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유문의 바이블로 거론되는 기계문헌(杞溪文獻)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해제(解題)를 차근차근 정독하여 그 가치를 알게 될 때 비로소《기계문헌》에 대한 자긍심은 배가될 것이다. 해제(解題)는 《기계문헌》 원문을 국문으로 역해한 국내 최고 권위의 한문학자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심경호 교수가 쓴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역자 심경호 교수의 해제(解題) 를 정독해보자.
해제(解題)
《기계문헌(杞溪文獻)》은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 선생이 기계 유씨(杞溪兪氏) 관련 문헌을 집록(輯錄)하여 한문 원문에 단구(斷句)를 하고 필요한 곳에 안어(按語)를 붙여 자필로 정사(淨寫)한 것으로, 본편 15권, 부록 1권으로 이루어진 호한 (浩汗)한 편저(編著)이다. 1963년 1월 25일 재단법인 부운장학회(富雲獎學會)에서 《기계문헌》 1책으로 간행하였다. 대형판 880쪽의 거질이다. 편집 겸 발행자는 바로 일창 선생이었다.
일창 선생은 1956년 《경모첩(景慕帖)》을 간행한 바 있는데, 당시 이미 <기계문헌>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양이 원체 방대하여 발간 비용을 마련하는 등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상재(上梓)가 늦춰졌다. 일창 선생은 그 로부터 7년 동안 자료를 재차 심리하여, 1961년 여름에 유진설(兪鎭卨)의 서문을 받고, 1962년 음력 5월에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박사의 서문을 받아, 이듬해 정월에 발행하였다.
일창 선생은 이 책을 편찬하기 위해 반곽 28자×13행(매장 26행)의 원고지를 특별히 인쇄하여, 한문 원문의 자료들을 세필(細筆)로 혼자서 전사(轉寫)하였다. 권수 (卷首) 9장, 제1권 98장, 제2권 98장, 제3권 93장, 제4권 89장, 제5권 110장, 제 6권 97장, 제7권 121장, 제8권 106장, 제9권 90장, 제10권 100장, 제11권 121 장, 제12권 121장, 제13권 115장, 제14권 110장, 제15권 118장, 부록 65장이므로, 전체는 1,661장에 이른다. 각 장마다 맨 끝의 한 줄을 비워서 여백을 두어, 혹 단구(斷句)의 표시가 있더라도 사란(絲欄)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단구 표시를 글자 수로 넣어 계산하면 매 장마다 대략 364자를 필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체 1,661장×364자, 즉 604,604자의 한자를 전사(轉寫)한 것이 된다. 한 글자도 흐트러짐이 없는 이 원고는, 원본의 대부분이 명지대학교 도 서관에 진장(珍藏)되어 있다.
역자는 이 문헌에 접하여, 일창 선생의 정갈한 서체가 권수(卷首)와 1권에서부터 15권과 부록에 이르기까지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것에 놀랐고, 문헌을 공부하면서 전사(轉寫)의 오류가 매우 적은데다가 원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단구(斷句)가 거의 정확한 사실에 외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문헌을 역주하면서 세대별로 문헌을 배치하고 관련 문헌을 연계시킨 방식이나 부설(附說)과 편찬자의 안설(按說) 을 부기한 방식이 치밀한 사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광복절에 작성한 <기계문헌 발(跋)〉에서 일창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지난 경신년(庚申年, 서기 1920)은 내 스무 살 되던 해이다. 이 해 집안어른들의 위선사업(爲先事業)으로 정당(政堂) · 관원(灌園) 양공의 유고(遺稿)와 《함계세고 (咸溪世稿)》를 발간함에 있어 교사(校寫)의 역(役)을 돕게 되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우리 선조(先祖)의 입조공렬(立朝功烈)과 거가행의(居家行誼)가 역사(歷史)에 남아 빛나 있음을 소상히 알게 되자 이후 삼십여 성상(星霜) 꾸준히 국사(國史)와 전인 문집을 고열(考閱)하며 또는 경향(京鄉) 각종(各宗)의 전래 문헌을 찾아내어 그 속에서 선대(先代)의 관계문자(關係文字)를 수록(收錄)하는 한편 주로 기계 유씨의 세보(世譜) · 가승(家乘) · 추원록(追遠錄) 등을 정리(整理)하여 증산합편(增刪合編)하고 다시 이름하여 《기계문헌》이라 한다.”
