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두 달 만인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신월동에 주둔하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군인들은 다음 날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지역 좌익 세력과 민중이 반란에 가담하면서
봉기로 커져갔다.
전남 동부 지역의 수개 군에 파급되어 1주일간 계속되었던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데 있었다. 제주도 곳곳에서 단독 정부 수립과 경찰 및 서북 청년단의 드센 억압에 반대하는 항쟁이 일자,
군경은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기 위해 여수 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14연대 군인들은 동족 살상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파병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데는 이전부터 쌓여왔던 군과 경찰 간의 갈등이 큰 역할을
했다. 애초에 경찰 보조 병력으로 창설된 국방 경비대는 확실한 군대조직을 갖추지 못한채 어중간한 상태로 있었고 지원자가 적어 경력이나 성향을
따질 겨를이 없이 간단한 신체 검사와 구두 검사 만으로 대원을 선발했다. 그래서 국방 경비대는 경찰의 체포를 피해온 좌익 활동가나 실업자가
많았다.
장비 면에서 우세했던 경찰은 국방 경비대를 깔보았지만, 국방 경비대는 거꾸로 경찰을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많은
친일 집단으로 보았다. 경찰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단지 군인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일반인도 그러했다.
이승만 정권
초기 경찰의 대부분은 일제 시대에 경찰에 몸담았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을 위해 봉사한다기보다는 군림했고, 주민들의 원성을 산
양곡 공출에 앞장서서 농민들로부터 강압적으로 쌀을 거두어 가기도 했다.
한편 국군 수뇌부는 좌익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14연대 연대장이었던 오동기를 구속하고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는 14연대에 있는 좌익 세포원들을 체포했는데, 이런 숙군 움직임이 감지된 것도
14연대가 여순 사건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여순 사건은 14연대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발발 원인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으로 부르거나 '병란' 또는 '군란'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지 국방 경비대의 일부 장교와 사병이 일으킨 하극상 사건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폭넓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14연대의 반란에 지방 좌익과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이 사건은 군인 반란을 넘어 당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여수와
순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14연대는 여수에 들어온 후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이름으로 벽보를 붙였는데, 거기에는
'제주도 출동 결사 반대', '미군도 소련군을 본받아 즉시 철퇴하라', '인공수립만세'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20일 오후 여수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인민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 '대한민국 분쇄 맹세',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등이 결의되었다.
특히 계속 반복하여 나타난 미군 철수와 남북 통일
등의 주장은 당시의 정치적 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순 사건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은 14연대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뒤, 그동안 비합법 상태로 있던 이 지역의 민애청원이나 노조원, 그리고 남로당원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반란군의 물리력을 배경으로 하여 해방 후의 자치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다시 세우고, 보안서를 조직하여 악질 경찰을 체포하고,
친일파 모리배의 은행 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식량 영단 창고를 개방하여 쌀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우익 인사에 대한 인민 재판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인민위원회 활동이 사전 계획에 따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여수나 순천에 있던 좌익 세력은 14연대 반란 소식을 미리 알지 못했고, 군인들이 여수나 순천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미리 정책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인민위원회가 펼친 정책들이란 남로당의 일반적인
정치적 입장을 14연대의 반란이라는 상황에서 실현한 것이었다. 더욱이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 조직이 조직된 것도 아니었고 활발한 활동은 보인
지역은 여수 정도였다.
이같이 인민위원회 조직이나 그 정책이 임기응변이기는 하지만 인민위원회가 펼친 친일 경찰과 극우 인물에 대한
보복정책이나 선심정책 중에는 민중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한편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14연대는 부대를 재편성하여 주력은 구례, 곡성, 남원 등 북쪽으로, 일부는 벌교, 보성, 화순 등 서쪽으로, 일부는 광양, 하동 등 동쪽으로
나누어 진격해 갔다. 그런데 남원, 구례, 보성 등지에서는 14연대가 진격하기도 전에 이미 지방 좌익 세력이 점령을 끝내 무혈입성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백범 김구가 여순 사건의 배후 인물?
