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하우저, 『문화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 창작과 비평사, 2008.
바로크의 사전적 개념 :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양식. 르네상스 양식에 비하여 과격적이고, 감각적이 효과를 노린 동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본래는 극적인 공간 표현, 축선의 강조, 풍부한 장식 따위를 특색으로 하는 건축을 이르는 말로, 격심한 정서 표현을 가진 동시대의 미술, 문학, 음악의 경향까지 이른다.
1장. 바로크의 개념
매너리즘은 비록 그것이 중세의 기독교적 예술보다 훨씬 좁은 범윙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고딕과 같은 범유럽적 현상이었다. 이와 달리 바로크는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궁정적, 카톨릭적 그룹의 바로크가 시민적, 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와 판이하게 바르고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이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과 다른 내적, 외적 세계를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커다란 양식적 방향 안에서도 또다른 명확한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차적 분화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궁정적, 카톨릭적 바로크가 다시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흔히 이해해온 바의 바로크적 양식과 이보다 더 엄격하고 한층 더 형식을 존중하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나뉘는 점이다.
고딕 이래로 예술적 양식의 구조는 점차 더 복잡해져왔다.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 사이에 점점 더 긴장이 커지고 이에 따라 예술의 상이한 요소들도 점점 더 이질적인 형식을 띠게 되었다. 바로크 이전까지는 그대로 한세대의 예술적 의지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반자연주의적인지, 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 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정할 수 있었지만 바로크 시대에 와서는 예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떠한 통일적 성격을 더이상 가지지 않게 된다.
ⓐ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크의 재평가
바로크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18세기에는 아직도 그것은 당시의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서 보아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우며 기괴하게 느껴졌던 예술현상에만 적용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로크 예술의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가치평가는 주로 뵐플린과 리글의 업적이며, 이는 인상주의라는 예술사조의 수용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뵐플린의 '근본 개념'들
뵐플린은 다섯 쌍의 대립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는데, 각 쌍의 개념에는 각각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특징이 서로 대립되어 있고, 그중 단 한 쌍의 대립 개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좀더 엄격한 예술관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운 예술관으로 나아가는 발전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범주들을 열거하면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폐쇄적인 것과 개방적인 것,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 다양한 것과 단일한 것이다.
뵐플린의 말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바로크가 지향하는 바는 화면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스쳐지나가는, 그러나 관람객이 한순간이나마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는 장면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 전체를 의도가 없이 그리 된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을 노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바로크 예술은 '영화적'이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명료한 것에서 덜 명료한 것으로, 뻔히 드러나는 것에서 감춰진 것으로 나아가는 예술문화 내부에서의 연속적인 발전이 너무 명백하고 확실한 것에 대한 점증하는 혐오감에 일조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예술감상자들은 그들의 교양과 예술이해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 수록 이와같은 자극의 상승을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것과 어려운 것, 그리고 복잡한 것을 통한 자극과 병행해서 무엇보다도 감상자에게 묘사된 화면의 무궁무진하고 파악하기 힘들며 무한함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력이 바로크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모든 바로크 예술은 이러한 경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 통일성의 원리
르네상스 예술의 통일성이란 일종의 논리적 일관성에 지나지 않았고, 묘사의 총체성이란 것과 개개 사물의 총합에 불과한 것으로서 거기 포함된 상이한 구성요소들이 뚜렷이 식별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에서는 그러한 부분부분들의 상대적 독립성은 상실된다. 다 빈치나 라파엘로의 구도에서는 아직도 각 요소를 분리시켜 즐길 수 있지만,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회화에 이르면 디테일의 묘사는 이미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바로크 거장들의 구도는 르네상스 화가의 구도보다 더욱 풍부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층 더 동질적이며 더욱 크고 깊고 지속적인 숨결이 지배하고 있다. 바로크 예술에서는 통일성이 추후에 달성된 결과가 아니라 예술적 창조 자체의 선행조건이다. 예술가는 처음부터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기 때문에 일체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은 결국 이러한 비전 속에 용해되는 것이다.
ⓓ 예술사의 논리
뵐플린은 엄격한 것에서 자유스러운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폐쇄적인 형식에서 개방적인 형식으로 나아가는 발전에서 예술사의 전형적인 전개과정을 찾고자 한다.
주관적 감각주의와 다소간은 급진적인 형식해체가 뒤따랐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두 양식의 양극성을 예술사의 기본 공식으로 생각하였고, 만약 보편사적 법칙성과 역사발전의 주기성이 존재한다면 이 공식이야말로 그런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고전주의 다음에 바로크가 뒤따랐다는 사실에서 일종의 보편적인 법칙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내재적인, 즉 순형식적인 근거만으로써는 하나의 발전과정이 왜 어느 특정 시점에서 엄격한 것에서 더욱 엄격한 것으로 나아가지 않고 엄격한 것에서 자유스러운 것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결코 해명하지 못한다. 발전의 '정점'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역사적 상황, 즉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일정한 방향으로의 발전을 종결시키고 그 발전방향을 바꾸게 되는 순간이 '정점'이 되고 여기서 새로운 전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양식의 변화는 오로지 외부적인 사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결코 자체 내의 시한을 지닌 것은 아닌 것이다.
