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순『사랑은 바닥을 쳤다』(천년의시작)
- 이 시집은 이십년 묵은 집 공사를 할 때 제가 정리하던 책더미 속에서 찾은 것입니다. 서명이 2006년으로 되어 있으니 8년 지나 제 손에 도착한 시집입니다. 2006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시집을 열어보지도 않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읽었더라면 니체에 관한 글을 쓸 때 고맙게 인용했을 텐데 아쉽기도 하고 시인에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시인 이름을 보고 갑자기 떠오른 추억의 장면이 있습니다. 사십년이 되어가는 그 시절 낙원상가 건물에 있던 학원에 다녔을 때입니다. 제가 워낙 밥을 천천히 먹는데 여학생 중에도 나만큼 천천히 먹는 분이 있었고 그 분 이름이 화순이었습니다. 물론 어떤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이름만 떠오른 것입니다. 슬쩍 웃었습니다. 시를 읽으면서는, 8년 전 첫 시집에서 이 정도였다면 지금은 엄청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명징한 감각적 인상과 그로부터 삶의 법을 끌어내는 솜씨는 천부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8년 후에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민망한 일입니다.
기회가 되면 시를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철수
삶은 붉다
-김화순
1
갈라파고스 이구아나가 혼신을 다해 모래 웅덩이에 알 낳고 있다 서너 개의 알 모래로 덮고 비칠비칠 바다를 향해 간다 저 멀리 고지가 햇살 아래 아득하다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매 한 마리가 지친 그녀를 사정없이 덮친다 예리한 발톱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2
두 달 후 부화한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아장아장 모랫길 건너 물로 향한다 큰 화산바위 너머 자궁 속 같은 바다를 어린 발은 본능적으로 걷어차지만 바위 틈 굶주린 뱀의 허기 피할 수 없다 식속들 하나, 둘 허기의 그 큰 구멍 속으로 삼켜지는 동안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들 황급히 바다 향해 몸을 던진다
3
어린 바다표범들 하품하는 바다 속, 이구아나는 그들이 갖고 놀기에 아주 좋은 장난감이다 물고 뱉고 던지고 돌리며 신나게 논다 피 튀기는 死의 현장 빠져나와 바위에 은신한 뒤 헉헉 더운 숨 뱉아내는 갈라파고스 이구아나 선지처럼 충혈된 망막 속으로 흔들리는 바다의 삶은 붉다
시를 읽으면 그냥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구아나 한 마리는 그가 사는 그 세계의 모든 힘 관계를 구현한 존재라는 생각이 말입니다. 이구아나 한 마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힘 관계를 구부려 자기화한 것이고, 자기화한 한에서 스스로를 성형(成形)한 그 존재라는 생각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힘 관계는 철저하게 ‘지배와 저항하는 복종’이라는 단순한 법칙에 의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알고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에 대한 개념들은 이런 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읽혀야 할지도 모를 운명이라는 생각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생에 대해 총론을 말한다면 “삶은 붉다”가 된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주인공이 바로 이구아나입니다.
알을 밴 이구아나가 뜨거운 모래에 알을 묻기 위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을 오릅니다. 이미 그것부터가 거대한 필연을 우연으로 견뎌야 하는 생의 조건입니다. 알을 낳고 바다를 향해 내려갈 때도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매 한 마리가 지친 그녀를 사정없이” 덮칩니다. 최선을 다해 힘 간의 ‘지배와 저항하는 복종’의 긴장을 유지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은 죽기도 할 것입니다. 두 달 후 부화한 이구아나에게도 부화함과 동시에 그 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부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와 저항하는 복종’이라는 힘 관계를 자기화하여 스스로를 그 모습으로 성형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다로 내려가면서 “바위 틈 굶주린 뱀”과의 힘 관계에 놓입니다. 본능적으로 ‘지배와 저항하는 복종’의 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개중에는 먹이가 되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삼켜지는 동안”, 그 죽음에 빚진 삶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들 황급히 바다 향해 몸을” 던집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다 역시 힘의 바다일 뿐입니다. 삶의 세계는 그 자체로 거대한 힘의 바다일 뿐입니다. 다시 바다표범과 생과 사의 긴장이 형성됩니다. 거기에서 지면 이구아나의 형체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팽팽한 ‘지배와 저항하는 복종’의 출렁거림 속에 이구아나도 바다표범도 그리고 다른 모든 생명체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은 니체 식으로 표현하면 ‘전쟁과 짧은 평화’입니다. 이를 시인은 “피 튀기는 死의 현장 빠져나와 바위에 은신한 뒤 헉헉 더운 숨 뱉아내는 갈라파고스 이구아나”로 표현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그 자체로 힘의 바다이고, 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힘 관계를 자기화하여 그만큼 꼭 그 만큼만 스스로를 성형한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선지처럼 충혈된 망막 속으로 흔들리는 바다의 삶은 붉다”라는 말이 어찌 미학적 표현으로만 이해되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그 눈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원망(願望)이라는 감정이전의 생명세계의 법이 새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글귀로? “삶은 붉다”고.
