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평화와 평등이 넘치고 정의와 사랑이 넘실거려야 한다!
- 고 박영진 열사 유언 중에서
목숨을 던져 빛을 뿌린 노동자들을 한국의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분들의 죽음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고, 그 의미 또한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길로 만들어 온갖 거짓과 위선과 폭력을 훨훨 불태워, 더 이상 아름다운 세상을 갈망하는 몸부림들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던 분들, 이제 그 찬란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망각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민주노총 남부지구협의회는 매년 그 분들의 넋을 불러, 무관심과 두려움과 회의에 지친 노동자들, 가난과 무시와 일방적 해고와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신을 일으켜 세워, 이 지역에 건강하고, 참된 노동자의 상을 심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불을 밝히고자 하는 노동자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어하는 노동자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고 싶어하는 노동자들, 오십시오. 오셔서 남부지역 노동열사들의 빛나는 정신을 보십시오!
제 5회 박영진, 김종수, 이종대 열사 정신계승 노동문화제(가칭)
부제----남부지구협의회에서 정할 것
일시---2001년 4월 28일 2시
장소---마이크로 노동조합 운동장
문의---박영진, 김종수 열사 추모사업회(868-3097 / 868-4578) 이종대 열사추모사업회, 기아자동차 노동조합(801-3950~4)
주체---민주노총 남부지구협의회(빠진 단체가 있나 확인해서, 넣어주십시오.)
함께하는 단체----구로청년회 서울여성노동조합, 서울 여성 노동자회, 박영진열사 추모사업회, 김종수열사 추모사업회, 이종대열사 추모사업회, 구로지역 풍물연합회, 서울지역 민주노동자회, 구로노동자문학회,
추도식 행사 및 노동조합과 단체에서 나와 장기 경연대회를 벌입니다. 물론 초청 가수와 지역 문화패들의 공연도 있으며, 사행시 짓기도 있고, 상품은 푸짐하죠. 사진전과 시화전, 뒤풀이에서 만나는 황홀한 막걸리와 큭윽, 쓴 소주도 있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절대 아닙니다. 진지함과 함박웃음, 박장대소와 거침없는 어깨동무가 여러분 모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굴 것입니다..
당신은 노동자들이 부르는 한국의 예수를 아십니까?
1. 서울역 대합실에 가보셨습니까
서울역 대합실을 가보셨습니까. 거리가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인지요. 허기진 얼굴들, 죽음에 사로잡힌 표정들. 그들의 얼굴은 일자리를 잃을까봐 불안에 떠는 노동자들의 얼굴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부르며 거리로 떠돕니다. 자식들마저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부모들. 차마 자식 때문에 죽지 못한다던 부모들은 어느 날 사랑하던 자식들의 목숨을 빼앗고, 천추의 한을 가슴에 새긴 채 동반 자살의 길로 접어듭니다.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치지만 탄생을 축복하며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을 죽일 때 그 부모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왜 그들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요. 누가 죽음을 강요한 것일까요. 죽음에 관한 그들의 소식은 과연 우리들의 삶과 관련이 없는 것인지요.
어느 날 느닷없이 해고가 됐답니다. 출근을 하니까 돌아가라고 하고, 호출이 와서 전화를 거니까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정리해고 당하고, 아들이 강제 사직을 당합니다. 생계가 막막한 집안에 큰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능력을 탓하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어쩔 수 없었다고 소리칩니다. 가난은 항상 가족의 불화를 가져옵니다.
잘 나간다던 대기업의 노동자도,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금융원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정부는 이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고통분담을 통해 이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옳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통분담의 참 모습이 왜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으로만 이어져야만 합니까. 재벌은 삼대가 망해도 평생을 배를 두들겨가며 살아갑니다. 그냥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필요한 것, 갖고 싶은 것, 마음껏 취하며 살고, 가고 싶은 곳, 만들고 싶은 것 모든 것을 게으른 하품하듯 그렇게 여유있게 살아갑니다.