바로크를 하나의 양식적 통일체로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한 시기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적 '시대양식'이라는 말을 우리는 결코 써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나 예술적으로 생산적인 사회그룹의 수효만큼이나 상이한 양식의 수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17세기처럼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인 면에서 이미 완전히 방향을 달리하는 여러 문화계층이 존재하고 이들이 예술에 완전히 상이한 과제를 맡기던 시대에 예술생산이 단일한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창조의 하나인 새로운 자연과학과 자연과학적 지향을 지닌 새로운 철학은 처음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주적인 세계감정
새로운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주가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학설은 신의 섭리에 의하여 정해졌던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오랜 위치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왜냐하면 지구가 더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할 때 인간 역시 더이상 창조의 의미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외라는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자연법칙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신학적 의미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의미의 필연성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인간은 이제 마술이 걷힌 새로운 세계에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하는 하나의 조그마한 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점은 인간이 그의 변화된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자기신뢰와 자존심이 감정을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완전히 압도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를 이해하고 그 법칙을 산출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다는 의식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의 무한한 자아감정의 원천이 되었다.
종전의 그리스도교적, 이원론적 현실이 바뀌면서 생겨난 이러한 동질적, 연속적인 세계에서는 종전의 인간중심적 세계관 대신에 우주적 의식, 즉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존재의 궁극적 원리까지도 내포하는 무한한 상호작용, 상호관련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바로크의 모든 예술은 이러한 전율과 무한한 공간의 메아리 및 모든 존재의 상호관련성으로 충만해 있다. 예술작품은 그 총체성에서 모든 부분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라는 점에서 우주의 상징이 된다. 작품의 각 부분은 제각기 전체의 법칙을 내포하고 있고 각 부분의 어디서든지 동일한 힘과 동일한 정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2장. 궁정적, 카톨릭적 바로크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 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크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 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와 카라치 일가의 주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예술관의 두 방향을 대표한다.
주정주의 : 감정이 가장 근원적이라고 하는 사상
ⓐ 근대적 교회예술의 성립
카라치가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일체의 근대적 '교회예술'의 역사가 이들과 함께 시작되기 대문이다. 그들은 매너리스트들의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주의를 간단하고 명백한 알레고리로 바꾸어놓았는데 여기서부터 우리들에게 낯익은 상징과 형식들인 십자가, 머리 위의 후광, 백합, 두개골, 하늘을 쳐다보는 시선, 사랑과 고뇌의 희열 등이 그려진 근대의 성황가 발전한다. 종교예술은 이때 비로소 결정적으로 세속적 예술과 구분된다. 르네상스와 중세에는 순수하게 종교적 목적을 위해 생산된 예술작품과 세속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작품 사이에 많은 중간적 형식이 존재하였지만, 카라치가의 양식이 완성되면서부터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진다. 카톨릭교회의 그림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가 확립되고 공식화되었다.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세례, 승천, 등 수많은 성서장면은 오늘날에도 성화의 일반적 모델로 남아 있는 하나의 형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교회예술은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자발적, 주관적 특징을 상실하며 날이 갈수록 직접적 신앙보다 예배의식에 의해서 더 많이 규정되었다. 교회는 종교개혁 정신의 주관주의가 지닌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작품도 정통적 교리의 뜻을 신학적 저서나 마찬가지로 일체의 오해나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 없이 표현해주기를 바랐다. 교회는 예술적 자유의 위험성과 비교할 때 예술작품의 획일화는 그래도 나은 악이라고 생각하였다.
카라바지오도 처음에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세기의 예술가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은 카라치가의 영향보다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담하고 가식없는 힘찬 자연주의는 그의 주문자들이었던 고위성직자들의 취향을 지속적으로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의 그의 예술이, 그들이 종교적 묘사의 본질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위대성'과 '고귀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질적인 면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어떤 그림도 필적할 수 없는 그의 그림에 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고 심지어는 거듭 퇴짜를 놓았다. 그들은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 단지 비관습적인 형식만을 보았고, 진정한 민중의 언어로 표현된 이 거장의 깊은 경건성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라바지오의 이러한 실패가 사회학적으로 더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적어도 중세 이후로 자신의 예술적 특성으로 인해 실패했고 훗날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동시대인들로부터 반갑을 산 최초의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바지오가 실제로 그의 예술적 가치 때문에 거부당한 근대 최초의 거장이라면, 이는 바로크가 예술과 감상자의 관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룸을 뜻한다. 즉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심미적 문화'의 종언을 고하고, 내용과 형식의 더욱 엄격한 분리를 가져와, 이제 형식의 완결성은 더이상 이데올로기적 탈선의 변명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카라바지오, 『의심하는 도마』, 1602-03년경, 캔버스에 유채, 포츠담 장 수시 궁]
ⓑ 바로크 시대의 로마
바로크가 대두하면서현실도피적 경향을 밀어내고 등장한 현실긍정적 태도는 무엇보다도 오랜 종교전쟁을 치르고서 사람들이 느꼈던 피로감의 징후이자 트렌토 종교회의 기간의 비타협주의를 대체하고 나타난 타협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교회는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되도록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거의 어디서나 교회가 국가적 차원의 교회가 되고 국가통치의 수단이 되었는바, 이는 종교적 목적이 국가의 이익에 널리 종속되는 현상과 처음부터 직결된 것이었다. 로마에서까지도 정치적 배려는 종교적 배려에 우선하였다.
