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의 보고(寶庫), ‘아나톨리아 반도’
터키가 위치한 아나톨리아 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고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입니다. 이곳은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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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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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수많은 문명들이 나타났다 사라져 간 곳이기도 하구요. 히타이트, 프리기아, 우라르투, 리디아,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 제국 등의 주 활동무대가 다 이 곳 아나톨리아 반도였습니다. 동서양의 문명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아름답게 꽃을 피운 곳이죠.
흔히들 세계 4대 문명으로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 황화문명을 드는데요. 이 중 BC 3500년경부터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된 곳이 바로 이 곳 아나톨리아 반도이구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젓줄인 티크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해 있습니다.
‘마이다스의 손’ 얘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얘기이지요. ‘트로이 전쟁’ 또한 마찬가지일테구요. 마이다스왕이 있었던 곳, 그리고 그리스 연합군들이 공격한 트로이가 또한 이곳 아나톨리아 반도입니다. ‘오리엔트’란 말이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서구문명의 시원(始原)이라는 그리스문명이 바로 이곳으로부터의 문화를 받아들여 이루어 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터키는 이슬람국이긴 하지만, 크리스트교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성지(聖地)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안착한 아라랏산(해발 5,165m)이 바로 이곳에 있으며,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룩한 초대 일곱 교회가 위치한 곳도 바로 이곳이구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에 의해 오랜 기간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이름을 바꾼 것이 지금의 이스탄불이구요. 비잔틴문명의 최대걸작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제국의 점령 후 성 소피아 성원(이슬람 성당)으로, 1934년부터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그 이름과 기능만 바뀐 채 여전히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구요.
이렇듯 많은 문화재가 위치한 인류문명의 보고(寶庫)이니만큼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을테구요. 실제 2002년 월드컵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터키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말로만 "형제의 나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왔다면 정말 형제처럼 반갑게 맞아준다 하니 형편 되시면 한 번 가 보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2. 세속주의 이슬람국가 ‘터키’
터키는 이슬람 국가입니다. 그러나, 사우디, 이란과 같은 일반적인 이슬람 국가와는 분명 다른 형태의 이슬람 국가인데요. 바로 세속주의(世俗主義) 이슬람 국가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터키공화국의 헌법에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것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운영되고 있구요.
여기서 이슬람 국가들이 왜 ‘정교합일(政敎合一)’이 보편적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종교(宗敎)와 정치(政治)가 일치되는 것이 인류역사상 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제집단이 필요하고, 이 사제집단은 그대로 권력화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권력화한 사제집단은 종교라는 믿음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기독교는 제정분리인데 비해 이슬람은 제정일치인 것은 창시자(?)의 살아생전 정치적 위상에 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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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란 ⓒ 엠파스 검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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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 크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지만(이게 정치범에 대한 형벌이라 하더군요), 마호메트는 살아생전에 이슬람 공동체를 완성해서 지배했지요. 마호메트의 사후에는 마호메트의 후계자(칼리파)들이 여전히 이슬람 공동체의 왕으로 군림했구요.
반면, 예수와 예수의 후계자들은 정권을 잡진 못하고 로마의 황제들에게 탄압받는 신세였으니, 포교를 위해서라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누가복음 20:25)”라고 정교분리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을테구요.
이러한 제정합일은 이슬람교의 교리(敎理)에도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슬림의 경전 『꾸르안』은 알라에 대한 복종(종교적 복종)과 현세 통치에 대한 복종(정치적 복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 믿는 자들이여, 알라께 복종하라. 그리고 알라의 사자(使者)와 너희들 가운데 권위를 지닌 자들에게 복종하라 (4:59)”라고 명시되어 있죠. 이러한 생각의 연장으로 이슬람 사회는 『꾸르안』과 『하디스(마호메트의 언행록)』을 주요한 법원(法原)으로 하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에 의해 다스려집니다.
그런데, 이런 일종의 종교법인 『샤리아』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역할은 당연히 종교지도자들이 할 수 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을 모두 종교지도자가 갖는 제정합일의 정치체제를 갖게끔 되는 것이죠.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도 이러한 전형적인 정교합일의 이슬람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승전국들에 의해 나라가 갈기갈기 찢길 위기에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고, 그가 외세를 물리치고 새로운 터키공화국을 건립하면서, 서구식의 공화정(共和政) 체제를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다른 제정분리의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3. 국부(國父) ‘아타튀르크’와 터키 공화국
이제 터키 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될 차례인 것 같습니다. 이 분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이구요. 터키공화국 설립 이후 의회가 ‘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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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 ⓒ 엠파스 검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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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국부라는 뜻의 터키어)’란 새로운 성(姓)을 헌정했다는군요.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주축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입니다. 안 그래도 크리스트교의 세계인 유럽이 한 때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이교도 오스만 제국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 일테고, 패전을 빌미로 아예 영토를 갈기갈기 찢어놓아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끔 하려 합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인 술탄은 이슬람 세력의 상징적 최고자인 ‘칼리파’의 칭호를 갖고 있는, 이를테면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의 종주국(宗主國)이기까지 했으니까 말이죠.
