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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운행일시: 2000. 2.29(화)~3/1(수) 2.운행구간: 2일차:기상(05:00)출발(05:45)→묘지(06:05)→포도밭(06:20)→지기재(06:25)→조식(07:40)→암능 오르막(08:15)→고압송전탑(09:00)→신의터재(09:05~09:30→326.5)→무지개산정상옆(11:00~중식~12:10)→윤지미산13:50)→화령재(15:00) 3. 도상거리 및 운행시간: 32.7Km(16시간 15분)누계(221.2 Km,138시간 07분) 4. 날 씨 : 맑음 5. 교 통 : 옥산→큰 재행(12:30,16:45,19:10 ) 상주→화령재,보은방면(06:55~19:30)직행버스20분간격운행) 옥산 버스정류소(0582-532-4013) 상주 종합 버스터미널(0582-534-9002) |
08:20 야간근무를 마치고 잠도 잊은 채 우리는 또다시 대간 길을 나섰다. 11:20 지난번(2.16)에 내려섰던 큰 재에 도착했다. 정확하게 3 시간이 걸렸 다. 신발을 등산화로 바꿔 신고 신곡리 마을 표지 석을 뒤로 하고 분 교 옆으로 난 대간 길로 들어섰다. 큰 재를 출발한지 30 여분정도 걸 어가니 콘크리트 도로가 나타났다. 콘크리트 도로를 2~3분 걸어가서 다시 능선으로 들어선다. 12:40 "회룡 재"에서 점심식사. 이번 구간은 완만한 능선으로 가파른 길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침묵 속에 열심히 발걸음을 옮긴다. 13:35 "개터 재"를 통과. 능선에 올라서서 좌우를 살펴보니 산 아래로 넓은 농토가 펼쳐진 곳도 있고 군데군데 민가들도 보인다. 대간 길에 잔 솔가지가 통행료라도 받으려는 듯이 배낭의 머리부분을 자꾸만 잡 아챈다. 배낭을 낮게 꾸려야 하는데 야영을 해야 하는 짐을 챙기다 보니 자꾸만 높아진다.할 수없지. 자세를 낮추는 수밖에. 허리를 굽 실거리며 때로는 쪼그린 자세로 나뭇가지 밑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 을 거의 하루종일 하게 된다. 15:00 윗 왕실 재.
곳 백학산(白鶴山 615m) 상주 시청 산악회에서 1998.5.10일 백두대간 이라는 글씨와 함께 표지 석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백학 산에 흰 학은 없 고 응달 진 곳에 흰 눈만 쌓여 있었다. 대간 길을 다녀갔다는 기념으로 사진을 한장 찍었 다. 백학 산에서 내려가는 길 은 조금 비탈이 심하다. 16:45 "원 삼거리" 임도. 누군가가 갖다 놓은 것인지 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낡은 소파가 하나 있어 잠시 쉬어간다. 쉬면서 모카 빵을 먹 으면서 에너지를 보충.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 목적 지는 "개머리 재". 어쩌다가 앞장 선 옥경동지는 뒤 사람들이 따라가 기 어려울 정도로 발걸음에 속도를 높인다. 배낭을 무겁게 멘 판오 와 나는 뛰다시피 하여 따라간다. 18:05 "개머리 재". 개머리 재 이름대로 멀리 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민 가가 한 채 눈에 들어온다. 재를 지나 조금 올라가려는데 현수막에 천왕봉에서 이곳 개머리 재까지 216.5Km라고 써놓은 현수막이 펄럭 이고 있었다. 아! 드디어 우리 백두대간 부부 종주대가 200Km 이상 의 거리를 넘어서는구나. 감격도 잠시. 야영할 자리를 찾기 위해 묘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식수를 구하러 나는 민가로 내려가고 판오 는 묘소가 아닌 다른 야영지를 찾기 위해 둘러보고 있었다. 지난번 묘소 앞에서 야영할 때 잠 못 이뤘다는 아내들의 의견을 받 아들여 묘소 앞이 아닌 곳을 찾으려 하니 마땅한 자리가 쉽게 나타 나질 않는다. 그럼 조금 더 올라가보자. 약 30여 분을 더 올라갔다.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려고 했다가 다시 더 가자고하니 다 들 맥이 쭉 빠지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랴? 조금 더 올라가니 임도 가 하나 나타난다. 18:30 길바닥 평평한 곳을 골라 집을 지었다. 내일 운행을 가뿐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저녁에 배낭을 많이 비워야 한다? 