이때부터 로마는 교황의 거주지로서뿐만 아니라 카톨릭 세계의 수도로서 그 위용과 화려함을 과시하게 된다. 교회예술에서도 궁정적 예술의 장대화려한 성격이 지배적이 된다. 매너리즘이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현세부정적이어야만 했던 데 비해, 바로크는 좀더 자유롭고 감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극도로 풍부하고 사치스러우며 낭비적인 예술생산의 한 시기가 시작된다. 바르베리니가 출신의 교화 우르바누스 8세 치하에서 로마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의 바로크 도시가 되었다. 적어도 우르바누스 8세 치하 전반기 동안은, 로마는 이탈리아의 모든 예술계를 지배했을뿐더러 나아가서는 전유럽의 예술중심지였다. 로마의 바로크 예술은 프랑스의 고딕 예술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제적이었다. 그것은 당시 존재하던 온갖 에너지를 흡수하고 모든 예술적 경향을 통합해서 당대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현대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예술양식을 이룩했다. 1620년경에는 바로크가 로마에서 완전히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다.
부용공작은 세기 중엽쯤에는 파리를 세계의 수도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프랑스는 이때 정치적으로만 유럽의 지배적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교양과 취미에 관련된 모든 면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교황청 세력이 약화되고 로마가 빈곤해감에 따라 예술의 중심지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던 국가형태, 즉 절대군주제가 그 완성에 이르고 예술생산이 가장 중요한 수단을 구사할 수 있었던 나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 절대군주제
절대주의의 승리는 어느 의미에서도는 종교전쟁의 한 부수적인 현상이었다. 16세기 말경의 프랑스는 끊없는 학살과 그칠 줄 모르는 기근 및 질병으로 매우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와 안정을 갖고자 하였고, 강력한 정치의 도래를 갈구하거나 아니면 평화와 안정을 갖고자 하였고, 강력한 정치의 도래를 갈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를 감내하였다. 이러한 강권통치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구귀족들이었는데, 이들은 왕권에 대항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통치하기 위해서는 구귀족의 저항을 분쇄해야만 했다. 이와는는 반대로 정치적 안정 속에서만 번창할 수 있고 언제라도 '강력한 정치'를 지지할 태세가 되어 있는 부르즈와지는 절대주의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왕과 정부 또한 이러한 추종세력의 고마움을 평가할 줄 알았다. 시민계급에 속하는 사람을 귀족으로 만들어주는 일은 오래 전부터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젠 종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분별하게 진행되었다.
ⓓ 프랑스의 귀족
그러나 왕과 절대주의 국가의 귀족에 대한 관계는 결코 간단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과 국가가 박해를 가한 것은 반항적인 귀족들이지 귀족 전체는 아니었다. 귀족은 여전히 국가의 중추로서 중요시되었다. 그들의 특권은 순전히 정치적인 특권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왕은 여전히 자신을 귀족계급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또 즐겨 자신을 국가의 첫째가는 귀족이라고 불렀다. 왕은 신흥귀족의 출현으로 추락한 귀족계급의 위신을 보상하기 위하여 모든 공적인 예술과 문학 수단을 통해 귀족의 도덕적 정신적 모범성을 강조하는 신화를 퍼뜨렸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사회는 다시 귀족화되고 구기사도적, 낭만적 도덕 개념은 또 한번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진정한 귀족은 세습귀족에 속하는 귀족으로서 기사도 이상을 신봉하는 이른바 신사인 것이다. 영웅적 행위와 의리, 절제력과 자제력, 관용과 예절은 이러한 사람이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궁정의 예의범절은 왕의 궁성이나 정원들을 만들었던 바와 동일한 형식원칙에 의거하여 만들어졌고, 그와 동일한 양식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바로크의 모든 형식이 그렇듯이 궁정생활 역시 비교적 자유스러운 데서부터 훨씬 엄격한 규범화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난날의 거칠고 기세등등하던 귀족은 잘 길들여진 온순한 궁신으로 변하고, 왕년의 휘황찬란하고 변화가 풍부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단조로워진다. 궁정귀족들 사이에 존재했던 등급 차이는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어, 궁정에 있는 사람들은 왕과의 관계에서는 모두가 하나같이 보잘것없고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들도 거기서는 왜소해진다"는 라 브뤼예르의 말 그대로였다. 바로크 문화는 날이 갈수록 더 권위주의적인 궁정문화로 변하였다. 무엇보다도 공적인 성격을 띤 고급예술의 기본바향이 여기서 정해졌고, 현실에 이상적이고도 화려, 장중한 성격을 부여하며 전유럽의 공식적 예술양식의 규범이 될 '위대한 양식'도 여기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궁정의 예의범절과 유행 및 예술이 이처럼 국제적으로 통하게 된 것은 프랑스 문화의 국민적 성격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가능했다.
ⓔ 프랑스의 궁정예술
하지만 우리가 바로크를 한마디로 일괄해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이른바 '위대한 세기' 역시 정신사적으로 통일적이고 예술적인 목표에서 일관된 하나의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하나의 깊은 단층이 이세기를 양분하고 있어서,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는 때를 분수령으로 하여 두 개의 양식사적 국면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1661년 이전, 그러니까 리슐리외와 마자랭 시대에는 아직도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예술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아직 국가의 후견을 받지 않았고, 국가에 의해 조직화된 예술생산도 없었으며, 국가에 의해 공인된 예술규칙들도 없었다.
이 세기의 후반부는 비록 몇몇의 중요한 작가를 가지고 있지만 전반부보다 더 창조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기에는 어디서나 개별적인 예술가의 개성 대신에 보편적인 유형이 지배적이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문학보다 조형예술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개개의 예술작품들은 독자성을 상실하고 실내나 궁정 내지 궁성이라는 전체 작품 속에 병합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대규모 기념비적 장식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1661년 이후는 정신적 제국주의가 정치적 제국주의에 상응하게 되었다. 공적 생활의 어떠한 분야도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즉 법률, 행정, 경제, 종교, 문학과 예술 분야가 모두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지방과 지역적 문화 중심지들은 이제 그 중요성을 상실하였고, 궁정과 도시, 즉 베르사유 궁정과 파리가 프랑스의 모든 정신생활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개성과 개인적 특색 그리고 개인의 자발성을 완전히 평가절하하는 결과를 낳았다. 17세기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전성기 바로크를 지배한 주관주의는 이제 통일적으로 규제되는 권위주의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다.
