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히어로는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비운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천재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를 추대하겠습니다.
주혹새 카페에서 아주 컬트적으로 인기가 많은 최고의 영웅중 한분이시죠.
오는 3월 19일 일요일은 랜디가 세상을 떠난지 어언 3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해맑은 봄날 세상을 떠나 멀리멀리 날아가버린 천둥새를 추억하며 불멸의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 그가 걸어왔던 나날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랜디 로즈(Randall William Rhoads)는 1956년 12월 6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St. John's Hospital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남매중의 막내로서 Doug이라는 형과 Kathy라는 누나가 있었다.
랜디가 생후 17개월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 William Arthur Rhoads(그는 국립학교에서 음악교사였다)는
랜디의 인생으로부터 떠나갔고 이후 로즈 삼남매는 어머니 Delores Rhoads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랜디의 친부 William Rhoads는 후에 재혼을 하여 Dan 과 Paul 이라는 랜디의 또다른 형제들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밝지 않은 가정 환경과 소아마비 환자라는 운명이 결합되어 랜디에게 예민한 감성을 키워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랜디는 헐리웃 북쪽에 위치한 Musonia(어머니인 델로레스가 운영하는)라는 음악 학교에서 6~7세부터 기타 레슨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기타는 어머니 델로레스 여사의 아버지가 소유하셨던 어쿠스틱 깁슨 기타였다.
랜디와 그의 누이 캐시는 어머니의 요구(거의 강압에 가까운)에 의하여 피아노 레슨과 포크 기타 레슨을 연마하였는데
랜디의 피아노 레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피아노 레슨이 자신과 별로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나보다.
랜디는 12세에 즈음하여 락 기타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랜디는 데이빗 보위의 우주적인 기타리스트 믹 론슨과 앨리스 쿠퍼의 기타리스트 글렌 벅스튼,
마운틴의 기타리스트 레슬리 웨스트, 퀸의 브라이언 메이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물론 랜디가 구사하는 스케일과 플레이는 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네오 클래시컬한 스타일이 많이 엿보이지만
그의 금발 머리와 크림색 깁슨 레스 폴, 물방울 무늬 깁슨 플라잉브이는 분명 믹 론슨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랜디는 어머니의 학원인 무소니아에서 기타를 가르치던 Scott Shelly라는 인물로부터 개인 레슨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승의 모든 것을 터득하고 스캇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랜디를 하산시켰다.
랜디는 14세의 나이에 첫 번째 밴드 Violet Fox(Violet은 랜디 어머니 돌로레스 여사의 가운데 이름이다)를 결성하는데
랜디가 리듬 기타를 연주하고 랜디의 친형인 덕이 드럼을 연주했다.
Violet Fox는 4~5개월 정도 지속되었고 이후 그는 The Katzenjammer Kids, Mildred Pierce 같은 밴드에서도 연주했다.
1976년에 즈음하여 랜디는 오랜 친우이자 베이시스트인 Kelly Garni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고
헐리웃에 있는 친구로부터 Kevin DuBrow라는 보컬을 소개받아 Quiet Riot의 청사진을 구체화시켰다.
대략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낮에는 어머니의 학교에서 기타 선생을 하고, 밤에는 콰이엇 라이엇과 연주를 하는 이중생활을 했다.
(콰이엇라이엇의 원래 밴드 이름은 "Little Women"인데, 케빈의 친구였던 Status Quo 멤버가 Quiet Riot이란 이름을 지었다)
Quiet Riot는 빠른 시일내에 Los Angeles 지역에서 명망있는 밴드로 급부상했고
결국에는 CBS/Sony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하여 2장의 LP를 공개하고 1장의 e.p를 일본에서 발매했다.
1집 Quiet Riot 1은 1978년에 발매되고, 2집 Quiet Riot 2는 1979년에 발매되었는데
불행히도 판매량이 저조해서 앨범들이 폐반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이미 랜디는 Dee라든가 Good bye to rommance의 기초라인을 만들어서 기타 솔로시 응용해서 연주했다.
