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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 -레마르크 '개선문'-
그렇다. 하늘은 그누구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어야 한다. 모짜르트의 천재를 질투한 살리에르의 탄식은 자기변명이다. 누군가의 빛남은 타고난 천재 덕분이 아니라 필살의 인과이다 그래서 산에서 나의 물색없음은 부족함과 게으름 탓이다.
눈덮힌 인수봉에서 이틀을 보낸 동계암벽 졸업등반은 한마디로 이 김세옥에겐 필살기(必殺起)였다 기진맥진해서 인수봉 정상에 올라서니(실은 직전까지 정상초입인줄도 모르고 있을 만큼 기진해 있었다) 규택샘이 서있다가 날 보며 웃는다. "잘 버텼어요" 잘했다, 고생했다도 아닌 잘버티었다는 말이 의미하는 외연, 순간 내 설움에 눈물이 핑돌았다 나의 필살기를 눈여겨 봐 준 또 한사람. 나의 부족함과 그로 인한 안간힘을 말없이(쉽게 거들어주지도 챙겨주지도 않고 ) 지켜봐준 규택샘이 고맙다. 아우지만 늘 형같다.
산에서 한없이 부족한 내가 벅벅거리면서도 3주차까지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교육받다가
4주차부터는 심한 절망감으로 마음이 쓰렸다. 실은 그래서 후기를 감히 쓸 엄두가 안났다. 나라는 사람이 산에 다니는 일에 희망을 가질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일었다 그람시는 "이성으로 절망하고 의지로 낙관하라" 했지만 어찌 그것이 늘 가능하겠는가. 쓸쓸한 4주차를 넘기고 그렇게 졸업등반은 다가왔다.
추위를 몹시 타는 성진씨가 걱정한대로 기온은 떨어졌고 인수는 하양게 눈을 뒤집어 쓴 채 버티고 서있다. 늘 사람으로 가득차 있던 도선사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고 막걸리 파는 아줌마들도 생업인 좌판을 엎어놓고 보이지 않는다. 하루재를 넘어가는 데 경일씨가 한마디 한다. 저 아가씨, 오늘, 무척 까칠해 보이네, 누구? 인수를 가리킨다. 경일씨는 엄청난 무게의 배낭을 지고 주력을 과시한다. 다들 존경의 말들을 보낸다. 내 배낭의 두배는 됨직하다. 내 자신의 한계를 아는지라 배낭무게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든 짐을 줄이고 옷은 입은 것으로 버티고, 비상식량하나도 칼로 잰듯이 정량만 챙겼다. 침낭도 800그램 짜리로 빌렸다. 그래도 쌀에 코펠에 물 2.5리터에 장비에 배낭을 매고 주마링이 될까 걱정이 앞선다.
인수릿지 가는길, 눈이 쌓여 어프로치가 좀 힘들다. 우리의 마지막 고지인 설교벽에는 하얗게 눈이 쌓였다 춥고 을씨년스러 짐도 푸는 듯 마는 듯 하는 데 교장샘이 눈을 털어가며 먼저 선등하신다. 선등할 사람은 하고 주마로 1피치 등반을 시작한다. 역시 서일선씨가 용감하게 선등한다 그렇게 1조 부터 시작된 등반은 진행이 여간 느린 게 아니다. 2조가 1피치를 다 올라갔는 데도 3조는 출발을 못한다. 1조가 2피치 등반을 하는 동안 1피치에 매달린 2조가 아우성이다. 성진이 아래를 향해 소리 지른다. "선생님~~ 추워 죽겠어요오~ 우리, 점점 미쳐가고 있어요오~~" 하긴 피치에 매달린 채 2시간이 넘었다. 배려가 필요한 민제씨랑 해승씨가 왜 3조에 배치 되었는지 비로서 확인하는 순간이다. 등반욕심이 많은 1조, 성격좋고 사려가 깊은 2조, 배려가 필요한 우리 3조, 지난주 조배치를 어떻게 이렇게 하셨냐고 묻자 교장샘은 필연이라고 대답하셨다. 등반이 지체되자 교장샘이 올라 가셔서 너무 간격이 길어 등반이 안되는 피치사이마다 자일을 더 깔거나 중간에 자일을 갈아타게 조치하자 등반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10시 반경에 시작된 등반인데 우리 3조의 등반이 시작된 것은 거의 5시가 다되어서이다. 다 올라가고 나랑 원명씨가 마지막이다.