시장경쟁의 논리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잘사는 놈은 더욱 잘 살고, 못 사는 놈은 아예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힘있는 놈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갖은 아부를 하면 먹을 수 있고, 바른 이야기, 옳은 행동을 하면 권력에 저항하는 못된 놈으로 낙인이 찍혀 처벌을 가합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침탈로부터 시작해서 독재정권으로 점철된 이 나라,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뽑혀버린 이 나라, 그 뿌리를 다시 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노력했던 모든 의지들을 꺾어내리고 있는 이 나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개인주의와 불신에 휩싸여 서로를 증오와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서로를 죽여야만 살 수 있다는 허울좋은 시장경제의 논리, 삐뚤어진 경쟁의 논리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고통을 안다고 했습니다. 옳은 얘기, 정의로운 행동을 해 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당한 말을, 자신의 권리를 외쳐본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행동이 얼마나 자신에게 불리하고, 심지어는 감옥에까지 가야 한다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국가가 혹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이 혹은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한 경제 활동이 과연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일들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나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민, 옛말로 백성들, 그 사람들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그런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을 위한 정치, 사람을 위한 경제 행위, 사람을 위한 공권력,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드러내는 문화적 행위, 그 모든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진실로 그런 삶을 존중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는 그런 세계는 추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서울역 대합실에 가 보십시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얼굴들을 찬찬히, 뚫어지게 들여다보시면 가슴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노동자도 인간이다, 전태일
30년 전 동대문 평화시장이 떠오릅니다. 기관지염, 안질, 신경통, 위장병, 빈혈로 시달리면서 잔업, 특근, 철야를 밥먹듯이 해대고 졸음이 오면 타이밍을 먹어가며 일해야만 했던 12살, 14살 꽃다운 어린 여공들이 떠오릅니다. 그 어린 여공들을 쳐다보며 자신의 몸이 바스러지듯 고통스러워하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밀폐된 다락방에서 일하던 어린 여공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저런 일이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고 피눈물을 흘리던 전태일의 몸부림을 봅니다.
노동부에 가서, 기자들을 만나, 평화시장의 노동자를 모아 항의하고 외치던 전태일을 봅니다. 아무리 뛰어다니고, 아무리 목을 놓아 외쳐도,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빈 메아리만 되어서 허공에 흩어지던 전태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결국엔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태우며, 소리치던 전태일의 절규를 듣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더 이상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마라. 근로 기준법을 지켜라!"
전태일의 불꽃이 이 땅을 환하게 밝힌 지 꼭 10년이 되던 해에 18년 장기 군사 독재정권은 허물어져 내렸습니다.
70년 말 사람들은 그 동안 억눌려 왔던 목소리를 드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동자들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소리친 것이지요. 실로 전태일의 목소리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은 학원 자유화를 외치며, 민주주의 실현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거리로 뛰어 나왔고,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민주주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은 80년 5월 18일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면서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억압도 더욱 강화됐습니다. 노동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사람들이 삼청 교육대로 끌려가고,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전태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치열하게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던 청계피복 '노동교실'도 폐쇄됐습니다.
학교도 노동현장도 모두 감시의 대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안기부, 보안사, 기무사의 감시와 백골단, 전투 경찰의 곤봉이 거리에서 난무했습니다. 누군가가 올바른 소리를 하면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고문으로 병신이 되고,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의 목소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전태일의 목소리는 들풀처럼 살아 민들레 홀씨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전태일이 죽는 순간까지 뭐라고 외쳤습니까?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노동자는 인간이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거나, 부유한 집에 태어났거나, 정상인으로 태어났거나, 비 정상인으로 태어났거나,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에 합당한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간선언'을 외쳤던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죽음으로 승화시켜 실천했던 전태일은 그래서 '한국의 예수'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84년 말 전태일의 정신은 노동현장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수년 전에 쓰여진 채 몇몇 사람들만 조심스럽게 돌려읽던 전태일 평전도 83년 폭압을 뚫고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전태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든 청계피복 '노동교실'도 '청계피복 노동조합'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였습니다. 풀뿌리처럼 살아난 전태일의 정신은 구로에도 민주노조라고 불리우는 노조들을 탄생시키기 시작한 것이지요.
전두환 군사정권은 놀랬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노조들을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의 정신으로 살아난 노조는 무력하게 무너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노동조합을 만들었기에 목숨을 내놓고 노동조합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3.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박영진
'이제 인생의 출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10년의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생각하며 깊은 침묵에 잠긴다. 인간답게 산다면 단 하루, 아니 몇 초라도 좋으리. 이제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태어나야 한다. 죽음 뒤에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84년 7월 18일 박영진이 동일제강에 입사하던 날 쓴 일기입니다. 그는 인간답게 산다면 단 하루, 아니 몇 초라도 좋으리라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진정한 삶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게 의연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었지요.
박영진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 3학년을 중퇴했습니다. 그후 껌팔이, 구두닦이, 잡부 등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생계를 위해 떠돌아 다녔지요. 그러나 그의 삶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력을 갖지 못하면 평생을 떠돌이 삶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정말 박영진이 떠돌던 시절 만해도 암울했습니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을 한 어린 소녀들은 사창가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노동자들은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해가며 그의 젊음을 기계에 빼앗겼습니다. 희망을 키우기 전에 그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목을 메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박영진은 그 비참한 생의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물 셋의 나이에 고등학교 입학 자격증을 부여하는 검정고시 야학을 스스로 찾아갔던 것이지요.
'승부의 세계, 무엇을 해도 이겨야 할 텐데, 승부 의욕이 너무도 저조하다.'