약과 돼지 육나물의 환상적인 조화가 이뤄지고 오랜 시간 걸어온 다리를 펴며 기다려온 이 시간을 즐기다가 그래도 집에 두고온 아이들이 생각나서 전화를 했더니 홍덕이가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으면서 좋지 않은 소식이 있다고 한다. 뭐냐고 다급하게 물으니 대답은 이랬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아내가 레인지 위에 있는 음식물을 한 번 끓 여 놓아야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녁무렵에 끓여놓으라고 말을 하고 나왔는데 홍덕이가 이것을 끓이기 위해 불을 켜 놓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어 다 태웠고 집안에 연기가 자욱해서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허 이것참. 아버지가 119 대원인데 소방교육을 잘못 시켰나 보군. 다친데는 없느냐고 묻고 많이 놀랬겠구나 하면서 달래주었다. 집을 비우면서 항시 걱정을 했었는데 그런 일이 생기다니. 그래도 코펠속에 육 나물은 소리를 내면서 3도 화상을 입고 있었고 약병의 공간은 넓어져갔다. 이때 판오의 전화벨이 울렸다. 동광양 시청에 근무 하신다는 분으로부터 백두대간 종주와 관련된 내용을 알고싶 어 하신다며 한참이나 통화를 했다. 그 바람에 내가 육 나물을 더 먹 었지 롱. 귀가해서 자세한 내용을 말하기로 하고 통화끝. 얼마 남지 않았던 약이 바닥을 드러내자 빈 약병의 처지는 텐트 밖으로 내쫓기 는 신세가 되고 우리는 침낭 속에 몸을 맡기고 대간보다도 더 멀고 먼 잠의 세계로 수면 여행을 떠났다. 돛대도 없이 코 골음 고동을 울 리며 무념무상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2000.3.1 05:00 기상. 밤새 잠못이루다가 이제서야 잠이 막 드려 고 한다는 아내와 명례 동지를 얼른 일어나라고 재촉을 했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 고 배낭을 다시 꾸리고 텐트를 해체하여 출발 준비를 했다. 어제저 녁에 먹은 약기운에 갈증이 난다. 05:45 빈 속에 찬물을 붓고 랜턴으로 길을 밝혀 또 다시 대간 길을 찾아 나 선다.동쪽하늘에 음산한 빛을 발하는 하현달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 었다. 06:25 "지기 재"에 도착.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건너 잠시 비석 앞에 멈췄다. 성균진사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成均進士 贈 通政大夫 承政 院 左承旨) 창녕 성 공 휘 진항 묘 갈명(昌寧 成 公 諱 震恒 墓 碣銘) 비석앞쪽에 이렇게 써 있었다. 뒤쪽에는 한문으로 수많은 글씨가 써 있고 그 옆에도 또 다른 작은 비석을 세워놓고 글을 써 놓았다. 도가 너무도 부족해서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그것을 읽어보기 위해서 시간을 지체할수도 없다. 단지 위의 비명으로 볼 때 조선시대 임금의 명을 만조백관 들에게 전하고 백성들의 뜻을 임금에게 아뢰는역할 을 했던 승정원은 왕명출납기관 으로서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비 슷한 일을 했던 곳이다. 이 승정원에서 좌승지 (정3품) 벼슬을 하신 창녕 성씨 진항어른의 훌륭하신 업적을 새긴 비석으로 보인다. 훌륭 하신 어른의 뜻을 후손들 이 더욱 쉽게 알아서 따르고 배울 수 있도 록 우리글로 써놓으면 좋았 을 텐데. 우리글로 써놓으면 어르신께 누 가되고 품위가 손상되는 것인지?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주변이 훤하게 되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 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몇 가구가 귀곡산장같은 모습으로 아침을 맞 고 있었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서 배낭을 지고 어느 집에 들어가서 지나가는 사람인데 식수를 얻을 수 있느냐고 했더니 문도 열어보지 않은 체 모터가 고장 나서 줄 수가 없다고 한다. 너무 이른 아침에 남 의 집에 가서 물을 얻으려 한것은 무례한 일이지만 이곳에서 식수를 구하지 못하면 물을 구하기가 어렵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 를보며 돌 아 나오는데 모타펌프 돌아가는 소리가윙-윙 난다. 그것 참! 인심 한 번 사납구나. 혀를 차면서 다시 대간길로 들어서서 가려다가 조금 떨어진 한 집의 문 창살이 형광등 불빛으로 밝혀진 것 을 보고 판오와 나는 다시 찾아 들어갔다. 