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시란 무었인가? 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시’하면 무언가 귀족적이고 접근 하고 싶으나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때는 시를 쓰고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으리라. 그리고 한두 편의 시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시를 읽고 쓰고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은 세월을 따라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상대가 너무 고고해서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사랑을 가슴에다 묻어 버린 것인가! 무엇이 사람들에게 시를 떠나게 했는가. 그것은 시가 부는 이미지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를 읽지만 어떤 시는 쉽게 접근을 허용하고 어떤 시는 아예 대문에도 못 들어서게 한다. 문에 들어서서 시에게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들어갈 방법을 찾아도 초인종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간혹 그 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들은 숲에 대하여 얘기해줄 뿐 나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장 대문을 열고 들어갈 방법을 알고 싶은데 그 방법은 읽고 느끼는만큼 느끼면 된다는 말 뿐이다. 맞는 말이다. 시의 숲에 들어가면 길은 자연히 나 있고 그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 맑은 물소리, 새소리, 간혹 눈에 띄는 아름다운 꽃, 나비들의 움직임들을 느끼고 즐기면 된다. 그러나 숲을 이루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생명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고 싶고 알아야만 시의 숲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숲에 들어서는 순간 이해하려는 첫 걸음에서 부딪치는 것은 풀 하나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다. 시의 숲에 대한 전문가가 되려고 백과사전을 찾아도 식물도감을 찾아도 알아내기 어려울 뿐이다. 일반적인 숲의 특성은 설명돼 있고 보여주고 있어도 숲을 이루고 있는 하나 하나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그 순간 포기는 다가와 우리를 숲 밖으로 나가게 한다. 자, 당신의 일상 생활로 돌아가세요. 이 어려운 시의 숲에서 헤메지 마세요. 가끔 가끔씩 당신의 생활 속에서 이곳을 생각하세요. 이곳은 지도 한 장 구체적인 안내서 한 장도 없는 곳이랍니다. 이곳은 특별한 감각을 타고난 사람만을 받아들이는 곳이랍니다. 어서 당신의 세계로 가세요. 그리고는 삶에 묻혀 어느덧 시의 숲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게 된다.
학생들과 함께 시를 해석하고 문제를 풀면서 느끼는 감정은 시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 해설을 찾아보면 전체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이해가 잘 안 되는 시 구절들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많다. 평론가의 글은 더욱 그러하다. 시를 대해도 학생들은 어려운 비유와 비약에서 이해의 절벽에 부딪치게 되고 안내서 하나 없는 상황에서 시는 어렵다는 인식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이 계속 남아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시는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시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어렵다.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시가 지니고 있는 멋이 담긴 곳이라는 것을 읽는 이에게 알게 해준다면 그것을 알게 해주는 안내서가 있다면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어려움에 부딪혀 포기하기 보다는 그 어려움을 즐기게 되지 않을까. 누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읽고 느끼는 만큼 느끼는 말은 맞는 말이고 시를 가장 순수하고 선입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지만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읽고 느끼는 것이 적다. 적으니까 느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느끼는 것이 없으니 시를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다른 이들이 느끼는 시의 느낌을 알게 해 주어야 된다. 알게 되면 자신이 보지 못했던 부분이 무엇이며 그 무엇을 다른 이는 어떻게 찾았는지 보게 되고 자신도 그 방법을 익혀 시의 숲속에 감추어진 가치있는 보물을 알게 되고 찾게되고 사랑하고 기쁨을 느낄 것이다.
이제 시 속에서 우리를 어렵게 했던 구절들의 의미와 더 나아가서 시가 주는 기쁨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러한 작업은 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모습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오히려 시의 의미를 제한함으로써 시가 지닌 상상의 넓은 세계를 왜곡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안내서와 지도도 없이 무작정 길을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믿는다. 잘못된 부부은 앞으로 이 안내서를 들고 시의 숲을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를 대하는 순간 이것이 무슨 내용인가? 시의 맛이 어떤지 알기 보다 무엇을 전하기 위한 것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온통 비유와 난해한 말로 가득차 있다. 먼저 시를 보고 연의 순서대로 살펴 보기로 하겠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서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1연에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하여 자신을 짐승이라 한다. 무슨 뜻일까? 진짜 짐승이기에 짐승이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인데 자신을 비하하여 짐승이라 한 것인가?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3연) 와 나의 신부여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시적 화자(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은 짐승이기 보다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짐승이라 했을까? 사람이 자신을 짐승이라 할 때는 어느 때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을 느낄 때가 아닐까?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란 말이 있듯이 화자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사람으로서의 갖추어야할 사람다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시 자체에서는 그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단지 나의 울음이 금이 되는 순간(4연)에 사람다움을 획득할 것이라는 짐작은 가나 이 또한 비유로써 이루어져 있기에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단서를 외부에서 빌려올 수 밖에 없다.