83년 박영진이 야학을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할 때 쓴 일기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상대편을 이겨야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뇌리에 심으려 했습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가르친 약육강식의 논리인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인간성을 버려야 한다는 패륜적인 생각이지요. 하지만 박영진은 그 야학에서 전태일을 만납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전태일 평전을 보게 된 것이지요. 박영진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의 온몸은 감전된 사람처럼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겠지요. 아아,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결코 나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 사람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자신의 목숨까지 던져서 이루고자 했던 이 사람의 진실은 무엇인가. 무수한 혼란이 박영진의 전신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지요.
수없는 질문이 박영진의 가슴에서 울려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히 전태일의 정신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인간선언'의 정신을 감동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전태일의 정신이 박영진의 가슴에서 되살아 나는 장엄하고도 위대한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박영진은 모든 것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적극성이 없다. 부정적이다. 지식이 없다. 현실도피자다. 대인관계에 공포심이 있다. 쉽게 포기한다. 퇴보적이다. 이기주의적이다. 계획성이 없는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격과 습관에 문제가 있다. 자신감이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83년 야학시절에 쓴 박영진의 일기입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가난이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본 것입니다. 누구나 똑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세계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의 세계로 변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특히 가진 자들에 의해 핍박받고, 기계 부속품처럼 취급받으며 늘 가난에 시달려야 하는 억눌린 자들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왜냐면 그들은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요.
박영진은 책을 보고,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이 어떤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똑바로 보게 된 것이지요. 그는 물었습니다. 왜? 왜, 나는, 나를 닮은 저 수많은 노동자들은 이렇게 기계처럼, 가난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전태일의 정신이 그의 가슴에서 넘실거렸습니다. 십 수년 동안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전태일의 정신. 그 '인간선언'의 정신은 참 민주주의를 바라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노동해방'의 정신으로 발전해 박영진의 가슴에서 불꽃처럼 피어났습니다.
노동해방의 정신은 무엇인가요. 노동이 더 이상 고통스러움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노동, 정신적인 노동, 그 모든 노동이 인간세상을 평등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내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름다움으로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지요. 바로 그 아름다운 노동, 인간을 노동으로 고통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인하여 인간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그런 노동의 세상이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노동해방의 정신이 박영진의 가슴에서 활활 타올랐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동일제강에 입사하며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최소한의 수면 시간을 빼고 박영진은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온 정열을 다 바쳤습니다. 탁월한 조직력을 발휘해 사람들을 모으고, 노동법을 교육하고,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뚫고 노동조합을 만듭니다. 바로 85년 5월의 일입니다. 하지만 공권력과 회사는 어용노조를 만들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강제 사직시킵니다. 경찰이 동일제강을 지켜주는 상황 속에서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납니다.
박영진이 여러 활동가와 함께 만들어낸 동일제강 노동조합과 성원제강 노동조합을 깨며, 노조탄압에 혈안이 되어 있던 공권력이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을 전격 구속한 것에 항의해 구로지역 6개 노조가 동맹파업을 일으킨 것이지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만들어 놓은 노동조합이 개별적으로 차례차례 깨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공권력은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해 현장을 차단시켰습니다. 현장의 전기도 끊고, 수돗물도 끊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노동자들은 창문에 매달리고,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허기로 쓰러진 채 저항했습니다.
"분쇄기에 넣어 가루로 만들어 버려!"
이 말은 공권력과 회사 경영자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결국 새벽을 틈타 공권력은 현장에 진입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외형상으로 노동자들은 졌습니다. 하지만 그 싸움의 결과는 노동운동을 새롭게 창출시키는 발전으로 이어졌던 것도 사실이지요. 즉, 노동자가 힘을 모아 정치적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그럴 때만이 가진자들에 의해 가진자들을 위한 나라로부터 이 나라는 탈피되어 대다수의 못가진 자들을 위한 나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박영진은 이런 상황 속에서 지역의 노동운동가들과 협의한 후 신흥정밀로 입사합니다. 신흥정밀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8시간 기본노동 시간을 회사 마음대로 9시간으로 정해 1시간의 노동을 약탈하고 있던 악덕 기업이었습니다. 위험수당도 떼어먹고, 미성년자 보호법도 어긴 채 잔업, 철야를 마음대로 시키던 패륜적인 기업이었죠.
동일제강에서의 경험은 박영진으로 하여금 더욱 성숙된 노동운동가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탁월한조직가요, 선동가였던 박영진은 신흥정밀에 들어간 지 몇 개월도 안 돼서 현장 노동자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가장 따듯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모든 노동자는 똑같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 그는 자신을 사랑하듯 현장 동료들을 마음으로 사랑한 결과지요.