당시 콰이엇 라이엇은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일본투어도 계획중이었지만 매니저의 거절로 기각되고 미국에서만 활동했다.
콰이엇 라이엇을 떠나기 5개월전 랜디는 Karl Sandoval에 가서 자신의 새로운 기타를 주문했다.
몇 번의 만남과 면접끝에 그들은 랜디에게 새로운 기타를 제작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검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물방울 무늬의 폴카 플라잉브이 기타이다.
1979년 9월 22일 랜디는 이 기타를 $738.00에 구입하게 되었다.
이 날 Quiet Riot는 L.A의 "Whiskey a go-go"에서 공연을 하는데
이것은 명실공히 랜디 로즈가 청중들 앞에서 물방울 무늬 플라잉브이 기타를 연주했던 최초의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1979년말,,, 랜디는 친구 Dana Strum(비니 빈센트 인베이젼을 거쳐 슬로터의 베이스로 유명한)의 요청에 의하여
Black sabbath의 보컬리스트였던 Ozzy Osbourne의 기타 오디션장에 갔다.
당시 오지는 L.A에 있는 거의 모든 기타리스트들을 오디션을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실망을 머금치 못하며
영국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이었는데 바로 이 시점에 Randy Rhoads가 나타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랜디는 이 오디션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고 단지 친구 다나 스트럼의 부탁으로 응했다.
랜디는 Quiet riot에서 활동하는 것이 매우 행복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오지 오스본과 함께 활동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랜디는 약간 늦은 저녁 그의 새로운 기타와 작은 연습용 앰프 하나만을 들고 오지의 호텔방에 방문하여 문을 두드렸다.
방안에 들어간 랜디는 앰프에 잭을 꽂고 그의 기타를 살며시 튜닝한후 워밍업으로 간단한 손풀기 프레이즈를 연주했는데~~
오지는 바로 이 간단한 손풀기 프레이즈에 깊은 감명을 받고 랜디를 자신의 기타리스트로 지목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오지 오스본이 랜디 로즈의 연주를 들어보지도 않고 얼굴을 보자마자
"그래 바로 너야~~!!!!!"
이렇게 찍어서 뽑은 거라고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픽션, 구라이다.
오지 오스본은 랜디 로즈의 기타 연주를 직접 듣고 뽑았다.
이것이 진실이다.
랜디는 1979년 추수감사절이 되기 전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오지의 집에서 레인보우 출신의 베테랑 베이시스트 밥 데이즐리를
만났다. 밥 데이즐리는 랜디를 처음 만났을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오지가 그러더군. L.A에서 기타 선생 하나를 만났는데 정말 죽여주었다구.
랜디를 만나기 전부터 나의 머리 속에서는 '기타 선생' 이라는 단어가 유영하고 있었어.
랜디를 실제로 처음 만난것은 제트 레코드 사무실이었어.
랜디는 꽉 끼는 코트를 입고 있었고 매우 희한하게 생겼었지.
나는 처음에 이 녀석이 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해보니까 남자라는 걸 알게되었지.
가장 불가사의한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랜디와 내가 스태포드의 플랫폼에서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머지 않은 미래에 적잖은 사람들이 나에게 랜디 로즈와 함께 연주했던 시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구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상황이 상상된거야.
이건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야.
그때 나는 왜 그런 상상을 했을까??"
오지와 랜디 그리고 밥은 함께 Blizzard of Ozz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작곡하고 드러머 오디션을 보았다.
그들은 런던의 리허설 홀인 John Henrys에서 연주를 하며 노래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갔지만 드러머는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본래 밥과 랜디가 원하던 드러머는 코지 파웰 스타일의 힘차고 절도있는 연주자였는데
38번의 오디션을 시행하는 동안 마음에 드는 드러머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Uriah Heap에서 드럼을 연주한 경험이 있던 Lee Kerslake가 39번째 오디션에 임한 연주인이었는데
밥과 랜디는 솔직히 그의 연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멤버로 받아들였다.
