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월 15일(음2월 23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man 평택 김평탁(017-727-386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저높은 곳을 향하여 !
항상 깨어 기도하라 !
예수를 좇아 믿으라 !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
치료하는 여호와
치료는 히브리어로 라파(Rapha)라는 말입니다.
‘라파’는 치료자,의사,의원의 뜻입니다.
의사선생님은 병든 사람을 고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은 사람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모든 만물을 고치시며, 우리 육체의 질병, 정신, 양심, 가치관 뿐만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모두 치료하시는 전능자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출15:26)
만남의 길 : 인생은 세 번의 만남이 있습니다.
처음 만남은 어머니 입니다.
둘째 만남은 부부 입니다.
셋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 입니다.
건설(건축)재료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시멘트(=양회)
시멘트+물=시멘트풀(=시멘트물)
시멘트풀+모래=모르타르
모르타르+자갈=콘크리트
콘크리트+철근=철근콘크리트
철근콘크리트+철골=철골철근콘크리트
CCCC<성경+일기>쓰기와 삼강오륜의 학습중 품성과 성품이 달라집니다.
자기자신부터계발개혁;성경일기교육학회=<성경+일기>쓰기운동본부)CCCC
국민총합학원;민족사관교육;자아초월계발;민립(民立) O군사관학교
(Corea Internet Cyber Academy) -CCCC ; C I CA-
3월 15일
� 오늘의 말씀
① 시편81:3-4 (월삭(月朔)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節日)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律例)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規例)로다.)
② 에스겔32:17 (제 십 이 년 어느 달 십 오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 오늘의 세시
① 월망 : 오늘은 3월의 월망 !
음력으로 매월 15일을 ‘월망’이라 한다.
⇨구약성경 시편81편 3절.
** 오늘은 양력이지만 음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인<오늘의 이스라엘 ; 유대인)들도 우리나라처럼 음력과 양력을 씁니다(필자 김평탁) **
� 오늘의 역사
① 3.15 부정선거(1960) :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3.15 부정선거 제 4대 정,부통령을 뽑았던 오욕의 선거일이 1960년 오늘입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당초 5월에 치르려했던 선거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 박사가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3월 15일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조병옥 박사가 한달전 사망하자 선거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부통령 선거에 모아졌습니다.
선거결과 자유당의 이승만 이기붕 정, 부통령 후보가 유권자 80% 이상의 지지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결과는 최인규 내무장관을 중심으로한 공무원들과 자유당원들의 계획적인 부정선거에 의한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국민들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 4월 19일
* 마산 3.15 의거 기념탑 :『저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민주의 깃발을 올 리던 그날,
1960년 3월 15일 !
더러는 독재의 총앞에 꽃이슬이 되고, 더러는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우리들은 다하여 싸웠고, 또한 싸워서 이겼다.
보라 !
우리 모두 손잡고 외치던 의거의 거리에 우뚝 솟은 마산의 얼을 !
이 고장 3월에 빗발친 자유와 민권의 존엄이 여기 영 글었도다.』
이상은 경남 마산시 자산동 로타리 소재「3.15 의거 기념탑」의 비문 전문이다.
② 사방의 날 : 1960년에 식목일을 고친 이름으로 3월 15일로 정했다.
1961년에 다시 식목일로 개정했다.
⇨ 4월 5일
※ 사방(砂防;defense against earth or sand slippage) : 산, 바닷가, 강가 등에 바위가 무너지거나 흙․모래가 바람과 비에 씻기어 밀 려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시설하는 일.
산비탈에는 듬성듬성 층이 지게 흙을 쌓아 떼를 입히거나 나무 를 심으며,골짜기에는 돌을 쌓아 올리는 등 여러 가지의 시설을
한다.
③ 일본 총독부 여성근로정신대 조직(1941) : 전세계 식민통치 역사상 가장 잔혹무도했던 일제의 조선식민통치는 오늘날까지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한국의 현대사를 왜곡시킨 주범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친일세력과 그 잔재는 해방이후 무늬만 달리하며 친미세력, 반공세력, 독재수구세력으로 변신하면서 민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일제말기 조선총독부는 한국여성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성을 유린하는 지경에 이른다.
1944년 8월 총독부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발표. 이 법에 의해 수많은 한국여성들이 군수공장과 군 위안소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후부터 조선여성들을 매춘부로 만들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인력 부족과 중국대륙에 진출한 일본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공장과 위안소로 보냈다.
따라서 1944년 발표된 여자정신대 근무령은 이미 있어온 강제동원을 합법화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조선 여성의 숫자는 무려 20만명에 달했으며, 대부분이 군부대에 끌려가 위안부가 되거나 공장에 배치되었다가 다시 위안부로 끌려간 경우였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조선의 가난한 집의 딸들이었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이고 반복적으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정신대'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정신대라는 용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어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좀더 명확한 표현이 필요하다.
정신대(挺身隊)는 이름 그대로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란 의미로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용어였다.
그것은 '사상의 정신부대 애국반' '농촌정신대(가칭 산업보국단)' '연료(燃料)정신대' 군부대장의 이름을 따서 '마쓰모리(松森)정신대', 요리영업관계에 고용된 여성을 조직한 '특별여자청년정신대' 등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정신대라는 용어가 이전에도 많이 쓰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시기 조선에서는 1940년에 들어와 신문기사, 특히 친일신문인 매일신보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대라는 용어가 일제시기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여자정신근로령이 논의되고 여자근로정신대가 조직되기 시작한 1943년 이후였다.