할머니 한분이 문을 열고 내다보시면서 무슨 일이냐고 하신다.자초지종을 말씀 드리니 물을 떠 가라고 하신다. 그래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 고 했던가. 기왕에 배낭을 내린 김에 물도 있겠다 아침을 먹고 가자. 양해를 구하고 마 당에서 버너를 피워 물을 끓이고 어제 저녁에 남은 밥을 넣었다. 물이 끓을 즈음 즉석 미역국을 넣어 뜻하지 않게 아침은 미역 죽을 먹어야 했다. 이렇게 아침을 준비해서 먹고 있는 사이 그 할머니의 손녀인 듯한 아이가 태극기를 들고나와 게양을 한다. 아. 3.1절이구나! 모두들 생각이 난듯이 동시에 말을 했다. 흙벽으로 된 집에 지붕은스레트로 얹은 허름한 집 벽에 하얀 태극기가 내걸렸 다. 그것을 그아이가 내걸고 있었을 때 우리집에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잠에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났다.아이가 너무 예 쁘고 귀여워 주머니속에 들었던 사탕을 꺼내주었다.할머니는 연신 추운데 어떻게 산에서 잤느냐고 걱정스럽게 말씀하신다. 며느리인듯한 아주머니와 할머니와 그 아이만 사는지 주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오면서 판오가 배낭에서 사탕봉 지를 꺼내서 할머니에게 드리라고 한다. 그 아이가 귀여워 나중에 편 지라도 쓸 생각으로 주소를 물었다. "경북 상주시 모서면 석산2리 지 기재 김지숙." 모서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간다고 한다. 09:05 햇살은 완연히 퍼지고 이미 양지쪽은 얼었던 흙이 녹아서 질퍽한 데 도 있다. "신의 터 재"에 도착했다. 신의 터 재라고 이름 붙여진 내력 에 대해서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놓았다. 신의 터 재 내력.
해발 280m 임진왜란 이전에는 신은현(新 恩峴)이라 불리었고 임진왜란 때 의사(義 士) 김준신(金 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 의병의 의병장 으로서 상주 진 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란 4.25일 장 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 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의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 재"로 불리게 되었 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 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 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저 옛 이름 인 신의 터 재로 다시 고치다. 1999.12 상주시장 그 옆에는 義士 節谷 金先生 俊臣 遺蹟碑 를 세워 놓았다. 애국의 혼을 불태웠던 그 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놓은 비석 옆으로 각종 차량들이 씽 씽 지나간다. 신의터 재 내력을 아는 이 가 몇이나 될까? 신의 터 재를 지나가는 대간 길 주변에는 무덤이 꽤나 많다. 어떤 무덤은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또 어떤 것은 봉분이 무너져서 흉한 상태로 방치되는 것도 있었다. 아내가 말을 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내 대답. 천국이 나 지옥 이겠지. 대답은 그랬지만 나도 마찬가지의 의문을 품는다. 사 후의 처지도 이승의 삶처럼 빈부와 귀천이 있는 것인가? 수많은 무덤 을 스쳐지나면서 찾아와서 조화라도 꽂아놓고 한 번씩 돌아보고 가는 후손들이 있는 묘소로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잊혀진지 이미 오래 되어 흔적 마저 희미해져 가는 것들도 있다. 아 차라리 저렇게 될바에는 한줌의 재가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11:00 그 생각도 잠시, 오르막길을 헐떡거리며 오르니 무지개산 정상이다. 이름은 아름다운 무지개 산이지만 무지개는 없고 올라오느라고 무 지하게 힘들었다. 점심식사, 건조주의보가 발효된 산에서 버너에 불 을 붙이는 것 자체가 119직무를 수행하는 내게는 부담감으로 작용되 어 버너주변에 낙엽을 치우고 불을 붙이고 바람막이로 갸렸다. 