하지만 그 사랑의 힘이 하나로 모아지기도 전에 지역 노동운동가 모임에서는 공동투쟁이 제기됩니다. 박영진은 반대했습니다. 아직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장은 공동투쟁에 임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지역 노동운동가들 사이에서 박영진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다수결에 의해 공동투쟁의 방침이 정해지고 말았죠.
결정되면 따른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 보면 여러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결과를 보기 전에 누가 옳은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박영진은 다수결의 원칙에 승복합니다. 승복한 이상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만이 박영진의 앞길에 놓였습니다. 화장실과 공장 담벼락에 선전물을 붙이고, 잔업 거부를 하며 임금 인상을 위한 파업 분위기를 만들어 갑니다.
마침내 3월 17일 공동투쟁의 날이 왔습니다. 박영진은 동료들과 함께 식당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전투경찰들은 신속하게 달려와 현장을 외부와 차단시켰습니다. 회사 구사대와 경찰이 합세해 노동자들을 분산시켰습니다. 그들은 돌을 던지고, 소화기를 뿌려 식당 안의 노동자를 흩어지게 했습니다. 마침내 5명만이 옥상으로 쫓겨갔습니다. 두 명이 난간을 집고 투신투쟁을 감행했고, 식당에서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올라온 박영진은 성명서에 불을 붙였습니다.
"다가오지 마라. 열 셀 때까지 물러서지 않으면 불을 붙이겠다!"
경찰들과 구사대는 비웃었습니다. 박영진은 그들의 비웃음을 향하여 계속 숫자를 헤아렸습니다. 마침내 열이라는 숫자와 함께 그의 몸을 붉은 불길로 휩싸였습니다.
"노동삼권 보장하라. 군부독재 몰아내자!"
박영진은 불길로 변해 소리쳤습니다. 결국 그는 다음날 새벽 3시에 숨을 거두며 한 장의 편지와 유언을 남깁니다.
'숙아, 전태일의 삶의 바탕은 인간애였고, 그 인간애는 다 같은 인간 중에서 억눌리고 핍박받는 약한 자의 편에서는 데서부터 그 사랑의 구체적 실천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숙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더 나아가서는 신흥정밀 노동자들에게 버림받지 않는 친구가 되고 싶고, 한국의 예수(전태일)처럼 남을 위할 줄 아는, 남들과 더불어 사는 내가 되고 싶다. 노동자는 남남이 아닌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편지는 박영진의 죽음 3일 전에 쓰여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보듯 그의 마음에는 늘 전태일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전신 95%의 화상을 당한 채 의식불명의 상태로 있던 그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씨가 왔을 때 "아아, 올 사람이 왔구나."하고 상채를 벌떡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머니 전태일 선배가 못다할 것을 제가하려고 했어요." 박영진은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속에 간직했던 말들을 전했습니다. "이 땅에 정의가 넘쳐야 합니다. 평화와 평등이 넘실거리고,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박영진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국은 노동자들의 분노의 함성으로 들끓었습니다. 이제 노동자는 인간이다는 전태일의 '인간선언' 정신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주체선언'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그후 수많은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86. 5.3 인천을 민중의 힘으로 장악했던 민중항쟁이 발발하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밝혀지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이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 숨가뿐 민중의 저항이 어어 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6.29선언으로 전두환은 물러나고 노동자 대투쟁이 폭팔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전국을 뒤흔든 시기이죠. 이 시기를 통해 수많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동자는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해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정권의 변화는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권 야욕으로 인해 노태우가 33% 정도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으로 올라선 것이지요.
암울한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대통령 선거 결과였습니다만 이 시기에 구로에서는 작은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4. "노동자는 언제까지 이렇게 가난해야 돼!" 김종수
가난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김종수가 저인방 어선을 타다가, 청계천에서 재단 보조를 하다가 구로동 서광(주)으로 입사한 후 입버릇처럼 담던 말입니다.
늘 되는 대로 살던 김종수가 88년 서광에 입사한 후 민주노동조합을 건설하려고 노력하던 선배 노동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영진이 야학을 통해 전태일 선배를 만났듯이 김종수는 선배를 통해 전태일을 만난 것입니다. 특히 선배의 집에 갔다가 '노동법 해설'이란 책을 보게 되고, 전태일을 소개한 소책자를 보면서 그는 자신을 싸고 있던 껍데기를 벗겨내기 시작합니다.
2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김종수는 본 것이지요. 그는 박영진과 똑같이 왜 자신이, 노동자가 늘 가난에 허덕거리며 살수밖에 없는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전태일 선배의 '인간선언'은 선배를 통해서 노동자가 이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주체 세력으로 커야 한다는 박영진의 정신 '노동자 주체선언'으로 탈바꿈합니다.