1920년 8월 당시 승전국이었던 연합군(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이스탄불을 빼앗고, 터키의 영토를 앙카라 고원지대로 축소하려는 세브르 비밀조약의 인준을 요구합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군의 일원이었던 아타튀르크는 ‘터키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국민의회를 만들게 되구요.
영국의 지원을 업은 그리스군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끔으로써, 이스탄불을 지키게 되고,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나마 지금의 터키 영토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라 15년간 터키를 통치합니다. 일종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민족영웅이라고나 할까요. 터키인들에게는 그런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아타튀르크는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전통적인 이슬람 국가를 벗어난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서구화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개혁조치들을 취했습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제정일치가 아닌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고, 이슬람율법인 『샤리아』에 의한 통치를 버리고, 서구식 법치를 도입했으며, 서구식 근대교육도 도입했구요. 지금 터키인들이 쓰는 로마문자에 기반한 터키문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터키 공화국의 모습 상당부분이 아타튀르크에 의해 이뤄진 것인 셈이지요.
4. 터키와 투르크 민족주의
1990년대 초 소련(USSR)의 붕괴로 나타난 세계사적 흐름 중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의 대두입니다. 이데올로기로 뭉쳤던 세계가 민족을 중심으로 다시 모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데요. 터키 관련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한 세계가 다극화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같은 한민족(韓民族)으로 거리를 점차 좁혀가고 있는 것 또한 이런 세계사적 흐름의 하나일테구요.
소련의 붕괴로 우리 귀에 생소한 새로운 나라들이 속속 국제사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크게 보면 그 일환일테고, 우크라이나, 그루지아, 벨로루시 등등등.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기 어려운 나라들이 최근 십수 년 내에 많이 나타났는데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기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6개의 나라도 바로 이러한 생소하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나라들이겠지요. 이들을 통칭해서 중앙아시아(아제르바이잔은 제외되지만) 라고도 하는데요. 이 들 나라는 모두 구 소련연방(USSR)의 일원이었으며, 아울러 터키와 같은 투르크족 들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과거 사회주의 이념 속에서 민족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던 이 들 나라에도 ‘투르크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自覺)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데요. 아마도 경제력이나 문화적인 전통을 감안해 보면, 이 들 투르크족 나라들은 터키를 중심으로 힘을 합치게 될 개연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 얘기는 터키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중앙아시아 대 초원을 차지하고 있는 이 들 6개국과의 교류도 또한 활발해 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요.
5. 외잘 총리와 한국형 모델, 그리고 한류열풍
대한민국 수반이 터키를 방문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지만, 터키의 수반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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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일리서프라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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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바로 전두환 재임시절인 1986년 11월4일, 7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외잘 총리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여기에 얽힌 재밌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시죠.
외잘이 이끄는 조국당은 1983년 정권을 잡게 됩니다. 당시 터키 경제는 상당히 혼란한 상태였는데요. 당연히 외잘 총리도 어떻게 하면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그리고, 이 때 외잘 총리가 주목한 경제성장 모델이 바로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잘 총리는 기회날 때마다 한국을 배우자고 했지요. 이 당시 터키에 유행했던 말이 “Look East”라고 합니다. 서양 고마 배우고 동양의 한국에게 배워보자는 거였겠죠. 그리고, 많은 조국당 간부들은 실제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보냅니다.
드디어 1986년 11월, 외잘 총리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나, 7일간의 방문을 마치고 터키로 돌아간 외잘 총리는 더 이상 “한국을 배우자”라고 얘기하지 않구요. 터키에서 한 때 유행했던 “Look East”도 그렇게 사라져 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터키 언론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업화 및 수출입국을 달성하려는 한국형 모델은 독재 정권이 가능한 나라에서만 가능하지, 터키와 같은 서구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 여태까지는 한국형 모델을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실제 가서 보니 실제보다는 지나치게 전설화 된 것이었다. 한국형 모델은 민주주의와 함께 생각해 볼 때, 터키와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터키에는 민주주의가 있지만, 한국에는 데모크라시의 ‘D’가 없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에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D’만 있는 것이 아니라, ‘C’나 ‘R’까지는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도 더욱 성장했구요.
첫댓글 터키는 'D'가 있나?? 국회 굴뚝 청소부몸값보다 국회의원의자값이 더 비싼 나라. 장관이 마피아랑 같은 차 타고 가다 교통사고 나서 정체가 드러나는 나라, 강간당한 자기 여동생을 가족명예를 더럽혔다고 살인하는 나라,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