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本考)는 상주지역에 크리스토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설립되기까지
어떤 분들의 노력이 있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문헌에 나타난 상황으로 보아 상주의
‘첫’ 개신교 목회자 이희봉 목사에 대해 그 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첫’이라는 말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첫’이라는 단어가 바뀔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임을 밝혀 둔다.
이희봉 목사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그가 많은 교회를 섬겼지만
각 교회마다 연혁에 한 줄 또는 두 줄 정도의 시무 경력만 기록되었을 뿐
그의 목회 활동에 관한 구체적 평가나 활동내용은 거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라도 정리하여 밝힘으로써
다른 이들의 연구에 적지만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다행이『경북기독교회사』 박창식,『경북기독교회사』, 코람데오, 2001.
의 발간과『경북교회사』 김병희 편역,『경북교회사』, 코람데오. 2004.
의 편역, 그리고 비록 복사본이기는 하나
『조선야소교 장로회 사기』 차재명(車在明). 소화 3년 9월 8일와
『경상노회록』 조현규 편집, 자료제공 이재원
,『경북노회록』 조현규 편집, 자료제공 이재원 경북노회록, 사본 24회~39회,
1999.은 이 지역 교회사와 인물을 연구하는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Ⅱ. 이희봉 목사
이희봉은 조선 말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정치적 싸움을 하고 선교사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딜 무렵 1876년 채종기 장로의 증언자료에 의하면
1873년 3월 5일 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북 김천 아포에서 전주 이씨 경영군(敬寧君) 경영군파는 태종 이방원의 12명의 아들 중 5번째 아들인 경영군 비(緋)를 중간 시조로 모시고 다시 1세부터 시작된다.
의 16대 손인 명문가에서 부친 이용각(李容珏), 모친 김해 김씨 덕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배우자 김성년 사이에 장남 종원을 낳았다. 종원은 후에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다시 손자인 인영은 안수 집사로 증손자 호근은 이희봉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 믿음의 대를 잇고 있다.
이희봉은 아버지 용각으로부터 한학을 가학(家學)으로 이어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학에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초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할 정도로 명석하였다. 부모님의 기대가 대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가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과거 포기라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에 대한 안타까움과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가
그를 크리스토교에 입교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그의 신앙은 깊어지게 되고 마침내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이희봉의 손자인 이인영과 증손 이호근 목사의 증언(2016. 6. 13일. 15시. 전화통화)
이희봉이 5,000년의 역사 속에 뿌리박은 샤마니즘 신앙과 아울러 불교와 유교 사상이 전통으로 이어진 이 나라에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참으로 그 시대에서는 생명을 건 고난의 길이었다. 이희봉은 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한국교회 초창기 조사가 되었다.
조사(助事)는 선교사들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Helpers'를 직역한 낱말이다.
선교사들은 통역을 위해 어학선생이 필요하였고,
이들은 종종 한국인들과 접촉함에 있어서 선교사와 일반 대중사이에서 중개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조사들이다.
초기에 조사라는 용어는 오로지 예배를 위해 모인 그룹 사이에서
중개자로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성장한 1928년 차재명 목사가
저술한『조선야소교 장로회 사기』상(上)에는 조사(助師)로 표기가 바뀌었는데
이 당시 조사들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일을 도우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목사의 직무를 대행하는 준 목사(準牧師)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조사들은 사실상 목사로서 일반 목사를 대신하는 의미의 조사로 인식되었다. 이로 볼 때 당시 한국인 목사가 대거 양성되기 전
선교사를 도와 교역 일선에서 직분을 맡아 수고했던 이들을 말한다.
이희봉은 이렇게 조사가 되어 선교사를 도와
선산의 죽원교회(竹院敎會), 노상동교회(路上洞敎會), 습례교회(習禮洞敎會),
김천지방의 대양교회(大陽敎會), 복전교회(福田敎會), 인의동교회(仁義洞敎會)와
상주 지역의 서정교회(西町敎會)를 비롯한 금흔(錦欣), 화산(花山), 오리원(五里院),
석산(石山), 사산(沙山), 오광(五廣) 등에서 시무하였다.