곧, 일창 선생은 1920년에 기계 유씨 종중에서 《정당유고(政堂遺稿)》·《관원유고 (灌園遺稿)》·《함계세고(咸溪世稿)》를 발간할 때 교사(校寫)의 역(役)을 도우면서 선조들의 관계 문헌들을 정리할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30여년에 걸쳐서, 역 사서, 문집, 종중의 전래 문헌에서 자료를 찾고, 기계 유씨의 윗대에서 이루어진 유 명건(兪命健, 나주공)의 《세보(世譜)》, 유광기(兪廣基, 지사공)의 《가승(家乘)》, 유성주(兪星柱, 복원재)의 《추원록(追遠錄)》 등을 살펴서 자료들을 증산(增刪)·합편 (合編)하였다. 또한 각기 유고(遺稿) 중 시(詩)·문(文) 일부를 특기(特記)하여 '습유록(拾遺錄)'을 두었다.
《기계문헌》 에 수록할 자료들을 수집, 정리할 때 일창 선생은 기계 유씨 가보(家 譜)로서는 초간본이었던 을유보(乙酉譜)와 이후 5간의 갑신(甲申) · 무오(戊午) · 병 오(丙午) · 갑자(甲子) · 갑인(甲寅)의 보(譜)를 줄거리 삼았다. 기계 유씨 문중에서는 1912년(임자) 봄에 대동보(大同譜)를 만들면서 7파를 입록하였으나, 이것을 기 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일창 선생은 <기계문헌>을 편집하면서 같은 세대의 인물들을 같은 곳에 배치하였다. 종법에서 계체(繼體)의 상승(相承)을 중하게 여기고 적자 (嫡子)에서 적자로 차례로 잇는 것은 연령을 따지지 않으므로 같은 항렬의 분들을 같은 곳에 모이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범례에서 "편렬(編列)은 항렬순으로 하 되 같은 항렬에서는 연령순으로 하며, 배위(配位)는 건위(乾位) 아래에 두었다. 연대와 항렬이 미상(未詳)한 위(位)에 대하여는 근사(近似)한 위치에 배입(排入)한 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기계문헌》의 범례에서 일창 선생은 "기계 유씨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조선조 말까지 내려오며 세세(世世) 충절(忠節)과 학행(學行)으로써 일컬어 왔으되 연대가 적원(逖遠)하고 문헌이 멸멸(蔑蔑)하므로 이를 통감하여 이 《기계문헌》 을 편수(編修)한다고 밝혔다. 즉, 일창 선생은 체계나 기준 없이 관련 문헌을 수집한 것이 아니다. 기계 유씨의 역대 인물들 가운데 '충절(忠節)과 학행(學行)'이 탁월한 분들을 중심으로 문헌을 수집한 것이다. 이것은 가문의 역사를 서술하는 올바른 태 도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일창 선생은 기계 유씨의 배위(配位)가 된 여성들에 관계된 제문, 행장, 묘도문자도 함께 수록하였다. 이것은 가문의 역사를 서술하는 진보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기계문헌>의 본문은 시조 아찬(阿飡) 유삼재(三宰)부터 265인(부인 51인)의 일생 사적과 장송(葬送) 사실, 묘택 위치 등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을 망라하였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일반 독자들도 열람에 편하도록 인명에서 유(兪)를 생략하지 않고 열기한다.
