떠남의 여정중의 삶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떠남이 얼마나 장엄합니까? 좌절함이 없이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구원 역사를 펼치시는 하느님의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로 신선한 감격이요 고맙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힘이 됩니다. 아브람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흡사 하루하루 떠남의 내적 여정에 충실하라는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12장 4절 앞부분으로 끝나는데 4절 후반부까지 인용됐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나이 75세이면 저와 같은 나이입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나이 75에 복된 존재로 떠남의 여정에 오르는 영원한 청춘 아브람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도전이자 충격이 됩니다. 죽는 그날까지 떠남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입니다. 더불어 떠남의 내적 여정에 항구할 때 안주가 아닌 진짜 정주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이런 소망과 결의가 담긴 고백 시입니다. 아마 아브람의 내적 심정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깨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떠남의 여정에 롤모델이 바로 아브람입니다. 아브람뿐 아니라 예수님 역시 떠남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지상 삶을 마감하는 고별기도에 속합니다. 지상 삶을 떠나기에 앞서 하느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로 끝맺는 마지막 떠남의 여정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지요! 흡사 하루가 끝나는 저녁 일몰 분위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고별기도의 순서는 “자신을 위한 기도”에 이어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오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혼신의 힘을 다해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 덕분에 하나의 일치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우리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아브람, 예수님 모두가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던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여기 떠남의 여정에 빛나는 모범이 있으니 우리의 자랑스러운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오늘 성인의 별세축일, 지상 삶에서 천상 삶으로의 떠남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요! 아마도 성인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제자들에 대한 충고를 마음에 새기고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을 때 마지막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의 떠남입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마지막 37장은 성인의 거룩한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감동적인 37장 2절 전문을 인용합니다.
‘그분은 임종하시기 엿새 전에 당신을 위해 무덤을 열어 두라고 명하셨다. 곧이어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심한 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하셨다. 병세는 날로 심해져서 엿새째 되던 날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떠남인 죽음의 장면입니다. 후대의 제자 수도승들에게 사부의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영이자 결과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었기에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은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시편 33,22)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5,8)
오늘 복음(요한 5,1-16)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말씀'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 있는 주랑 안에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습니다. 그들은 벳자타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못으로 들어가는 이가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참으로 불쌍한 병자가 있습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라는 그의 말로 보아,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불구자였습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5,6)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
그러자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갑니다.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그의 신뢰(믿음)'가 놀라운 치유를 가져옵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그의 인내심'이 놀라운 치유를 가져옵니다.
힘들다고 쉽게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일어난 40대 부모와 자녀들 3명이 함께 숨진 사건에 그 바탕에는 엄청난 힘듦과 고통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부모(아버지)가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믿는 이들은 어떻게 그 힘듦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가?'
우리를(나를) 살리시려고 스스로 힘듦과 고통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온갖 수난과 모함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하느님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 작은 믿음만 있으면, 힘듦과 고통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fLdPRhIYU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 6)
사랑을 품고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건강한 삶의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자신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건강한 삶
건강한 관계는
사랑과 진심어린
대화(對話)에
있습니다.
건강해지는
대화는 먼저
상대의 약점과
아픈 곳을
후벼 파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점과 아픔을
드러내는
대화입니다.
사람의 최고
가치는 몸과
마음의 참된
건강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을
되돌아보고
우리자신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소외된
우리자신을
우리가 이제
돌보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는
우리의 삶에
생기를 줍니다.
서로를
괴롭히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해묵은
논쟁거리를
이제 그만
내려놓고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우리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건강한 인격의
나눔과 행복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