ⓕ 고전주의
17-18세기 근대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 작품을 모범으로 삼아, 단정한 형식미를 중시하며 조화, 균형, 완성 따위를 추구하려는 창작 태도
고전주의 예술이론은 중상주의적 경제조직을 위시한 당대의 모든 생활과 문화 형식들처럼 절대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정신적 형식에 대한 정치적 목적의 절대적 우위성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 경제 형식의 특징은 국가라는 절대적 이념에서 나온 반개인주의적 경향이다. 그리고 중상주의자들이 일체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지방분권주의를 말살하려고 했던 것처럼 공식적 고전주의의 대표자들도 일체의 예술적 자유, 개인적인 취향을 관철하려는 일체의 시도, 주제나 형식의 선택에서 있을 수 있는 일체의 주관주의를 근절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은 예술로부터 보편타당성, 즉 자의적이고 기괴하며 이색적인 것을 일체 배제하며 비밀이 없고 명석하며 합리적인 양식으로서의 고전주의 이상에 부합하는 형식언어를 요구했다. 그들은 그들의 '보편타당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고, 그들이 일컫는 '모든' 사람이라든가 '일체의'라는 것이 얼마나 적은 수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들의 보편주의는 엘리트, 그것도 절대주의가 만들어놓은 엘리트들의 동류의식이었다. 고전주의 미학의 규칙이나 요구는 그 어느 하나도 이 절대주의 이념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은 예술이 국가처럼 통일적 성격을 가져야 하고, 군대의 움직임처럼 완벽한 형식을 갖춰야 하며, 군대의 명령처럼 정확하고 명료해야 하고, 국가 안에서의 모든 시닌의 생활처럼 절대적 규칙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가는 다른 신민이나 마찬가지로 자기 멋대로 움직여서는 안되며, 독자적인 공상세계의 미로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 법칙과 규칙에 의지하고 그 지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고전주의 형식의 요체는 규율과 제한 그리고 집중과 통합의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가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는 것은 연극의 통일이론이다.
신고전주의극 : 인간의 감정의 유발로 인한 행동을 철저히 통제하고, 극 중에 질서를 수립하는 것을 중시. 3일치의 법칙 (시간의 일치, 장소의 일치, 행동의 일치)
그들은 통일의 원리를 지킴으로써 고대로 되돌아 가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야만'과 결별하고 있음을 내세웠던 것이다. 바로크는 이러한 측면에서도 중세적 문화전통의 최종적인 해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고전주의적 미학의 모든 법칙과 규칙들은 형법조문을 연상시키며, 이러한 조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의 경찰력이 필요하였다. 프랑스 예술계가 당면했던 강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들 아카데미에서였다. 아카데미의 임무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하나로 묶고 일체의 개인적 노력을 억압하며 왕에 체현된 국가이념을 최대한으로 찬미하는 일이었다. 정부는 예술가와 감상자층의 개인적 관계를 해체하고 이를 직접 국가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정부는 개인적인 패트런 제도나 예술가와 작가의 개인적 관심 및 노력을 장려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예술가와 시인은 오로지 국가에만 봉사해야 했고, 아카데미는 이를 위해 그들은 교육하고 감독해야 했다.
ⓖ 아카데미
왕립 조형예술 아카데미는 모두가 다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그 회원수에서 아무런 제한이 없는 멤버들로 구성된 자유단체로 1648년에 발족되었지만, 1655년 왕의 보조를 받기 시작한 후부터, 특히 1664년 이후 콜베르가 조형예술의 장관 격에 해당하는 '건축총감'이되 고 르 브룅이 '왕실 수석화가'와 아카데미 종신원장이 된 후부터 관료적으로 운영되고 엄격한 권위주의적 수뇌부가 이끄는 국가기관으로 변모하였다. 아카데미를 이런 식으로 왕의 직접적인 종속기관으로 만든 콜베르에게 있어 예술은 단지 새로운 왕이 신화를 지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 지배권의 본산으로서 궁정이 펼쳐야 할 화려함을 드높임으로써 절대군주의 위신을 높이는 특수기능을 지닌 국가통치의 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아카데미는 예술가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일체의 보조금과 예술가들을 위협하기에 알맞은 일체의 권력수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카데미는 공직과 공적 주문 그리고 칭호등을 나누어주었고, 예술교육을 독점하고 그 시초부터 최종적인 고용에 이르기까지 한 예술가의 발전을 감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로마상을 위시한 모든 상과 연금도 아카데미에서 주었다. 전람회나 콩쿠르도 아카데미의 허가를 얻어야 했고, 아카데미의 예술관은 사회에서 특별한 신망을 누렸고 이를 따르는 예술가들에게는 처음부터 우선적인 지위가 주어졌다.
ⓗ 왕실의 매뉴팩처
많은 규칙과 제한을 가진 궁정양식에 절대적 웅위를 확보해주었던 이러한 체제에는 예술교육의 독점 이외에도 예술생산의 국가적 조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콜베르는 왕을 국가의 유일한 예술수요자로 만듦으로써 귀족계급과 금융가들을 예술시장에서 축출하였다.