그리고 서정교회(西町敎會)에 시무하면서 1910년 보성의숙(普成義塾)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으며,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9회 졸업을 한 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다시 청산교회(靑山敎會), 상주 서정교회(西町敎會), 선산 죽원교회(竹院敎會), 고령읍교회, 황금동교회(黃金洞敎會)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8년 경북 노회장을 3~4회 연임하게 된다. 그 후 대구 칠성정교회(七星町敎會),
김천 송천교회(松川敎會)를 담임하다가 1931년 상주 남문외교회(尙州南門外敎會)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이러한 그가 갑자기 건강이 문제가 되어 1937년 상주 남문외교회와 상주 서정교회가 합병을 하고 상주 서정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그리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 생활하다가 1940년 향년 64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이희봉 목사의 손자 이인영 목사의 사진자료에 기록된 내용 제공)
여기서 이희봉 목사가 상주의 ‘첫’ 목회자로 세움 받음에는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복음의 확장에도 큰 역할을 다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은 그가 교육자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이다. 1910년에 세운 보성의숙((普成義塾)과 1920년에 세운 보성여자학원(普成女子學院) 및 부인야학교(婦人夜學校)는 상주교육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귀한 씨앗이 되어 마침내 1949년 5월 1일 상주읍교회 내 상주유치원(尙州幼稚園)이 설립인가를 받고 5월 5일에 개원(초대 원장 고윤봉 목사)을 한 것이다. 상주지역에서 첫 유치원 설립이다. 이렇게 시작한 유치원은 2003년 교회시설로 인해 폐원하기까지 54년의 역사를 이루어 상주교육사에 한 획을 긋게 했다.『상주교육사』, 상주교육청, 2004, 1300~1303쪽.
그런데 상주교회와 시민교회 연혁에 없는 또 다른 기록이 경북노회록에서 발견된다.
1928년 6월 5일 동산성경학교에서 열린 제24회 경북노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주읍교회는 유치원인가를 받았고 불신자 중에서 풍금 1좌를 기부하였으며, 상주읍교회에서는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은 40여 명이 오며 많은 재미를 보옵나니다.”
『경북노회록』, 1928. 6.5, 경북노회 제24회 노회록 10쪽.
이 기록과 오늘날 두 교회 연혁은 차이가 나는데 이는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내용이다.
위 내용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영향을 받은 상주읍교회는 1954년 상주성경중등구락부(尙州聖經中等俱樂部)를 설립하여 배움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터를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 6월 6일 교회 내에 있던 상주성경중등구락부를 상주성경중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다시 계산동으로 이전하면서 성신고등공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상주교회,『상주시민교회 요람』
이는 오늘날 성신여자중학교의 전신이 된 셈이다. 1966년 성신여자중학교는 옥천학원이 설립되면서 새로운 교육의 터전으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희봉은 상주의 복음화와 교육을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살았던 ‘첫’ 목회자였다.
Ⅲ. 이희봉 목사의 목회 활동
이희봉 목사의 목회 활동을 위 자료들에 의해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1년
〇 선산 도산(桃山)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이때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 이었던 김기원(金基源)과 함께 시무하였다. 김기원은 본명이 김재수(金在洙)였는데 경북 최초(慶北 最初)의 장로교인(長老敎人) - 상주(尙州)사람 김재수(金在洙) -『상주문화』제19호
애덤스 목사와 같이 대구에 온 어학선생으로 부해리 목사의 증언으로는 상주 출신이다.
대구장로교회사연구. 이재원. 도서출판 사람. 제1부 제6항
그는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여 8세에 상주군 화산리 사숙(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조승장과 결혼하여 2남을 둔 사람으로 이희봉 목사와 함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을 하였다. 김기원 목사는 이희봉 목사보다 3년을 먼저 목회의 길을 걸었지만 고향인 상주에서 목회자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희봉 목사를 상주의 ‘첫’ 목회자라 이름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〇 선산군 옥성면 죽원교회가 설립되고 조사(助事)로 시무하다.
1903년
〇 송천교회(松川敎會)에서는 영수(領袖)로 시무 중 이중희와 덕계교회 설립하고,
덕계교회로 옮겼다.
여기서 영수(領袖)는 청일전쟁(1894) 이후 교회가 대폭 증가하자
다시 조사를 도와 각 교회에서 조사 일을 대행하는 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영수’직이다.
