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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20 세계 난민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The Kiss in Time Square on V-J Day'
2010 - ‘종전의 키스’ 사진 여주인공 셰인 별세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상징하는 수병과 간호사의 키스 사진의 여주인공인 에디스 셰인이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가족들이 22일 전했다. 향년 91세.
이 사진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쏟아져 나온 인파 속에서 해군 복장의 병사가 간호사 복장의 셰인을 끌어안고 키스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유명 사진기자 앨프리드 아이젠스타트가 촬영한 이 사진은 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종전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사진 속 간호사가 누구인지는 1970년대 말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셰인이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이라는 편지를 사진기자에게 보낸 뒤에야 밝혀졌다. 해군 복장의 남성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일고 있다.
셰인은 간호사, 유치원 교사, 케이블TV 프로듀서 등으로 일했으며, 사진 속 주인공으로 밝혀진 이후 유명세를 얻어 각종 전쟁 관련 기념행사에 초청됐다.
셰인의 아들 저스틴 데커는 "어머니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떠맡았고,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돌보면서 변화를 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경향닷컴 2010년 06월 23일 17:26:46
http://news.khan.co.kr/kh_news/cp_art_view.html?artid=
20100623172646A&code=970100
2001 - 제1회 세계 난민의 날
매년 6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입니다. 본래 6월 20일은 아프리카단결기구(OAU)가 1975년부터 아프리카 난민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여 오던 날로서, 국제적 난민보호 개념의 초석을 세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설립 50주년이 되던 지난 2001년을 기하여 ‘아프리카 난민의 날’을 ‘세계 난민의 날로 확장하여 기념하기로 한 것입니다. (발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http://minbyun.org/?document_srl=8956
- 금강산 관광 기념, 1998.11.18 발행
1999 -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북에 억류
1999년 6월 20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인 민영미씨에 대해 북한 환경감시원을 상대로 남한 `귀순 공작`을 했다며 그녀를 북한에 억류, 장전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감금, 조사했다. 북한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북측 여자 환경감시원과 10여분간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다 북한 귀순자에 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측 환경감시원은 대화가 끝난 직후 민영미씨에게 관광증 제시와 벌금을 요구했으며, 민영미씨는 관광증을 건네주고 2회에 걸쳐 총 1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다. 북측은 "더 조사할 것이 있다"며 민영미씨를 연행, 장전항 출입국관리소 옆 북측 금강산관광총회사 사무실로 데려가 강제 구금했다.
그후 5일 만에 북한이 현대측에 민영미씨를 인도했고, 다음날 새벽 속초항에 도착,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렸다. 그일이 있은후 한동안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었다가 8월 5일 다시 재개됐다. /조선
- 외항선 1000만톤 돌파, 1995.6.20 발행
1995 - 외항선 보유량 1,000만톤 돌파
정부는 1955년 2월 정부 조직법 개정을 통하여 해사행정을 총괄하는 해무청을 신설하여 체계적인 해운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1967년에는 해운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해운진흥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우리나라 해운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해방 이후 2만여톤에도 못미치던 한국상선대 규모는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해운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1974년 선박보유량이 100만톤을 넘어섰으며, 1995년에는 1,000만톤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특히, 2006년말 현재 한국상선대는 모두 609척에 1,520여만톤에 달하고 있으며, 해외에 치적한 선박을 포함한 1,000톤 이상의 선박은 모두 1,900여만톤으로 반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세계 8위의 해운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더구나 용선선박을 포함하여 우리 외항해운기업들이 운항중인 선대규모는 6,700여만톤으로 세계 전체상선대의 10%에 달할 정도로 해운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발췌)
김학준부장 /해운항공신문
http://www.cargotimes.net/bbs/sview.php?code=ship&idx=1537&search_str=
%C2%BC%C2%B1%C2%B7%C3%89
1994 - 상용 인터넷 서비스 개시
[어제의 오늘]1994년 상용 인터넷 서비스 개시
ㆍ‘인터넷 세계 1위’ 시대를 열다
인류문명의 진화 과정에는 기존의 질서를 일거에 뒤집는 혁명적 전환점들이 있었다. 그중 인류가 직접 지켜보고 체험하고 있는 문명의 혁명적 진전은 인터넷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은 20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 세계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더욱이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아직도 진행형이어서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이나 18세기 산업혁명과 비견되는 문명사적 ‘일대 사변’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94년 6월20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에는 상징적인 날이다. 이날 한국에서는 아시아권에서는 최초로 상용 인터넷 서비스가 개시됐다. KT가 ‘코넷’이라는 이름의 상업 인터넷망을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코넷은 원래 상용화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인터넷망은 아니었다. 일부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연구·교육용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을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계정을 내주고 개방한 것이다. 코넷의 당시 이용료는 월 4만원이었다. 평균 전송속도는 9.6Kbps(1초당)로 현재 보편화된 초고속 인터넷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MP3 파일 하나를 다운로드 받으려면 1시간 이상이 걸려 ‘인(忍)터넷’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일반인도 돈만 내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같은 해 10월과 11월에 아이네트와 나우콤이 인터넷 시장에 뛰어들면서 인터넷은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128Kbps 속도를 내는 종합정보통신망(ISDN) 서비스가 인터넷의 총아로 주목받았고, 98년에는 케이블 모뎀 방식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에 이어 기존 전화망을 활용한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서비스가 제공되면서 인터넷은 연간 100%가 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누구나 손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초고속망 확대 정책을 시행해 인터넷 인프라가 급속히 확산된 것은 ‘인터넷 강국’ 한국을 만든 모태다. 한국은 현재 80%가 넘는 인터넷 보급률로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컴퓨터를 통한 소통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과학적 꿈’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은 그동안 공유·개방·협력의 가치를 지향하며 자율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전 지구적으로 그 꿈을 확대시켜 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 같은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 구글 유튜브에 인터넷 실명제를 강요하다가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나라’로 낙인찍히고
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6-19 18:09: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6191809175&code=100100&s_code=ap005
1985 - 세르비아의 프로 농구선수 다코 밀리시치(Miličić, Darko) 출생
밀리시치(밀리치치) [Miličić, Darko, 1985.6.20~ ]
Darko Miličić (Serbian: Дарко Миличић; born June 20, 1985) is a Serbian professional basketball center for the Minnesota Timberwolves of the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NBA). He was selected by the Detroit Pistons as the second overall pick in the 2003 NBA Draft after LeBron James, and ahead of players such as Carmelo Anthony, Chris Bosh, and Dwyane Wade. However, Miličić never received significant playing time during his 2½ seasons with the team and was traded to the Orlando Magic in 2006. After stints with the Memphis Grizzlies and New York Knicks, Miličić was traded to the Timberwolves in 2010, then signed a four year contract in the off-season. Miličić is the youngest player in NBA history to win the NBA Championship.