이 멤버로 밴드는 지방의 술집에서 시험삼아 공연을 하곤 했는데
Crazy Train같은 곡은 이미 그곳에서 엄청나게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1980년 3월 22일 오지 오스본 밴드는 영국의 Surrey에 있는 Ridge Farm Studios에 들어가서 데뷔 앨범 제작을 착수했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Blizzard of Ozz"가 공개되었다.
원래 이 앨범은 Chris Tsangarides(프리스트 팬들에겐 Painkiller의 프로듀서로 유명한)가 디렉팅을 했는데
그는 오지에 의하여 일주일만에 해고되었다.
해고 사유는 크리스가 너무 작업에 깊게 관여했기 때문이다.
Max Norman은 Ridge Farm Studio'에 상주하고 있던 고정 엔지니어였는데 크리스가 떠난 이후 오지의 정식 엔지니어,
프로듀서가 되었다.
막스 노먼은 오지 오스본의 초기 2장의 앨범뿐만 아니라 라이브 앨범 Tribute에서 프로듀서를 담당했던 꽤 중요한 인물이다.
1980년 4월 "Blizzard of Ozz"가 완성된후 랜디 로즈는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귀환하여
그의 친우들이었던 Quiet Riot와 헐리웃의 Starwood club에서 고별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랜디 로즈는 Ozzy Osbourne Band의 일원으로
1980년 9월 12일 스코틀랜드의 Glasgow에 있는 Apollo Theatre에 모인 4,000명의 팬들 앞에서 첫 번째 공연을 펼쳤다.
"Blizzard of Ozz"는 영국 차트 7위에 기록되며 오지 오스본 밴드는 영국 전역을 돌며 3달 동안 34번의 공연을 감행했다.
1980년 12월 랜디는 캘리포니아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그는 새로운 기타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일주일전 Charvel guitars의 Grover Jackson에게 찾아간 랜디는 자신이 원하는 기타의 디자인을 직접
그에게 그려주었고 그로부터 2달후 글로버 잭슨은 랜디가 그린 그림을 기반으로 새로운 '잭슨' 플라잉브이 기타를 만들었다.
1981년 2월과 3월 두 달 동안 오지 오스본 밴드는 또 다시 Ridge Farm Studios에 들어가서 맥스 노먼의 지휘 아래
2집 "Diary of a Madman"을 제작하게 되었고 앨범 녹음을 마치자마자 베이시스트 밥 데이즐리와 드러머 리 커슬레이크를
해고하고 장대한 미국 투어를 거행하였다.
여기서 잠깐 밥 데이즐리와 리 커슬레이크가 해고된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다.
원래 오지 오스본 밴드는 Blizzard of ozz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blizzard of ozz라는 이름은 본디 오지의 친 아버지께서 생각하신 것으로
오지는 1977년 블랙 새버스 시절에 이 Blizzard of ozz라는 문장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이름이 데뷔 앨범의 제목으로 사용되면서부터 그냥 오지 오스본 밴드로 불리우게 되었다.
밥 데이즐리가 이것에 대하여 매우 화를 내며 매니저인 샤론 오스본(당시는 샤론 아덴)에게 항의했는데
아마 이런 것들이 쌓여서 샤론 오스본의 심기를 건드리고 그로 인하여 해고가 결정된 것 같다.
랜디 같은 경우는 밴드 이름이 어찌 되던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반면 밥은 조금 예민한 편이었다.
물론 그런 것 이외에 다른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밥 데이즐리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하고있다.
"오지는 밴드가 처음 결성되었을때부터 블랙 오크 아칸사스와 팻 트래버스를 거친 타미 앨드리지를
드러머로 기용하길 원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은 정말 쓸모없었어.
리 커슬레이크는 훌륭한 드러머였고 우리와 아주 잘 맞았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와 샤론은 계속해서 타미를 밴드에 넣자고 강요하더군.
나는 강하게 반발했어.
싫어~~ 왜 그를 계속 집어넣으려고 하는건데??"