콜베르 : 프랑스의 정치가. 중상주의 정책을 펴서 재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학예를 보호 장려하였다.
콜베르는 그가 아카데미를 예술교육의 총본산으로 만들었던 거소가 같은 방식으로 1662년 고블랭가로부터 인수한 양탄자 매뉴팩처를 다시 정비해서는 이를 국가의 모든 예술생산의 근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건축가와 장식화가, 화가와 조각가, 양탄자직공과 가구공, 견직물공과 모직물공, 청동 주조공과 금은세공사, 도자기공과 유리공 등을 총망라하여 공동작업을 하도록 했다. 왕이 거처하는 성이나 정원을 위한 모든 예술품과 장식품은 이 작업장에서 생산했다. 콜베르는 수출용 예술품을, 왕은 외국의 궁정이나 고명한 인사들을 위한 선물용 예술품을 이곳에서 제작하도록 하였다. 이 왕실 매뉴팩처에서 나온 물건들은 모두 나무랄 데 없이 품위가 있고 기술적으로도 완벽한, 말하자면 뛰어난 수공업적 문화의 창작품이었다. 비록 개인적인 독창성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그만큼 더 균일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뉴팩처의 기계적, 공장적 방법은 응용예술은 물론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생산의 규격화를 초래하였다. 상품의 새로운 생산기술에 의해 대량생산에서도 미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독창적인 것,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성적인 형식이 지니는 가치의 과소평가가 가능해졌다.
ⓘ 아카데미즘
'고블랭' 매뉴팩처에서 제작된 것의 거의 대부분은 르 브룅의 개인적 통제 밑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손수 대부분의 설계도를 그렸고 나머지도 모두 그의 지시에 따라 작성되고 그의 감독 아래 완성되었다. 베르사유의 예술은 여기서 그 형태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르 브룅의 창작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일체의 비판을 초월하는 모범, 즉 고대, 라파엘로, 볼로냐의 거장들 및 푸생을 바탕으로 하는 아카데미적 미의 전범이 확립되었고, 이때부터 역사적 성서적 소재를 묘사할 때에도 왕의 명성과 궁정의 위신을 절대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이론을 따르면 특별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카데미 예술이론과 이에 상응하는 예술활동에 대한 반대는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 공인예술과 비공인예술
옛날에도 뛰어난 예술가나 어떤 예술경향이 이런저런 교회 및 세속의 주문자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었지만, 바로크 시대 이전에는 공적 예술과 대중적 예술 사이에 원칙적인 구분이 지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처음으로 진보적 예술경향은 자연적인 발전과정의 타성뿐만 아니라 국가와 교회 같은 권력기구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인습에 대항해서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예술계의 보수적 요소와 진보적 요소 간의 전형적인 현대적 갈등은 단순히 상이한 여러 취향들 때문에 생겨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권력투쟁의 양상-이 투쟁에서는 모든 특권과 기회는 보수적 진영이, 그리고 모든 손해와 위험은 진보적 진영이 갖거니와-을 띠고 전개되는데, 이는 바로크 이전에는 못 보던 현상이었다. 이제는 예술감상자 자체 내에서 두 개의 파, 즉 진보와 혁신을 적대시하는 그룹과 처음부터 새로운 경향에 호의적인 자유주의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두 파의 상호대립, 추상적이고 계획적으로 제시된 예술이론과 생동적이고 실천 속에서 발전하는 예술이론 사이의 대립이야말로 바로크와 그 후의 예술양식에 독자적인 현대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문외한 감상자층의 이러한 최초의 승리는 부분적으로는, 루이 14세가 예술가들에게 지급하는 보조금 액수가 그의 치세 말경에 가서는 점점 적어졌고 따라서 아카데미가 보조금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해 좀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로써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제 드 필르의 전제에서 논리적 결론이 내려진 것은 다음 세기에 와서이다. 즉 예술음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감동' 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예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이성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의 태도라고 처음으로 강조한 것은 장-바티스트 뒤 보였다.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누구든지 전문가에 대한 비전문가의 우월성을 내놓고 주장하게 되었ㄱ, 끊임없이 한가지 일에만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둔화되게 마련이며 반대로 애호가나 문외한의 감정은 언제나 신선하고 자연스럽다는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다.
ⓚ 시민계급과 고전주의
예술감상자층은 날로 그 규모가 커져갔고, 점점 더 다양한 구성원들을 포괄함으로써 17세기 말경에는 이미 르 브룅 시대의 궁정적 예술감상자들처럼 동질적이거나 도저히 그처럼 쉽게 다르어질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전주의적 예술의 합리성에는 귀족계급의 세계관 못지않게 시민계급의 세계관 또한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합리주의는 귀족의 사고방식보다 오히려 시민계급의 사고방식에 더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서, 귀족들은 애초에 부르즈와지로부터 합리주의적 생활관을 배웠던 것이다. 아무튼 영리를 추구하는 시민들은 자신의 특권을 자랑하려던 귀족보다 먼저 합리주의적인 생활계획을 따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시민계급의 감상자층은 귀족들보다도 더 빨리 고전주의 예술의 명료성과 단순성 및 간결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시민계급에서 고전주의 예술을 좋아한 사람들은 물론 상류층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그들 역시 고전주의 예술에 전적으로 심취한 것은 아니었다. 고전주의의 합리적 질서원칙은 그들의 실무적인 사고방식에 맞는 것이었지만, 실천적,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그들은 자연주의적인 인상에 한층 더 민감했다. 푸생의 합리주의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적 화가들인 르 쒸외르와 르 냉 형제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부르즈와 화가였다.