정부가 극우/극좌 세력이 합심해서 일으킨
것으로 발표한 여순 사건이 일어난 지 이틀 째인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의용군'은 조직적 실체도 없는 허상의 군대였고,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무력 공산 혁명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혁명의용군 사건에서 가리키는 '극우 정객'이란 김구 등의 한국독립당 세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극우 세력이 관련되었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 곧바로 부정했다. 하지만 김구는 여순에서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으며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반도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정부측의 여순 사건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여순 사건을 이와 전혀 관계가 없는 김구와 관련지으려 했던 이유는 이승만에게는 남북 협상을
이끌었고 남한 단독선거를 보이콧한 김구가 가장 큰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가 여순 사건 관련 주장을 부정하고 일반
여론도 이제 동조하지 않아 분명한 효과가 없자, 정부는 범위를 바꾸어 민간 공산주의자의 행동으로 발표했다. 김형원 공보처 차장은 여순 사건은
전남 현지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건의 주체가 민간 공산주의자이며
14연대 군인은 이에 종속된 지위로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와 증언들을 보면 여순 사건이 남로당 중앙은 물론, 전남도당 또한 여수나
순천 지구당과는 전혀 연락이 없는 상태에서 군 내부에서 자연 발생한 사건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공산주의자의 폭동으로
선전하면서 정부는 여순 사건을 북한 공산주의 세력과 관련지었다. 국방부는 여순사건을 '소련 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 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
정권의 음모'라고 규정했는데, 이로써 여순 사건은 반도 남쪽의 한 지방에서 이승만 정부에 반항한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소련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승만 정권은 여순 사건의 철저한 진압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대통령의
담화로는 어울리지 않을만큼 강경했다.
이와 더불어 윤치영 내무부 장관은 1주일 전부터 북한의 평양, 신의주 등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 지배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났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북한에서는 이러한 폭동이 일어난 사실이 전혀 없었다.
주한 미군은 내부 정보 보고서에서 윤치영의 발표를 허황한 것이라면 부정했지만, 북한의 침략성을 강조하고 공산주의라는 적에 대항하여
단합할 것을 호소하는 전략에서는 한국정부와 동일했다.
주한 특별대표부의 무쵸는 자신과 콜터 장군은 한국의 대통령, 국무총리,
내무장관에게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냉정한 자신감과 정부 내외의 비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들이야말로 진짜 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이'이라고 지적했다는 내용의 전문을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결국 이승만 정부에게서 '냉정한 자신감'은 실재하지도 않는
혁명의용군 사건과 북한 폭동설이라는 '냉혹한 거짓말'로 나타났고, '적에 대한 끊임없는 상기'는 진짜 적(공산주의자)에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적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곧 나의 적이 된다는 편협한 유아독존의 생존 논리와 '끝없는 적대 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김구 세력을 공격하려는 초기 시도가 실패하자 결국 공산주의자들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지만, 책임을 회피하려한 의도는
변함이 없었다.
헌법까지 어긴 이승만 정부의 계엄령 발포
제주 4.3 항쟁 때도 그랬지만, 여순 사건
때도 계엄령은 민중에게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일반 시민들은 계엄령이 선포되면 군인과 경찰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여순사건에서 최초의 계엄령은 순천 진압 작전을 펼치고 있던 10월 22일에 현지 사령관이 내렸다. 계엄선포문은 '반도'를
숨겨주거나 연락하기만 해도 사형에 처한다는 강도 높은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여수 공격이 감행되기 시작한 10월 25일,
대통령과 국무총리(국방 장관 겸임) 그리고 11명의 장관은 국무회의를 열고 여순 지역에 대한 계엄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대통령령 13호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계엄법은 1년이 지나 1949년에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에는 계엄법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였다. 계엄법이 아직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이를 '제정'하고 '의결'한 것은 명백히 헌법 위반이었다.
국무회의에서 계엄령이 통과된 다음날
호남 방면 사령관은 여수, 순천 지구에 임시 계엄을 선포했고, 11월 1일에는 호남 방면 사령관 원용덕이 전남북으로 확대했으며, 남원 지구
사령관은 11월 1일부터 남원 지구에 계엄령을 발포했고, 원용덕은 다시 11월 5일에 전라남북도 지역에 통신 제한 계엄령을 별도로 발포했다.
이같이 계엄령은 특정한 지역에 내려진 것도 있었고, 통신 분야 같은 특정 분야에 대해서 발포되기도 했다.
계엄령이
발포되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일반인 뿐만 아니라 작전을 수행하는 군관계 인물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가 내린 계엄령은
행정, 사법의 모든 기능을 현지 사령관이 장악하는 것(이를 합위지경合圍地境이라 하는데, 이는 임전지경臨戰地境보다 한단계 위의 조치이다)이었지만,
한 신문에서는 군사에 관계된 행정, 사법 기능만을 사령관이 관할하는 것(임전지경)으로 보도했고, 국회에서 법무부 장관도 임전지경으로 답변했다.