하지만 타미 앨드리지에 대한 오지와 샤론의 집착은 밥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샤론은 미국에 전화를 걸어 새로운 베이시스트를 부르고 밥에게 통지를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
너와 리 커슬레이크는 해고되었다구.
그들은 이미 타미 앨드리지와 루디 사르조를 공연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한 거지.
나와 리는 아주 끔찍한 흉물 노땅 꼰대들이라고 말했어.
특히 리의 덥수룩한 수염을 비웃더군."
샤론은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지는 항상 타미를 드럼에 앉히고 싶어했어.
심지어 첫번째 앨범 순회공연에서조차 타미를 드러머로 기용하고 싶어했지.
루디 같은 경우는 랜디의 추천을 받아 연락하게 된거야.
루디는 랜디와 콰이엇 라이엇 시절에 함께 했던 동료였기에 같이 작업하기 편한 인물이었지.
루디는 실제로 굉장히 대단한 실력을 가진 인재였어.
리와 밥은 우리들의 궁극적인 동료들이 아니었어.
그들은 단지 우리들과 2장의 앨범만 같이 낸 사람들일 뿐이지.
그들은 분명 우리들의 거대한 역사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멤버이길 거부하고 세션이길 원할때 갈등은 발생한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연주한 만큼 돈을 줘라~~ 세션맨처럼 행동하는 거 말하는거야."
결국 1981년 4월 22일 Maryland의 Towson에서 시작된 "Blizzard of Ozz"의 전미투어에는 새로운 멤버들이 동승했다.
랜디와 함께 콰이엇 라이엇에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는 베이시스트 루디 사르조와 블랙 오크 아칸사스,게리무어
등에서 활약한 바 있는 베테랑 드러머 타미 앨드리지가 가세했는데 이들은 비록 스튜디오에서 오지,랜디와 연주한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라이브 연주를 수행해내었다.
1981년 4월부터 9월까지 펼쳐진 전미 공연의 레퍼터리는 "Blizzard of Ozz" 와 "Diary of a Madman" 앨범 수록곡들
그리고 Black Sabbath의 몇몇 곡들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Blizzard of Ozz 앨범은 100일 사이에 50만장이 팔려나가며 승승장구를 이루고 있었기에
그들의 공연 또한 연일 대성황을 기록했지만 너무 저렴한 티켓 가격 때문에 밴드에게 돈을 정당하게 지불하지 못한
공연 프로모터측과 다소의 마찰이 생겨 공연을 취소하는 불상사도 더러 발생했다.
Blizzard of Ozz" tour가 끝날 무렵 랜디는 또다시 Grover Jackson에게 가서 다른 기타를 주문했는데
그가 새로운 기타를 요구한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랜디의 하얀색 잭슨 플라잉브이 기타와 똑같은 제품을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랜디는 보다 더 특별한 기타를 원했다.
몇주 후, 랜디와 케빈 듀브로는 글로버 잭슨이 착수하고 있는 아직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기타를 보게 되었고
랜디와 글로버 잭슨은 이 기타의 최종 디자인을 여러 각도로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들은 white Jackson의 다양성을 제안하게 되었고 기타의 바디 한쪽 끝이 높은 모델을 만들었다.
랜디는 이 기타를 받았고 Diary of a Madman 투어가 시작되기 전에 2번째 잭슨이 만들어졌다.
결국 이 시기에 랜디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3개의 기타를 연주하게 되었다.
1981년 11월 "Diary of a Madman"이 발매되고 Ozzy Osbourne, Randy Rhoads, Rudy Sarzo, Tommy Aldrige는
유럽 투어를 강행하는데 이 투어는 단지 3개의 공연을 마치고 싱겁게 끝났다.
대부분의 투어가 취소된 이유는 오지 오스본이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밴드 멤버들은 미국으로 귀환했고 오지는 당분간 휴식을 취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후~~
12월 30일 샌프란시스코의 Cow Palace에서 밴드는 다시 미국 투어를 재개하며 싱글 Flying High Again를 발매했다.