[루이 르 냉, 『농부 가족』, 캔버스에 유채, 1640-45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 근대적 심리학의 기초
ㄱ러나 자연주의 역시 시민계급의 전유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자연주의도 합리주의처럼 모든 사회계층에게 생존경쟁에서 없어서는 안될 정신적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업의 성공뿐만 아니라 궁정과 쌀롱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도 날카로운 심리학적 감각과 인간에 대한 섬세한 이해는 하나의 전제조건이었다.
ⓜ 살롱
살롱의 전성기는 17세기 전반기였다. 즉 당시는 아직 궁정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 전이었고, 직업적인 비평가가 없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질을 판정하기 위해 정당한 예술감상자층과 예술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기관을 필요로 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살롱들은 문학적 명성과 유행이 만들어지는 비공식적인 소규모 아카데미와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은 외부에 대해 개방적이고 대내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후의 궁정이나 실제의 아카데미보다 예술생산자와 예술소비자 사이에 훨씬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줄 수 있었다. 살롱의 교육적, 문명적 의의는 엄청나게 컸지만, 살롱으로부터 직접 나온 문화적 성과는 보잘것 없었다.
살롱은 상이한 계층의 예술전문가나 예술애호가들을 그들 서클 속에 통합시킴으로써 예술감상자층의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살롱에는 아직도 물론 다수를 차지하였던 세습귀족 이외에도 관료귀족 그리고 이때 이미 예술계에서 한몫을 하게 되는 부르즈와지들이 그 구성원으로서 함께 모여들었다. 귀족은 여전히 장교, 지방장관, 외교관, 궁정관리와 고위성직자의 자리를 차지했고, 이에 반해 부르즈와지는 재판소나 재무관청의 고위관직에 있었고 문화계에서도 귀족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3장. 시민적. 개신교적 바로크
ⓐ 플랑드르와 홀란드
에스파냐가 플랑드를 통치하고 플랑드르 상류계층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곳에서는 여러 면에서 동시대의 프랑스와 유사한 상황이 생겨났다. 여기서도 귀족계급은 국가권력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고분고분한 궁정귀족이 되었다. 부르즈와지의 귀족화 및 부르즈와지가 가능한 한 본래의 생업에 등을 돌리려는 경향 또한 사회발전의 지배적 특징이 되었으며, 여기서도 교회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누리는 대신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국가통치의 수단이 된다는 대가를 치렀다. 또한 지배계급의 문화는 철저하게 궁정적 성격을 띠었고, 민중적 전통과의 관련은 물론,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얼마나간 남아 있던 부르고뉴 궁정의 시민적 정신과의 관련까지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특히 예술은 여기서도 프랑스에서처럼 대체로 공적인 성격을 띠었다. 다만 이곳의 예술은 프랑스의 바로크와는 달리 동시에 종교적인 색채도 띠었다는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는 플랑드르의 예쑬이 에스파냐의 영향을 받고 잇었기 때문일 것이다.
플랑드르의 바로크 예술이 프랑스의 궁정예술보다 더 자유스럽고 관대한 성격을 띠었고, 로마의 교회예술보다 더 자연스럽고 활달한 분위기로 차 있는 것은 교회측의 이러한 관용주의 덕분인 것이다.
카톨리시즘은 성직자가 신도를 대표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군주의 주권이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 데 반해, 프로테스탄티즘은 모든 신자는 신과 직접 교섭하는 아들이라는 종교관을 내세움으로써 본질적으로 반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신, 구교 사이의 선택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되는 수가 많았다. 종교개혁 직후에는 북부의 카톨릭 신자 수가 개신교 신자 수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많았고 그후에 가서야 많은 숫자가 개신교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이 두 지역간의 문화적 대립의 진정한 원인이 남부 국가들과 북부 국가들 간의 종교적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주민의 종족적 특성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경제적, 사회적 원인이 있었다. 네덜란드 예술 자체 내의 근본적 양식 대립은 바로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다.
네덜란드 예술의 분화는 펠리페 2세의 치세기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절대주의의 성과와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조직 및 계획성있는 국가재정의 합리주의를 네덜란드에도 도입하려고 했던 진보적인 군주였다. 하지만 네덜란드 전체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북부는 성공을 거두고 남부는 실패했다. 이 두 지역의 문화적 대립은 에스파냐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직도 표면화되지 않았었고, 투쟁의 결과가 남부와 북부에 각각 다른 결과를 낳은 후에, 그리고 반란의 이러한 상이한 결과에 따라서 이 두 지역에서 각각 상이한 사회적 차이점이 부각되면서부터 비로소 전개되었다.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도시의 자치권과 이와 결부된 그들의 특권을 그대로 지키려 하였고, 이점에서는 네덜란드의 전 시민계급이 같은 입장이었다. 개신교도요 공화주의자인 홀란드인들이 무자비한 종교재판과 극악무도한 군대를 앞세워 통치하는 카톨릭 전제폭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아름다운 전설에 불과하다.
ⓒ 홀란드의 시민적 문화
북부의 자유도시국가들은 남부의 여러 주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도시 연합국가를 형성했다. 남부에도 북부 못지않게 큰 도시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지방자치권을 상실하고 난 후부터 남부 도시들의 기능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던 것이다. 봉기에 실패한 남부의 지배적 사회계층은 홀란드에서처럼 도시의 시민계급이 아니라 귀족적이거나 귀족화되고 있던 궁정예속적 상류층이었다. 북부는 국민해방에 힘입어 도시적 문화의 특색을 그대로 유지한 반면, 남부는 외세통치로 인해 궁정적 문화가 도시적, 시민적 문화에 대해 승리를 했다. 그러나 홀란드의 경제적 번영은 자유주의적인 미덕보다 행운과 우연의 힘이 컷다.
