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명장(名將) (1)
김유신
소년 화랑에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우뚝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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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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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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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고지 정상에 있는 신조탑(信條塔)은 ‘사관생도 신조’를 현대적 조각으로 구현했으며, 하단부에는 두 화랑의 나라에 대한 충성 서약문인 ‘임신서기(壬申誓記)’가 새겨져 있다. 이는 사관생도들이 한국 고유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인 화랑정신을 이어받아 사관생도 신조를 지표로 삼고 생활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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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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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그림 |
1. 머리말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출신 성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삼국통일을 주도한 우리 고대사의 대표적 명장이다. 이러한 명성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그는 우리 고대사 연구의 기본 사료인 《삼국사기》 〈열전〉에서 무려 3권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다. 치열한 생존경쟁이 상존한 당시 상황에서 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장(武將)으로서 비록 당(唐)과 연합하기는 했으나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대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신라 조정에서 최고의 관직에 오르고 사후에는 흥무대왕의 시호까지 받는 영예를 누렸다.
원래 김유신은 신라계가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조부인 김무력 때부터 신라에서 무장(武將)으로 활약하면서 가문을 일으켜 왔다. 부친 김서현은 만노군(현 충북 진천) 태수를 거쳐, 신라의 최고위급 관직인 각간(角干)에까지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아들 김유신은 여전히 혈통의 한계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신라 왕족과의 진정한 결합에 열중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이 활동한 7세기는 동북아 세계가 지각변동을 일으킨 격랑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국제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근간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의 행적은 오늘날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그는 망명한 가야계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이겨내고 명성을 얻은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했다.
2. 김유신 시대 동북아 정세와 삼국통일
김유신은 격동기였던 7세기를 거의 대부분 살았다. 이 시기 중원대륙에서는 남북조 분열시대를 끝내고 통일제국을 건설한 수(隨)가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면서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당(唐)이 적극적인 대외팽창 정책을 펴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642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권은 유명무실해졌고 국가의 모든 권력이 연개소문 일인에게 집중됐다. 당의 안보 위협이라는 시대적 분위기가 그의 권력 강화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한반도의 서쪽에 둥지를 틀고 있던 백제에서는 600년 무왕 즉위를 기점으로 국왕 중심 체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한편, 한반도의 남쪽이라는 지리적 불리함으로 선진문물의 수용이 늦었던 신라에서는 6세기 초반 법흥왕 대에 이르러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형성했다. 선대가 이룩한 업적을 기반으로 진흥왕대(재위 540~576)에 적극적인 대외영토 팽창을 추진해 장차 삼국통일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진지왕과 진평왕을 거치면서 관료제를 정비하는 등 통치기반 안정화에 주력했다.
당시 신라의 삼국통일은 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7세기 후반기 동북아의 국제정세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7세기 중엽 동북아의 형세는 당-신라 대(對) 돌궐-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일명 ‘십자형 외교관계’라는 역학 구도였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압박과 특히 백제의 끈질긴 공격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신라는 김춘추를 중심으로 대당 외교에 매진, 마침내 당과의 연합(651년)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단지 당 군에 의지해서만 삼국통일을 달성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국가로의 출발이 가장 늦었음을 자각한 신라 나름대로의 국력 신장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신라는 화백회의, 가배행사 등을 통해 공동체 윤리관을 고취하고 호국불교를 통해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는 등 국가 결속력 강화를 도모했다. 또한 체계적으로 군사력을 육성했다. 정규군 양성 이외에 무엇보다도 화랑도를 조직하여 귀족계층 자제들로 하여금 솔선수범의 희생정신을 실천토록 했다. 관창이나 사다함 등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면에는 수많은 화랑도 출신 젊은이들의 피가 서려 있었다. 통일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끈 문무의 대표적 두 인물인 김춘추와 김유신도 화랑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3. 김유신의 행적과 화랑도
가야계인 김유신 가문은 할아버지 때 신라에 귀의, 신라의 영토 확장에 공을 세우면서 신라 사회 상층부로 편입했다. 하지만 혈통을 중시하던 당대 신라 사회에서 전통적인 진골 귀족들로부터 수시로 견제와 배제를 당했다. 이러한 설움을 타개하기 위해 부친 김서현은 진흥왕 동생뻘인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과 금지된 사랑을 했고, 온갖 기지(奇智)를 발휘하여 이를 쟁취했다. 김유신 역시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따라 여동생 문희(文姬)를 왕족 김춘추와 연을 맺게 했다. 어쩌면 이질적 존재라는 의식 덕분에 김유신은 당시 신라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보다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유신은 595년 부친의 임지였던 만노군에서 태어났다. 옛날 영웅들의 탄생설화가 그렇듯이 《삼국사기》가 전하는 김유신의 탄생도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이야기로 윤색되어 있다. 어린 시절을 당시 백제 및 고구려와의 접경지대인 진천에서 보내면서 그는 국토방위의 중요성을 실감했으리라 짐작된다.
얼마 후 수도인 경주로 온 김유신은 화랑도에 가입하고 이미 15세에 화랑도 내에서 한 조직의 리더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온 덕분에 처음부터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이때 용화는 ‘미륵’을, 향도는 불교의식 중 ‘향을 태우는 신도’를 의미했다.