김종수는 가슴이 벅찼지요. 이제까지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그의 인생에 목적이 생기고 의미가 부여된 것입니다. 그는 변화시키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변화하듯 세상이 변화하고, 변화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요. 특히 신애전자에서의 사건은 그의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애전자는 카메라를 동원해 탈의실까지 감시하는 악덕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감시를 뚫고서 노동자들은 조합을 탄생시켰습니다. 어느 날 노동조합에서 연 집회가 끝나고 노동자들이 평화롭게 귀가할 때 느닷없이 전투경찰이 나타나 노동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경찰이 곤봉으로 노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치고, 닭장차에 싣는 참혹한 광경이었지요. 종수는 오거리에 있다가 그 상황을 봅니다.
종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신애전자에 실습 나온 고등학교 학생이 백골단의 군화발에 복부를 채이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경찰은 그 어린 학생을 죽은 개 끌고 가듯 질질 끌고 가서 닭장차에 처박습니다. 정말 종수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요.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저럴 수 없다는 분노가 그의 전신에 경련을 일으킨 것입니다. 종수는 그날 이후 달라지기 시작해서 집회가 열리는 곳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선두에 섰습니다.
종수가 변하듯 서광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서광은 부평과 구로 두 군데가 있습니다. 그 두 곳은 서로의 기득권을 놓고 집행부 사이에 싸움을 벌입니다. 그런 와중에 구로 노동조합은 새롭게 집행부가 꾸려지고, 선배가 지부장에 당선됩니다. 이제까지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던 노동조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종수 역시 쟁의부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하게 되지요.
정말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부평 본조의 어용적 작태와 늘 대결을 해야 했고, 구로의 다른 사업장과 연대사업을 위해 수없이 만나고 토론하고 격려하는 자리를 갖아야만 됐지요. 정말 다른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종수는 기뻤습니다. 특히 다른 사업장 사람들과 만나면서부터 그의 시야는 넓어지게 되고, 그의 신념은 거대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옛부터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학교라고 했고,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의 힘은 굳건해진다고 했습니다. 종수는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자본과 노동에 대한 본질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필연적이며, 서로의 힘의 우위에 따라 자신의 입지를 넓히게 되고, 노동의 대가를 더욱 얻게 되며, 노동자의 삶을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지요.
두 번의 파업을 하면서 노동조합은 그 힘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다음해인 89년 4월 부평의 어용노조와 회사는 구로 노동조합을 깨뜨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당시 구로지역에서는 공동임투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연대 활동이 활발할 때였지요. 서광 노조도 준법투쟁을 하던 중 나우, 남지, 엔진 등의 사업장과 함께 상미 노동조합에서 개최한 연대집회에 참가하고 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회사측은 정문을 걸어 잠그고 사진을 마구 찍으며 간부들을 탄압하더니, 경찰이 달려와 지부장과 간부 4명을 불법적으로 연행간 것이지요.
노동조합은 분개했습니다. 조합원들은 곧바로 3일간의 파업에 돌입했지요. 정말 우습고 답답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평 어용노조에서 달려온 구사대가 '민조노조 물러가라!'며 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철야 농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회사는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노동조합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협박도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지요. 왜냐하면 이미 구로 노조의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당연하고, 노조가 자신들 편이라는 것을 깨우치고 있었으니까요. 조합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쟁했습니다. 집회 농성, 철야 농성, 단발식 거행 투쟁 등 조합원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싸웠던 것이지요.
회사는 암담했습니다. 조합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말에 고분고분했던 노동자들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변했으며, 그들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있는 노동자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결국 회사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1차 교섭에 나왔고, '파업기간 중 임금 90% 지급' '민, 형사상 책임 무효화' '간부 3명 사퇴'라는 안을 내놓은 것이었죠.
조합원들은 회사가 한발자국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날 저녁 운동장 등나무 아래에선 기쁨이 넘치는 축제가 벌어졌지요. 풍물을 치고, 촛불 의식을 거행하며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의 위대함을 본 것이었습니다. 아, 뭉치면 되는구나. 우리 스스로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기쁨이 바로 이것이구나. 그들은 오랜 파업 기간 동안 지친 몸들을 서로의 어깨에 걸고, 즐거워 하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더욱 힘을 합쳐 반드시 조합의 주장을 관철시키자. 이제까지 늘 당해만 왔던 노동자들이 회사의 부당함을 주저앉힐 수 있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때 종수는 또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쟁의부에 들어가 쟁의부장이 되어 파업을 주도해 온 그였으니, 그 보람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광에 들어오기 전까지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가 이제 희망을 만들어 가는 첫발을 내딛어 그 성과를 움켜 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더 큰 희망으로 만드리라 마음 속 다짐을 수없이 했었겠지요.
하지만 그의 작은 희망의 결실은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맙니다. 날이 밝자 회사측은 어제의 교섭 결과를 전면 부인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89년 5월 4일입니다. 노동절이 꼭 3일 지난 후였지요.