1피치 출발을 하려는 데 이미 어둠이 몰려온다. 랜튼을 준비하고 교장샘에 지시에 따라 등반을 시작한다. "자 준비됐으면 올라가세요." 어두운 벽, 동기들은 다 올라가고 나 혼자 등반을 해야한다. 그 어두운 벽을 마주하는 순간 무섭고 고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 해줄수 없는 등반, 무섭고 외롭다는 생각으로 순간 포기하고 싶다는 느낌마져 들었다. 여기가 돌아갈수 없는 수백미터의 높은 어느 벽 중간쯤이라면 나는 얼마나 더 두려울까. 클라이머들은 아마도 이런 순간들을 수없이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다.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두려움과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는 순간을 수없이 넘긴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클라이머가 될수 있었을 것이다.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어려운 벽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한계를 가진 내 자신을 이기는 일일 것이다.
주제 넘게도 내가 걱정했던 우리조의 민제씨와 해승씨는 산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 앞에서 후딱 가버린다. 교장샘이 힘들지 않으면 회수한 자일을 달고 가라하신다. 2피치까지는 힘들지 않게 등반했는데 경사도가 급해지자 뒤에 달고 있는 자일무게 때문에 등반이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도저히 등반이 안돼 자일을 다 감아올려 배낭에 넣고 등반을 하니 훨씬 낫다. 하지만 마지막 오버행에서 좌절한다. 배낭를 매고는 몸을 바위에 붙일 수가 없다. 몇 번을 버둥거리는 데 교장샘이 오시더니 배낭을 벗고 등반하라신다. 배낭을 벗으니 오버행을 넘어설수 있게 된다. 아직 제 배낭무게 하나 못이기는 옹색한 클라이머 김세옥,
오버행을 올라서니 지성샘과 규택샘이 하강포인트에서 골바람을 맞으며 망부석처럼 서있다. 얼마나 추울까. 몇시간을 저러고 서서 한사람 한사람 끌어줬을 것이다. 오전부터 속이 안좋더니 탈이 단단히 낫는지 몸상태가 점점 나빠진다. 다리가 풀려 겨우 하강하니 해승씨가 배낭도 벗겨주고 자리도 잡아준다. 너무 고맙다. 인수릿지 4피치 앞 3-4평 남짓한 공간, 그게 오늘 우리집이다.
먼저 도착한 동기들이 불을 밝히고 저녁을 지으며 와작하니 모여 있다. 그 '한데 집'에 다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래도 심하게 체했는지 아랫배에 통증이 심해 움직이기도 힘들어진다. 이러고 등반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나때문에 전체가 등반을 못하게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졌다. 먹지도 못하고 기력도 없어 쓰러져 있으니 해승씨가 자리도 잡아주고 따뜻하게 보온도 해준다. 자상하고 속이 깊어 눈물나게 고맙다. 교장샘이 체기에 좋다는 손바닥 지압을 해주시고 해승씨가 따뜻한 물과 진통제를 준다. 그 사랑들 때문일까. 장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가라앉고 좀 살 것 같았다. 속이 비면 잠을 못잘것 같아 숭눙 몇숟갈 뜬다.
일찌감치 올라와 자리잡은 1조는 마침 생일을 맞은 유승현님을 위하여 빵에다 담배 한대를 꽃아 생일축하를 해주느라 소란스럽다.
차필성씨는 북어 한 마리를 침낭위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사연인즉은 오늘이 아버님 기일이란다. 생일과 부친 기제사를 인수릿지 비박지에서 맞는 것은 클라이머다운 일상인것 같다. 다들 나름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는 데 아프다는 이유로 좋은 자리를 차지한것 같아 미안했다. 최대한 추위를 이기기위해 나름대로 많은 준비들을 해 왔는데 영태씨는 커다란 은박지커버를 가져와 뒤집어 쓰는 바람에
모두로부터 주목과 찬사를 받는다. 3-4평 남짓 아래는 낭떠러지인데다가 높낮이 마져 불규칙한 불편한 공간인데도 18명이 다 자리를 잡고 누웠다. 넘 심하게 불어 소리 때문에 잠을 잘수 없게 만든다는 골바람은 다행이 별로 불지 않았다. "이번 동계반은 운이 존거야" 웅이형이 한마디한다. 등산학교 가방끈이 길어 대충 뺀질이지만 결코 밉진 않은, 독특한 매력이 있는 형이다.
아침에 몸이 한결나아졌다. 몸이 아파서 느낀 정말감과 두려움이사라졌다. 아침을 좀 먹었더니 다시 거북하다.