무인의 길을 선택한 김유신은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면서 실전 경험과 전투 능력을 키웠다. 34세이던 629년(진평왕 51년)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낭비성 전투 에서 선봉을 맡아 맹활약하면서 바야흐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진골계 왕족 김춘추와 맺은 깊은 우정과 혼맥 형성은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됐다. 이는 능력은 있었으나 가야계라는 태생적 한계로 신분상승의 벽에 부딪혀 있던 김유신에게 도약의 발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642년 발생한 백제군의 대야성(현 합천) 함락 사건은 두 사람의 우의를 더욱 깊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 살해된 성주 김품석과 그의 부인(김춘추의 딸)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로 청병외교를 떠나는 김춘추와 혈맹의 맹세를 했던 것이다.
654년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는 당의 군사지원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드디어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으로 군사를 일으켜 백제 정벌에 나섰다. 배로 서해안에 도착한 13만의 당 군이 백강(금강)을 따라 사비성으로 올라오고 육지에서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탄현을 거쳐서 사비성으로 향했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끈 결사대에 막혀서 한동안 고전한 신라군은 관창과 같은 화랑들의 희생을 통해 이를 격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군해 당 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여세를 몰아서 나당 연합군은 665년 연개소문의 사망으로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를 공격, 마침내 668년 무너뜨렸다. 이 공로로 70대 중반이던 김유신은 최고의 지위인 태대각간에 임명됐다.
어떻게 김유신은 이토록 유능한 무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김유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화랑도와 그 정신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화랑 시절에 교육받고 연마한 것들이 이후 그의 리더십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화랑도는 신라시대 청소년 수련 단체였다. 역사상 그 명칭도 원화, 화랑, 국선, 풍류도 등으로 다양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원시 청소년 결사체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통설로 인정되고 있다. 화랑도의 기능도 초기에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으나, 차츰 군사적 및 교육적 기능이 더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관련 역사서들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랑도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화랑도를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인재 양성 제도로 조직화한 인물은 신라 부흥의 기틀을 다진 진흥왕이었다. 그는 576년 남모와 준정이라는 여성 지도자 중심의 원화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남성 중심의 화랑제도로 변경했다. 귀족가문의 덕망 높은 청년을 선발하여 그를 국선으로 임명(김유신은 15대 국선)하고, 약 1천여 명에 달한 인원을 통솔케 했다. 조직도 체계화하여 국선 아래에는 화랑을, 그리고 각 화랑으로 하여금 낭도들을 거느리게 했다. 진흥왕에 의해 체계화된 화랑제도는 이후 문무왕대(재위 661~681)까지 유지되면서 신라 귀족층 자제들이 국가에 대한 ‘고귀한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삼국통일 전쟁 시 화랑의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신라군의 선두에서 승리를 위해 과감하게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어떻게 화랑의 무리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었을까? 화랑도의 수련 내용과 방법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두 화랑도 동기생의 나라에 대한 충성 서약문이랄 수 있는 〈임신서기석〉(보물 제1411호)의 비문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약 3년이라는 수련 기간 동안 화랑의 무리들은 사서오경과 같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시가 및 가무 등을 통해 정서를 함양했다. 또한 무예를 연마하고 신라의 명승산천을 순례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특히 ‘세속오계(世俗五戒)’야 말로 화랑정신의 요체로서, 이들이 부단히 추구한 핵심 덕목이자 행동 지침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인용(智仁勇)의 덕목을 구비한 전(全)인격적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바로 이들 화랑 집단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할 김유신과 같은 충신과 명장, 김춘추와 같은 재상이 배출될 수 있었다.
4. 김유신 재조명의 현대적 의미
21세기인 오늘날 김유신을 재조명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상 김유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한편에서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충신이자 영웅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상잔의 전쟁을 벌이고 무엇보다도 드넓은 만주 땅을 상실케 한 망국적 사대주의자라는 평가이다.
물론 시대적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는 있으나 전자의 평가가 보다 타당성을 갖고 있다. 삼국통일 전쟁이 벌어졌던 7세기경에는 삼국 간에 오늘날과 같은 동족의식은 희박했고, 오히려 오랜 투쟁과정에서 배태된 적개심과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만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가 강대국 당과 손잡으려 한 것은 당연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됐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소모적인 상호 분쟁으로 점철되어 온 삼국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삼국을 통일, 한반도에 한민족의 생활공간을 확보하고 고유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민족사적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김유신은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했기에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우선, 그는 가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일평생을 신라에 충성하는 국가관을 견지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미 17세 때 고구려, 백제 등이 신라의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목도하고 홀로 굴 속에서 명상하면서 국가방위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그의 충정이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평생의 신념이었음을 사료는 또한 전하고 있다. 661년 대 고구려 전쟁을 위한 군량미 수송작전 시 김유신은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일은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늙은 신하가 절의를 다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임무를 완수했다.
다음으로, 그는 리더로서 사익(私益)을 멀리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629년 참전한 낭비성 전투를 필두로 무장으로서 항상 공격부대의 선두에 서서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전장에서 복귀한 직후 재차 출정하라는 왕명을 받고 자신의 집 앞을 그냥 지나친 일화는 바로 사적 감정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장수의 덕목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필요시 당 군과 연합할 줄 아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으나, 항상 신라인이라는 주체의식을 유지했다. 이는 황산벌 전투 승리 직후 당 군 총사령관 소정방의 부당한 조치에 의연하게 맞서서 수하 장수의 참형을 막은 사례나,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던 당의 야욕에 끝까지 저항한 측면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김유신의 리더십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유용한 전범(典範)임에 분명하다.
이내주 대령, 사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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