그렇다면 이 말은 생이라는 세계에 걸려 있는 유일한 경구고, 생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경구일 것입니다. 삶은 붉다!
내 안의 개펄
- 김화순
내 안의 작부 충동질한다
오이도 개펄 초입에 유곽 차려놓고
홍등을 내걸란다
상심한 사내들 치마폭으로 다독여보라고
내 안의 여자 부채질한다
밤새워 홍등의 불이 타고
그 불로 꼬여드는 하루살이 떼의 더운 가슴
어루만져주란다
갯내음 물씬 풍기며 뛰쳐나오는
가리비 속살 같은 내 안의 여자
거친 물살 위 부표 되어 하얗게 웃는다
낙지발처럼 와서 쩍쩍 달라붙는 근육질의 사내
그 거친 숨소리에 갇히고 싶다
바다 가득 내리는 찬비
우우, 거세게 밀려오는 밀물의 사내들
화끈하게 받아내는 개펄 되어보라고
내 안의 바다 충동질한다
“내 안의 바다” 그 카오스가, 그 생명을 생산하는 힘이 출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커다란 여성성입니다. 그래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남자/여자’ 구분법에서의 ‘여자’에 해당한 성이 아닙니다. ‘남자/여자’의 구분을 통째로 담는 틀과도 같은 생명적 힘으로서의 여성성입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여자는 ‘남자/여자’의 구분법에서의 여자이지만, 지금 그 여자를 뒤흔드는 힘은 ‘남자/여자’ 구분법 자체를 깨뜨리는 바다의 출렁거림, 생명적 힘으로서의 여성성입니다. 여자 안에서 여성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바다의 출렁거림의 그 생명적 기운이 여자 안의 여성성을 뒤흔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여자’ 구분법의 전통사회에서는 금기시되거나 천하다고 말하는 “유곽”이니 “홍등”이니 하는 것을 서슴없이 자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내 안의 작부 충동질한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작부”는 남성중심주의의 타자로써 형성된 여자 중에서도 천한 무엇입니다. 그러니 그런 구분법에서 작부는 여자로서도 피해야할 무엇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작부를 자임한다면 그 힘과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힘과 의미는 ‘여자/남자’ 구분법의 사회를 넘어서는 충동이라는 뜻입니다. 작부처럼 망가져 질펀한 욕망을 즐겨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낳은 ‘남자/여자’ 구분법의 사회를 카오스적 여성성과 생명성으로 깨뜨려 거듭나자는 의미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안의 여자”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 여자는 ‘남자/여자’ 구분법으로 존재하는 사회적인 여자 안에 근원적인 힘으로 존재하는 여성성입니다. 그 여성성이 사회적인 여자를 넘어 생명적 카오스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적 요청은 ‘남자/여자’ 구분법을 관할하는 이성이 아니라 그로는 잘 잡히지 않는 “충동”으로 존재합니다. 그런 충동질이기에 “상심한 사내들” 뿐만 아니라 “낙지발처럼 와서 쩍쩍 달라붙는 근육질의 사내”도 생명적으로 다스려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성애적 표현과 여성성은 우주적 차원을 얻습니다. 그를 “우우, 거세게 밀려오는 밀물의 사내들/ 화끈하게 받아내는 개펄 되어보라고/ 내 안의 바다 충동질한다”고 표현합니다. ‘남자/여자’ 구분법에서의 성애를 넘어서 우주적 리듬을 가진 ‘밀물/개펄’의 성애이고(이런 성애이기에 생명적 치유가 가능하고), 그때의 여자는 다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우주적 리듬을 내재화한 그 명령을 역동적인 생명현상으로 표현하는 여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작부”에서 “내 안의 바다”로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여성성이라면 노자할배가 말한 ‘움푹 패인 곡의 신기로움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거뭇한 암컷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도덕경』6장]고 할 때의 그 생명적 생성순환의 신기로움을 간직한 ‘거뭇한 암컷’[玄牝]의 생성적 “충동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힘 덕택에 시를 읽으면 해방감과 카오스와 치유의 감정을 거치게 됩니다. 아마 성애적 표현이 그런 직접성을 강화하는 것일 겁니다.