체끼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닌듯하다. 걱정이 되어 교장샘한테 한번 더 지압을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예의 노가다목장갑을 낀 커다란 손으로 지압을 해주시는 데 옆에서 성진이가 난리다. 지는 교장샘 지압을 받고 싶어 아침부터 찰떡을
급하게 먹고 나 일어나기전에 체할려고 무진애를 썼는 데도 체하질 않아 교장샘지압을 못받으니 샘이나 죽겠다고 엄살을 피운다. 나이가 무색한 참으로 천진하고 맘이 말간 처자이다.
인수 비박 둘쨋날, 인수릿지 4피치 실크랙등반이다. 지성샘이 실크랙에 쌓인 눈을 불어가며 먼저 선등을 하고 선등하실분~ 해도 추운날씨때문일까 모두 몸을 움추린다. 역시 과감한 일선씨, 장비를 정리하고 선등에 나선다. 밤새 머리맡에서 웅이형이 자장가를 부르고 침낭은 800그램이었지만 잠은 비교적 잘잤다.
그런데 막상 붙으니 주마링은 힘들고 몸은 무겁다. 내가 올라가니 5피치 크랙까지 선등했던 일선씨가 하강한다. 일선씨 멋있어요 샘도 일선씨보고 등반잘하신다고 칭찬 하셨어요 그래요? 근데 실은 살 떨렸어요 일선씨가 웃는다. 세옥누님도 멋있어요
민제씨랑 앞서거니 뒷서거니 등반한다. 민제씨의 지구력은 만만치 않다. 근력기력 부족인 나와는 근본이 다르다. 마지막 완경사에서 지성샘이 주마트랩없이 그냥가셔도 됨다해서 그냥 오르다 발란스가 깨지면서 나뒹굴었다. 그렇게 하늘을 보고 벌러덩 누워있으니 참 좋다. 잠시 얼굴에 눈을 맞으며 누워있다.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정상에 도착했을 즈음 눈은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한다. 처음 교육시작했던 날 하루종일 비가 와 그 비를 맞으면서 교육받았는데 비로 시작한 교육이 눈으로 끝을 맺는다. 인수정상에서 눈을 맞는 감회는 또 새롭다. 눈발이 점점 강해져 건너편 백운대도 희미하다. 평소엔 걸어 다녔던 하강포인트 까지도 줄을 깔고 모두들 크램폰을 신은 채 우주인들 처럼 뒤뚱거리며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나도 좀은 겁이나 오버행 하강길을 피해 왼쪽 루트로 하강한다. 눈보라를 뚫고 크램폰을 신은 채 인수하강을 한 기억은 오래 갈 것이다. 하강하니 차필성씨네 산악회에서 텐트를 치고 기다리다 따뜻한 커피로 졸업을 축하해준다.
백운산장으로 내려와 하산한다. 눈은 오히려 아랫동네에 더 와있다. 졸업식은 학교에서다. 난 학교는 처음이다. 작은 암장을 가득 채운, 세월의 더께가 켜켜에 배여있는 무채색 홀드는 작지만 힘있는 학교의 느낌과 비슷했다. 오래된 정원의 느낌, 누군가의 손길이 매일 닿은, 화려하지 않지만 제 몫을 단단히 해 온 역사성이 있는 장소가 주는 묵직한 느낌. 교장샘은 한사람 한사람 불러세워 덕담을 해주시고 수료증을 주신다.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세레머니이다. 나의 학부모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졸업을 축하하러 몰려왔다. 살가운 짓을 하면 죽는 줄 아는 한 남자가 오십평생 제 손으로 처음 산, 촌스럽기 이를데 없는 꽃다발을 들고와 나를 감격시킨다.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에뀌디미르와 그랑조라스 동계등반을 떠나는 지성샘과 용준씨를 눈부시게 바라보며 성금을 전달하고 장도를 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우리 모두는 오래 술과 우정을 나눈다.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지난 5주를 얘기하고 미래도 전망하고 조금씩 취해서 허물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필연으로 만난 우리들이 산에서 힘있는 클라이머가 되리라 서로 다짐한다.
지난 5주를 간신히 버텨낸 물색없는 김세옥, 오늘 이렇게 한없이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하여 몸을 다하여 힘있는 클라이머가 되고자 하노니,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결코 쉽진 않겠지만, 저 위대한 그람시가 이른대로 '이성으로 절망하고 의지로 낙관하리라'. 쉬임없이 |
첫댓글 오랜만의 형수님 글빨 주깁니다. 이따가 덜 바쁠 때 재탕 한 판....
늦게 나마 동계암벽반 졸업 축하 합니다~ 멋져요~ 세옥씨~
저 위대한 어느 클라이머 보다도 더 멋져보이십니다 세옥언니~!!
추워서 꼼짝도 못했는데...대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