유산계급이 끊임없이 귀족적 취향에 연연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적 정신은 예술에서도 지배적 정신으로 존속하였고 유럽 전반에 걸친 궁정문화의 한가운데서도 홀란드 회화에 본질적으로 시민적인 특징을 부여하였다. 홀란드의 미술이 시민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구속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성경의 얘기는 세속적인 화제에 비하여 별로 큰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대부분 일종의 풍속화로 취급되었다.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소재들의 묘사, 예컨대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실내화, 건축화 등이었다. 카톨릭교회와 전제군주가 지배하는 나라들에서는 계속해서 성서적 역사화나 세속적 역사화가 지배적인 예술 형식이었던 반면, 홀란드에서는 종전까지 부속물로만 취급되던 대상들이 완전히 독립된 대상으로 발전하였다.
ⓓ 시민적 자연주의
그러나 이러한 소재선택보다도 홀란드 회화에서 더 특징적인 것은 그 특유의 자연주의이다. 홀란드 회화는 바로 이러한 자연주의에 의해서 유럽의 일반적인 바로크, 그 영웅적 포즈와 엄격하고 경직된 의식성, 그 격렬하고 화려한 감각주의 등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다른 사실적인 양식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홀란드 미술에 박진감이 넘치는 것은 단순하고 경건한 묘사의 솔직성이나 사물을 직접적이고 평범하며 어떤 관람자에 의해서도 통제될 수 있는 형식 속에 묘사하려는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묘사의 시각이 개인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관이 구체화된 친근감 넘치는 패널화는 근대적 부르즈와 예술의 특징적 형식이 되는데, 시민계급의 내면적 충동과 그 나름의 한계성을 표현하는 데에는 어더한 다른 형식도 이보다 더 적합하지는 못했다. 이 형식은 조그만 규모에 한정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이자 동시에 좁은 테두리 안에서 정신적 내용을 최대한으로 상승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시민계급은 규모가 큰 장식적 예술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홀란드에서는 조형예술 중에서도 가장 겸손한 예술인 회화,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형식인 실내장식용 소형 그림이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 시민적 예술감상자층
그러니까 홀란드 예술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교회나 군주도 아니요 궁정사회도 아니었으며, 유별나게 부유한 몇몇 사람보다 웬만큼 부유한 사람이 많음으로 인해 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 시민계급이었다.
예술수요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중간 시민계급 내지 소시민계급의 취미는 결코 높이 계발된 것이 못 되었다. 예술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기준이란 고작해야 그림이 얼마나 실물을 담았는가 하는 정도였다. 많은 경우 그들은 자기네보다 상류층에서 인기있던 취미를 따랐고, 상류 시민계급은 또 고전주의적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의 예술관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별로 까다롭지 않은 예술애호가층의 수요는 비록 나중에 가서는 하나의 위험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예술가에게 커다란 이득이 되었다. 그것은 예술가로 하나여금 개개 주문자의 희망을 고려할 필요 없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게 하였다. 단지 나중에 가서는 이러한 자유가 무정부적인 시장상태로 인하여 과잉생산이라는 불운을 초래했던 것이다.
ⓕ 홀란드의 미술품 매매
17세기의 홀란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돈은 자본의 과잉상태로 항상 유효하게 투자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규모가 큰 물건을 장만할 액수는 못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구나 장식품, 특히 그림을 구입하는 일은 비교적 많은 돈을 갖지 않은 소시민들도 참가할 수 있는 인기있는 투장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그들이 그림을 산 것은 무엇보다도 그드르이 형편으로는 딴 물건을 살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특히 그들보다 상류층 사람들이 그림을 샀기 때문이고 그림으로 집안을 꾸미면 집안이 고상해 보였기 때문이며 또한 그림은 샀다가도 다시 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림을 사는 일은 아마 가장 드문 경우였을 것이다.
미술시장에서의 광범위한 투기가 낳은 호경기 바람을 타고 1620년 이후 홀란드에서는 엄청난 수의 그림이 쏟아져나와, 수요가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과잉생산을 초래함으로써 예술가들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17세기의 홀란드에 와서 새롭다고 할 것은 미술생산이 주로 국내 수요자에 의존하였고 국내 수요자가 생산을 다 소화할 능력이 없게 되자 예술계에 심각한 우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예술가의 과잉과 예술 예술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예술사에서 이때가 처음인 것이다. 길드가 해체되고 궁정이나 국가에 의한 예술생산의 통제가 붕괴되자 예술시장의 호경기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경쟁으로 변질되었고, 가장 개성이 강하고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이러한 경쟁의 제물이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궁색하게 산 예술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생활이 비참할 정도는 아니었다. 렘브란트와 할스와 같은 화가가 겪은 궁핍은 경제적 자유와 무정부주의가 예술분야에 가져온 부수현상으로서, 이때 처음으로 완전히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면서 이후의 미술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렘브란트 : 네덜란의 화가. 화려한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의 구사. 절묘한 명암의 배합. 인물의 내면 묘사에 뛰어났다. <야경>, <자화상>, <탕자의 귀향>
키아로스쿠스 :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했던 회화기법이다. 화폭의 많은 부분을 어둡게 처리하면서 동시에 단일 광원으로 특정 부분을 밝게 처리하는 방법
미술품 매매업의 형성과 독립화는 근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발전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이 한 장르만을 취급하는 화가의 전문화를 초래했는데, 그 까닭은 화상들이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가장 잘 팔리는 종류의 그림만을 화가들로부터 요구했기 때문이다. 미술품 매매는 시장을 규격화하고 안정시켰다. 다시 말하면 예술품 생산을 항상 동일한 타입에만 고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적인 종래의 상품유통 과정도 조절하였다. 화상은 한펴으로는 개인적 수요가 없을 때에는 자신이 직접 뛰어듦으로써 일정한 예술수요가 유지되게끔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들에게 고객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예술가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총괄적이고도 신속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화상을 통한 생산과 소비의 중계가 예술가들을 감상자들로부터 소외시킨 것도 사실이다. 고객들은 점차 화상들이 이미 가지고 잇는 작품만을 사는 데 익숙하게 되었고 또 그들은 예술작품을 다른 상품과 같은 비인격적인 생산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비개성적인 고객들을 위해 일하는 데 익숙해지 시작했다.