균열
-김화순
오른쪽 아래 어금니에
원인 모를 미세한 금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벌어지는 틈
먹을 때마다 통증의 강도도 커져간다
상한 이 피해 왼쪽으로 먹는다
부드러운 것도 자꾸 왼쪽으로 씹으며
식사 때마다 벌이는 사소한 전쟁
어찌 음식뿐만이었겠나
좋아하는 것만 좇고
불편한 것에는 슬쩍 슬쩍 고개 돌렸다
마음 가는 쪽으로 손 내밀 때마다
반대편에는 쩌엉쩡, 생활의 실금 생겨났으리
크고 작은 관계의 균열
벌어진 어금니 틈에 낀 찌꺼기들
시큰시큰 썩어가고 있다
마음 내키는 곳만 짚으며 걸어온 길이
또 허방임을 알겠다
편한 쪽을 선택하여 간다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는 없습니다. 편한 쪽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삶을 건강하게 한다면 무슨 문제겠습니까. 한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의 불균형을 낳고, 그 불균형으로 하여 전체적으로는 삶의 약화로 결과되기 때문입니다. 이[齒]를 예로 들면, 한쪽이 편하여 그쪽을 주로 사용하면 불균형이 쌓여가고, 그 불균형이 한쪽 이만 못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이 전체를 못 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만 좇고/ 불편한 것에는 슬쩍 슬쩍 고개 돌렸다/ 마음 가는 쪽으로 손 내밀 때마다/ 반대편에는 쩌엉쩡, 생활의 실금 생겨났으리”에서 보듯, “반대편에 쩌엉쩡” 금이 가면서 그쪽만 못 쓰는 게 아니라 “생활의 실금”이 생기며 전체 잇몸의 건강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 이유는, 삶은 편한 쪽만 아니라 불편한 쪽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편한 쪽만 아니라 불편한 쪽도 ‘불편함의 지혜’를 만들게 하며, 삶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편한 쪽은 피하고 배제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중하게 경청하며 그를 통해 내가 가진 편한 쪽을 총체성 속에서 가치매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가 그냥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피하는 것을 상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능사만은 아닌 까닭은, 그 불편함에는 내가 편안해 하는 것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유리함이 있고 따라서 나의 편안함이란 그에 되비춰진 편안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건강은 편안한 쪽 뿐만 아니라 불편한 쪽도 ‘불편함의 지혜’로 받아들여 삶을 자양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균형 잡히고 총체성을 획득하는 건강한 삶이 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삶의 총체적인 약화, “크고 작은 관계의 균열/ 벌어진 어금니 틈에 낀 찌꺼기들/ 시큰시큰 썩어가고 있다”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마음 내키는 곳만 짚으며 걸어온 길이/ 또 허방임을 알겠다”는 구체적인 감정 진술이 커다란 울림을 만듭니다.
삶은 편한 쪽과 불편한 쪽 모두를 아우르며 건강을 유지합니다.
불편한 쪽을 ‘불편함의 지혜’로 만들지 못하면 그만큼 삶이 약화됩니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가끔 불편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삶이 ‘불편함의 지혜’로 한 뼘 성장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첫댓글 내 안의 갯벌은 읽는 순간부터 그냥 온몸이 출렁임으로 요동치는데요.
내 안의 작부가 내 안의 바다로 갈수 있는것은 위대한 자기 긍정이 함께 했기 때문이겠죠.
끓임없이 출렁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답답하게
질식하게 만드니까요.
남자의 타자로 규정된 그 여자가 자연성으로의 여자를 억누르니까, 그 억누름을
답답하게 느끼니까^^
화순 운주사가 생각나게 하는 시인이네요.
자연성으로의 여자, 때로 그 억누름이 자연성을 화들짝 펼쳐내게도 하지요. 2012년 5월에 시집『시간의 푸른 독』이 천년의시작에서 또 발간되었네요. 저서로 『김종삼 시 연구』가 있고.
아 그랬군요^^
그렇게들 부지런히 살고 공부하고 시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