Professional career
Detroit Pistons
http://en.wikipedia.org/wiki/Darko_Mili%C4%8Di%C4%87
1975 - 아프리카단결기구(OAU)에서 '아프리카 난민의 날' 제정
매년 6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입니다. 본래 6월 20일은 아프리카단결기구(OAU)가 1975년부터 아프리카 난민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여 오던 날로서, 국제적 난민보호 개념의 초석을 세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설립 50주년이 되던 지난 2001년을 기하여 ‘아프리카 난민의 날’을 ‘세계 난민의 날로 확장하여 기념하기로 한 것입니다. (발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http://minbyun.org/?document_srl=8956
1973 - 중앙선 청량리-제천 구간 전철 개통
중앙선은 경부선(京釜線)에 이은 한국 제2의 종관철도로, 연선(沿線) 일대의 광산 ·농산 및 임산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되었으며, 영서(嶺西) 내륙지방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다.
더욱이 충북선(忠北線)과 태백선(太白線)이 제천에서 교차하고, 경북선(慶北線)과 영동선(嶺東線)이 영주에서 교차하여 경부선과도 직접 연결되며, 청량리∼원주 구간의 복선전철화(複線電鐵化) 공사도 진행되고 있어 수송 능력이 더욱 증가될 예정이다. 1973년 6월 청량리~제천 간, 1987년 12월 제천~구단양 간, 1988년 12월 단성~영주 간이 전철화되었고, 2005년 12월 청량리~덕소 간의 수도권 복선 전철이 개통되었다. /naver
<전기철도 특집> 1973년 진정한 전기철도 효시 '중앙선' 개통
1899년 노면전차 첫 운행, 1969년 산업선 전철화 착공
유희덕 기자 (yuhd@electimes.com) /전기신문 2008-09-16 11:25:03
http://www.electimes.com/home/news/main/viewmain.jsp?news_uid=60338
1968 - 100m `魔의 10초벽` 돌파
100m 달리기에서 인간의 한계로 여겨 온 `마의 10초 벽`이 마침내 무너졌다. 전미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1968년 6월 20일이 세계 육상사를 다시 쓰게 한 그날이다.
1912년에 세계기록 공인이 시작되고 1960년에 독일의 아민 해리가 10초F를 끊은 이래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10초 벽이 같은 날 그것도 세 사람에 의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무너진 것이다. 수동시계로 9초9. 준결승전 1·2조에 출전한 하인즈·스미스·찰리가 주인공이었다. 기록이 믿기지 않아 트랙 길이를 재조사했으나 오히려 10㎝가 더 길었다. 지미 하인즈는 4개월 뒤 열린 멕시코올림픽에서 9초95를 또 기록해 명실공히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20여년 동안 깨지지 않던 9초9 벽이 88서울올림픽에서 9초79를 기록한 벤 존슨에 의해 깨지는 듯했으나 곧 약물중독임이 밝혀져 기록이 취소됐다. 이후 9초9 벽은 1991년 칼 루이스(9초86)가, 9초8 벽은 1999년 모리스 그린(9초79)이 깨뜨렸다. 현재의 세계최고기록은 2002년 9월 팀 몽고메리가 세운 9초78이다. /조선
1967 -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Kidman, Nicole) 출생
키드먼 [Kidman, Nicole (Mary), 1967.6.20~ ]
니콜 키드먼(Nicole Kidman, 1967년 6월 20일 ~ )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적을 가진 배우이다. 2006년, 영화 산업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가 되었다.
미국 호놀룰루에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혈통이며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인 아버지 닥터 안토니 데이빗 키드먼(Dr. Antony David Kidman)과 어머니 자넬 안 맥네일(Janelle Ann MacNeille)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호주 시드니에서 성장하며 어릴적부터 배우의 길을 걸었다. 한 때 가수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호주 성 마틴 청소년 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1983년 《Five Mile Creek》로 데뷔하였다. 필립 노이스가 감독한 《Dead Calm》을 통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으며, 2006년에 키스 어번과 재혼하였다.