Diary of a madman tour가 시작되었을때, 오지 오스본의 데뷔앨범 "Blizzard of Ozz"는 주당 6,000장의 비율로 팔려나갔고
랜디는 Guitar Player지로부터 '가장 촉망받는 신인 기타리스트'로 선정되었으며
영국의 Sounds magazine지로부터는 '가장 기대되는 신인 기타리스트'에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그야말로 랜디 로즈의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공연은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다이어리 투어때는 동물들의 전염병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라 순조로운 콘서트가 진행되기 힘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Diary of a Madman"은 많이 팔려나가 어느새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랜디는 클래식 기타에 절실한 관심을 가지며 그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실제로 랜디는 몇몇 도시에서 클래식 기타 교습을 강행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시기의 랜디는 락 음악을 일시적으로 그만 두고
학교에 가서 원래 전공이었던 클래식 기타를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어느날 랜디는 오지에게 이러한 자신의 진심을 표명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오지의 마하펀치 뿐이었다.
"허튼 소리 하지 말라!!!!!"
오지는 진심을 말하는 랜디의 아구창을 향해 주먹을 날리면서 이렇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랜디는 오지에게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시간은 어느덧 흘러가 1982년 3월 19일이 되었다.
전날 밴드는 Tennessee의 Knoxville에 있는 Civic Coliseum에서 랜디와 마지막 공연을 치루었고
다음날인 3월 19일 밴드는 토요일 거행될 Rock Super Bowl XIV (Foreigner, Bryan Adams, UFO등이 등장했던)에
참여하기 위하여 Knoxville로부터 Florida의 Orlando로 가는 도중이었다.
버스 드라이버 Andrew C. Aycock은 플로리다의 리스버그에 자리잡은 Flying Baron내에 있는 자신의 집에
잠시 멈추어 자동차 부품을 교환하고 그때까지 함께 했던 전 와이프 Wanda Aycock을 플로리다에 떨구었다.
플라잉 베런은 전직 컨츄리 뮤지션이었던 Jerry Calhoun의 땅으로 Jerry Calhoun의 집과
버스드라이버 Andrew C. Aycock의 집,경비행기가 뜨고 내릴수 있는 작은 활주로 이렇게 세 파트로 구분되었다.
버스가 플라잉배런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오전 8시이었다.
당시 이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Ozzy Osbourne, Sharon Arden, Rudy Sarzo, Tommy Aldrige, Don Airey,
Wanda Aycock, Andrew Aycock, Rachel Youngblood, Randy Rhoads, Jake duncun(밴드의 투어 매니저)으로
밴드 멤버들이 자고 있는 동안 앤드류 에이콕은 전처 완다와 함께 제리의 집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완다와 커피를 마시고 나온 에이콕은 버스에서 나와 몸풀기 운동을 하고 있던 키보디스트 돈 에어리와
투어 매니저 제이크 던컨에게 때마침 그곳에 있던 Beechcraft Bonanza F-35 경비행기를 잠깐 타지 않겠냐고 제의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앤드류 웨이콕은 경비행기 조종사 면허증이 분명히 있긴 했지만
약물 과용으로 그 면허증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행기는 금새 착륙했고 돈 에어리와 제이크 던컨은 차로 돌아왔다.
그 다음이 바로 랜디와 샤론의 요리사 레이철 영블러드가 비행기에 탔는데 이때 시간이 대략 9시 무렵이었다.
에이콕과 랜디, 그리고 레이철은 버스를 떠나 비행기에 탔는데
비행기는 제대로 이륙하지 못하고 나무보다 더 낮게 날았다.
투어 버스안에 있는 루디 사르조나 타미 앨드리지 같은 멤버들은 무려 3번씩이나
비행기가 버스를 향해 날아오는 위험한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네 번째 굉음이 들려왔을 때 비행기의 왼쪽 날개가 버스 뒤쪽을 찢고 지나갔고
이 과정에서 비행기의 왼쪽 날개가 부서지며 균형을 잃은 비행기가 튕겨 나가 근처의 소나무와 부딪친 후
대략 바닥으로부터 10피트 정도 맹렬하게 솟구쳐 올라 제리 칼훈이 운영하는 플라잉배런의 차고에 불시착했다.
