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 [24회 고급 31번]
정답: ②
*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1863~1873)
고종의 즉위(1863)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대내적으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재정이 부족하여 원납전을 징수하고 댕백전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삼), 비변사 폐지와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사)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호포제: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하여, 환곡제를 사창제(양반 지주 운영)로 개혁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1866, 프랑스와 싸움)와 신미양요(1871, 미국과 싸움)를 거치면서 모두 물리치고 전국에 척화비를 확고하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게 유지하였다.
① 경희궁: 광해군이 1617~1620년에 걸쳐 지은 궁으로 술사들이 왕기(王氣)가 서려있다고 하는 정원군(후일 인조)의 옛집을 몰수하여 지은 별궁이다(경덕궁). 이 곳에서 숙종과 경종이 태어났고, 숙종.영조.순조가 승하했으며, 경종.정조.헌종이 즉위한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심 공간이다.
③ 탁지지(1788, 박일원): 정조의 명에 따라 호조의 모든 사례를 정리하여 편찬한 책.
④ 삼정이정청: 임술농민봉기(1862)의 진주민란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문란에 있다고 보고 그 수습책을 삼정이정에서 찾아 삼정이정청이 설립되어 이정청은 여러 의견을 검토한 뒤 군정과 전정은 옛 제도를 기본으로 그 폐단만을 고치며, 환곡은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토지에 부과하는 '파환귀결'을 방법으로 내놓았다. 삼정이정청은 <삼정이정절목>을 책으로 내면서 철폐되고, 그 뒤 삼정 업무는 비변사에서 관장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못되었다.
(2) 군역의 개혁 호포제 [26회 고급 35번]
정답: ⓵
* 군역의 개혁 호포제
- 2번째 시는 군적의 문란을 비판한 정약용이 1803년에 지은 애절양(哀絶陽: 남자의 생식기를 자름을 슬퍼함)이라는 시이다.
- 조선 후기에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들은 군포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군포를 부담하기도 하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농민들이 군역 부과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1750). 이제 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또한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조 이후 조선 후기의 수취 체제는 총액제에 의한 재정 운영이 일반화되어, 양역(군역)은 정총제로 전세는 비총제로, 환곡은 환총제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모든 부세가 공동납 형태로 징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은 총액제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총액징수제로 인하여 인징(隣徵)·족징(族徵)이라 하여 도피자가 10년이 넘으면 면세하게 되어 있었으나 도망자의 납세분을 친척이나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서 강제로 징수하고, 황구첨정이라 하여 만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그 세금을 착복하였으며, 백골징포라 하여 만 60세가 넘었거나 사망한 자에게 징수하는 등 군역의 폐단은 그치지 않았다.
흥선 대원군(1863~1873)은 이러한 군역의 폐단을 포함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호포제: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하여, 환곡제를 사창제(양반 지주 운영)로 개혁하였다.
⓶ 개항(1876) 이후 군사력 강화를 위해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으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신설하였다(1881, 교관 일본인).
⓷ 고종의 광무개혁(1898~1904) 때에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소유 문건인 지계를 발급하였다.
⓸ 영조 때에 법전으로 속대전(1746)을 편찬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⓹ 정조(1776~1800)는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3) 흥선 대원군의 사창(社倉)제 실시 [21회 고급 38번]
정답: ①
* 흥선 대원군의 사창(社倉)제 실시
봄에 곡식을 관에서 꿔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게 하는 환곡 제도의 문제이다.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를 등용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사)의 기능 회복하였으며 대전회통의 편찬 등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이는 광화문 앞의 6조 거리를 포함하여 한양의 도시 구조를 되살리고, 왕실의 권위를 되살린다는 의미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과 계속되는 군비 확장을 위해 원납전이란 이름으로 기부금을 받아내고, 당백전을 발행하였다(명목가치가 100여배). 그리고 토지 1결당 쌀 1두에 해당하는 화폐를 거두고, 통행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물가가 폭등하였고, 토목 공사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또한 양반들의 묘지림을 베어 경복궁의 목재로 사용하면서 양반들도 반발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하는 호포제(동포제)로 개혁하고, 환곡제를 사창제(면민의 공동출자 운영)로 개혁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영조의 서원 개혁 정책을 참조하여 서원 정리를 단행하였다. 원래 서원은 선현에 대한 봉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누려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제사 비용의 명목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은 사액서원 중 47개소만 남기고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북벌론자인 송시열과 관련이 있는 괴산 화양동 서원 옆에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와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였다(1871).
(4) 병인양요(1866) [20회 고급 33번]
정답: ②
* 병인양요(1866)
‘천주교 신부 살해’, 강화도에 적의 침입‘ 등의 말을 통해 ’병인양요‘임을 알 수 있다.
흥선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청이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흥선 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866년부터 6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병인박해).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 여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바로 이 병인박해 때의 자국의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였다.
1866년 9월 프랑스군은 군함 7척에 수병 600여 명을 승선시키고 조선을 침략하여 한강을 봉쇄하였다. 그 중의 한 부대는 갑곶진에 상륙한 뒤 우수한 화력으로 강화읍을 점령하여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와 금, 은 등을 약탈해 갔다.