이때부터 정신대 하면 '여자근로정신대'를 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여자근로 정신대는 일본이 전쟁으로 남성들의 동원에 한계를 느껴 일본만이 아니라 식민지였던 조선의 여성까지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98년 12월 3일 미국은 731부대 관련자, 종군위안부 관련 일본전범 16명에 대해 입금금지 조치를 내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들은 약 6만여명의 전범들을 요시찰자로 분류하면서 감시하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선진국들의 조치를 보면서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우리 정부의 행태를 보면 참으로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친일 청산과 역사적 정통성 복원을 기대하며 내용을 싣는다.
1. 일본의 침략전쟁과 조선에 대한 물자, 인력 약탈 :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공항이 일본에 파급되자, 일본은 거기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아시아 대륙침략 정책을 펴게 되었다.
조선은 아시아에 대한 일본침략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식량은 물론, 지하자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군수 공업자원이 대대적으로 약탈당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어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은 조선의 물적 자원 뿐 아니라 인적 자원을 그들의 침략 전쟁에 강제동원시켰다. 그래서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일본신민’으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였다.
1938년 3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1939년 11월에는 ‘창씨 개명’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인을 전쟁에 1회용품으로 동원하기 위한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2. 강제연행 노동자 : 중일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 본토의 전시 산업 노동력이 병력으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였다.
그것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9년 9월부터 조직적, 집단적 노동력 동원이 시작되었으며, 당초는 ‘모집’ 방식이었으나, 전쟁이 아시아 태평양 침략 전쟁으로 확대되는 1944년에는 국민 징용령을 적용시켜 조선인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였다.
일본에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약 60%가 탄광, 광산에서 지하 노동을 하였다.
도찌기현 아시오 광업소에는 1940년부터 조선 사람들이 약 1,000 명 연행되었는데, 낙반사고와 규폐병(硅肺病)에 의한 사망자뿐 아니라 학살까지도 감행되었다.
무처럼 발이 팽팽한 시체가 손수레로 자주 운반되었고 병때문에 취업할 수 없는 노동자를 전주대에 매달아 놓고 때리는 등 처참한 풍경이 펼쳐졌다고 ‘아시오 동광산 노동운동사’는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전쟁 말기에는 더욱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미야기현 다가죠 해군 공창 건설 공사에는 해군 군속으로 약 1,000 명의 조선인들이 강제 연행되었는데, 여기서는 조선인 사망자들이 저녁이 되면 마차로 밭에 운반되어 매장되었다고 한다.
제2차 대전 말기 나가노현 마쯔시로에 일본 천황이 피난할 1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방공호가 건설되었다.
이 공사에 수천명의 조선 사람들이 연행되었는데 공사가 끝난 후에는 비밀 보장을 위하여 공사에 참여한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행 작업소는 일본 국내만 해도 1,141개소 이상이라고 한다.
여자 근로 정신대도 이러한 맥락에서 모집되었다.
전체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상당한 숫자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 당시 국민학교 여학생들까지 이 근로 정신대 모집의 대상이었고, 학교 당국이 모집에 깊이 관여했다.
1941년부터 자주적 참가라는 허울 아래 14-25세의 여성에 대한 근로 동원이 실시되었으며, 1943년 9월, 일본은 '여자 근로 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정하여 여자 근로 정신대를 자주적으로 편성시켜 여성의 거의 대부분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3. 군인. 군속 : 1937년 중일 전쟁 개시에 의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서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필수 과제가 되었다.
1937.7.2, ‘조선인 장정을 지원에 의해 현역에 복무시키는 제도’를 창설하였고,1938.4.3, ‘육군 특별 지원 병령’ 실행에 의해, 지원병 제도가 실시 되었다.
실시 과정에서 역시 각 도, 군으로 하여금 각 면에 지원자 수를 할당하여, 지원자 확보를 강제적으로 하였다.
또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도 강제 지원의 희생이 되었다.
당초, 일본당국은 친척 연고자를 통해 압력을 가해 지원 시키려 했으나, 지자가 적어 1943.11.10, 조선총독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지원시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11월 14일, 명치 대학에서 ‘반도학생 결의 대회’를 열어 지원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11월 21일에는 지원하지 않은 자는 엄격히 훈련, 육성시켜 탄광 등의 강제 노동에 징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조선인 학생들은 지원하지 않으면 징용되고, 가족들도 곤란을 겪게 되어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졌다.
그래서 총 20만여명의 군인으로 징병되어 갔다.
전후 후생성 제2 복원국이 집계한 숫자에 의하면 1941년 이후의 군속동원 수가 육군 70,424명, 해군 84, 483명, 합계 154,907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위의 집계에도 많은 누락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44년에는 경상북도 일대에서 약 3,700명의 노동자가 붙잡혀, 오끼나와로 보내졌다.
4. 일본군 '위안부'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과 정부가 정책적으로 조선의 부녀자를 강제연행하여 성의 노예로 삼았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령군에 의한 부녀자에 대한 우발적 강간이 아니라 군대최고 통수지휘부에서 장기적, 조직적, 국가제도로서 기획, 입안하여 시행 했다.
10-20만 조선의 소녀들을 군부대와 함께 강제로 이동시키면서, 여성을 성노예화시킨 인류 전쟁사에 있어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이것은 여성의 재생산기능을 파괴함으로써 민족말살을 기도한 범죄이며 "노예화"이고 "추방"이다.