이같이 아직 해당 법령이 만들어지지 않았기때문에 해당 지역 규정이나 내용이 굉장히 애매했다.
계엄령이
내려지자 국회는 정부가 어떤 법에 근거하여 계엄령을 발포했는가, 왜 국회의 동의를 얻지 않았는가, 계엄의 유효 시기와 그 지역 범위는 무엇인가를
따졌다. 질문에 대해 이인 법무부 장관은 계엄령 선포는 '반란'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현지 군사령관이 '계엄법'에 따라 발동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계엄령은 군 작전을 위해 실무적인 차원에서 내렸고, 합위지대에서는 일반 행정과 사법권이 정지되지 않는다고 모순되게 말했다.
그런데 계엄령은 10월 25일 이인 장관도 분명히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이미 통과되었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도 국회 여순 사건
보고에서 사건을 용이하게 처리하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계엄령을 발포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현지에서는 군사령관이 행정관과
사법권 일체를 장악한 채(합위지경) 작전을 펼치면서 시시때때로 즉결 처분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인 법무부 장관이
사실과 다르게 계엄령은 현지 군사령관이 내렸다고 답변한 것은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계엄령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현지
사령관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였다.
국회 의원들의 계속되는 질문 앞에서 이인 법무부 장관도 결국에는 "이 점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여 계엄법 제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시인했다.
그의 발언은
같은 날 앞서 행했던, 현지 사령관이 '계엄법에 의해서' 계엄을 내렸다는 스스로의 발언을 뒤집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인 법무부 장관의
국회 답변은 '거짓'과 '자기 모순'을 담고 있었다.
진압 과정에서 군과 경찰은 부역자을 골라내면서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은채 의심가는 사람을 즉결 처분했다. 군경이 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규정 자체가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사용된 계엄령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여순 사건 때 재판을 진행했던 김완룡 법무관을 불러 "임자가 가서 한달 안에 빨갱이들을 전부 다 재판해서
토살하고 오라, 그러면 계엄령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여순 지역의 부역자 색출 과정은 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여순 진압
작전에서 '인권'은 아득히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부역 혐의가 있다는 다른 사람의 지적만으로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의심받아 사형당하는
무법천지가 되었는데, 계엄령이란 이런 일을 군경이 할 수 있도록 만든 '마법의 카드'였다.
손가락총이 난무한 부역자 처벌
국군이 여수, 순천 진압 작전을 시작했을 때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정규 병력은 이미 산악 지대로 탈출한 후였다. 그렇다
보니 진압군의 작전은 정규 반란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 공격으로
변질되었다.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맨 처음 한 일은 전 시민을 학교 운동장에 모은 일이었다. 시민을 집 밖으로
몰아낸 군인들은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고, 집 안에 있으면 반란군으로 여겨 무조건 쏴버린다고 경고했다.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기관총 세례를
가했고, 조금이라도 의심나면 사살했다.
진압군은 먼저 사건 가담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이 붙잡히면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
처분장에서 개머리판, 몽둥이, 체인으로 죽이거나 곧바로 총살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수용되어 재심사를 받거나 계엄군, 경찰에게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이때 '백두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종원은 중앙 국민학교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혐의자들을 즉결 참수해 악명을 떨쳤다.
부역자를 지목하는 일은 반란에서 살아남은 그 지역의 경찰, 우익인사, 우익단체 청년들이 맡았다. 이들이 가리킨 단 한번의
손가락질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그러나 운동장에 모인 그 많은 혐의자 가운데 누가 과연 반란군에 협조했는가를 적확하게 골라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사실상 없었다.
색출 작업은 누가, 어떻게 참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 심사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심사 기준이 된 것은 교전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이렇게 심사는 외모나 다른 사람의 고발, 개인
감정에 의한 중상 모략, 강요된 자백 등의 기준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이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군경은 가담자를 색출하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투서를 받았는데, 개인 감정 등에 따라 생사람을 잡는 허위 투서가 난무하여 무고한 민간인들이 수없이 희생당해야 했다.