한성근이 지휘하는 군대는 서울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을 문수산성에서 방어하였고, 양헌수가 거느린 군대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함대가 모두 퇴각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1866).
①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일종의 포함외교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1875).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③ 두 차례에 걸쳐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한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 소재)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났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서양인을 오랑캐로 보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④ 갑신정변(1884.12)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1887).
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을 빌미로 미군이 강화도로 침략해 왔다. 이에 어재연 등이 이끄는 부대는 광성보에서 미군을 막아 내었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1871).
(5) 병인양요(1866.9) [30회 31번]
정답: ④
* 병인양요(1866.9)
흥선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866년부터 6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병인박해).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 여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은 병인박해 때의 자국의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1866년 9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였다(병인양요).
프랑스군은 군함 7척에 수병 600여 명을 승선시키고 조선을 침략하여 한강을 봉쇄하고, 그 중의 한 부대는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한 뒤 우수한 화력으로 강화읍을 점령하여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와 금, 은 등을 약탈해 갔다.
한성근이 지휘하는 군대는 서울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을 문수산성에서 방어하였고, 양헌수가 거느린 군대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함대가 모두 퇴각하였다
병인양요 후 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충남 덕산 소재)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1868).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거세어졌다.
병인양요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다. 이 배에 탄 서양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제너럴 셔먼 호를 불살라버렸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8).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신미양요, 1871.6) 초지진, 광성보를 점령하였으나,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1871).
③ 메이지 유신(1868) 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1875),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었다(1876).
⑤ 조불수호통상조약(1886.5)을 통해 천주교 포교가 허용되었다
(6) 병인양요와 조선 왕실 의궤 [25회 고급 32번]
정답: ②
* 병인양요와 조선 왕실 의궤
흥선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청이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흥선 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866년부터 6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병인박해).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 여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바로 이 병인박해 때의 자국의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였다(병인양요).
1866년 9월 프랑스군은 군함 7척에 수병 600여 명을 승선시키고 조선을 침략하여 한강을 봉쇄하였다. 그 중의 한 부대는 갑곶진에 상륙한 뒤 우수한 화력으로 강화읍을 점령하여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2011년 영구임대 형식으로 반환)와 금, 은 등을 약탈해 갔다.
한성근이 지휘하는 군대는 서울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을 문수산성에서 방어하였고, 양헌수가 거느린 군대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함대가 모두 퇴각하였다.
① 두 차례(병인, 신미)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1871).
③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을 빌미로 미군이 강화도로 침략해 왔다. 이에 어재연 등이 이끄는 부대는 광성보에서 미군을 막아 내었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1871).
④ 두 차례에 걸쳐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한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 소재)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달아났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서양인을 오랑캐로 보는 풍조가 널리 퍼졌다.
⑤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하는 일종의 포함 외교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1875).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7) 신미양요와 척화비 건립(1871) [28회 고급 34번]
정답: ①
* 신미양요와 척화비 건립(1871)
흥선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청이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흥선 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866년부터 6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병인박해).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 여 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바로 이 병인박해 때의 자국의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1866년 9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였다(병인양요).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군함 7척에 수병 600여 명을 승선시키고 조선을 침략하여 한강을 봉쇄하고, 그 중의 한 부대는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한 뒤 우수한 화력으로 강화읍을 점령하여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와 금, 은 등을 약탈해 갔다.
한성근이 지휘하는 군대는 서울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을 문수산성에서 방어하였고, 양헌수가 거느린 군대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 함대가 모두 퇴각하였다
병인양요 후 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1868).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거세어졌다.
병인양요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다. 이 배에 탄 서양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제너럴 셔먼 호를 불살라버렸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8).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1871.6). 프랑스군을 격퇴한 후. 또다른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도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던 조선 정부는 이에 맞섰으며,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帥자기를 탈취하여 감).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1871).
(8) 최익현의 대원군 하야 상소(1873) [28회 고급 33번]
정답: ③
* 최익현의 대원군 하야 상소(1873)
가난한 선비 집안의 둘째 아들로 포천에서 태어난 최익현(1833~1906)은 14세 때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항로의 제자로 들어가 병과에 급제하여 이조 전랑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을 비판한 상소(1868)와, 만동묘를 비롯한 서원 철폐에 반대하고 고종의 친정을 요구한 계유상소(1873)를 올려 대원군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뒤이어 집권한 민씨 세력과도 일본과의 수교 문제로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강화도 조약(1876) 때에는 왜양일체론에 입각하여 지부복궐(도끼를 메고 궐에 엎드림)의 5불가 척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여기서 일본을 포함한 외래 자본주의의 침략적 본질과 해독성을 날카롭게 간파하였다.
63세 되던 해(1895) 최익현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에 반발하였고, 단발령에도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을사조약(1905.11)이 체결되자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의병을 지휘하다 체포당하였다. 결국 쓰시마 섬(대마도)으로 유배되었고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