군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기업, 탄광 등의 노무자를 위한 위안부의 존재가 일찍부터 발견된다. 위안소 개설에는 도청의 허가가 필요 했으며, 그 과정에 경찰과도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졌다(朝日新聞北海道內13版,1992,3,15).
여기에 고용된 조선인 위안부는 대개 조선에서 일본의 방적공장 등에 취직된다는 말에 속아서 온 13-14세의 여성으로서 약 3천명 이상이었다고 추정된다(朝日新聞北 海道內13 版, 1992,3,15) .
일본군대를 위한 '위안부'는 본격적으로 193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위안소는 군대 내에서 군이 직접 경영한 것과 군에서 축조하고, 허가와 통제를 가하지만 민간업자에게 경영을 위임한 경우로 나뉜다.
위안소에는 규정이 있었는데, '위안소의 감독지도는 군정간부가 관장하며, 위안소 관리자는 매일 영업상태를 군정간부에게 보고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도 위안소의 최고감독권은 군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안소는 군대막사나 점령지의 기존 건물에 칸막이 방을 만들어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군대의 이동에 따라 함께 이동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하루에 30-40명의 군인을 상대했고 주말에는 더 많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기절하면 마약주사를 놓아 가면서 혹사시켰다.
또 더러는 끌려 가자 마자 육군병원에서 자궁수술을 강제로 받았다고 한다.
패전 후에는 이들은 그대로 전쟁터에 버려졌다.
조선의 소녀들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고, 쓰다 버리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더러는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조선인 위안부를 총알받이로도 취급했으며, 자살 강요까지 했던 경우도 있다.
이 외에도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피폭 당한 후 귀국한 약 2만명의 원폭피해자 문제, 사할린동포문제, B.C급 전범자 및 사형자 문제, 재일 동포 문제 등 일제시기에 우리민족이 당한 피해는 어느 한 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 전체와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피해자들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고, 가해국인 일본은 사죄도 법적인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도대체 어떤 규모로, 어떻게 끌고 갔고, 도대체 몇명이 사망 했는지 등 진상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식민지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 시점에서 그리고 미래의 시점으로 올바르게 해결해야 한다.
앞으로 한-일간의 응어리진 과거역사가 제대로 진상규명 되지 않거나, 법적으로 매듭지어 지지 않는다면 한-일간에 진정한 평화와 우호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과 정부가 정책적으로 조선의 부녀자를 강제 연행하여 성의 노예로 삼았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령군에 의한 부녀자에 대한 우발적 강간이 아니라 군대 최고 통수지휘부에서 장기적, 조직적, 국가제도로서 기획, 입안하여 시행 했다는 것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④ 훈장(勳章)의 유래 : 1888(고종25).3.15 우리 정부는 훈장을 제정하는데, 참고하려고 일본국의 제식(制式)과 도면(圖面)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 1월 25일
⇨ 4월 17일
⑤ 가옥세(家屋稅) 부과 실시(1919) : 가옥 소득을 과세 물건으로 하여 그 소유자에 대하여 부과하는 소득세의 하나. 을종 소득세.
지세(地稅)와 함께 조세(租稅)의 최초의 발생 형태이나 지조(地租)와 엄밀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면적․수익․가격․가옥의 등급․임대 가격 등이 과세의 기준이 된다.
한국의 경우 5.16 후에 조세 체제가 바뀜에 다라 지방세인 재산세로 통합되었다.
⑥ 박정희 쿠데타후 육군장교 80명 군정연장 데모(1963) : 당시 ‘칠성회’라는 육군 사조직의 리더였던 전두환은 5.16당시 육사 생도들에 의한 지지데모를 주도한 공로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격려(회식 및 '一心' 휘호 등)를 받으므로서 군내에 친위세력성 사조직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쿠데타의 검은 뿌리는 또 다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⑦ 울릉도(鬱陵島) 간첩단 검거(1974) : 울릉도를 거점으로 간첩 활동을 해오던 일당 47명을 검거, 일망 타진했다.
⑧ 금관 가야(金官伽倻;本伽耶, 伽羅, 駕洛國) : 가락 태조 김수로가 A.D42.3.15 왕위에 올라 건국 후 김해를 중심으로 하여 강대해져서 최초로 6가야(통일)의 맹주가 되었다.
특히 오늘날 경남 김해를 중심한 유물 유적의 발견으로 보아 금관 가야의 문화는 금석 병용기 문화에서 일본․중국과 교역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강해지자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금관 가야 최후의 임금인 구해왕(仇亥王)이 왕비와 3 아들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서 가락국은 10대 491년만에 망하였다.
⇨ 3월 3일
⑨ 긴급통화조치, 화폐 개혁(1953) : 100 대 1.
원(圓)을 환(圜)으로.
⑩ 광화문 복원 착공식(1968) : ⇨ 12월 2일
구한말 고종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지난해 해체한 광화문은 목조 건축물이 아니었다.
문 있는 석축 위의 2층짜리 문루는 목조를 흉내 낸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공포(처마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춰 댄 나무쪽), 서까래, 기둥, 천장 등 응당 나무여야 할 부재(部材;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여러 재료)가 모두 콘크리트였다.
해체 후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인근에 전시 중인 이들 부재를 보면 ‘콘크리트로 목조를 이렇게 흉내 낼 수도 있구나’라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콘크리트 광화문이 태어난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7년 광화문은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린다며 헐린 뒤 경복궁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으로 옮겨졌다.
비운은 끝나지 않았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석축만 남고 불타 없어졌다.