세평에는 이 시의 작가 김춘수를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시인이라 한다. 시인이 가진 시의 목적이 존재의 본질에 있다면 시인이 생각하는 사람다운 사람이란 존재의 본질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맞는다고 하면 1연의 짐승은 존재를 본질을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짐승은 짐승인데 왜 위험한 짐승이라고 하였을까? 그 원인은 바로 뒤에 나오는 시구에서 보여진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기에 나는 위험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나의 손이 닿는 순간에 나는 너를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으로 변화시킨다. 3연의 무명의 어둠 속에서 내가 한밤내 운다는 진술은 나의 손이 너에게 부정적으로 작용되었음을 알게 해 준다. 따라서 나는 너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부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존재이기에 너에게 위험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나의 손의 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은 무슨 뜻일까? 미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이고 어둠 또한 자신의 속에 간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손은 너의 모습을 더욱 더 알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의 손은 지금은 사람의 손이 아니라 짐승의 손이다. 존재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위험한 손이다. 나의 손이 다음으로서 너가 알 수 없는 존재로 비뀐다는 것은 너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켜 본질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이 의하는 바는 ‘인식’ 또는 ‘해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너의 존재에 대한 인식 또는 해석은 너의 존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드는 위험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2연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는 것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춘수의 또 다른 시 ‘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작품을 보도록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다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나의 이름이 불리워 지기를 갈망한다. 그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이다.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지않는 이름은 나의 참된 이름이 아니다. 참된 이름은 나의 본질에 알맞는이름이고 본질에 알맞는 이름이 되려면 이름을 불러 부는 사람은 ’존재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러기에 너는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피었다 지는 이름없는 존재일 뿐이다. 아무도 너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너의 본질에 맞는 이름을 붙이지를 못한다. 심지어는 나마저도‘흔들리는’은고정되지 않고 변함을 , ‘가지 끝’은 존재가 있는 곳인 이 세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흔들리는 가지 끝은 이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
3연의 무명의 어둠은 비교적 쉽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 무명의 어둠은 1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둠은 너가 잘못된 인식인 나의 손을 만나서 변화한 것으로 나는 나의 신부로(5연) 삼은 너를 까마득한 어둠으로 만들고 너에게 알맞는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여 무명의 어둠이 되게 하였다. 그러하기에 나는 너를 무명의 어둠이 되게 한 지난 일(추억의 한 접시) 때문에 온밤의 반성의 눈물로 지샌다. 그러나 그 추억과 그 눈물은 단순한 추억과 눈물이 아니다. 그 추억은 불이 되어 어둠을 걷게하는 것이고 그 눈물은 잘못된 존재의 인식을 반성하는 눈물이다.
4연에서는 밤새 잘못된 존재 인식을 반성하는 울음이 금이 될것임을 말한다. 이 금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한 차츰 아닌 밤 돌개 바람은 무엇이고, 탑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쉽게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문제는 그 해결책이 있는 법이다. 아닌 밤이 들어간 말을 찾으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속담이 있다. 그 뜻은 사전에서 갑자기 불쑥 내놓음으로 풀이되어 있다. 여기서 아닌 밤은 밤이 아니라고 고칠 수 있다. 밤이 아니면 낮을 말한다. 대낮에 홍두깨 질을 당하니 갑작스런 봉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닌 밤은 갑작스럽다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풀이는 돌개바람과 잘 연관이 된다. 돌개바람이란 회오리 바람으로 갑작스럽게 회오리를 만들며 아래에서 위로 부는 바람이다. 아닌 밤 돌개바람은 갑자기 부는 바람이다.
여기서 그냥 바람이 아니라 돌개바람이라 표혆나 것은 정말이지 시인의 시적 발상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돌개바람이라야 탑을 휩싸고 돌 수 있고, 탑 전체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구절의 차츰과 갑자기를 의미하는 아닌 밤은 그 의미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서로 대립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탑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탑이란 불교에서 사리(舍利), 불골(佛骨)을 모신 기념물로써 본래는 부처님의 무덤이다. 또는 어떤 이와 어떤 일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기념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탑이 의미하는 바와 시를 연결시킬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부처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 존재의 본질을 수득한 사람이다. 차츰 갑자기 일어난 돌개바람은 탑을 싸고 돈다.
차츰이란 시간의 지속적인 경과가 있음을 의미하고 갑자기는 순간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모순된 두 시간이 합쳐져서 존재의 본질을 깨달은 부처의 상징인 탑을 흔들게 되고 그 바람이 돌에 스미어 깨달음의 상징(사리, 불골)에 더 가까이 감으로써 부처의 경지 즉, 존재의 본질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자신의 밤을 새며 존재의 왜곡을 반성한 울음은 고귀한 정신 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경전을 공부하는 교(敎)와 직관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선(禪)이다. 공부는 차츰 차츰 깨달음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고 선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 둘을 교관겸수(敎觀兼修)라 하여 모두 깨달음에 이르는데 서로 보완이 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적 화자가 도달한 경지는 아니다. 될 것이다의 ‘ㄹ’은 미래의 가정적 상황을 나타내는 관형어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앞으로 계속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게 되면 지금의 슬픔을 벗어나 존재의 본질을 알게 되는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 믿는 믿음이다.
시인 김춘수는 예수를 믿는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전개된 시의 해석은 잘못되었다라는 의문을 품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인은 종교적인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법이다. 이미 종교적으로 존재의 본질이 신이고 예수임을 믿고 있으나 그는 인간으로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을 이성을 매개로하여 찾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이 시에서 불교적인 가르침이 있다하여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존재의 본질을 추구함에 있어 편견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보다 넓은 시인의 정신 세계가 느껴진다.
5연의 ······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연에서 4연까지 의미 전체와 5연 뒤에 보이지 않는 6연, 7연 ······ 의 말들을 단지 점 여섯 개로 이루어진 말줄임표로 모두 표현하고 있다. 가히 선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여기서 이 시를 읽은 다른 이들은 ······이 시인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나의 신부라는 말을 무심코 지나간 풀이이다. 너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고 그 속에서 밤새운 반성과 ······을 거쳐 나의 신부가 되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신부란 평생을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같이 살아갈 동반자이다. 시인은 아직 신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곧 존재의 본질을 알지 못하였지만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신부처럼 여기고 평생을 함께하며 존재의 본질을 추구할 각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김춘수는 꽃을 위한 서시에서 일관되게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신의 정신 세계와 그 정신 세계의 발전 과정과 끊임없는 존재 탐구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