대책을 세우기에 앞서 조합원들은 황망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정말 회사의 경영진들은 표리부동한 얼굴을 들이밀고 킬킬거렸지요. 그 모습을 본 노동자들은 분노보다도 인간에 대한 비애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게 회사의 참 모습이었던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관리자들의 모습이 저런 것이었던가.
분노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쟁의부장이었던 김종수의 분노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지요. 그는 회사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 전태일이 수없이 노동부로 뛰어다니고, 신문기자를 만나 평화시장의 실태를 기사화시켜 달라고 애원하며, 나중에는 현장의 동료들을 모아 농성을 했을 때, 무엇인가 가진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을 죽음으로 새겼을 때와 비슷한 마음을 아로새긴 것은 아닐까요.
저 비정한 인간들, 저 괴물 같은 공장, 저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온몸으로 감지하며 그 속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5월 4일 오후 1시 5분 경, 마침내 김종수의 분노는 불길로 치솟습니다. 그는 온몸에 석유를 뿌린 뒤 자신의 몸에 불을 그었습니다. 24살의 젊은 청년이 지금 자신의 몸에 불을 지핀 것입니다. 사랑도 하고, 가족의 행복도 찾고, 친구들과 여행을 하면서 삶을 살찌우고, 그 삶을 수많은 사람을 위해 써야 할 젊음이 불길로 타오른 것입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불태우며 그는 생애 마직막 소리를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던지며 달렸습니다.
"무노동 무임금 철폐하라!"
"구로노조 독립 인정하라!"
"가난한 셋방살이가 싫다!"
교선부장 정미옥이 비명을 지르며 종수의 불을 끄기 위해 달려들었습니다. 순간 그녀의 몸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습니다. 서광이 불길에 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붉은 불길로 훨훨 타오른 것이었지요.
결국 김종수는 9시간의 사투 끝에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납니다. 아름다운 청년, 남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자 했던 아름다운 청년이 떠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모르고 농투성이로만 살아온 종수의 어머니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종수야, 에미왔다. 어서 벌떡 일어나거라, 종수야! 넌 안 죽었어, 우리 종수가 왜 죽어!"
오열하다 실신을 하는 어머니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정말 죽음 그 방법뿐이 없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동시에 박영진이 불길로 타올랐을 때도 떠올려봅니다. 그들은 모두 현장 동료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컸던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투쟁을 조직하고, 투쟁을 이끌어 온 사람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싸움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목숨을 던지며 그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투사들이 옥중에서 끝없이 단식을 하며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려고 했던 숭고한 정신과 다를 바가 없는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던 것이지요.
김종수의 죽음의 시기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우려했던 노동운동 탄압이 가속화 되던 때였습니다. 무노동, 무임금이 법제화되고 노조 상근자의 월급을 주지 않아, 노동조합의 기능을 마비시키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울분을 토하고 있던 노동조합들에게 김종수의 죽음은 투쟁의 경종으로 울렸습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노동자 인파가 구로지역로 몰려들었습니다.
"종수를 살려내라!"
"열사의 정신 이어받아 노동해방 앞당기자!"
"무노동 무임금 철폐하라!"
전태일의 정신이, 박영진의 정신이, 김종수로 이어져 수많은 노동자의 가슴으로 되살아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눈물로 얼룩진 그들의 가슴에서 김종수가 전태일이, 박영진이 부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모든 노동자들은 더 이상 죽음으로 이어지는 눈물겨운 세상이 끝장나기를 바랬습니다. 최소한 노동자가 인간다운 대우를 받는 때가 오기를 바란 것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어두웠고, 가진 자들의 만행은 되풀이되었습니다. 그 참혹한 행위가 끝나지 않는 이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건 싸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도 더 이상 죽음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랬건만 기아자동차에서 또 다시 불길이 현장을 벌겋게 태웠던 것입니다.
5. 민주노조를 건설하라! 이종대
마흔 한 살의 가장이 부당하게 해고당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중학생, 고등학생인 자식을 둔 가장입니다. 20년 동안 휴가 한 번 없이 일하며 벌은 돈으로 자식을 키우고, 부모를 모셨던 분이었습니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은 그 세월이 얼마나 힘에 겨운 세월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로서 자식을 그렇게 키울 때까지는 참으로 많은 힘겨운 세월이 있는 것입니다.
그 세월을 겪으면서 이종대 씨는 보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개인적인 허영과 욕구를 다 버리고 살아도 우리네 삶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가를. 또한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노동조합의 실태도 보았을 것입니다. 간선제로 점철된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위해 활동하지 않고, 회사의 입장만 대변해 온 것을. 그래서 이종대 씨는 기아자동차에 민주노동조합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김종수가 죽어가면서도 만들어놓으려고 했던 민주노동조합.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을 만들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모릅니다. 이종대 열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민주노동조합, 그 곳으로부터 출발해서 노동자가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자신의 몸과 함께 불태우며 외쳤던 목소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외침은 여전히 이종대 열사의 목소리까지 계속됐던 것입니다.