1968년 3월 15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콘크리트 광화문 공사가 시작됐고 그해 12월 완성됐다.
당시 목재를 전혀 쓰지 않은 건 정부가 녹화를 위해 벌채를 금지했기 때문. 이때 세워진 광화문은 원래 자리보다 14.5m 뒤로 밀렸고 경복궁의 중심축보다 약 5.6도 동쪽으로 틀어졌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2005년에는 박 전 대통령이 쓴 광화문 한글 현판을 교체해야 한다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발언 이후 홍역을 치렀다.
문화재위원회가 광화문을 복원한 뒤 현판 교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해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문화재가 정치 논쟁에 휘말린 안타까운 광경을 봐야 했다.
마침내 2006년 원래 위치로 광화문을 복원하는 공사가 시작됐다. 지난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광화문 터를 발굴한 결과 창건 때 유구(遺構;건축물 흔적)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쁨도 잠시.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이 유구를 없애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학계를 달궜다.
올해 2월 유구를 땅속에 보존하고 그 위에 광화문을 복원하기로 하면서 논란은 마무리됐다.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1926년 8월 동아일보에 헐려 가는 광화문을 한탄한 칼럼이 실렸다.
당시 광화문 철거에 반대한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을 잃으면 서울의 중심을 잃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광화문의 한이 복원이 마무리되는 2009년엔 풀렸으면 좋겠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2007.3.15)
⑪ 미 군정청 인사행정권 민정장관에 이양(1947) : ⇨ 6월 3일
⑫ 남북 우편물 교환 재개(1946) :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사람들의 왕래와 함께 우편물 교환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던중 1946년 1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의 합의로 1946년 오늘 처음으로 우편물 교환이 이뤄집니다.
우편물은 열차 운송을 통해 개성에서 교환됐습니다.
남측에서는 30만통의 우편물을 보냈고 북측에서는 만여통의 우편물을 보내왔습니다.
우편물 교환은 1950년 한국전쟁전까지 계속됐습니다.
⑬ 대한교원공제회(大韓敎員共濟會) : [요약] 교직원의 생활안정과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국의 복지기관.
구분 복지기관
설립연도 1971년 3월 15일
소재지 한국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설립목적 교직원의 생활안정과 복리증진
주요활동 각종 복리후생 사업, 사업체 운영
규모 2실 9부 22과, 직원 217명, 16개 시·도지부, 회원수 58만 명, 자산 8조 원(2000)
⑭ 파나마 분쟁(1964) : ⇨ 1월 23일
⑮ 러시아의 3월 혁명(1917) : ⇨ 10월 25일
⇨ 1월 21일
⑯ 엑스포(EXPO;World Exposition International Exhibition) : 19
28년 파리에서 체결한 국제 박람회 조약에 의하여 가맹국 또는 가맹국이 인정하는 단체가 개회하는 박람회.
4년마다 열리는데, 회원국 이외의 나라라도 참가할 수 있으며 인류의 문화와 사업의 성과를 겨루는 문명 올림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2차 대전후 처음 열렸던 브뤼셀 박람회 때부터는 대회마다 기본 테마를 갖기 시작했다.
「EXPO '70」의 테마는「인류의 진보와 조화」였다.
⑰ 쇼팽 피아노 콩쿨대회(1965) : 1965년 오늘 !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쇼팽 피아노 콩쿨대회가 열립니다.
29개 나라에서 70여명의 젊은 피아니스트가 참가했습니다.
5년에 한번씩 열리는 쇼팽 콩쿨대회 !
피아니스트에게는 쇼팽콕의 권위자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최고의 무대입니다.
참가한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날때마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마타양이 기교를 마음껏 살리면서 쇼팽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번 쇼팽콩쿨 대회에서는 결국 마티양이 우승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⑱ 영국 최초의 흑인 경찰관 탄생(1966) : 1966년 오늘 !
영국에서 최초로 흑인 경찰관이 탄생합니다.
주인공은 23살의 모하메드 다르 !
다르는 영국 서부에 있는 코벤트리시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⑲ 주디 갤런디 네 번째 결혼(1969) : 1939년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로 출연해 배우와 가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미국의 주디 갤런디 !
1969년 오늘 그녀의 생애 네 번재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나이 마흔 여섯 살 !
그러나 결혼식을 올린뒤 몇주일 안돼 약물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⑳ 지젤 브라질 대통령 취임식(1974) : 1974년 오늘 !
어네스토 지젤 장군이 브라질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브라질은 1964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민간 정부를 전복한 이래 군부내에서 대통령 승계가 이뤄져왔습니다.
메디치 전임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인계 받은 지젤 신임 대통령 !
브라질은 이후에도 군부가 독재정치를 계속하다가 1985년에야 민간정부가 들어섰습니다.
㉑ 콜럼버스 서인도의「산살바돌」섬을 발견(1492.10.12)하고 귀국(1493) : ⇨ 5월 20일
.
㉒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1939) : 1935년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재무장에 전력해온 독일이 일년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데 이어 1939년 오늘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합니다.
독일군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 거리를 누빕니다.
유럽전역은 점차 2차 세계대전의 늪으로 더욱 깊게 빠져들어갔습니다.
㉓ 미, 미시시피주 노예제도 뒤늦게 비준(1995) : 인종차별의 남부주인 미시시피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노예제 하원비준, 미국 전역 공식적으로 노예제도 폐지.