권1(22인, 부인 1인): 아찬(阿飡) 유삼재(兪三宰), 유의신(兪義臣), 유성미(兪成 美), 유진경(兪晉卿), 유여해(兪汝諧), 유득선(兪得瑄), 유선(兪售), 유승계(兪承 桂), 유정(兪), 유성보(兪成保), 유성복(兪成福), 유선(善), 유현(兪顯), 유석진 (兪石珍), 유집(兪輯), 유진(兪鎭), 유효통(兪孝通), 유해(兪解) [죽산 박씨(竹山朴 氏)], 유응부(兪應孚), 유기창(兪起昌), 유순거(兪舜擧), 유여림(兪汝霖) 등.
권2(20인, 부인 2인): 유임(兪任), 유여주(兪汝舟) [의성 김씨(義城金氏), 인동 장 씨(仁同張氏)], 유관(兪綰), 유진(兪鎭), 유강(兪絳), 유륜(兪綸), 유순인(兪舜仁), 유호(兪灝), 유홍(兪泓), 유영(兪泳), 유함(兪涵), 유순(兪洵), 유대숙(兪大俶), 유대수(兪大脩), 유대기(兪大祺), 유대술(兪大述), 유대의(兪大儀), 유대건(兪大建), 유대경(兪大儆), 유대정(兪大禎) 등.
권3(15인, 장인 1인, 부인 1인): 유대진(兪大進), 유대칭(兪大偁), 유대일(兪大逸), 유대우(兪大佑), 유옥경(兪玉卿), 유호증(兪好會), 유성증(兪省會) [장인 구준(具濬)], 유학증(兪學會), 유수증(兪守會), 유양증(兪養會), 유무증(兪懋會), 유시증(兪是會), 유선증(兪善會), 유희증(兪希會) [능성 구씨(綾城具氏)], 유백증(兪伯會) 등.
권4(10인, 부인 2인): 유낙증(兪樂會), 유기증(兪企會), 유득증(兪得會), 유욱증(兪勗會), 유분(兪棻), 유황(兪幌) [진주 류씨(晉州柳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유 경(兪檬), 유비(兪秘), 유은(兪檗), 유철(兪徹) 등.
권5(5인, 부인 3인): 유철(兪徹) 배위 [풍천 임씨(豊川任氏), 청주 한씨(淸州韓 氏)], 유계(兪棨) [전주 이씨(全州李氏)], 유비(兪棐), 유종(兪棕), 유방(兪枋), 유 헌(兪欞) 등.
권6(20인, 부인 1인): 유평(兪枰), 유영(兪榑), 유개(兪槩), 유우(兪橋), 유석(兪 皙), 유전(兪襖), 유박(兪樑), 유권(兪權), 유담(兪禪), 유명기(兪命夔), 유명윤(兪 命胤) [남원 윤씨(南原尹氏)], 유하익(兪夏益), 유하겸(兪夏謙), 유명택(兪命擇), 유 명일(兪命一), 유명필(兪命弼), 유명식(兪命寔), 유명중(兪命重), 유명흥(兪命興), 유명뢰(兪命賽) 등.
권7(7인, 부인 3인): 유명웅(兪命雄), 유명홍(兪命弘) [전주 이씨(全州李氏)], 유명 순(兪命舜), 유명웅(兪命凝), 유명건(兪命健) [안동 김씨(安東金氏), 순흥안씨(順興 安氏)], 유명집(兪命集), 유명악(兪命岳) 등.
권8(25인, 부인 3인): 유명악(兪命岳) 배위(配位) [용인 이씨(龍仁李氏)], 유명보
(兪命保), 유명섭(兪命燮), 유명립(兪命立), 유명즙(兪命楫) [양주 조씨(楊州趙氏)〕, 유정기(兪鼎基), 유정기(兪正基), 유상기(兪相基), 유중기(兪重基), 유순기(兪順 基), 유정중(兪正重), 유신기(兪愼基), 유익기(兪益基), 유경기(兪敬基), 유건기(兪 建基), 유복기(兪復基), 유진기(兪進基), 유택기(兪宅基), 유하기(兪夏基), 유광기 (兪廣基)[함평이씨(咸平李氏)], 유백기(兪伯基), 유학기(兪學基), 유보중(兪普重), 유두기(兪斗基), 유하기(兪厦基) 등.