충돌과 동시에 차고는 화염에 휩싸이고 징그럽게 폭발을 거듭했다.
차고 안에는 Oldsmobile과 Ford Granada라는 두 대의 차가 있었는데 랜디와 레이철이 타고있던 비행기와 정면충돌하여
형체도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3월 19일 오전 9시 반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게 있어요.
랜디는 비행기를 싫어합니다.
그는 비행하는 것을 싫어해서 시카고에서 플로리다까지 버스를 타고 가곤 했어요.
저는 왜 랜디가 그 날 비행기를 타려고 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네요."
밥 데이즐리의 말이었다.
"살아남아서 슬픕니다."
여기서부턴 샤론의 말이다.
"왜 저는 깨어있지 않았을까요??
왜 제가 그와 함께 있지 않았을까요??
왜 우리는 그가 비행기에 타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요??
왜?? 왜??
우리들은 랜디의 어머니인 돌로레스 여사를 볼 때마다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힌답니다."
랜디 사후 버니 토메(이언 길런 밴드 출신)를 기용하여 오지가 잔여 투어 스케쥴을 끝마친 것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무례한 짓이라고 욕을 먹고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버니 토메는 아주 잠깐 밴드에 재적해있었고 이후로 브랫 길스, 제이크 이리, 잭 와일드 등
젊은 기타 영웅들과 함께 오지는 승승장구하며 솔로 커리어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그런데 이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랜디 로즈라고 불리우는 조그마한 기타 거인이 공개했던 2장의 앨범을 경건한 마음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Blizzard of ozz와 Diary of a madman을 만들었을땐 정말이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우리들을 감싸고 돌았어요."
밥 데이즐리가 허심탄회하게 술회한다.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가져갈순 없어요.
정말 그 시절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특별하고 소중했던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랜디와 함께 작업했을때 그의 천재성은 우리들을 보다 젊고 유능하게 만들었어요.
우리들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창조하기 위하려 노력했습니다.
조용히 그 시절의 음반을 꺼내 귀를 기울여보세요.
그때 우리들이 발표했던 앨범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우리들은 결코 돈이나 명성을 위하여 음악을 하지 않았어요.
우리들은 오직 진심에서 우러나온 음악만을 추구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그 음악들이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오지 오스본은 랜디 로즈의 삶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랜디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나는 너무나 슬퍼집니다.
그가 죽은 바로 그날로 돌아가지요. 하지만 그의 영혼은 내 가슴속에있고, 결코 죽지 않을 겁니다.
그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어요. 이건 그저 센티멘탈한 푸념이 아닙니다.
그는 마치 유성과 같았지요.
짦은 시간 동안 그는 나와 함께 음악을 만들고 앨범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순간들을 경험했지요.
지미 헨드릭스 처럼, 이런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불꽃을 갖고 있지요. 랜디도 물론 그랬고..."
끝으로, 타미 앨드리지의 아주 짧은 그러나 강렬한 멘트를 끝으로 이 글을 줄일까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누구든 결국은 대체되고 잊혀진다고들 합니다.
그건 헛소리에요. 랜디 로즈야 말로 대체될수도, 잊혀질 수도 없는 녀석입니다...'
첫댓글 랜디 l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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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영웅 랜디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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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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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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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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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의 금주의 히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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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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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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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저미는 글 잘 읽었습니다.
랜디는 정말 위대한 기타리스트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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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메탈이 존재하는한 영원히 기억되어야할 불멸의 피터팬이 이번주 히어로군요~!!! l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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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3LvhdFEOqs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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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영원히 살아있는 영원한 히어로이시군요~!!!!!!!!! l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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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리브 랜디 갓 블레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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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Vovq9TGBw0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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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글이군요... 저도 그의 팬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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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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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l
그가 세상을 떠난지가 엊그제같은데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
lml
Rest in peace... h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