《To Die For》로 골든 글로브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 《디 아워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위키백과
- The White House and the Kremlin
1963 - 미국-소련 직통통신선 개설 협정에 조인
미국과 소련 양국이 1963년 6월 20일 워싱턴과 모스크바 간의 직통전신가설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이날 조인식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찰스 스텔과 소련을 대표하는 세이몬 차라프킨이 각각 서명했다.
이 협정은 국제긴장을 완화하기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우연과 오산으로 인하여 생길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미리 막도록 중대한 국제적 위기에 사용됐다.
직통전화의 연결방법은 특별 텔레타이프 선을 헬싱키 스톡홀름 런던을 경유하도록 가설하는 것이었다.
이후 8월 30일 공식문서의 교환 대신에 미국이 시험적인 표준신호를 보내고 소련으로부터 같은 신호를 받음으로써 직통전화가 개설됐다. 이때부터 전화는 긴급 사태시 양국 정상들간의 메시지 교환을 위해 사용됐다. 개설된 직통전화는 국방성에 있는 기계장치들로부터 크레믈린궁에 있는 흐루시초프 서기장 사무실 근처의 통신실에 이르는 텔레타이프 통신선으로 구성됐다. 미국은 영문으로 전문을 보냈고 소련은 러시아어로 전문을 보냈다. 각 전문은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암호화됐다. /조선
1960 - 말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18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탐험가들이 이 지역을 탐험했으며 19세기 후반 세네갈에서 내륙으로 진격해 온 프랑스군에 의해 이 지역은 프랑스령 수단으로서 식민지화되었다.
수단은 그 후 세네갈과 합병되거나, 영토의 일부가 프랑스령 기니에 편입되기도 했는데, 1920년 영역이 확정되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이곳에도 독립운동이 활발해져 1960년 6월 세네갈과 함께 말리연방으로 독립했으나 8월에 세네갈이 연방을 이탈하여, 9월에 단독으로 말리공화국이 탄생했다. /yahoo
1960 -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가원수 취임
본명은 Samdech Preah Norodom Sihanouk.
캄보디아의 왕·총리·국가원수·대통령.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중립노선을 취했다. 아버지는 노로돔 수라마리트 공이었고 어머니는 1904~27년 캄보디아 왕을 지낸 시소와트의 딸 코사마크 네아리라트 공주였다. 1941년 시소와트의 아들인 모니봉 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나이 18세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젊은 혈기에 일본인에게 고무되어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이 다시 들이닥치자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기까지 기다렸다. 1955년 1월 사회주의인민공동체를 결성하고 2월 국민투표를 통해 그 계획을 인정받았으며, 3월 2일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사퇴했다가 새 왕의 총리·외무장관·국제연합(UN) 상임대표를 지냈다. 5년 뒤인 1960년 4월 3일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는데 스스로를 왕이라는 칭호 대신 국가원수라고 칭했다. (발췌) /브리태니커
1947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
올림픽대회는 단순한 국제경기대회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스포츠외교의 정상무대이다.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독립한 신생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에 개최되는 런던올림픽대회에 어떤 일이 있어도 출전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우선 올림픽 출전을 위해서는 국내 올림픽위원회(NOC)를 구성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어야 했고, 또한 올림픽 종목의 경기단체들이 각각 국제경기연맹에 가입되어 있어야 했다. 조선체육회는 1946년 6월 16일에 런던올림픽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원회는 위원장에 유억겸(조선체육회 부회장)을 비롯하여 부위원장, 상무위원을 구성하고 조선체육회 산하의 경기단체 중 올림픽종목에 해당되는 육상, 수영, 축구, 농구, 역도, 권투, 레슬링, 빙상 등의 각 경기단체로 하여금 각각의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하도록 했다. 한편 1947년에 봄 전경무 부위원장은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버리 브란데지(Avery Brundage)를 만나 한국의 올림픽참가를 위한 협조를 교섭해 승낙을 얻었다. 이리하여 대한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6월15일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총회에 참가하고 동년 6월 20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을 받게 되었다.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0656
1946 -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발족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라고도 한다. 1944년 브레턴우즈협정(Bretton Woods Agreement)에 따라 국제연합의 전문기관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전쟁피해 복구와 개발을 위해 1946년에 설립되었다.
주요 목적은 ① 가맹국의 정부 또는 기업에 융자하여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② 국제무역의 확대와 국제수지의 균형을 도모하며 ③ 저개발국(개발도상국)에 대하여 기술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금은 가맹국에의 주식할당에 의한 자기자본, 특별준비금, 차입금(세계은행채의 발행으로 조달), 투자이윤 등으로 이루어지며 예금은 없다. 주로 개발도상국의 공업화를 위해 융자를 해주고 있는데 5~6%의 이율로 융자조건이 엄격해 융자대상은 선진국과 중진국이 많다.
