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에 의해 하루아침에 "준비조"로 좌천되었던 나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적어도 이 부서에는 내가 스카이빙 라인에서처럼 "꽃 밭의 잡초"라든가 "개 밥의 도토리"란 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었고 준비조에는 나를 포함해서 남자들이 세명이나 있었다.
회사에는 4개 부서가 있었는데 갑피를 완성하는"미싱반"가죽을 얇게 깍아주는"스카이빙 라인"가죽을 넓게 펼쳐놓고
손 프레스로 부속 모양을 찍어내는"재단반"그리고"미싱반"이 일하는데 준비를 해 주는"준비조"이렇게 4개 부서가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일했던 "스카이빙 라인"부서만 빼고는 모두 남녀가 섞여서 일하고 있었기에 준비조에서
일하는데는 처음부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여자들만 일하고 있었던 "스카이빙 라인"에 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생산과 과장의 장난이었다.
생산과 직원들의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었던 과장이 미싱 테스트에서 떨어진 나를 장난 삼아 여자들만 있었던
"스카이빙 라인"에 보내서 적응력을 시험 해 본 것이다.
여자들 속에 던져 버렸으니 몇 일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적응하는 것을 보고는 희안한 녀석이
하나 들어왔네?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상무의 눈에 내가 그만 딱 걸리고 말았다.
하긴,여자들만 일렬 종대로 앉아서 일하고 있는 중간에 남자녀석이 하나 끼어 있었으니
내가 상무였다 할 지라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서 당장 다른 곳으로 보내고 말았겠지.
어쨌건 나는,상무에 의해 준비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곳 조장 역시 나보다 두살 연하의 아가씨였다.
준비조 조장은 내가 먼저 일했던 스카이빙 라인 조장처럼 사납지도 않았고 쌍욕도 절대 하지 않는
얌전한 아가씨였지만 다혈질에다 심성이 좀 여리고 예민한 편이라 과장에게 꾸중을 들으면 곧 잘 울기도 하였다.
지금의 직장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 초,군사독재정권이 억누르고 있었던 대한민국 사회는 매우
권위적이어서 상사는 부하 직원이 잘 못 하면 사정 없이 야단을 쳐댔던 시대였다.
마음이 여린 조장은 그때마다 준비조로 되 돌아와서는 자신의 자리에 엎드려 울곤 하였는데
지금의 민주화 시대에 살고 있는 2~30대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였다.
중간 관리자인 팀장들은 두명이 있었는데 둘 다 남자였고 그 밑에 있는 조장들은 모두가 또 여자들이었다.
왜 이런 관리체계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80년대 초 당시"남존 여비" 사상이 남아 있었던
독재정권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었다.
조장들은 팀장의 직속 부하였기에 팀장의 말 한마디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을 만큼 팀장의 권위는 대단히 높았다.
이젠 해가 넘어서 그때 내 나이 26살, 그 나이때면 적어도 미싱사로 일하거나 아님 팀장과
같은 관리자가 되어야 했는데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자리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팀장과 나는 겨우 한 두살 밖에 나이 차이가 없었으니 나는 그들에게도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팀장은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조장을 불러서 따로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그러나 조장아가씨 또한 자기보다 두 살이나 더 많은 남자가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 말고 준비조에 있는 두명의 남자들은 20살 정도였기에 조장은 그들을 마치 동생들 다루듯 하였지만
그들과 달리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상당히 난처해 하였다.
나 또한 그런 조장 밑에서 일하기가 불편하였지만 여자들만 있는 스카이빙 라인에서도 꿋꿋하게 버텼었기에
나는 그런 "젖은 낙엽"정신으로 준비조 또한 열심히 적응해가며 일했다.
조장은 미싱도 잘 다루었고 준비조에 한대 밖에 없는 미싱에 앉아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녀가 일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싱 연습을 하였다.
조장아가씨도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좋은 인상이 들었는지 나는 그녀와 곧 친해질 수 있었다.
일렬 종대로 앉아서 일했던"스카이빙 라인"과 달리 "준비조"는 서로 마주 보면서 일했었기에 근무시간에도
온 갖 잡담을 하며 일 할 정도로 사내 분위기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일하면서 너무 시끄러우면 가끔 조장이나 팀장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 정도였다.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집에 있는 녹음기를 갖고 와서 일하는 시간에 틀곤 하였는데 주로 폴모리아악단의 세미클래식이나
골든 팝송들이 녹음기의 작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권위적인 회사였슴에도 불구하고 작업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은 상사들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음악이 일의 능률을 향상 시킨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곧 잘 부르던 조장아가씨는 가수 여진의"꿈을 꾼후에"를 일하면서 작게 즐겨 불렀다.
나는 그대 모습을~꿈 속에서 보았네~사랑하는 사람이여~~꿈속에서 그댈 봤네~~(중략)
장미 꽃 향기를~맡으며~잔잔하게 미소 짓는 그대 얼굴 보았네~~살며시~~그대를~
80년대 초, 당시 최고의 힛트곡이라 할 수 있는 여진의 "꿈을 꾼 후에"란 노래는 여진의 청아하고 맑은 음색과 꿈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동경한다는 가사와 몽환적인 멜로디는 여자들은 물론,나를 비롯한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녹아내리게 하였다.
도대체 이 가수가 누군가 하였더니 서울대학교 성악과 출신이면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했을때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였는데 여진은 그 당시엔 정말 보기 드문 실력파 가수였다.
성악과 출신이여서 그런지 여진의 노래는 그렇게 맑고 고왔다.
물론 가수 여진을 절대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조장의 노래 실력도 매우 좋았는데 음색도 여진을 조금 닮은 듯 하였고
그녀가 "꿈을 꾼 후에"를 부르며 일할때는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스카이빙 라인에서"개 밥의 도토리"로 쫒겨나온 준비조의 생활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첫댓글 조장님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가 봅니다.
가시는곳 마다 꽃밭이네요
부럽습니다.
조장아가씨와는 잘 지냈었지만 내가
무서워하는 다혈질이라서 ㅎㅎ
수필책으로 만들어보셔요, 피카소 작가님
그 찮아도 부크크,브런치스토리에 노크하고
싶어도 인터넷을 몰라서 내지 못하고
있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