㉔ 스페인 항해가 ‘마젤란’ 필리핀 도착(1521) : 1521년 3월 21일 필리핀 세부의 사말섬을 통하여 필리핀에 도착한 마젤란은 필리핀을 스페인 영토로 주장하고 각 부족장들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하지만 막탄섬의 부족장인 '라푸라푸'는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다.
1521.4.27 마젤란은 라푸라푸를 죽이기 위하여 막탄섬을 침략하게 되나 부족을 지키기 위하여 용감히 대항하는 라푸라푸와 그 부족에게 패배하고 자기 자신도 상처를 입고 후퇴한다.
라푸라푸는 후퇴하는 마젤란과 그의 부하들을 포위하여 죽이지만 스페인의 침략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543년 VILLAOBOS 도착한다. 이때 스페인 국왕 필립 2세의 이름을 따서 국명을 FILIPINAS고 명함하고 1565년11월 LEGASPI가 보홀섬에 도착하여 CEBU에 최초의 스페인 항국을 건설하였다.
1571년에는 민다나오와 술루해를 제외한 필리핀 전부를 장악하게 되고 이 때부터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 되었다.
㉕ 히틀러, 체코 점령 : 1938년 3월 12일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합병에 성공한 후 히틀러는 곧 바로 체코 병합 작업에 들어갔다.
독일군의 체코 침공일자가 1938년 10월 1일로 공식 발표되자, 서방 국가들은 독일에 대한 외교적 항의를 계속했다.
그 결과 1938년 9월 29일 뮌헨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전쟁 방지를 위해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체코 주데텐(Sudeten) 지방의 독일 합병 안을 수락한 뮌헨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음 날에는 영국 수상 체임벌린과 히틀러가 영·독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에 평화가 정착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3월 15일 히틀러의 체코 전격 침공으로 히틀러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던 서구 강대국의 노력이 헛된 것임이 입증되었다.
1939년 3월 15일 히틀러는 체코 대통령 에밀 하카(Emil Hacha)에게 독일군의 자유로운 체코 국경 통과를 보장하지 않으면 수도인 프라하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체코 대통령은 히틀러의 위협에 굴복했으며, 이날 독일군은 아무런 충돌도 없이 보헤미아(Bohemia)와 모라비아(Moravia)로 진격하여 이곳을 독일 보호령으로 선포한 뒤, 프라하로 입성했다.
1939년 8월 23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스탈린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지 일주일 뒤인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데 이어 17일 뒤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 동부 국경선을 넘으면서 제 2차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히스토피아)
㉖ 미국 재향군인회 발족(1919)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승리의 개선을 했을 때 미국 원정군 장병들에게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시작되었다.
1919년 오늘 프랑스 파리에서 중령「해리 루즈벨트」2세가 비공식으로 장교들을 모았는데 이것이 미국 재향 군인회 창립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후 이 재향 군인회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동란을 계기로 그 식구가 크게 늘어났다.
미국과 해외 29개 지역에 근 만7천 개의 지부를 둔 재향 군인회는 이제 270만이나 헤아리게 되었다.
재향 군인회 총회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행사이다.
㉗ 기타 오늘의 역사
1450(조선 세종 32) 일본의 간청으로 대장경 1부 보냄
1815 나폴레옹 다시 황제에 즉위
1874 제2차 서이공조약 체결(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됨)
1894 아프리카에 관한 독일-프랑스 협정 조인
1901 핀란드 총선거서 첫 여성의원 당선
1906 러시아, 최초로 총선거 실시
1913 윌슨 미국대통령, 사상 처음 기자회견
1916 소태산 박중빈, 전북 익산에서 원불교 창설
1916 미군, 멕시코 국경선 넘어 판초 빌라의 혁명군 소탕전 개시
1917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임금 자리에서 물러남
1919 대한 독립단 조직
1919 미국, 멕시코, 하와이 교포 대표자회의 독립지원 결정
1923 일본, 공산당원 1천여명 검거
1925 신민부 조직
1926 셩경요령 발행.기독교문헌.저자겸 발행자 팔스트라 사령관.발 행처 구세군 조선본영.인쇄처 황금정 신문관.
1931 독일, 체코와 합병하고 보헤미아 모라비아 점령
1933 일본군, 사도하자 전투서 만주군 대파
1937 춘천서 항일비밀결사 독서회 조직
1939 독일, 체코침입 합병
1941 중앙선 개통
1946 러치 미군정장관, 귀속농지 분할매각 발표
1946 남북한 우편물교환 실시
1948 조선신학교 개혁안 작성
1951 이란, 석유 국유화법언 가결
1952 인도양의 레그니온 섬에 하루 1,870mm의 비가 쏟아져 세 계 기록 세움
1953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교단) 창립
1956 박태선 이단 규정
1956 기독교문화 발행.기독교 계간잡지며 발행인에 이준호 편집인 에 임인수였다.국판 100여편의 체제로 나왔다.