영수는 당회에서 선출하기도 하고 당회가 조직되지 않은 교회에서는 그 지역 순회교역자가 임명하는데, 자격은 그 지역 토착 교인으로 신심이 두텁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을 택하였다. 영수의 역할을 지교회의 일반적 업무처리와 당회 사무, 교역자나 시찰위원회에 제반 업무를 수행하고, 교인을 대표하여 지도하며, 조사나 교역자를 협조하는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영수는 1894년 마펫(S. A Moffet.) 선교사가 임명한 평양 장대현교회 영수인데 그는 이영언으로 추정된다.『기독교대백과사전』, 1985, 교문사, 695쪽.
송천교회 100년사에는 이때의 상황과 이희봉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03년 송천교회에서 여러 교회가 분립되었는데,
덕계, 김천 황금동, 추풍령, 죽원교회 등이 그것이다.
특히 덕계교회의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이중희와 이희봉(李喜鳳)이었다.
이희봉은 덕계교회 분립 시 영수로 시무하다가, 1909년 상주교회 조사로 부임하여 시무했다. 이듬해 그는 보성의숙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으며,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아 청산교회와 상주 서정교회(西町敎會)를 거쳐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선산 죽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제3~4회 경북노회장을 지냈고, 1921년 대구 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대구 칠성동 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대구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가 주도하는 자치운동(自治運動)에 관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인들의 반대로 칠성동 교회를 사면하였다. 그 후 1931년 상주 남문밖교회를 개척했는데, 그 때 송천교회 당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상주읍교회와 남문 밖 교회가 합병하여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송천교회 100년사』
1904년
〇 선산군 무을면 오가동에 오가동교회(五佳洞敎會)가 세워지고, 선산면에 노상동교회(路上洞敎會)가 세워지면서 오가교회와 노상동교회에 조사를 겸임하다.
선산면 노상동 교회는 지금 선산읍교회이다.
선산읍교회 100년사에는 이희봉 목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산면 이문동 706번지의 대지 288평 초가 5칸을 노재한외 4명의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부해리 선교사가 설립자로 노상동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노석원이 영수로 윤원옥이 집사로 시무하고 조사는 이희봉이 본교회에 시무하다. 선산읍교회(路上洞敎會)의 초대 당회장 목사는 선산읍교회를 설립한 부해리 목사로
1904년 부임하여 1914년까지의 기간 중에 인근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도산교회, 오가교회, 상모교회, 습례교회, 백자교회, 석산교회, 서정교회, 화산교회,
오리원교회, 오광교회, 사산교회, 금흔교회 등 13개 교회를 겸임하여 순회하면서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이희봉 조사(李喜鳳)는 선산읍교회 초대 교역자로 선산읍교회가 설립되던 해 1904년에 부임하여 1909년 사이에 선산읍교회와 오가교회 죽원교회 3개 교회를 겸임하여 시무하였다. 이희봉 조사는 부해리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몇 명되지 않은 교인들이나마 그들과 뜻을 모아 교회를 부흥시키기에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눈물의 기도로 호소하며, 호별 방문전도와 노상전도에 힘을 써 한 사람의 교인이라도 더 늘려 그들이 다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희봉 조사의 시무기간에 교회 구내에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인들은 물론이요, 주민들의 문맹퇴치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한국 교회의 대 부흥기에 힘입어 교회성장에도 헌신적인 사역을 하다가 1909년에 상주교회로 전출하였다.
이희봉 조사는 선산읍교회를 떠난 후 1916년 평양신학 9회로 졸업하고 1916년 6월 23일에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를 계속하였고, 1918년도에는 경북노회 3대, 4대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선산읍교회 100년사』, p.130.
〇 칠곡군 왜관교회가 설립하니 왜관교회에 김영채, 박영조와 함께 이희봉이 조사로 시무하다. 왜관교회 연혁
1905년
〇 선산군 선산면에 습례교회(習禮洞敎會)가 세워지고 조사로 시무하다.
1906년
〇 김천군 복전교회(福田敎會)와 곡송면(谷松面) 대양교회(大陽敎會)가 세워지자
이희봉이 조사로 대양교회와 겸임(兼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