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당공(拙堂公) 후손들(後孫)과 발자취 ◈
졸당공(拙堂公)은 1353년 6월 24일(고려 공민왕 2년 : 高麗 恭愍王2年)계사생(癸巳生)으로 현재,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삽포리에서 출생(出生) 하여 1439년 2월 2일 기미년(己未年, 조선 세종대왕 21년 : 朝鮮世宗大 王 21年)에 운명(運命)하여 합천군 용주면 봉기리 미금동 유좌원(酉坐原)에 예장(禮葬) 하였다. 벼슬은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이후, 이조참판(史曹參判)으로 증직(贈職) 되었다. 차후, 졸당공(拙堂公)께서는 기해년(己亥年) 신계서원(新溪書院)으로 배향(配享) 되었다.
또한, 삼기현(三岐縣 : 지금의 경남 합천군 용주면, 대병면과 봉산면 일부, 거창군 일부지역.)에서 엄청난 부자(富者)였다.
배(配)는 동래 정씨(東來鄭氏)인데, 묘(墓)의 형적은 없어졌고 후배(后配)는 강양 이씨(江陽李氏)로서 태자첨사공실(太子詹事公實)의 딸님이시며, 강양군(江陽君) 약(若)의 손녀(孫女)였다.
졸당공(拙堂公)께서는 강양 이씨(江陽李氏)로부터 2남 2녀의 자녀(子女)를 두었다.
장남(長男) 박 승문(朴承文)은 음직(蔭職)으로 정랑(正郞)이요, 품자(品資)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지내서면 두촌공파(杜村公 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차남(次男) 박 희문(朴熙文)은 태인현감(泰仁懸監)을 지냈고 태인공파(泰仁 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박 승문(朴承文)의 자식으로 장자(長子)는 사림(士林)이요. 벼슬은 음직(蔭 職)으로 찰방(察訪) 이요. 차자(次子), 서림(書林)은 주부(主簿)였고 숙자(叔子 : 셋째), 유림(儒林)은 습독(習讀) 이다.
박 희문(朴熙文) 자식의 장자(長子) 세림(世林)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현감 공파(縣監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차자(次子), 언림(彦林)은 판사(判 事)를 지냈고 판사공파(判事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숙자(叔子 : 셋째), 계림(係林)은 통찬(通贊)을 지냈다.
졸당공(拙堂公) 맏딸의 남편(여서 : 女壻)은 강 위성(姜渭成) 이면 훈도(訓導)였다. 둘째, 딸의 남편은 이 석주(李碩柱) 이다.
이렇게, 졸당공파(拙堂公派)는 후손들은 후대(後代)에서 여러 갈래로 분파(分派)되고는 있으나 졸당공(拙堂公) 일맥의 계보(系譜)는 같은 일파(一派)에 속한다.
졸당공(拙堂公)의 둘째, 아들 박 계림(朴係林)의 딸[졸당공(拙堂公)의 친손녀(孫女)] 남편(손서 : 孫壻)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서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을 지내신 김 헌(金獻)으로서 중종(中宗) 14年(1519년) 정암(靜庵) 조 광조(趙光祖)의 난(亂)에 연루(連累) 되어 졸당공 선생(拙堂公先生) 거주지로 낙향(落鄕)하여 평생을 의탁생활(依託生活)을 하면서 지금의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마을 주변에서 여생(餘生)을 마쳤다.
졸당선생(拙堂先生)께서 후손들에게 특히,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들은 아리따움과 권력(權力)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慾心)은 누구나 가지고 있듯이, 나라고 그런 욕심(慾心)이 없겠느냐, 그러나 나는 스스로 고려의 큰 군신(君臣)들의 충직(忠直)을 보고 깨달은바가 매우 크다.”하시면“아! 절개(節槪)를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느냐. 이제부터 나 홀로서라도 이씨 조선(李氏朝鮮)의 졸(拙)함을 보면, 모든 역경(逆境)과 시련(試鍊)을 극복(克服)하면 살아갈 것”이라 하였다. 졸당공(拙堂公)께서는 고려 백성으로 굳은 마음의 정조(貞操)를 간직한 채, 강직하게 살아 가셨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친구로는 모두들 당대(當代)의 현인(賢人)들로서 야은(冶隱) 길 재[吉再, 1353~1419],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9~1392], 독곡(獨谷) 성 석린[成石璘, 1338~1423], 춘당(春堂) 변 중량[卞仲良, 1352~1398], 송당(松堂) 조 준[趙浚, 1346~1405] 등과 정의(正義)가 돈독(敦篤)했고 서로 도의(道義)를 논의(論議) 하면서 시문(詩文)을 주고받으면 면학(勉學)에 더욱 증진(增進)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특히, 행실(行實)이 심비(深秘)하여 부모님을 섬김 때에 있어서는 말소리는 부드럽게 하여야 하고 얼굴빛은 항상, 밝은 미소를 짓고 부모의 뜻을 새겨듣고 받들어 집 안에 기쁨 일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고 항시 후손들에게 말씀하였다.