회원국은 2001년 현재 183개국(IMF 회원국은 자동가입)이며, 한국은 1955년에 가입하여 1970년 대표이사국으로 선임되었다. 제40차 총회는 IMF 총회와 합동으로 1985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본부는 미국 워싱턴에 있다. /naver
1946 -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 초대 대통령 구스마오 (Gusmão, Xanana) 출생
구스마오(구즈망) [Gusmão, (Kay Rala) Xanana, 1946.6.20~ ]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 정치인.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라틴어를 포함해 5개국 언어를 익혔다. 1975년 인도네시아군(軍)이 동티모르를 강제 점령하자 곧바로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을 조직하고 대규모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어 계속 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중 1992년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Dili)에서 체포되어 연금 생활을 하였고, 풀려난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99년 8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감시 아래 치러진 동티모르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되면서 7년 만에 귀환, 동티모르민족저항평의회(CNRT) 의장을 맡아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해왔다. 2002년 4월 치러진 동티모르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장기간 폭력과 내전으로 시달려 온 동티모르의 평화 분위기 조성과 동티모르인(人)들의 정치적 공감대 형성, 지도부 조직 문제 등 여러 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1999년 사하로프 인권상, 2000년 제1회 광주인권상을 받았다. /naver
1945.6.20 - 캐나다 가수 앤 머레이(Murray, Anne) 출생
머레이 [Murray, Anne, 1945.6.20~ ]
46년 6월 20일 캐나다 노바스코티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눈에 띄게 큰 활약을 보인 대표적인 여성 싱어 앤 머레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감있게 이지리스닝을 노래하는 그녀는 어린시절 유난히 음악을 사랑하던 다섯 오빠들 사이에서 클래식부터 가스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노래와 음악을 익히며 자랐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지방학교의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그녀는 남편 윌리엄의 주선으로 지방 TV프로그램인 '싱어롱 주빌리'에 출현하게 되었는데, 기대 이상의 반응으로 캐피롤 레코드사에 발탁되는 행운과 함께 70년 첫 앨범인「Snowbird」를 발표하여 같은 제목의 싱글
/하세민, [팝 앨범 속으로], 세광음악출판사 /네이버 지식
- Germany, DDR, 10 Mark (Banknote)
1933 -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클라라 체트킨(Zetkin, Clara) 사망
체트킨 [Zetkin, Clara, 1857.7.5~1933.6.20]
작센 비데라우 출생. 1878~1890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이 시행되던 당시부터 독일사회민주당에 참가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당내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좌익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주로 문화운동과 여성운동에 종사하였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1892~1916년 사회민주당의 여성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편집하였다. 1907년 최초로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를 개최하여 반전(反戰)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였다. 1918년 독일 공산당의 창설자로 1919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0년부터 연방하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코민테른의 집행위원, 1924년 그 여성국장이 되었으며, 1932년 8월 나치스(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가 제1당이 된 국회에서 최연장 의원으로서 임시의장이 되어 230명의 나치스 의원단 앞에서 반(反)파쇼통일전선의 결성을 호소한 일은 유명하다. 1957~1960년 동베를린에서 그녀의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연설문과 편지모음집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이 출판되었다. /naver
1931 - 후버 미국 대통령 '모라토리움' 선언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후버(Hoover, Herbert C., 1874~1964)가 1931년 6월 20일 오후 6시 성명을 발표, 세계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미국에 진 채무와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전시배상 지불을 7월 1일부터 1년간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후버 모라토리움’이다.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전쟁ㆍ천재(天災)ㆍ공황 등에 의해 경제가 혼란하여 채무상환 기간이 도래했음에도 외채가 많아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 채무상환 기간의 일시적인 연기를 채무국이 요청하는 것, 즉 지급유예를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된 독일은 당시 배상금 1320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금액의 채무를 연차적으로 분할지급을 하거나 외국으로부터의 단기차입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정치의 불안이 가중되고 외국단기자본의 인상ㆍ유출이 격화되어 독일은행이 차례로 도산하게 되자 경제가 마비됐다.
이에 후버가 전시채무 동결을 제안하는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하자 배상지불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과 불황에 빠진 연합국 각국이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후버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쟁부채 배상안의 제안자인 오웬 영은 채권국의 현명한 처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논평했고 당초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선뜻 응하지 않던 프랑스도 결국 이에 동조했다. /조선
1923 - 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비야(Villa, Pancho) 암살
비야 [Villa, Pancho, 1878.6.5~1923.6.20]
1923년 6월 20일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인 판초 비야가 치와와 주 이달고델파랄 근교의 농장에서 암살되었다.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비야는 1909년 독재자 디아스에 대한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봉기에 가담하면서 혁명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1913년 마데로가 암살된 뒤에 멕시코로 돌아와 유명한 '북부사단'을 조직하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와 연합해 우에르타의 무단통치에 저항했다. 1914년 6월 두 사람은 멕시코 혁명의 개선장군이 되어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1914년부터 카란사 정권이 전복된 1920년까지 비야는 게릴라 활동을 계속했다. 1920년 비야는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조건으로 사면받았으나 3년 뒤 암살되었다. /브리태니커
1915 - 영국의 영화감독 테렌스 영(Young, Terence) 출생
영 [Young, Terence, 1915.6.20~1994.9.7]
영국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에서 동양학을 공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아른험 전투에 탱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1940년 영화 《On the Night of the Fire》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1940년대와 1050년대에는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1948년 《당신과의 하룻밤》이란 영화를 처음으로 감독했고 1962년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주연배우로 기용하여 찍은 007 시리즈의 첫 작품 《007 살인 번호》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63년 《007 위기일발》, 1965년 《007 썬더볼》을 연달아 연출했다. 이후 몇 편의 액션영화들을 만들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1981년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대작 《오, 인천》을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대표작으로 007시리즈 3편 외에 《블랙 타이츠》(1960) 《어두워질 때까지》(1967) 《배신자》(1970) 《살인 영장》(1972) 《비극의 마라톤》(1988) 등이 있다. 1994년 프랑스의 휴양지인 코트다쥐르의 칸에서 79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naver
1902 - 시인 정지용(鄭芝溶) 출생
정지용 [鄭芝溶, 1902.6.20~1950.9.25?]