권9(10인, 부인 5인): 유우기(兪宇基) [청주 한씨(淸州韓氏)], 유도기(兪度基)[연일 정씨(延日鄭氏)], 유위기(兪偉基), 유최기(兪取基), 유적기(兪迪基), 유수기(兪受 基), 유척기(兪拓基) [평산 신씨(平山申氏)], 유묵기(兪默基) [한산 이씨(韓山李氏)〕, 유응기(兪應基), 유직기(兪直基)(경주 김씨(慶州金氏)] 등.
권10(16인, 부인 6인): 유숙기(兪肅基) [완산 이씨(完山李氏)], 유욱기(兪郁基), 유 중기(兪重基), 유해중(兪楷重), 유환기(兪奐基), 유언명(兪彦明), 유언협(兪彦協). 유언벽(兪彦璧) (인동 장씨(仁同張氏)], 유언철(兪彦哲), 유언탁(兪彦鐸) [전주 이씨 (全州李氏), 배천 조씨(白川趙氏)], 유언박(兪彦璞), 유언길(兪彦吉), 유언일(兪彦 鎰) [창녕 성씨(昌寧成氏)], 유언경(兪彦鏡), 유언전(兪彦銓) [안동 김씨(安東金氏)〕, 유언상(兪彦銷)등.
권11(13인, 부인 6인): 유언술(兪彦述), 유언지(兪彦摯), 유언호(兪彦好), 유언민 (兪彦民), 유언억(兪彦億), 유언흠(兪彦欽) [우봉 이씨(牛峯李氏)], 유언집(兪彦鎳) [창원 황씨(昌原黃氏)], 유언순(兪彦淳), 유언현(兪彦鉉) [청송 심씨(靑松沈氏)],유 언진(兪彦鈴)[평산 신씨(平山申氏)], 유언익(兪彦釴), 유언수(兪彦鏽), 유언선(兪彦 鑛) [연안 이씨(延安李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등.
권12(21인, 부인 5인): 유언수(兪彦銖), 유언제(兪彦銻), 유언음(兪彦鉴), 유언용(兪彦容), 유언횡(兪彦鋐) [은진 송씨(恩津宋氏)], 유언호(兪彦鎬) [여흥 민씨(驪興閔 氏)], 유언택(兪彦擇), 유언육(兪彦銷) [해주 오씨(海州吳氏)], 유언무(兪彦鍪), 유언 반(兪彦盤), 유언옥(兪彦鋈), 유언대(兪彦整), 유한년(兪漢年), 유한룡(兪漢龍), 유한 길(兪漢吉), 유한철(兪漢喆), 유한복(兪漢福), 유한빈(兪漢賓), 유한소(兪漢蕭) [광산 김씨(光山金氏)], 유한갈(兪漢葛) [인동 장씨(仁同張氏)], 유한병(兪漢邴) 등.
권13(26인, 4인): 유한운(兪漢雲), 유한직(兪漢直), 유한정(兪漢禎), 유한근(兪漢 謹), 유한장(兪漢蔣), 유한엄(兪漢嚴), 유한준(兪漢雋) [순흥안씨(順興安氏)], 유한 팔(兪漢八), 유한돈(兪漢敦), 유한관(兪漢寬)[평산 신씨(平山申氏)], 유한녕(兪漢 寧), 유한기(兪漢綺), 유한재(兪漢宰), 유한지(兪漢芝), 유한객(兪漢客), 유한영(兪 漢榮), 유한응(兪漢應), 유한원(兪漢愿), 유한수(兪漢授), 유정주(兪靖柱), 유찬주 (兪纘柱), 유원주(兪元柱), 유준주(兪駿柱), 유경주(兪擎柱), 유만주(兪晚柱) [수양 오씨(首陽吳氏)], 유성주(兪星柱) [전주 류씨(全州柳氏)] 등.