부역자로 몰리는 것은 이처럼 쉬웠다. 반란에 협조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는 쉬웠으나 혐의자로 몰린 사람이 그렇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을 건 방어였다. 진압군과 경찰의 과도한 부역자 색출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지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더욱이 부역자 색출이 정치적 혹은 사업상의 경제적 관계 등 개인적인 감정이 관련되어
이루어지면서 민심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진압군의 부역자 색출 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시내는 공포 분위기로 뒤덮였다.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진압의 대상'이었고, 여수는 공포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부역자 색출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이라도 군이나 경찰이 수많은 인명의 생사를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전투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현지 전투가
아닌 부역자 색출은 법의 기준에 입각해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수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기본
권리조차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혐의 사실을 증명하는 주위 정황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이나 기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역자 색출은 단지 혐의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리한 진압 작전과 뒤이은 공포 분위기 속에 진행된 부역자 색출
과정은 군경, 그리고 이를 지휘하는 정부에 대해 겉으로는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내면화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지역 공동체
성원 간에 이루어진 '손가락총'은 그 자체가 인간성 말살과 공동체의 붕괴를 뜻했고 이로 인해 이루어진 공포와 죽음 뒤에는 인간 불신이
내면화되었다. 결국 부역자 색출은 작게는 여수, 순천이라는 지역 사회를, 크게는 민족 공동체의 단합을 저해하는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이 지역에서 존경받던 우익 인사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순천 갑구에서 당선된 황두연 국회의원은
느닷없이 중앙 일간지에 '순천 반란 지구 인민 재판에 국회의원 황두연이 배석판사로 활약'했다는 기사가 실리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다.
반란 기간 내내 숨어있었던 황두연은 '빨갱이 국회의원' 소문을 해명하기 위해 국회에 직접 출석하여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자신의 행적을 해명했다. 황두연이 모함을 받은 것은 순천 지역 우익 세력과 경찰이 황두연을 '우익 단체원이나 경찰의 좌익 사건 수사에 방해
활동'을 하고 좌익에 동조적인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강직한 성격이 경찰과 마찰을 빚었던 것이다.
한편 박찬길은
광주 지방 검찰청 순천지청의 차석 검사였는데, 순천에 진압군이 들어온 뒤 바로 총살당했다. 반란군에 협조하여 인민 재판에서 재판장을 지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박찬길은, 경찰이 검거한 좌익 인사를 엄격한 법의 기준에 따라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좌익 타도에 앞장섰던 경찰은 박찬길이
엄중하게 처벌해야할 좌익을 가벼운 형벌로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좌익검사'로 여겼다.
그가 총살된 진짜 이유가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으므로 유족들은 다음 해 박찬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당시의 경찰 책임자를 의법 조치해 달라는 탄원서를 법무당국에 올리게 되었다.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되어 결국 박찬길 검사가 인민 재판 판사를 지냈다는 혐의는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총살 사건의 진상과 의미 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은 경찰의 파업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편 여순 사건이 전개되던 때 이범석 국무총리는 송욱 여수 여자
중학교 교장을 '민중을 총 연합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라고 지목했다. 아직도 여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많은 기록에서는 송욱을 여순 반란의 총
지휘자로 서술하고 있다. 송욱이 반란군 지도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송교장이 인민대회 연사로 나온다는 광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의를 받은 송욱은
내가 무엇을 아느냐면서 "나는 대중 연설 같은 것은 할 줄 모른다."고 끝끝내 거부했다. 실제로 사건 당시 그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
송국이 군인들에게 감금당한 뒤 주변 사람들은 호남신문사 사장 이은상(한독당 전남지부장)에게 구명을 부탁했으나, 이은상은
정부가 여순 사건을 이용하여 김구과 한독당 세력의 정치 생명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송교장의 운명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다.
송욱은 대구로 이송된 뒤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은 각각 지방에서 존경받는 우익계 인사였지만
조그만 트집이라도 잡아 처벌하려는 정부와 진압군의 강경 진압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여순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는 인명 피해와 함께 가옥 등 재산 피해도 엄청났다. 사건이 끝난 뒤 정부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등지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까지 인명피해는 총 5,530명이고, 가옥피해는 8,554호였다.