한국의 시인. 1902년 6월 20일(날짜 수정함) 한국 근대 시사에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열어 보인 시인으로 평가받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난 그는 재학시절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교지를 만들며 일찍이 뛰어난 문학적 재질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후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ㆍ조지훈ㆍ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됐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에 접어들어 격렬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집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6ㆍ25전쟁 이후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누명 때문에 1988년 해금되기까지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기도 했다. /조선 (5월 15일자)
1899 -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 장 물랭(Moulin, Jean) 출생
물랭 [Moulin, Jean, 1899.6.20~1943.7.8]
몽펠리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공무원이 되었다. 1930년 가장 젊은 군수가 되었고 1937년에도 역시 가장 젊은 나이에 외르에루아르 주지사가 되었다.
1940년 독일이 외르에루아르를 점령하자 프랑스군이 잔학행위를 저질렀다고 써 있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자살하려 했다. 지사 자리에서 물러난 뒤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한때 영국으로 도피했다가 비점령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샤를 드골 장군의 대리 자격을 얻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마키"(maquis:독일과 싸운 프랑스 게릴라)를 조직하는 한편 각종 저항운동을 조정하는 레지스탕스 전국위원회를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43년 5월 27일에는 이 위원회의 초대의장이 되었다. "막스"라는 별명으로 전설적 인물이 되었으나 1943년 6월 리옹 근처 칼뤼르에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여러 감옥을 돌며 고문을 당한 뒤 메스에서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1 - 아일랜드의 정치가 코스텔로(Costello, John A.) 출생
코스텔로 [Costello, John A(loysius), 1891.6.20~1976.1.5]
1948~51, 1954~57년에 아일랜드의 총리를 지냈다. 법률가로 성공하여 법무부장관까지 지낸 코스텔로는 여러 정당(그는 통일 아일랜드당 소속이었음)과 중요한 무소속 정치가들이 에이먼 데 벌레라가 이끄는 아일랜드 공화당에 반대하여 연합한 덕분에 총리로 선출되었다.
첫번째 임기 때인 1948년 그는 의회에 "아일랜드 공화국 법안"을 도입했고, 이 법률에 따라 아일랜드는 영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그의 2번째 임기 때는 불법단체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테러 행위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 특징이었다.
1959년 에이먼 데 벌레라가 대통령이 되고 숀 레매스가 총리가 되자, 그는 야당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브리태니커
1887 - 독일의 다다 미술가, 시인 슈비터스(Schwitters, Kurt) 출생
슈비터스 [Schwitters, Kurt, 1887.6.20~1948.1.8]
콜라주 및 릴리프(부조) 기법의 구성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슈비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기존의 미학적 가치의 파괴를 추구하면서 새로 등장한 허무주의적 문예운동인 다다이즘에 매료되었다. 베를린의 다다 미술가 모임에서 회원가입을 거부당하자 그는 하노버에서 독자적으로 새 모임을 이끌었다. 슈비터스는 일상생활에서 쓰다 만 여러 물건들(기차표·나무실패·신문·끈·담배·우표 등)을 모아 구성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와 비슷하게 그의 시는 신문의 표제와 광고문안, 기타 일시적인 인쇄물들을 합성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예술활동 전체를 "메르츠"라고 했는데 이 말은 "상업"이라는 뜻의 독일어 Kommerz의 2번째 음절에서 따온 무의미한 단어이다. 그의 콜라주 작품은 메르츠빌덴("메르츠 회화")이라고 명명되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모든 일상활동과 자기 자신까지도 이 명칭으로 불렀다.