1958 한-미 원자력 협정 수정 조인
1959 중국 수상 주은래, 미-중-소-일 4대국 아시아 집단안전보 장체제 제의
1959 북나이지리아, 영연방내 둑립국으로 발족
1960 일본-북한 무역 개시
1961 앙골라 흑인폭동 / 남아프리카공화국, 영연방 탈퇴
1963 군사정부 내각 총사퇴결의
1967 북한, 남조선 해방 민주민족연맹방송 개시(평남 순안)
1967 천국직통파 창립.전북 김제읍 강정리에서 유석운.이의하.박형 진.이성희.유영남등 20명 창립한 신흥교단.정식명칭은 대한 예수교 복음교회
1968 광화문 제 자리에 중건
1968 국제로고스선교회(회장:임화영) 창립
1971 미국, 중국여행금지조치 20년만에 해제
1974 브레즈네프, 시베리아 개발계획 발표
1975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백65인 선언' 발표
1978 이스라엘군, 레바논 남부 팔레스타인 5개 기지 장악
1979 중공군, 베트남 철수완료
1983 정부, 유엔 해양법협약 서명
1984 미국 마이애미서 흑인폭동 발생
1985 브라질, 21년만에 민선 대통령인 네베스 취임
1985 김영삼-김대중 회담, 신민당 중심으로 야당 통합 합의
1987 서울대 김정구 교수팀, 초전도물질 개발 발표
1988 소련과 유고, 신베오그라드 선언
1990 이스라엘의회, 샤미르총리 불신임안 가결
1991 슬로보다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 유고연방 이탈선언
1992 공선협 공명선거주일 지정
1995 미국 미시시피주 하원, 노예제도 뒤늦게 비준
1995 유엔 언론인보호위원회, 94년 기자 72명 사망, 173명 투옥 발표
1996 유엔 인권위원회 보고서, 후세인 통치 후 1만 6천여 명 실 종됐다고 발표
� 오늘의 인물
① 유관순(柳寬順 ; 1902.음3.15 - 1920.10.12) : 생가지(生家址) 기념 비문(碑文)에서 발췌.
태어난 곳 : 충남 천원군 병천면 탑원리.
유중권의 장녀.
1916년 이화 학당 입학.
1919.3.1 거사 결심, 4.1 궐기.
1920.10.12 08시 12분 서대문 감옥 순국.
⇨ 3월 31일
② 길선주(吉善宙 ; 1869.3.15 - 1935.11.26) : ⇨ 11월 26일.
장로교회 목사이자 교육가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활동으로 구국운동을 펼쳤고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호 영계
별칭 자 윤열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
주요저서 《해타론》 《만사성취》 《말세학》
③ 최명학(崔明鶴 ; 1898.3.15 - 미확) : 해부학자.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뒤, 1946년 함흥의학대학장을 시작으로 1956년 과학원 의학연구소장을 거쳐 1962~65년 의학과학원 부원장을 지낸 것까지가 북한 문헌에서 확인된다.
소설적 상상력으로 얽어낸 허준 에피소드 같은 것을 제외하면, 최명학은 한국 최초의 해부학자다.
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일본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해부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울로 돌아와 모교에서 가르쳤다.
박사학위 청구 논문인 귀의 발생에 관한 연구는 심사위원단에 의해 세계적 수준의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명학이 주로 관심을 쏟은 분야는 발생학. 조직학. 체질인류학 등이었다.
본방인(本邦人)의 체형학적 연구, 이(耳) 발생에 대한 신사실(新事實), 조선인의 두폭(頭幅)과 두개지수에 대하여 같은 논문들이 이런 관심의 열매다.
최명학의 이 논문들은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해, 일본해부학회는 1934년 그를 평의원으로 추대했다.
조선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최명학은 1930년 조선인 의사들이 서울에서 조선의사협회를 만들 때 이를 주도했다.
조선의사협회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조선인 개업의 모임인 한성의사회가 친목단체였던 것과 달리 전문학술단체였다.
조선의사협회는 1939년 일제가 의료단체단속법을 제정해 강제로 해산시킬 때까지 학술지 조선의보를 펴내며 일제시대 한국 의학을 이끌었다.
1936년 세브란스 의전 해부학교실 주임교수를 사임한 최명학은 고향으로 돌아가 외과의원을 열어 개업의로 일했고, 함흥의학전문학교 해부학 교수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니 그는 월북 인사가 아니라 재북 인사였다(고종석,2003).
④ 전숙희(田淑禧 ; 1919.3.15~20108.1) : 수필가.
⇨ 8월 1일
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 1889.3.15 - 1970.4.16) : 캐나다의 감리교 선교사이며, 세계적인 수의학자이며 세균학자이다.
⇨4월 16일.
⑥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율리우스 카에사르 ; B.C 102.7.12 - B.C 44.3.15) : 로마의 군인․정치가.
B.C 60년 「크랏수스(Crassus)․폼페이우스(Pompeius)」와 함께 제1차 삼두 정치(三頭政治)에 참가하고,「갈리아 브리타니아」에 원정, 토벌했다.
크랏수스가 죽은 후 폼페이우스를 이집트까지 내쫓아 멸하였고, 이어 여러 곳의 내란을 평정하여 종신(終身)「딕타토르(dictator;獨裁官)」의 칭호를 얻었으나, 공화 정치파의 음모로 원로원(元老院) 의사당에서 피살되었다.
율리우스력(Julius 曆)의 제작, 식민지의 건설 등 정치의 실적을 올렸고, 문필에도 능하여 그가 쓴 <갈리아 전기(Galia戰記)>는 라틴 문학의 웅편(雄篇)이다.
⇨ 7월 12일
⑦ 베링(Emil von Behring ; 1854.3.15 - 1917.3.31) : 독일의 세균학자.
「마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전염병에 대한 면역학을 연구하여 혈청 요법의 토대를 닦아 놓았고 「디프테리아」 및 파상풍의 항독소를 만들었다.
1901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⑧ 스코필드 출생(1888) : ⇨ 4월 12일
⑨ 폴 하이제(Paul Heyse ; 1830.3.15 - 1914) : 독일 문학 사상 유례없이 훌륭한 단편을 많이 남겼다.
