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純(강순):(1390 ~1468)-(南怡가 저승길에 同行한 政丞)
世祖(세조)12年 領議政(영의정)에 올랐던 康純(강순)은 本貫(본관)이 信川(신천),黃海道(황해도)谷山出身(곡산출신),그의 出世(출세)에 決定的(결정적)인 影向(영향)을 준 人物(인물)은,曾祖父(증조부)인 朝鮮最初(조선최초)의 王妃(왕비)神德王后(신덕왕후)康氏(강씨)의 親庭(친정)아버지 康允成(강윤성)이었다.
康允成(강윤성)은 高麗末(고려말)에 贊成事(찬성사),그의 아우 允忠(윤충)·允暉(윤휘)도 宰相級(재상급)벼슬을 누렸고, 特(특)히 康允暉(강윤휘)의 아들 上將軍(상장군)康祐(강우)는 李成桂(이성계)의 伯父(백부)李子興(이자흥)의 사위였다. 그러나 뒤에 康氏所生(강씨소생)의 두 王子(왕자)를 없애고 執權(집권)한 太宗(태종)은 故意的(고의적)으로 康氏家門(강씨가문)을 푸대접하였는데, 聖君世宗(성군세종)이 北方開拓(북방개척)에 쓸 人材(인재)를 찾을 때, 마침 눈에 띤 人物(인물)이 武藝出衆(무예출중)하고 先代(선대)에 겹으로 因緣(인연)이 있던 家門(가문)의 後孫(후손)康純(강순)이었다.
康純(강순)은 宮闕(궁궐)을 守備(수비)하는 甲士出身(갑사출신)의 武官(무관)으로 野人征伐(야인정벌)과 邊方守備(변방수비)에 큰 功(공)을 세워 世宗(세종)의 두터운 信任(신임)을 받았고,世祖(세종)때는‘李施愛(이시애)의 亂(란)’에 70高齡(70고령)으로 큰 功(공)을 세워, 敵慨1等 功臣(적개1등공신)에 策錄(책록)됨과 함께 信川府院君(신천부원군)에 被封(피봉)되었다. 이어 西征將軍(서정장군)으로 南怡(남이)等(등)과 함께 女眞族(여진족)의 本據地(본거지)建州衛(건주위)를 征伐(정벌),名將(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니, 世祖(세조)는 그를 一躍(일약)右議政(우의정)으로 올렸다가 바로 領議政(영의정)으로 삼아 五衛都摠官(오위도총관)을 兼(겸)하게 하였다. 그러나 野戰軍(야전군)으로 다져진 體質(체질)에 78歲(78세)高齡(고령)이라, 領議政(영의정)자리는 適任(적임)이 아니어서 곧 院相(원상)으로 물러앉고 말았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랄까 全(전)혀 엉뚱한 일로 날벼락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卑陋(비루)한 出身(출신)이라 恒常(항상)콤플렉스에 젖어있던 兵曺正郞(병조정랑)柳子光(유자광)이, 出世(출세)에 미쳐 直屬上官(직속상관)이던 南怡(남이)를 逆謀(역모)로 몰아 물어뜯는 事件(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른바 <南怡의 獄事(남이의옥사)>이다. 窮地(궁지)에 몰린 南怡(남이)가 살아날 可望(가망)이 없자, 지난날 邊方(변방)에서 苦樂(고락)을 같이하던 康純(강순)이 입을 닫고 外面(외면)해 버리는데 脾胃(비위)가 뒤틀려 그만 康純(강순)을 걸고넘어진 것이었다.