슈비터스는 1920년경에 일상적인 물건으로 성당을 지을 구상을 했다. 그는 하노버의 자기 집 안에 "메르츠바우"라고 이름붙인 입체적인 아상블라주 작업을 16년간이나 계속하여 더이상 집 안에 다른 물건을 놓을 공간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파괴되었다. 1937년 나치 정부가 슈비터스의 작품을 퇴폐예술로 규정짓자 그는 노르웨이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제2의 〈메르츠바우〉(1951년 화재로 소실됨)에 착수했다. 그러나 1940년에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슈비터스는 영국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도움을 얻어 제3의 〈메르츠바우〉 작업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메르츠바우 Ⅲ〉은 뉴캐슬어폰타인의 뉴캐슬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1870 - 프랑스의 형제작가 쥘 드 공쿠르(Goncourt, Jules de) 사망
공쿠르 [Goncourt, Jules de, 1830.12.17~1870.6.20]
공쿠르 형제는 당시의 명문 출생으로 형 에드몽(Edmond de Goncourt)은 내향적인 공상가였고, 동생 쥘은 정열적인 활동가였는데, 두 사람 모두 병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였다. 이 형제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 합작(合作)의 형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주로 형이 작품을 구상하고 동생이 문체를 다듬었다. 소설 《18××년에》(1851)가 처녀작이며, 처음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사회·여성·미술에 대해서 연구하여 《대혁명기의 프랑스 사회사》(1854) 《18세기의 여성》(1862) 《18세기의 미술》(1859∼1875) 등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역사가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소설가는 현재를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정밀한 관찰기록에 입각한 소설을 잇달아 써서 《샤를 두마이》(1860) 《피로멘 자매》(1861) 《르네 모프랭》(1864)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5) 《마네트 살로몽 Manette Salomon》(1867) 《제르베제 부인》(1869)을 발표하였다. 그들의 작품에는 급격히 발전한 물질문명의 소산으로서 얼마간 변질적인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심리분석보다는 병리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은 자연주의의 선구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편 ‘예술적 문체’라고 하여 특이하고 정교한 문체를 이루어, 예민한 감각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조성함으로써 인상파풍의 시각적인 효과를 노렸다.
동생이 죽은 후로는 형이 단독으로 집필을 계속하여 《매춘부 엘리자》(1877) 《장가노 형제》(1879) 《라 포스탱》(1882) 등의 소설을 썼다. 동생과 함께 썼던 《공쿠르의 일기》(9권, 1887∼1896)는 19세기 후반기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며, 일기문학의 걸작이다. ‘공쿠르상(賞)’은 에드몽의 유언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3년에 설립되었다. /naver
1859 -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에렌펠스(Ehrenfels, Christian von) 출생
에렌펠스 [Ehrenfels, Christian (Freiherr) von, 1859.6.20~1932.9.8]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심리학에 도입하고 가치론에 이바지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프란츠 브렌타노와 알렉시우스 마이농의 영향을 받았다. 1888년 <감각과 의지에 대하여 Über Fühlen und Wollen>로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되었으며, 1890년 <과학적 철학을 위한 계간지 Vierteljahrsschrift für wissenschaftliche Philosophie>에 발표한 <게슈탈트의 성질에 관하여 Über Gestaltqualitäten>라는 논문으로 형태 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열었다. 에렌펠스는 선율의 예를 들어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설명했다. 소리에 대한 직접적 감각 경험이 청취자가 듣는 선율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고, 이해에는 기억이 필요하며 때로는 다른 구성 요소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모든 구성 요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게슈탈트 구조 또는 전체 구조를 형성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게슈탈트는 직접적 감각 경험 이상의 것이 있어야 지각될 수 있는 복합자료를 설명하는 개념이 되었다. <가치론의 체계 System der Werttheorie>(2권, 1897~98)를 집필해 가치론에도 이바지했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안톤 브루크너에게 사사를 받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게슈탈트(Gestalt) 성질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복합자료는
어떤 기여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의식 속에 주어져 있다."
- 크리스티안, 프라이헤어 폰 에렌펠스
1858 - 미국의 소설가 체스넛(Chesnutt, Charles W.) 출생
체스넛 [Chesnutt, Charles W(addell), 1858.6.20~1932.11.15]
미국의 소설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흑인작가이다. 남북전쟁 전에 고향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나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의 자손이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는 노스캐롤라이나로 되돌아갔다. 25세에 결혼했고 이미 학교 교장으로 성공한 위치에 있었으나, 남부에서 흑인에 대한 대우에 깊이 실망하여 가족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이주했다. 개업 변호사가 되어 법률 속기 회사를 차리는 동안 서기 겸 속기사로 일했다. '부당한 계급 풍조'의 척결을 앞당기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틈틈이 글을 썼다.
1885~1905년에 50편이 넘는 이야기, 단편소설, 수필과 함께 2권의 단편집, 반노예제 지도자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자서전, 3권의 장편소설을 출판했다. 흑인 작품으로는 최초로 〈애틀랜틱 먼슬리 The Atlantic Monthly〉(1887. 8)지에 실린 〈구퍼드 포도 덩굴 The Goophered Grapevine〉은 토머스 넬슨 페이지의 대농원 학교를 교묘하게 논박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속에 담긴 풍자를 눈치채지 못했다. 〈구퍼드 포도 덩굴〉과 노스캐롤라이나 흑인들의 삶에 관한 꾸밈없는 이야기들이 〈여자 마법사 The Conjure Woman〉(1899)에 담겨 있다. 〈그의 젊은 시절의 부인과 유색인종차별에 관한 그밖의 이야기들 The Wife of His Youth and Other Stories of the Color Line〉(1899)에서는 조지 W. 케이블과 유사한 방식으로 흑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들에서도 나타나는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비난한다. 〈대령의 꿈 The Colonel's Dream〉(1905)은 자유를 얻은 노예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다루고 있다. 심리적 사실주의자로서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 사람들의 친숙한 정경들을 소재로 삼았다. 그의 작품은 1930년대까지 등장한 흑인작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며 윌리엄 포크너, 리처드 라이트, 제임스 볼드윈 등의 여러 후기 작가들보다 흑인의 인간적 측면, 흑인과 백인을 떠나 동시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비인간성이라는 주제를 앞서 다루었다. /브리태니커
1837 - 빅토리아(Victoria) 영국 여왕 즉위
역사속의 오늘-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역사상 가장 전성기를 확립한 빅토리아 여왕이 1837년 6월 20일 즉위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정립된 영국의 전통은 한둘이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부를 축적했고,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가 두 개의 당으로 정리되면서 정착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됐다.
