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스탑이라는 음료 기억하시나요? 한 번에 죽 나오지 않고 쭉쭉 빨아 먹도록
된, 새로운 패키지의 음료였는데 청소년들 사이에서 히트를 쳤습니다. 이처럼
음료는 패키지가 구매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 달에 소개 드릴 에비앙 생수 광고도 새로워진 패키지를 알리는 광고입니다.
에비앙의 뉴 패키지는 뚜껑에 구멍을 뚫은 건데, 그 구멍을 '인상적'으로 알리기
위해 패키지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다른 구멍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스타킹에 난 구멍말이지요. 여자들은 알지요, 나일론 스타킹에 구멍이
나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그 만큼 이
광고는 한 번 보면 잊기 어렵지 않겠어요?
이 광고를 보는 동안 참 여러 생각이 스쳤습니다. 이 광고는, 애시당초 썸네일에서, CD의 처음 생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최종 아웃풋을 이것으로 결정하기까지 CD는 얼마나 많은 변덕을 부렸을까.
처음엔 구멍 뚫린 패키지가 주는 베네피트를 광고하자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고, 그
다음 날엔 아니다, 구멍 뚫린 새로운 패키지가 나왔다는 것만 인상적으로 알리자고 주장을 바꿨을지도 모르고, 그것을 알리는 데 구멍 뚫린 스타킹 썸네일이 처음엔 기발하다 했다가 다음 날엔 먹는 물인데 괜챦을까 고민 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다 다시 일단은 인상적으로 알리는게 제일 중요하니 그냥 가자고 했을지도 모르고..., 아마 수많은 변덕을 부리지 않았을까요, 좋은 아이디어는 얻기도 어렵지만
그 놈은 왜 늘 이리도 먼 길을 돌아서야 오는 건지요. 왜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을 여러 번 부정하고 배반하게 하면서 체통을 다 잃게 한 후에야 모습을 나타내는 것인지요.
어렸을 땐, 몇십장의 원고를 단 한 번의 고침도 없이 일사천리로 써 내려 가는 작가가 멋있었습니다. 재능에 대한 동경이었지요, 그러다 보통의 재능을 가진 자에게 그런 멋있음은 허락되지 않음도 곧 알게 되었습니다. 허면, 보통의 재능으로는
어떻게 해야 뛰어난 아웃풋을 만들까? 제가 얻은 깨달음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그리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것. 훌륭한 아이디어는 잘 떠오르지도 않지만 처음부터 떠오르지는 더더욱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결코 혼자 하는 일이 아닌 광고를 만들면서 고치고 또 고친다는 건, 함께
일하는 이들에겐 죽을 맛이기도 합니다. 어느날은 확신을 가지고 A를 주장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그 주장이 여러 군데가 비어 보여 이번엔 스스로 어제 했던
말을 뒤집고 B를 주장합니다. 이 만큼만 뒤집고 말면 후배들 보기에도 낯이 없지는 않을텐데 큰 PT의 경우엔 수도 없이 이런 일을 되풀이 합니다. 그러나 민망해
하면서도 이런 일을 반복하는 건, 더 좋은 걸 만들려는 노력이라는 믿음, 그리고
천재가 아닌 자가 좋은 아이디어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는 까닭입니다.
스케줄을 보니 이 달에도 해야 할 일이 가득인데 저는 또 얼마나 많은 변덕을 부리게 될까요. 변덕을 다 받아주는 연인을 가진 자는 행복하듯 숱한 변덕을 받아주는
파트너를 가진 광고쟁이는 복되도다! 행복하도다!
......2001/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