권14(23인, 부인 4인): 유평주(兪平柱), 유상주(兪常柱) [우봉 이씨(牛峯李氏)], 유 병주(兪秉柱) [전주 이씨(全州李氏)], 유달주(兪達柱) [전주 이씨(全州李氏)], 유정주 (兪正柱) [안동 김씨(安東金氏)], 유기주(兪耆柱), 유황주(兪黃柱), 유익주(兪益柱), 유집주(兪集柱), 유운주(兪雲柱), 유응주(兪應柱), 유형주(兪瀅柱), 통덕랑 유만주 (兪萬柱), 백거(白葉) 유만주(兪萬柱), 유성환(兪成煥), 유구환(兪久煥), 유무환(兪 茂煥), 유성환(兪星煥), 유매환(兪邁煥), 유장환(兪章煥), 유신환(兪莘煥), 유정환 (兪貞煥), 유상환(兪常煥) 등.
권15(33인, 부인 5인): 유필환(兪弼煥), 유국환(兪國煥), 유백환(兪百煥) [전주 최 씨(全州崔氏)], 유정환(兪正煥), 유준환(兪準煥), 유영환(兪永煥) [청주한씨(淸州韓 氏)], 유창환(兪昌煥) [전주 이씨(全州李氏)], 유치선(兪致善), 유치량(兪致良),유 치항(兪致恒), 유치봉(兪致鳳), 유치용(兪致容), 유치원(兪致元), 유치홍(兪致興), 유치형(兪致亨) [안동 권씨(安東權氏)], 유치정(兪致井), 유치옥(兪致沃), 유치종(兪 致鐘), 유진일(兪鎭一), 유진수(兪鎭壽), 유진규(兪鎭奎), 유진옥(兪鎭沃), 유진익 (兪鎭翊), 유진철(兪鎭喆), 유진무(兪鎭戊), 유진호(兪鎭浩), 유진태(兪鎭泰), 유진 하(兪鎭夏)[고령 이씨(高靈李氏)], 유덕준(兪悳濬), 유길준(兪吉濬), 유성준(兪星 濬), 유공근(兪供根), 유영식(兪永植) 등.
한편 이 책의 권수(卷數)와 부록(附錄)은 기계 유씨의 파계(派系)와 역대 명환의 명단, 족보(族譜) 편찬의 연혁과 종중 규약 등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며, 또한 일 창 선생이 참고한 문헌의 목록도 있어서 문헌 수집의 신빙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권수(卷首): 유진오(兪鎭午) 서(序), 총목(總目), 기계문헌 서(杞溪文獻序), 유자 음의동이고(兪字音義同異攷), 유씨본관고(兪氏本貫考), 기계현 건치 연혁(杞溪縣建置沿革), 기계유씨 파계도(杞溪兪氏派系圖), 범례(凡例).
부록(附錄): 유씨원류동이고(兪氏源流同異攷), 기계유씨족보 연혁(杞溪兪氏族譜沿 革), 기계유씨족보 서·발(杞溪兪氏族譜序·跋), 기계유씨족보 범례(杞溪兪氏族譜凡 例), 명자 강정록(名字講定錄), 기계세보 서발(杞溪世譜序跋), 기계가승 서(杞 溪家乘序), 기계가승 속록 서(杞溪家乘續錄序), 기계세고 서(杞溪世稿序), 기계유씨 추원록 서(杞溪兪氏追遠錄序), 경모첩 서(景慕帖序), 종계 입의 좌목(宗禊立議・座 目), 종헌중수의(宗憲重修議), 기계유씨 종중 규약(杞溪兪氏宗中規約), 기계유씨세계(杞溪兪氏世系), 시조 아찬공 세향 홀기(始祖阿飡公歲享笏記), 시조 아찬공 세향 축문(始祖阿准公歲享祝文), 기계유씨 호보(杞溪兪氏號譜), 유씨 국조방목(兪氏國朝 榜目), 중국 연호 대조표(中國年號對照表), 도시군별 유씨 세대수(道市郡別兪氏世帶 數), 유진강 사보 서(兪震剛私譜序), 채용 군서 목록(採用羣書目錄) 등.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창 선생은 1950년의 병화(兵火)를 피하여 원고를 땅 속에 묻어두어야 하였는데, 귀환하여 보니 원고에 아무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기계문헌》 편저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한 개인의 경경일념(耿耿一念)을 저 창창한 하늘이 돌아본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기계 유씨의 문중이 《기계문헌》을 세상에 전함으로써 쇠퇴한 풍속을 바로잡는데 일조하도록 저 명명한 하늘이 격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창 선생은 출판에 임하여 다음과 같이 겸손하게 말하였다.