또한 그의 시는 19세기 독일 서정시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뽑힌다.
작품엔 <세상의 어린이는> <수녀 이야기> <메르틴> <메라나 단편 소설집> <파라다이스에서> 등이 있고, 1910년엔 최초로 독일인으로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⑩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i ; 1876.2.21 - 1957.3.15) : 요약
루마니아의 조각가.
독자적으로 상징적 추상조각을 밀고 나간 작품을 만들었다.
재질을 살리고 형태를 단순화 ·추상화시킴으로써 표현력을 높여 고유의 생명을 발휘하는 방법으로 일관하여, 그의 작풍(作風)과 생활은 더욱 단순하고 소박해졌다.
작품도 한층 원형화(原形化)되었으며, 배자(胚子) ·난형(卵形)에서 완전한 추상의 형태로 변했다.
국적 루마니아
활동분야 예술 - 조각
출생지 루마니아 왈라키아 페스티사니 고뤼
주요작품 《신생》(1915)《공간 속의 새》(1919∼1940)《끝 없는 기둥》(1937) 등
⑪ 조지프 바잘게트(Josept Bazalgett ; 72세 향수 - 1891.3.15) : ‘숨쉴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지옥의 웅덩이.’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가이며 문필가 디즈레일리가 템스강을 두고 한 말이다.
18세기 초까지 생활용수로 활용되던 강물은 19세기 들어 오물의 늪으로 변해갔다.
도시인구 급증 탓이다.
1801년 86만5,000명에서 1860년 300만명으로 늘어난 인구가 쏟아낸 오물로 더럽혀진 강물은 1832년부터 콜레라를 퍼뜨리며 1848년에는 한해 동안 1만4,13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5만 여명이 사망했다는 추정도 있다.
의정활동이 마비될 정도로 심한 악취까지 풍기던 강물은 1860년대 말부터 깨끗해졌다.
조지프 바잘게트(Josept Bazalgett ) 덕분이다.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철도건설 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템스강의 오염을 해결할 대책으로 ‘분류 하수관로’ 건설을 제의, 1856년부터 공사 책임을 맡았다.
강변에 석축을 쌓고 석축 내부에 벽돌로 된 하수로를 통해 바다로 흘려보내는 바잘게트의 720㎞짜리 하수도는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강을 오르내리는 선원들은 더 이상 두통과 구역질에 시달리지 않게 됐다.
전체 구간이 완성된 1874년에는 악취에서도 벗어났다.
템스강을 살린 공로로 1875년 기사 작위까지 받은 바잘게트는 1891년 3월15일 72세로 사망했지만 그가 건설한 하수도망은 ‘천재 토목기사 브루넬 부자(父子)’가 뚫는 런던 지하철과 함께 오늘날까지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
바잘게트와 브루넬 부자의 공통점은 프랑스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에 정착한 프랑스 신교도(위그노)의 후손이다.
코드에 집착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면 19세기 이후 토목공학의 주도권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가 행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⑫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 1767.3.15 ~ 1845.6.8) : [요약] 미국 군인 겸 정치가.
⇨ 6월 8일.
⑬ 오나시스(Aristotle Socrates Onassis ; 1906. 1. 15 - 1975.3.
15) : 그리스 선박왕.
69세로 사망.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부유한 그리스계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오나시스는 10대때 그리스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이주했고, 그 곳에서 담배. 양털. 가죽 무역에 종사하며 장사를 배웠다.
그가 세계적 부호가 된 것은 해운업을 통해서다.
25세 때인 1931년 중고 선박 몇 척을 사들여 해운업에 손댄 그는 이내 유조선을 소유한 최초의 그리스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기 마련인 전쟁은 어떤 장사꾼들에게는 치부의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20세기의 큰 전쟁들과 오나시스의 관계가 그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오나시스는 잉여선박 처분법을 통해 미국의 전시형(戰時型) 유조선들을 헐값에 사들임으로써 사업을 불렸고, 종전 뒤에는 미국 시민권을 지닌 두 아들 이름으로 뉴욕에 해운회사를 설립해 오나시스 해운왕국의 토대를 다졌다.
6.25전쟁이 몰고 온 해운업 붐은 그 왕국의 영토를 더욱더 넓혔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석유수송 독점계약을 맺은 1954년에 이르자 세계 해운업계와 석유업계에서 오나시스왕국의 패권은 거의 확실한 것이 되었다.
오나시스와 어울린 여성들도 저명한 인물들이었다.
그와 염문을 뿌린 그리스계 이탈리아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가 그렇고, 그와 재혼한 케네디 대통령 미망인 재클린 부비에가 그렇다.
특히 재클린과의 결혼은 결혼 자체의 의외성만이 아니라 전처 자식들과 재클린 사이의 거듭되는 불화로 호사가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울린 어떤 여성도 오나시스만큼 저명 하지는 못했다.
오나시스는 자기 이름 안에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두 사람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다(고종석,2002).
⇨ 1월 15일
⑭ 헤럴드 익스(Harold Ickes ; 1874.3,15 - 1952) : '석유황제'
. 루스벨트 대통령 밑에서 내무장관을 13년간 지낸 인물이다.
현대 경제사에서는 ‘석유 황제’로 더 유명하다.
1874년 3월15일, 펜실베이니아 태생인 익스는 전형적인 ‘개천의 용’.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트리뷴지 기자로 일하며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는 법률 대신 사회개혁운동에 나섰다.