산에 서 먹는 음식은 언제나 맛있다. 출발하려는데 어제 저녁에 전화를 했 던 "허 남중" 씨로부터 또 전화가 왔다. 아뿔싸! 배낭을 지고 내리고 하는 과정에서 산악회에서 마련해준 부부 백두대간 종주 "한울 산악 회" 깃발이 나도 모르게 빠졌는가보다.이를 어쩐 다? 어디에서 빠졌 는지 알 수가 있나? 안타깝고 신중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 할 수없지. 다시 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산악회 모든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13:50 "윤지미 산" 도착,판오가 먼저 올라갔는데 누군가가 있었다. 산불 감 시원 인가? 아니다. 머리가 세서 하얗게 된 할아버지 한분이 면민 체 육대회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중풍 기가 있어서 등산이 좋다고 해서 한달 전부터 매일 이곳을 올라오신다고 했다. "김용태씨(72세)" 사탕 을 몇 개 드리면서 빨리 나으시라고 인사를 하고 윤지미 산을 내려 오는데 경사가 매우심하다. 어휴 할아버지 여기 올라오시려면 꽤나 힘드시겠는걸. 15:00 "화령재" 도착을 목표로 부지런히 걸었다. 화령 재 직전 임도에"안동 →"이라고 써 있었다. 14:45 삼각점 No.045를 통과,
15:00 "윤지미" 산에서 예정했던 대로 정각에 도착했다. 길가 에 배낭을 내리고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는데 등산을 갔다 오는 사람들 몇몇이서 충북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먼 저 인사를 건넸다. 도로 건 너편 화령 재 표지 석 앞에 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화령 재 마루에는 대령정(大嶺亭) 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자가 서 있다. 15:10 버스를 타고 화령 재를 출발, 약 25분 걸려서 상주터미널에 도착했 다. 화령 재에서 상주터미널까지 차비는 2000원/인. 15:35 터미널에 도착. 옥산으로 가려면 상주에서 김천 가는 버스(15:43) 를 타야 한다. 옥산까지 표를 끊고(1100/인) 배낭을 화물 칸에 싣고 판오가 화장실 간 사이에 차가 출발을 하려고 한다. 화장실에서 세수 를 하다 말고 뛰어와 차에 올랐다.(주) 진안 경북72아 1324. 상주에서 옥산까지는 멀지않다. 옥산에 내려서 나는 택시를 타고 차를 가지러 큰 재로 가고 남은 동지들은 하산 주를 하라고 했다. 큰 재까지 택시 비 5000원을 주고 큰 재 "박분례"씨 옆집 슬래브집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행궜다. 주인 할머니인 듯한 분에게 물좀 쓰겠다고 했으나 가 타부타 말씀을 않으신다. 갑자기 낯도깨비 같은 놈이 나타나서 물좀 쓰자고 해서 놀라셨는가? 옥산 와서 동지들을 찾으니 "꼬꼬 내 분식" 집에서 순대를 놓고 조 껍데기 술을 한 투가리 비우고 있었다. 조 껍 데기 술? 낯설지 않은 술 이름이다. 지난번 무등산 정기산행 때 무등 산입구에서 맛보았던 그 술 이름이기 때문이다.여느 막걸리보다 맛 이 좋고 깔끔한 것 같다. 허긴 내게 맛없는 술이 어디 있겠냐마는....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관계로 딱 한 잔밖에 못 먹는 것이 아쉬울 따 름이다. 분식 집 아주머니의 인상이 좋아서 한마디 했더니, "그래도 술값은 받습니다" 한다. 허 어 술값 않내려고 한 소리는 아닌데. 17:45 옥산을 출발. 귀가 중에 차 안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실이, 성근이 하고 화니 용궁(중국 집)에 가서 자장면이라도 먹고 오라고 했다.우리가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 래 걸릴 것 같기 때문이다.산청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전 시해놓은 난,괴목 등을 둘러 보고 다시 밤길의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금당동의 한가족식당에 도착하니 20:10분. 메기탕을 시켜놓고 소주한병 비우고.....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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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