각파 제친(諸親)의 사적(史蹟)을 빠짐없이 일통(一統)하여 전하고 싶었으나 나의 이목이 더 미치지 못하고 시국이 또한 날로 급변하여 편수(編修)의 역(役)을 중지하고 있던 바 마침 천선(闡先, 선대를 밝히는 일) 계후(啟後, 후손번영)의 특지(特 志, 특별한 뜻)를 가진 동족(同族) 재일(載一)군이 이를 민망히 여기어 그 경비(經 費) 일부를 부담하고 나의 초고(草藁) 그대로를 영인본(影印本)으로 간행하기로 하자 그 감의(感意)에 감격하여 나는 불비(不備)하나마 기성(既成)된 원고 15권과 부 록 1권을 합집(合集)하여 출판하기로 한다.
송나라 학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계보를 밝히고 세족을 거두며 종자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 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근세 이전에는 여러 성씨의 많은 문중에서 이 말에 담긴 뜻을 중시하여 가보(家譜)를 엮었다. 하지만 가문의 선조들과 관련된 시문을 집록(輯錄)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기계 유씨 집안의 <기계문헌>은 문헌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1962년 음력 5월 유진오 박사는 《기계문헌》의 서(序)에서 이 문헌이 어떠한 과정에서 편찬되었는지, 이 문헌이 기계 유씨의 가문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명료 하게 밝혀두었다.
“기계 유씨는 자고로 청족(淸族)이라 세상에 일컬어 왔는데 사실 기계 유씨의 역 사를 훑어보면 이상할 정도로 탐관오리(貪官污吏)의 추명(醜名)을 남긴 이가 드물 다. 매사에 중용(中庸)을 잡아서 대체로 조촐한 선비의 규구(規矩)를 넘지 않은 것이 시조 아찬공(阿公) 이래의 기계 유씨의 전통인 것이다. 권세를 일족의 수중에 모으고 국정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한 적이 없으므로 평범한 역사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랑할 만한 평범(平凡)이오, 천양(闡揚)되어 마땅한 역사이었다. “不義而富且貴는 於我에 如浮雲이라" 하는 유가(儒家)의 교훈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겨 놓은 역사이었다.
<기계문헌>의 간행에는 또 한 가지 의의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 운 개혁을 성급하게 추구하는 나머지, 묵은 것이라면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내 어버리려 하는 작금(昨今)의 풍조에 대하여, 이 문헌의 간행은 진정, 반성(反省)의 계기(契機)를 마련해 줄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利)가 아니면 일지(一指)를 움직이지 아니하는 이 세태에 전후 30년에 긍(亘) 하여 오직 천선계후(闡先啟後)의 일편단심으로 널리 문헌을 섭렵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祖先)의 유적(遺蹟)을 편력(遍歷)하고 수천 장에 달하는 원고를 수사 (手寫), 편찬(編纂)하는 분이 있다는 것은 이 땅에 도의(道義)가 아직 죽지 아니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긍경(肯綮)을 얻은 이 논평에 비단 기계 유씨의 종중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나 역 사문화 연구자들도 수긍을 하리라고 본다.