정치에도 뛰어들어 선거운동원으로서도 이름을 날렸지만 결과는 언제나 패배. ‘언제나 패자를 택하는 놀라운 능력’을 한탄할 무렵 기회가 왔다.
민주당 후보인 루스벨트가 개혁 성향의 서부지역 공화당원을 찾은 것. 선거전에 기여한 공로로 내무장관 자리를 받은 익스는 곧바로 ‘공공토목사업위원회’까지 맡았다.
후버댐 등 뉴딜정책의 토목사업을 총괄하며 능력을 발휘한 익스는 루스벨트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석유조정관직까지 따냈다.
대공황 당시 미국 석유산업의 고민은 유가 폭락. 수요가 없어 배럴당 3센트선까지 떨어지자 익스는 생산할당제를 도입, 유가를 끌어올렸다.
2차 대전 중에는 미국의 연안 유조선단이 독일 잠수함의 표적이 되자 장거리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휘발유 배급제를 도입했다.
연합국이 사용한 석유 70억배럴 중 60억배럴을 차지한 미국산 석유를 좌지우지한 그는 석유 황제로 불렸다.
최저가격제와 할당제ㆍ배급제는 종전, 익스 사망(1952년)과 함께 잊혀졌지만 ‘익스’라는 이름은 오늘날 정치에 살아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익스는 초임 내무장관 시절의 익스가 36세 연하의 부인과 결혼해 65세에 낳은 아들이다.
여론조사ㆍ정치컨설팅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근무 중인 아들 익스는 힐러리 상원의원의 대선 캠프에 곧 합류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
⑮ 기타 오늘의 인물
1587 올레비아누스 사망.독일의 종교개혁자.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개혁신학자.
1766 뮌셔 출생. 독일 신학자.교리신학의 사명은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점차적으로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 가?"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1767-1845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 출생
1824 쉬발리에 출생. 사제이자 저술가였던 그는 [예수성심선교단] 의 창설자.
1860 로빈슨 출생. 네바다의 성공회 선교사 주교.사제직에 서품되 어 산 마테오시에 있는 성 마태성당의 본당신부를 지냈고 그후에 주임사제가 되었다.
1913 헐리우드 영화계 거물 류 워서먼 출생
1916 트럼펫 연주자 해리 제임스 출생
1935 배우 저드 허쉬 출생
1959 신홍우 박사 별세
� 오늘의 샘터
① 삼두 정치(三頭政治) : 로마 공화제 시대에 행하여졌던 정치 조직.
「국가 재건 3인 위원(國家再建三人委員)」이란 뜻으로 흔히「3인 위원」이라고도 하며, 제1․2회에 걸쳐 행하여졌다.
제1회는 B.C60년, 폼페이우스가 수년에 걸친 동방 원정으로 「아르메니아」․「폰토스」․「시리아 왕국」등을 정복하여 로마의 속령(屬領) 지배를 크게 확장하고 로마로 개선했으나, 원로원에서는 폼페이우스의 너무나 큰 성망(聲望)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가 원로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의로 시행하였던 동방 정책에 대한 비준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에 대한 토지 분배 법안도 유산시켜 버렸다.
이러한 원로원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폼페이우스는 민당(民黨)의 시저, 부호 크랏수스와 결탁하여 3두 정치를 펴고 로마의 판도를 3분한 것이고, 제2회는 브루터스에게 시저가 암살된 후에 조직된 것이다.
시저가 암살된 후 시저의 상속인으로 지정된 옥타비아누스가 유학하고 있던 그리스에서 돌아오자, 수도 로마에서는 사태 수습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시저의 세사람이 치열하게 대립 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손을 잡고 시저의 유장(遺將) 「레피투스」를 끌어들여 B.C 43년「국가 재건 3인 위원회」를 조직한 것이 일반적으로 제2회 삼두 정치라고 불린다.
제2회 삼두 정치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약 10여년 간에 걸쳐 행하여졌다.
② Beware the Ides of March, You, too, Brutus!
(Et tu Brute)
『브루터스여, 그대도 인가 !』
점장이에게서 『3월 15일을 경계하라』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막상 그 날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었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느냐?』고 꾸짖자,『하지만 아직 지나지는 않았습니다.』라는 대답이었다.
Ides는 고대 로마의 3․5․7․10월의 15일(다른 달은 13일).
스물세 군데나 상처를 입은 그는 암살자 중에서 친구인 브루터스를 발견했을 때 낙담하여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 7월 12일
③ 유관순 노래 : 「유관순」
3월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부르다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3월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듯하여 푸른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④ <줄리어스 시저> : 셰익스피어
제2막 제1장, 시저 암살의 전날 밤.
브루터스 저택의 정원.
브루터스는 마지막 결심을 굳힌다.
머슴인 루시어스가 브루터스에게 편지를 전한다.
『다시 한 번 더 자도 된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
내일은 바로 3월 15일이 아닌가.』
다음날인 3월 15일에 시저는 암살자에게 살해된다.
브루터스가 칼로 찌르는 것을 보고 그는 『브루터스 너까지냐』하고 쓰러진다.
⑤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말 :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내 아트리에에 날아 들어왔다.
그 새는 다시 나가려고 했지만 출구를 찾지 못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유리창과 벽에 이리저리 부딪쳤다.
또 한 마리 새가 날아 들어왔다.
이 새는 잠시 받침대 위에서 쉬고는 하늘로 향한 길을 쉽게 찾아내 날아가 버렸다.
예술가에게도 이 두 가지 상황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