가옥을 비롯한 총 재산 피해 추정액은 99억 1,763만
395원에 달했고, 가장 긴급한 구호가 필요한 대상 주택은 1만 3,819호서 그 인원은 6만7,332명이었다. 단 1주일간의 피해는 이처럼
막대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피해가 '반란군'이 아니라 진압군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 여수 지역의 경우,
반란군에 의한 인명 피해는 최소 90명에서 최대 150명이었고, 재산 피해는 14연대가 산악 지대로 도망가면서 가져간 금융기관의 현금과 쌀
정도였다. 이 밖에 다른 심각한 재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진압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시민의 피해는 이에 비할 수 없이 막대했다.
여수 시내 2,000여호를 불태운 대화재로 인한 피해액만도 100억원에 이르렀는데, 이 화재는 진압군이 여수를 점령한 뒤
발생했다. 이 화재가 없었다면 여수 지역의 재산 피해는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반란군에 대한 공격과 진압이 아니라
일반 시민을 반란군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인명과 재산을 빼앗은 이 초토화 작전은 정부 수립이라는 국가 권력 탄생 시기에 제주, 거창 등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대량학살과 유사했다.
사건이 진압된 다음 많은 사람이 군법 재판을 받았다. 물론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군, 경찰은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채 구금되어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무참하게 즉결 처형했다.
여순 지역이 진압되고
14연대 잔류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즉결 처분은 계속 이어졌다. 군법 회의는 계엄 사령부가 있었던 광주와 중앙 고등 군법
회의가 설치된 대전 등지에서 열렸다. 군번 재판은 수천 명의 혐의자를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가 처리해갔다.
한 신문은 1월 22일까지 대전 군법 회의에서 모두 9차례 재판이 열려 3,715명에 형이 선고되고, 1.035명은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보도했다. 각 기록에 나타난 군법 회의 관련자 수를 추정해 볼때, 그 수는 약 6,00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군사 재판을 받았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국방부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그 결과를 간간이 발표했지만 이는 중간
발표였을 뿐이고 최종적인 재판 결과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따라서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어떤 죄목으로, 어떤 형을 받았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재판 통계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때때로 신문에 피해 상황이 보도되기는 했지만 어림잡아 짐작으로 보도했을 뿐이고 발표시기에 따라
들쑥날쑥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처형이 이루어졌을 때 사형수들은 자신들이 묶여 총살될 말뚝 앞으로
끌려와 군가를 불렀고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솔직해진다. 사형장의 풍경은 여순 사건의 다층적 성격을
압축하여 보여준 것이다.
여순 사건이 남긴 것
여순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임에도 불구하고, 기초가
되는 자료인 신문 기사들 가운데 뜬소문을 무책임하게 기사로 내놓은 경우가 많아 사실 자체의 파악이 쉽지 않다. 그래서 여순 사건은 당시에 정부가
주장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자의 반란이나 난동으로만 인식된 채 이제까지 그 의미나 성격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정부 수립
직후에 일어난 여순 사건은 통일 정부 수립의 좌절에 따른 분단 정권 수립과 해방 후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사회 구조 속에서 경찰에 대한
반감과 식량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남한 사회에는 반공이라는 기본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다.
여순 사건 뒤 이승만 정부는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경찰의 수를 대폭 늘렸고,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한편, 학교에는 반공 교육과
군사화를 위한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전 사회에 반공 체제를 확립해 가기 시작했다. 여순 사건때 잠깐 실패한 김구나 국회 내 소장파 세력 등에 대한
공격도 다음 해 6월 김구 암살과 국회 프락치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여순 사건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대응은
민중의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여순 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주민들은 '부역자', '빨갱이'로 불리면서 숱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강화되는 반공 체제 앞에서 다른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무 근거 없는 누명 때문에 국회의원이 빨갱이로
몰리고, 검사와 학교 교장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숫자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정치적
압력에 쫓겨 무리하게 강행된 진압 작전 실패가 지역 주민의 피해로 이어졌다는 점은 여순 사건에서 가장 가슴 아픈 측면임과 동시에 당시 정부의
태도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필요한 지점이다.
진압군과 정부는, 학생들이 '반란'에 열렬히 참가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탈법적인 부역자 처벌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지역
공동체는 산산조각났으며 일반 민중의 마음 또한 분열되었다. 여순 사건에서 나타난 민중 억압의 양상은 여순 사건 이후 더욱 체계적으로 강화되었고
당시의 한 국회의원이 지적했듯이 파시즘과 유사한 길을 가고 있었다.
여순 사건은 지역 사회에서 출발했고 피해 또한 여순의 민중들이
직접 당했지만, 그 성격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규정되었고 그 영향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