88년 어용노조 퇴진을 위한 파업을 통해 노동조합 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안을 쟁취했습니다. 그라나 직선제로 탄생한 유호영 집행부는 또 다시 회사와 결탁하는 어용으로 전락, 민주노조 건설에 적극적이었던 노동자들 부당해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노동조합 대의원으로서 민조노조건설에 적극적이었던 이종대 씨도 그들의 눈에 가시였던 것입니다.
89년 7월 3일 이종대 씨는 일방적인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해고란 노동자에게 목숨줄인 것입니다. 더욱이 20년을 한결같이 기아자동차를 위해 살아온 그 분에겐 죽어라, 하고 말하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분야에서 청춘을 불살라온 사람들은 압니다. 본인이 스스로 돌아서지 않는데, 쫓겨난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수치스럽고, 앞날에 대한 전망도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을.
통지서를 든 이종대 씨는 죽음부터 떠올렸던 것입니다. 죽어도 좋다, 라는 울분에 휩싸여 신나통을 든 채 어용노동조합으로 뛰어들어갔던 것입니다. 역부족이었지요. 이미 어용이 되어 개인의 착복을 맛 본 사람들은 가진 자들보다도 악랄하게 변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종대 씨를 사정없이 밀어냈겠지요. 그 과정에서 이종대 씨는 신나를 뒤집어 쓴 것입니다. 수많은 상념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당시 해고된 사람은 20여 명, 그들이 힘겹게 살며, 투쟁하고 있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온몸에 신나 냄새를 풍기며 그는 외주 물품이 쌓여 있는 야적장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정수리를 갈라놓을 것 같이 7월, 뜨거운 태양이 온몸을 이글이글 끓게 만들고 있습니다. 암담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어용이 되풀이되고, 바른 생각을 가진 노동자들이 쫓겨나는 일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술을 깨물며 흐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들도 떠올렸겠지요. 20년을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뒤늦게 노동조합 일에 몰두해 가정도 소홀히 한다고 푸념했던 사랑하는 아내도 떠올렸을 겁니다. 물론 부모님과 그 소중한 자식들, 그는 뜨거운 태양 빛 아래서 혼란스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너무도 또렷하게 노동자라는 존재들의 운명이, 더 이상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노동자라는 운명이 거듭되어서는 안 된다고, 내 죽음을 통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릅니다. 눈을 감아봅니다. 그가 불꽃을 튕기는 순간이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눈앞에서 아른거립니다. 그의 아내가 오열을 터뜨리며 울부짖는 모습도 보입니다.
호소문
제 남편을 아껴주셨던 회사 동료 여러분께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에 몸이 떨려 이렇게 호소합니다!
저는 현재 성애병원 영안실에 누워 계신 고 이종대 대의원이 아내입니다. 제 남편은 7월 3일 터럭 하나 남김없이 전신에 화상을 입고 한강성심병원에서 입원을 외면당하고 성애병원 중환자실에서 입원하셔서 15일 동안 고통으로 몸부림치시다가 18일 새벽 3시 끝내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제 남편은 평소 회사 일이라면 집안 일보다 더욱 적극적이신 것이 야속할 정도로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셨는데, 그렇게 여름 휴가 한 번 가보자고 졸랐건만 20여 년 동안 휴가 한 번 없이 회사를 위해 일하셨는데, 우리 남편이 무슨 죄가 있기에 해고라는 날벼락을 줄 수 있습니까?
얼마나 억울하셨으면 마흔 두 살에 그것도 고 2, 중 1의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이런 엄청난 일을 하셨겠습니까?
회사에서는 제 남편이 민주노조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던 것을 눈의 가시처럼 여겨오다, 급기야 회사와 어용노조가 만장일치로 해고시켜버렸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시면서도 온몸이 벌겋게 익고 그을리시고, 그 상황에서도 회사와 어용노조에 맞서 조합원들의 뭉쳐 일어날 것을 목타게 외치셨습니다.
-부당해고자를 전원 복직시켜라!
-유호영 집행부를 반드시 몰아내라!
-내 희생을 끝으로 더 이상 부당징계자가 없도록 하라!
-우리 가족들의 생계 대책을 조합원들이 단결 협조하여 세워주기 바란다!
-내 분신을 물질로 합의하지 말며, 가족은 모든 문제를 독단으로 처리하지 말고 동료들과 상의해 주기 바란다!
-김선홍 사장, 김성훈 업무 이사, 조영수 부서장을 반드시 퇴진시켜라!