일창 선생은 《기계문헌》 발문에서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바라건대 후래(後來) 동지(同志)는 이만치라도 우리 문헌이 모아진 것을 계기(契 機)하여 앞으로 더욱 힘써 닦고 넓혀 존조돈족(尊祖敦族)의 의(義)를 굳게하여 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이러한 당부가 어찌 기계 유씨 문중에만 해당하겠는가? 전통의 가치와 종족의 이 념이 재해석되어야 하는 지금, 각 성씨의 각 문파마다 관련 문헌을 모아 '존조돈족 (尊祖敦族)의 의(義)'를 굳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어찌 한 종족 과 문파의 사업으로 끝나겠는가! 우리 역사와 민족의 간단없는 진전을 반추하고 미래 사회의 지향을 가늠하고자 할 때, 《기계문헌》과 같은 문헌이 가장 중요한 참조 준거가 되지 않겠는가? 각 성씨마다 문파마다 이와 같은 체제의 문헌을 편성하고 그것이 상호간에 참조된다면 우리 역사의 굴곡과 진전을 이해하는데 소중하고도 가장 근거 있는 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기계문헌》에 집록된 자료 가운데는 현재 각종 문집이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열람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종중에 전하여 오거나 일실되어 쉽게 열람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많다. 따라서 《기계문헌》 은 한국의 문학사나 지성사를 서술하고자 할 때 에도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다. 더구나 세대별로 관련 문자들을 정리해 두었으므로 시대풍속의 추이와 사유 방법이나 행문 관습의 변화도 요연(瞭然)하게 살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국역 기계문헌》 의 편찬과 간행이 기계 유씨만의 대사업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대사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은사 정양완(鄭良婉) 선생님의 권유로 이 대사업에 자그마한 힘이나마 보탤 수가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국역본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수록 문헌 가운데 일부는 고전번역원(구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문집 번역본에 들어 있는 것이 간혹 있어서 그것을 참고로 하였다. 또한 《국역 경모첩》 (도서출판 선비, 2011)에 이미 들어 있는 번역도 참고로 하였다. 그리고 번역문의 교정 때는 연구실 조교 노요한 · 오보라 · 권진옥 · 김현정 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역문에서 일일이 밝히지 않고 여기서 그 사실을 언급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2014년 8월 15일
역자 심경호(沈慶昊) 삼가 적음.
첫댓글 일가님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기계문헌 "해제"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근차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어서 감사합니다.
쉬엄쉬엄 정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6월 마무리 잘 하시고요~!
역자인 고려대 심경호(沈慶昊)교수는
정양완(鄭良婉, 1929~ )교수를 은사라고 하였는데,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정양완(鄭良婉)선생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를 역임하였고,
심교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조교수를 역임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재직시 공동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정양완 심경호 공저(鄭良婉, 沈慶昊 共著)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江華學派의 文學과 思想(1)(2)(3) 韓國精神文化研究院 (1) 1993)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연구분야인 강화 양명학파에 대한 지도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그래서 아마 은사라는 말을 한 게 아닐까합니다.
그러면 정양완(鄭良婉)선생이
어째서 우리 문중 중대사를 심경호교수에게 부탁한 것일까요?
일창 유치웅 문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양완(鄭良婉)선생은 정인보(鄭寅普)선생의 삼녀입니다
정인보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초대 감찰위원장이었고,
당시 일창문장은 감사원에 재직하였습니다.
정인보선생과 주고 받은 일창선생과의 서신을 살펴 보면
단순한 직장 상하관계가 아니라 사제지간에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인보선생은 근대 강화 양명학파의 맥을 잇는 대학자입니다
두 집안간 친분을 확인할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은데
정양완(鄭良婉)선생 졸업식때
일창선생이 찾아가 함께 찍은 축하사진이 전해집니다
정인보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당한 후로
일창선생이 정인보선생의 자녀들을 보살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정양완(鄭良婉)선생 입장에서는
일창선생의 역작 <기계문헌>에 대한 애착은 당연할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