졸당공(拙堂公) 박 총(朴聰)의 시문(詩文)은 부친(父親)의 문장력(文章力)과 손색(遜色)이 없을 정도로 칭송(稱頌)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졸당(拙堂) 선생께서“신심신관장(愼心愼官章)”에 철학(哲學)을 남긴 뜻은 “사람은 항상 선비의 절개(節槪)와 위용(威容)을 갖추고 벼슬길을 대비(對 備)해 분골쇄신(粉骨碎身), 학문(學文)을 닦고 습득(習得)해 두고 근신(勤愼) 을 하여야 만이 차후, 벼슬길에 나서도 백성들에게 모범(模範)이 된다.”는 단편적(斷片的)인 마음도 후손들에게 전(傳)하고 있다.
졸당공 선생(拙堂公先生)께서는 자기 자신(自身)을 독려(督勵) 하면서 학문 에 심취(心醉) 하였고 87세, 생존(生存)한 날까지도 부형(父兄)의 훈계(訓 戒)는 절대적으로 지켰다. 스승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이씨 조선 (李氏朝鮮)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殺害) 당하자, 거상(居喪)을 지내면 통곡하면서 제자(弟子)가 스승을 위하여 죽지 못한 도리(道理)는 본인의 부덕(不德)이 졸(拙)함이라, 하시면 고려 왕실(高麗王室), 유노(遺老)들의 정충탁절(貞忠卓節)과 송죽(松竹)같은 마음속에 충절(忠節)을 보아서니 과히, 벼슬보다는 인(仁)과 의(義)의 도리(道理)에 더욱 중요(重要)것 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전(傳) 한다.
스승의 깊은 학덕(學德)에 대한 그리움 간직 한 채, 수척한 몸으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예절(禮節)을 다하고 87세를 살아 가셨으니 어찌, 대단한 도인(道人)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스승의 슬픔은 언젠가는 후손들 기억 속에서 살아나 고귀한 죽음으로 기록되어서 후손들의 청백리(淸白吏) 함에 귀감이 되어, 여명(黎明)의 빛이 될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향사(享祀)는 순조(純祖) 33년(1833년) 옛, 덕남서원(德南書院) 경남 밀양 시 초동면 신호리 220번지, 모선정(慕先亭)뒤 송은공(松隱公) 박 익(朴翊), 우당공(憂堂公) 박 융(朴融), 인당공(忍堂公) 박 소(朴召), 아당공(啞堂公) 박 조(朴調), 졸당공(拙堂公) 박 총(朴聰)을 봉안(奉安), 제향(祭享)하고 영각(影閣)에 이안봉향(移安奉享) 하여서며 충숙공(忠肅公) 송은(松隱) 박 익(朴翊) 선생은 예관치제(禮官致祭) 하였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진태 마을’ 신계서원(新溪書院)은 송은공(松隱公) 박 익(朴翊), 우당공(憂堂公) 박 융(朴融), 인당공(忍堂公) 박 소(朴召), 아당공(啞堂公) 박 조(朴調), 졸당공(拙堂公) 박 총(朴聰)을 봉안(奉安), 제향(祭享)하고 있다. 헌종(憲宗) 5년(1839년) 지방 유림(儒林)에 공의(公義)로 박 익선생(朴翊先生)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을 추모(追募)하기 위하여 창건(創建)되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 창건과 함께 나라에서“신계(新溪)” 라는 사액(賜額)을 받았 으며 선현배향(先賢配享)과 지방교육(地方敎育)의 일익(日益)을 담당(擔當)하여 내려오고 있다. 신계서원(新溪書院)의 시제일(時祭日)은 매년, 음력 3월 17일 모시고 있다.
그리고 경남 합천군 대병면, 용주면의 악견산(嶽堅山)을 비롯해 인접에 금 성산(金城山), 허굴산(虛屈山), 황매산(黃梅山) 등, 인근 서부 경남(西部慶 南)주위로 졸당공(拙堂公)의 후손이 많이 형성(形成)되어 있어서나 현재, 이곳을 거점으로 본적만 두고, 많이 타 지역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졸당공(拙堂公)의 합천 봉양제 향사일은 매년, 음력 10월10일 경남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지내고 있다.
이밖에 졸당공(拙堂公)의 장자(長子) 두촌공(杜村公) 박 승문(朴承文)은 합천 대병면“봉산재”를 차남(次男) 태인공(泰仁公) 박 희문(朴熙文)은 합천군 대병면“산천재”를 음력 10월 11일 지내고 있다.
졸당공(拙堂公) 선조님의 연혁(沿革)을 여러 자료를 빌어 3년간 살펴보니, 이씨 조선(李氏朝鮮) 때, 벼슬보다는 후학(後學) 양성에 힘쓰고 학문 증진과 시문 등에 매우 열중(熱中)한 것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문헌(文獻) 곳곳에서 졸당공(拙堂公) 문중(門中)에 대한 인물들을 논의(論議)한 것을 보면, 모든 사물(事物)을 대함에 있어, 비굴(卑屈)함이 없고 청백리(淸白吏)한 혈통(血統)으로서 국가임무(國家任務)에 맡은 바, 책임(責任)과 의무(義務)를 위하여 최선(最先)을 다하는 충직정신(忠直情神) 으로 무장(武將)되어 있는 훌륭한 가문(家門)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선조님께서는“인본사상”(人本思想)을 중요시 한 것으로 평가하고 싶고 정의(正義)와 도리(道理)를 근본(根本)으로 삼아다는 대단한 예찬(禮讚)도 친구 분들 문집으로부터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