빅토리아가 처음부터 이런 업적을 쌓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버지 켄트 공은 조지 3세의 네 번째 아들이었기에 그녀와 왕위는 별 관계가 없어보였다. 이런 까닭에 빅토리아는 자랄 때 공주 교육을 받았고 경직되고 엄했던 어머니는 자신의 분수를 깨닫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쳤다.
하루 아침에 왕좌에 오른 빅토리아에게 제왕의 위엄을 가르쳐준 것은 당시 영국 총리 멜번 경. 빅토리아는 그를 통해 여왕으로서의 긍지와 오만과 카리스마를 배웠다. 그리고 남편인 앨버트 공은 그녀에게 군왕의 도를 가르쳐주었다. 영국의 명총리로 불리는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주변의 도움과 자신의 영민함으로 인해 빅토리아는 대영제국의 전설을 완성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06월 1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6826&yy=2006
1837 - 영국의 국왕 윌리엄 4세(William IV) 사망
윌리엄 4세 [William IV, 1765.8.21~1837.6.20]
영국 하노버왕조의 왕(재위 1830∼1837).
런던 출생. 조지 3세의 셋째 아들이다. 1779년 이래 해군에서 근무하였으며 나폴레옹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828년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형 조지 4세의 죽음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나이가 많아 정치도 우유부단하다는 빈축을 샀으며, 선거법 개정문제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동요하였다. 그러나 세론의 움직임에 놀라, 1832년 새 귀족의 서임(敍任)에 동의하고 상원에 압력을 가하여,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뒤에도 자주 휘그당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배우 D.조던과 동거하여 이미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1818년 작센의 마이닝겐 공작의 딸 애딜레이드와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서 난 두 공주는 모두 요절하여, 조카딸 빅토리아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naver
- 'Prince Albert I'
1833 - 프랑스의 초상화가 보나(Bonnat, Léon) 출생
보나 [Bonnat, Léon(-Joseph-Florentin), 1833.6.20~1922.9.8]
마드리드에서 페데리코 마드라소에게서 미술을 배운 후 바욘 시의 후원으로 파리에서 레옹 코녜를 사사했다. 초기 작품들은 고대 스페인 미술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주는 풍속화이다. 1875년부터는 초상화를 그려 더 잘 알려졌다. 벨라스케스와 스페인의 사실주의 화가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아돌프 티에르와 빅토르 위고, 이폴리트 텐, 루이 파스퇴르, 앵그르를 비롯한 당시의 인물들을 그렸다. 200점 가량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중 코녜의 초상이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힌다. 1888년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의 회화교수가 되었고 1905년 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바욘의 보나 미술관에 그가 폭넓게 수집한 훌륭한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 /브리태니커
1819 - 미국 증기선 사바나호, 첫 대서양 횡단
(참고) [오늘의 경제소사/5월22일] <1402> 사바나호
1819년 5월22일,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항구. 도시 이름을 딴 320톤짜리 목조선 사바나호가 닻을 올렸다. 목적지는 영국 리버풀. 증기기관을 단 선박으로는 최초로 대서양 항해에 나섰다.
사바나호의 당초 설계는 쾌속범선. 건조 도중 탈착이 가능한 90마력짜리 증기엔진 두 대를 설치하고 배의 양쪽에 외륜을 달았다. 1818년 8월 진수돼 연안과 하천의 시범운항을 마친 사바나호는 먼로 대통령의 격려 속에 대서양 횡단을 기획했으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승객은 물론 선원조차 소음과 검은 석탄에서 나오는 그을음을 기피한 탓이다.
결국 승객도 태우지 못한 채 출항한 사바나호는 29일 11시간 만에 목적지에 닿았다. 항해 중 증기엔진을 돌린 80시간 동안에는 근처를 지나던 범선들이 사바나호에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구조하러 접근하는 촌극도 있었다. 영국은 사바나의 등장으로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미영전쟁(1812년)의 앙금이 남은 미국 정부가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돼 있는 나폴레옹을 탈출시키기 위해 쾌속 증기선을 동원했다는 낭설이 퍼졌기 때문이다.
소문을 뒤로 하고 영국을 떠난 사바나호는 스웨덴과 러시아,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는 차르(황제)로부터 건조비용의 2.6배가 넘는 10만달러에 팔라는 제의까지 받았다.
성공적인 항해와 달리 사바나호는 불운을 맞았다. 대화재와 불황이 겹쳐 증기엔진은 제철소에 팔려나가고 헐값에 매각된 선박 자체도 1821년 암초를 만나 좌초하고 말았다. 사바나호는 짧은 생을 마쳤으나 역사에 두 가지를 남겼다. 미국 의회는 1933년 사바나호의 출항일을 해운의 날로 정했다. 1962년 등장한 세계 최초의 원자력 상선에도 ‘사바나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경제 /인터넷한국일보 2009/05/21 18:04:44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05/e2009052118044097490.htm
The SS Savannah was the first steamship to cross the Atlantic Ocean. Its machinery was built at the Speedwell Ironworks in New Jersey.