-내가 죽으면 노동자 조합원 장으로 장례를 치러달라!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 뜻이 옳다고 여기고, 생명과 바꾼 그 뜻을 회사 동료 여러분이 함께 뭉쳐 그 뜻을 실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회사와 현 노조 집행부는 아직도 해고는 정당했다고 주장하며, 마치 가정불화로 분신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하니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합니다. 또한 회사는 고인을 애도하기는커녕 문상 오는 조합원들에게 은근한 협박을 가하기 위해 회사 관리직 사원들과 경비들을 병원 영안실로 출근시켜 저희 가족들을 역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급하게 썼던 호소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종대 열사 부인의 눈엔 피눈물이 돋고 자식들과 백발의 부모님들 가슴엔 수만 개의 비수가 꽂혔을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다보면, 손가락이 다쳐 피만 보여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어찌 백발이 성성한 부모님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쏟는 고통을 다스릴 수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왜 우리 노동자들은 이렇게 죽음으로까지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요. 죽음 한가운데에서도 그가 남긴 유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부당한 해고자를 전원 복직시켜라, 라는 그 간절한 소망,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노동자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때때로 회사가 너무도 커 보이고, 무서워, 또는 주어진 삶을 팔자로 여기고 얻어지는 것만 받아서 살고 싶다 보니, 우리 서로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네 삶도 우리 스스로 찾아나서지 않고는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태일이 죽을 때까지 외쳤던 말이 노동자도 인간이다, 라는 말입니다. 박영진이 목숨을 던지면서 했던 말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김종수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는 민주노조가 반드시 건설돼야 한다고, 더 이상 노동자가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종대 열사의 죽음은 93년 기아자동차 12대 집행부라는 민주노조를 탄생시켰습니다. 그의 죽음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가, 민주노조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지요. 우린 먼저 가신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분들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들의 고귀한 정신이 우리 안에서 사라진다면, 노동자들의 세상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식을 그 험난한 세월 속으로 또 다시 버려지도록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노동자가 노동자를 위하는 세상, 그 곳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빛이, 희망의 눈부신 빛이 넘쳐 들어올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 노동자.
민족, 민주 열사 유가족 협의회 부모님들이 420여 일이라는 국회 앞 천막 투쟁을 통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명예회복 및 보상 신청을 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더디고 정당하게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동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되고 있지 못합니다.
70년대와 80년대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많이 애썼습니다. 그 노력과 더불어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노동자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대거 나섰습니다. 참된 민주화라는 것은 바로 민중이 진정한 민주화를 바라며 주인 의식을 발휘할 때 가능한 것인데, 그 역사적 깃발을 휘날리며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노동자들의 피나는 활동을 기업내의 문제로 간주하고 보상 심의에서 대거 탈락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노동자들, 혹은 민중의 민주화 노력에 대해 정부는 우호적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알고 있듯이 정치권력, 경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은 여전히 노동자를, 민중을 한 나라의 동등한 국민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 발전이란 명목을 내세워 수많은 노동자들을 중동으로 보내고, 월남전에 참전시켜 목숨을 담보 잡아 벌어들인 돈으로, 재벌을 키웠듯이, 이제는 일방적인 구조조정 혹은 일방적인 비틀어진 경제논리로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에 대한 움직임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얽매여 통일 문제를 바라볼 뿐입니다. 게다가 아주 보수적인 우익 인사들은 여전히 빨갱이란 단어를 운운하며, 언론 등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정부를 비난하거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제 시대 때 민족을 팔아먹었던 자들이 버젓이 정치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게 우리 정부의 현실입니다. 김대중 정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 역시 미국 등을 위시한 세계를 쥐고 뒤흔드는 세력에 순종하고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명분과 희망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 경제 발전, 부정부패 추방, 부정 선거, 의약 분업 등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는 비열한 인간 사회의 어두운 모습들만 여전히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분명 세상은 권력자들이나, 권력을 쥐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달라지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 가난이라는 고통을 받아 본 사람들, 노동자, 바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으며, 아름다운 인간미가 넘쳐나는 나라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전태일, 박영진, 김종수가 온몸으로 불길을 휘감으면서 노래했던 것이 바로 그 아름다움입니다. 이제 그 노래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다시 피어올라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그 분들의 죽음은 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되살아나 우리 가슴을 억누르는 모든 슬픔을 쫓아낼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와 평등이 넘치는 세상, 그런 세상이 꿈이라고 생각되더라도 그 꿈은 우리를 살게 하는 희망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이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는 세상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떠올려봅시다. 전태일, 박영진, 김종수!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봅시다. .
4월 28일 2시에 마이크로 노동조합에서 열사 문화제를 엽니다. 그 분들의 넋과 함께 뜨거운 술자리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셔서 서로의 마음에 빛이 되고 희망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