南怡(남이)는 太宗(태종)의 外孫(외손)에다 世祖(세조)의 寵臣(총신)左議政(좌의정)權擥(권남)의 사위로, 出身(출신)이 華麗(화려)한데다 재주까지 뛰어나, 17歲(17세)어린나이에 武科(무과)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니, 外四寸兄(외사촌형)인 世祖(세조)가 特別(특별)히 寵愛(총애)하고 키워, 及己也(급기야)는 27歲(27세)血氣(혈기)넘치는 南怡(남이)에게 兵曺判書(병조판서)자리를 덥석 안겨주었다. 이에 南怡(남이)는 若年(약년)에 나라의 兵權(병권)까지 쥐게 되니 어깨가 으쓱해지고, 世上(세상)이 온통 내려다 보여 그만 敖慢(오만)해졌다. 뒤에야 이런 南怡(남이)의 行動擧止(행동거지)를 눈여겨보던 世祖(세조)도 便(편)치 않던 中(중)에 마침 側近(측근)인 韓明澮(한명회)의 6寸(6촌)吏曺判書(이조판서)韓繼禧(한계희)가 “南怡(남이)는 性質(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兵權(병권)을 줄 수 없습니다”며 憂慮(우려)하니,世祖(세조)는 깨닫고 南怡(남이)의 職帖(직첩)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南怡(남이)는 그만 자리를 잃은 白衣狀態(백의상태)로 宮中(궁중)에 드나들기만 하는 별 볼일 없는 處地(처지)에 빠져, 앉은 자리마다 不滿(불만)섞인 말을 함부로 하며 歲月(세월)을 보냈다. 곧 世祖(세조)가 世上(세상)을 뜨고 睿宗(예종)이 登極(등극)하니, 權力版圖(권력판도)가 뒤집어지는 過渡期(과도기)를 奸臣(간신)柳子光(유자광)이 出世(출세)를 爲(위)한 絶好(절호)의 機會(기회)로 삼아,南怡(남이)의 不遜(불손)한 言行(언행)을 針小棒大(침소봉대), 그를 逆敵(역적)으로 몰아 南怡(남이)가 邊方(변방)에서 豪氣(호기)를 부려 지은 詩文(시문)가운데,『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글귀를『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으로 變造(변조), 南怡(남이)가 ‘나라를 얻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헐뜯으니, 平素(평소)에 입소문으로 南怡(남이)의 行實(행실)을 들은바 있던 어린 睿宗(예종)은, 柳子光(유자광)의 말을 그대로 믿고 南怡(남이)를 逆敵(역적)으로 斷定(단정)하고 말았다.
서툰 王(왕)은 주책머리 없이 南怡(남이)를 直接(직접)鞫問(국문)하며,“누구와 逆謀(역모)를 꾸몄느냐”고 다그치니, 죽음을 感知(감지)한 南怡(남이)는, 느닷없이 王(왕)옆에서 鞫問(국문)을 거들고 섰는 늙은 康純(강순)을 끌어넣고 말았다. “前(전)領議政(영의정)康純(강순)과 같이 하였소!”이에 꼼짝 못하고 現場(현장)에서 묶여 南怡(남이)와 나란히 꿀린 康純(강순)에게“事實(사실)대로 밝히라”는 닦달과 함께, 모진 拷問(고문)이 加(가)해졌다. 80을 바라보는 康純(강순)은 그만 精神(정신)이 흐릿해져, 다그치는 王(왕)의 재촉에“예! 예! 南怡(남이)와 같이 하였습니다”하고, 橫說竪說(횡설수설)로 그만 逆謀(역모)의 罪(죄)를 목에 걸치고 말았다.
刑場(형장)으로 끌려가면서 康純(강순)은,“南怡(남이)야! 너는 나와 무슨 怨讐(원수)가 졌기로 나를 끌어넣었느냐?” 하니, 南怡(남이)는“여보시오 領相(영상)! 나도 참으로 寃痛(원통)當身(당신)은 院相(원상)으로 내가 陋名(누명)을 쓰고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소? 그래서 領相(영상)도 같이 죽어야 싸다고 여긴 것이오!” 하고 받았다
康純(강순)은 죽기가 싫어‘抑鬱(억울)하다’며 울부짖었으나, 刑吏(형리)들은 모두 賦質(부질)없는 푸념이라며 목을 날려버리니, 1468年 10月 27日의 일, 南怡(남이)는 28歲(28세),康純(강순)은 79歲(79세). 이로써 柳子光(유자광)은 敵慨1等功臣(적개1등공신)에 翊戴功臣(익대공신)을 더하여 資憲大夫(자헌대부)로 昇次(승차)하고 武寧君(무령군)으로 封君(봉군),柳子光(유자광)은 그의 아비 府尹(부윤)柳規(유규)가 낮잠 中(중)에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내를 덮쳐 子息(자식)을 배게 하려다가, 아내가 한사코 마다하니, 그만 몸종을 집적거려 生(생)긴 賤出(천출)이라, 武術(무술)로 出世(출세)길을 찾다가 李施愛(이시애)의 亂(란)에 自願(자원)參與(참여),功(공)을 세워 벼슬을 얻었던 人物(인물)이다.
柳子光(유자광)은 끝내 彈劾(탄핵)으로 歸養(귀양)을 살다가 죽는데, 숨이 끊어지는 날, 큰子息은 女色(여색)에, 둘째는 술에 빠져 아비의 죽음도 外面(외면)해 버렸던, 天下(천하)의 奸臣(간신)으로 이름이 났다.
1818年 純祖(순조)18年 右議政(우의정)南公轍(남공철)의 建意로(건의),南怡(남이)와 康純(강순)은 復權(복권),康純(강순)은 文正公(문정공)으로 諡號(시호)가 내렸으나, 이미 當(당)해버린 慘禍(참화)는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