The Savannah left the port of Savannah, Georgia on May 22, 1819, captained by Moses Rogers, on its famous voyage and arrived in Liverpool, England on June 20, the steam engine having been in use for part of the time on 18 days. /wikipedia
1819 - 독일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 오펜바흐(Offenbach, Jacques) 출생
오펜바흐 [Offenbach, Jacques, 1819.6.20~1880.10.5]
본명은 Jacob Levy Eberst인데, 아버지 Issac Juda Eberst가 오펜바흐 암 마인 출신이어서 이 이름으로 불렀다. 유대인으로, 1883년 14세 때에 파리로 나가 파리 음악학원에서 첼로를 배웠다. 관현악단과 오페라코미크에 근무하다가 알레비에게 작곡을 배웠고 1855년에는 스스로 극장을 경영하여 《천국과 지옥(지옥의 오르페우스) Orph e aux enfers》(1858) 《아름다운 엘렌 La belle H
rolstein》(1867) 등의 대표작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음악의 특징은 그것 자체로서 이해하기 쉬운 화성 ·선율 ·리듬 ·악기법을 여러 가지로 맞추고 바꾸어서 큰 변화를 얻는 데에 있다. 특히 리듬은 독특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왈츠와 캉캉 따위 무곡도 오페라 부파 속에 편곡되어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회 풍자를 비롯한 ‘비꼼’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의하여 제2제정의 위정자와 사회를 풍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C.W.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Orfeo ed Euridice》도 음악적으로 비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유작 《호프만 이야기 Coutes d’Hoffman》(1881)는 순수한 오페라 코미크이다. 오펜바흐의 영향은 F.주페, J.슈트라우스(아들), 영국의 W.S.길버트, A.S.설리번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naver
- 'The Oath of Tennis Court' by J.-L. David
1789 - 프랑스 '테니스코트의 서약' 체결
[어제의 오늘]1789년 테니스코트의 서약
ㆍ프랑스혁명의 시발점이 되다
1789년 프랑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등 거듭된 전쟁과 왕실의 사치로 국가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루이 16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란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국민 대토론회’였다.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통해 세금 인상을 통과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제3신분인 부르주아는 성직자와 귀족의 횡포를 참을 수 없었다. 전체 인구의 2%도 되지 않는 성직자와 귀족들이 전체 농지의 40%를 차지하고,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는 바람에 그 부담은 고스란히 평민들에게 지워졌기 때문이다.
세금 문제에만 논의를 국한시키려던 왕실의 의도는 빗나갔다. 표결권을 놓고 갈등을 빚던 세 개의 신분이 별도로 회합을 가짐으로써 삼부회는 파행을 겪게 된다.
“때는 왔다. 닻줄을 잘라라!” 1978년 6월10일, 프랑스의 정치학자 시에예스의 선언으로 세 개의 신분은 독자적 행동을 취하게 된다. 제3신분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집회를 열고, 스스로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의회에 일부 진보적인 성향의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합세하기 시작하면서 위협을 느낀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국왕을 부추겨 한밤중에 제3신분 회의장을 폐쇄한다. 이에 이들은 근처 테니스 코트로 가서 “프랑스를 위한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것이 이른바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다. 프랑스 혁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7월14일에는 치솟는 빵값과 혼란스러운 정세에 분노한 파리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다. 제3신분을 길들이기 위해 왕과 귀족들이 빵값을 일부러 올렸다는 뜬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권력은 제3신분의 손에 넘어오게 됐다.
한편 ‘테니스코트의 서약’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사진)으로도 유명하다. 1791년 자코뱅당은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열렬한 혁명당원이었던 다비드에게 프랑스 혁명의 기폭제가 됐던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기념할 역사화를 주문했다. 다비드는 수백명의 혁명당원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장면을 거대한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1년이 넘게 습작에 매달렸지만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요동치던 혁명 정국 속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곤 했던 탓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6-19 20:45:5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6192045505&code=100100&s_code=ap005
1771 - 캐나다의 박애주의자 셀커크(Selkirk, Thomas Douglas) 출생
셀커크 [Selkirk, Thomas Douglas, 1771.6.20~1820.4.8]
1812년 캐나다에 개척마을 레드리버 정착지(어시니보이아)를 세운 박애주의자.
뒤에 레드리버 개척마을은 매니토바 주 위니펙 시로 발전했다. 형들이 모두 일찍 죽어 1799년 아버지가 죽자 셀커크는 스코틀랜드 백작작위를 이어받았다.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민뿐이라고 믿은 그는 1803년 캐나다로 이주해서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대규모 개척마을을 세웠다. 1810년부터 허드슨베이사(社)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1811년 5월 이 회사로부터 레드 강 유역의 광대한 토지(지금의 위니펙 시 부근)에 대한 소유권을 얻어 스코틀랜드인들의 개척마을을 세웠다. 그후 어퍼캐나다 밸둔에 비슷한 개척마을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셀커크의 경쟁회사인 노스웨스트모피회사는 1818년 1월 셀커크에 대한 소송에서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받아냈고, 이로 인해 레드리버 개척마을의 발전에 차질이 생겼다. 건강이 나빠지고 재산마저 잃은 셀커크는 그해 11월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2년 뒤에 죽었다. 그를 추모하여 매니토바 주에 셀커크 시가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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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책 한권 잘 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