ⓖ 홀란드 화가의 경제상태
홀란드 미술시장에서 그림의 가격은 매우 낮았다. 몇 길더 안되는 돈을 주고 한폭의 그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궁정적 귀족적 문화가 지배적이던 주에서는 예쑬가들의 보수가 나앗다. 바로 이웃의 플랑드르에서 루벤스는 가장 인기있던 홀란드 화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작가와 화가 사이의 이와같은 수입의 격차에서 우리는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과 수공업과 무관한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더욱 높은 펴가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되낟. 17세기에 와서도 프랑스에서 궁정화가의 위치는 하급 궁정관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 루벤스와 렘브란트
화가들이 사회적으로 별로 존경받지 못햇기 때문에 화가의 직업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에서나 네덜란드에서나 여전히 시민계급의 중류 내지 하류에 한정되어 있었다. 루벤스는 이 점에서도 하나의 예외에 속한다. 그는 고급관리의 아들이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최상의 교육을 받은데다가 궁정에 진출하여 사회인으로서의 교육까지 완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휘황찬란한 사회적 지위 이외에도 영주와 같은 큰 재산을 모앗고 자국의 전 예술계를 마치 전제군주처럼 지배하였다. 루벤스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의 예술적 재능 못지않게 조직가적 재능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매뉴팩처의 작업방법을 미술생산의 조직에 적용함으로써, 그리고 전공에 따라 조수 화가들을 세심하게 선택하고 그들의 능력을 합리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이러한 주문들을 처리하였다. 라파엘로의 아틀리에서 먼저 철저하게 적용되었고 예술적 구상과 실제 작업을 근본적으로 분리시켰던 이같은 미술제작의 합리적 조직화는 한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이미 초벌 그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여기에 나타난 생각을 최종형태로 옮기는 일은 부수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루벤스, 『세워지는 십자가』, 1609-10년, 안트베르펜 성당의 세 폭 패널화 중 가운데.]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의 초기의 활동기를 거친 뒤 바로 루벤스의 노년기 양식에 해당하는 발전단계에 도달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회화를 직접적 개인적인 전달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모든 것에 혼을 불어놓고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시각의 산물이 되게 하는 '인상주의'의 형식, 그때마다 새로이 획득되는 어떤 근원적인 인상주의의 형식이 곧 회화라는 것이다. 리글은 예술사를 크게 두 시기를 나누는데, 첫번째 원시적 시기에는 모든 것이 객체인 데 반해 두번째 현대적 시기에는 모든 것이 주체라고 한다. 이 명제에 의하면 고대에서 바로크까지의 발전과정은 첫번째에서 두번째 시기로의 점진적인 이행과정에 불과하며, 17세기의 홀란드 회화는 일체의 객관적 사물이 주관적 의식의 단순한 인상이나 체험으로 보이는 현대적 상화으로 나아가는 도상에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것이다.
루벤스의 경우에는 그가 말년에 도달한 예술적 급진주의가 고객층에서의 그의 명서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지만, 렘브란트는 똑같은 급진주의로 인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 희생을 치렀다. 그의 몰락은 1642년 『야경』의 완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렘브란트, 『야경』, 1642년.]
『야경』 :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특유의 명암 효과 카로스쿠스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이 그림의 주문자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자신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이 그림에 만족하지 못했다. 때문에 렘브란트에게 미술품을 주문하는 이들은 점점 적어졌고 마침에 렘브란트는 비참하게 그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렘브란트의 실패는 결코 그의 비실제적인 천성이나 사생활을 정리하지 못한 데에만 기인했던 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예술고객층의 취향은 점차 고전주의로 기울어지고 렘브란트 자신은 그의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던 격정적 바로크로부터 멀어지면서 일어난 결과였다. 렘브란트는 최초의 커다란 희생자였다. 그전의 어떠한 시기도 렘브란트의 예술가적 성격을 형성하지 못했겠지만 또한 그렇게까지 완전히 그를 팔멸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홀란드 사회는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만 허용했고, 그가 더이상 고분고분하지 않는 순간 가차없이 그를 버렸던 것이다. 예술가의 정신적 실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험에 처해 있게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사회질서도 자유주의적 사회질서도 예술가에게는 완전히 편안한 것이 못 된다. 전자가 자유를 속박한다면 후자는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자유 속에서만 안전하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안전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쉬는 예술가도 잇게 마련인 것이다. 아무튼 17세기는 자유와 안정의 결합이라는 이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세기였다.
아놀드 하우저, 『문화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 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