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밝았을 무렵이었다.
심영은 미리 알린 대로 서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조조의 군사를 맞아들었다.
원한에 눈이 뒤집힌 신비가 먼저 말을 박차 성안으로 뛰어들고,
그 뒤를 조조군의 장졸들이 물밀듯 짓쳐 들어갔다.
이때 심배는 동남쪽에 있는 성루 위에 있었다.
조조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온 걸 보자
몇 기 따르는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로 내려와 죽기로 싸우려 들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심배가 먼저 맞닥뜨린 것은 다름 아닌 맹장 서황이었다.
원래도 무예에 그리 능하지 못한 심배고 보면 결과는 뻔했다.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서황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심배를 끼고 성을 나오던 서황은 도중에 신비를 만났다.
신비가 이를 북북 갈며 피맺힌 소리를 냈다.
"이 미친 살인귀야, 이제 너도 한번 죽어보아라!"
그러나 심배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큰소리로 신비를 꾸짖었다.
"이 더러운 도적놈아, 조조를 끌어와
우리 기주를 깨친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다!"
심배의 그 같은 태도는 조조를 대할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서황이 조조 앞으로 심배를 끌고 가자 조조가 물었다.
"그대는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들인 자가 누군지 아는가?"
"모른다"
심배가 꿋꿋하게 대답했다.
조조가 빈정대듯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조카 심영이었다.
그가 서문을 우리에게 바친 걸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어린놈의 행실이 막되어 먹었다 했더니 끝내 여기에 이르렀구나.
그 놈은 사람도 아니다!"
그 말에 조조가 다시 빈정대듯 물었다.
"전에 내가 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성안에 왠 활과 쇠뇌가 그리도 많았던가?"
전에 조조가 백성을 미끼로 성에서 나온 기주 군사를 되받아 치며
그 틈에 성안까지 뛰어들려다 활과 쇠뇌에 죽을 뻔했던 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로잡혀 와 있는 마당이라
조조의 그 같은 말이 섬뜩하게 들릴 법도 하건만 심배는 오히려 더 기세를 냈다.
"그때 더 많은 화살을 네게 퍼붓지 못한 게 한이다"
"그건 그렇고 -- 그대는 원씨들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저들이 받아들여 주지 않자 결국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떤가?
내게 항복해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는가?"
"아니 될 말, 결코 항복할 수 없다"
심배가 결연히 대답했다.
☆☆☆
이때 신비가 땅바닥에 엎드려 울며 조조에게 말했다.
"저희 가속 80여 명이 모두 저 도적놈 손에 죽었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저놈을 토막내어 이 크나큰 한을 씻어 주십시오"
조조가 심배의 재주를 아껴 혹시라도 살려둘까 두려웠던 것이다.
조조가 무어라도 대답하기도 전에 심배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살아서는 원씨의 신하요,
죽어서도 역시 원씨의 귀신이 될 뿐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너희 같은 무리와 같을 수 있겠느냐?
어서 빨리 이 목을 쳐라!"
그 말을 듣자 조조도 그를 단념하고 끌어내게 했다.
형을 받는 심배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형리가 남쪽으로 향해 앉게 하자 심배는 큰소리로 꾸짖었다.
"내 주인이 북쪽에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나를 남쪽을 향해서 죽게 하느냐?
나를 북쪽으로 앉게 하라!"
그리고는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은 뒤 길게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전풍이나 저수 같은 이들과 화합하여
대군을 잘 이끌어가지 못한 일이나
원소의 맏아들 원담을 제쳐놓고
셋째 원상을 내세움으로써 집안싸움을 일으킨 점은 문제가 있으나
한번 정한 주인을 저버리지 않은 점에 있어서는
실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 뒷사람이 그를 애석하게 여겨 시를 지었다.
하북에 이름난 선비 많으나 심배만한 이 누가 있는가!
어리석은 주인 만나 죽건만 그 충성 옛사람에 섞일 만하다.
깨끗한 재주 탐심이 없었다.
죽음에 이르러 오히려 북쪽을 향하니
항복하여 살아남은 자 모두 부끄러워라.
어쩔 수 없어 심배를 죽이기는 하였으나 조조는
그 충성되고 의로움을 어여삐 여겨 성 북쪽에다 후히 장례 지내 주게 했다.
그때 기주성을 완전히 우려 뺀 여러 장수들이 달려와
조조에게 성안으로 들기를 청했다.
☆☆☆
조조가 막 성안으로 들어가는데
창칼을 든 군사들이 한 사람을 에워싸고 끌어왔다.
조조가 보니 바로 진림이었다.
전에 원소 아래서 조조를 꾸짖는 저 유명한 격문을 쓴 적이 있어
그 죄를 크게 본 군사들이 특히 사로잡아 끌고 오는 길이었다.
"그대는 전에 격문을 쓰면서 나의 죄만 따질 것이지
어찌하여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했는가?"
조조가 짐짓 매서운 얼굴로 물었다.
진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화살은 시위에 올려진 이상 날아가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나 자신의 글은 원소의 활시위에 얹어진 화살과 같은 것으로
원소가 조조를 향해 쏘면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한낱 글의 장인으로서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화살을 대듯 글을 빌려주었다는 말이 되고,
자신의 처지와 바로 그 화살 같았다는 말도 되지만
어쨌든 재치 있으면서도 씁쓸한 대답이었다.
재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로 가볍게 자신의 책임을 벗어 던진 까닭이요,
씁쓸하다는 것은
힘 앞에서 종종 자신의 진의에 관계없이
글을 빌려주어야 하는 문사의 처지를
너무도 부끄럼 없이 내세우고 있게 때문이다.
진림의 그 같은 대답에
조조를 둘러싸고 있던 장수들이 먼저 술렁거렸다.
"저자는 원소를 위해 승상의 조상까지 욕한 자입니다.
죽여서 본보기를 삼아야 합니다"
장수들이 입을 모아 권했다.
그러나 조조는 진림의 글재주가 아까웠다.
잠깐 생각하다 조용히 물었다.
"나는 너와 너의 글을 이번에는 내 활시위에 얹으려 한다.
원소를 위해 했던 것처럼 나를 위해서도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주겠느냐?"
세상의 원한 중에서
얼른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무섭고 끈질긴 것 중에 하나는 글로 맺어진 원한이다.
그런 점에서는 놀랄 만한 조조의 아량이며,
한편으로는 비정하리만큼 현실적인 조조의 정치 감각이었다.
진림이 그 같은 조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승상께서 써 주신다면 재주를 다해 받들 뿐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니 조조는 그를 용서하고 종사로 삼았다.
☆☆☆
이때 조조의 맏아들 조비도 나이 열 여덟으로
아비를 따라 출정했다가 함께 기주성으로 들어갔다.
조비는 자를 자환이라 썼는데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상서로운 조짐이 많았다.
태어나던 날도
푸르고 자주색을 띤 구름이 둥그런 수레덮개 모양으로 산실을 떠돌며
하루종일 흩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구름 같은 기운을 본 자가 있어 조조에게 가만히 일러주었다.
"이것은 천자의 기운입니다. 아드님은 귀히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라면서도 조비가 보여준 재주는 놀라웠다.
여덟 살에 이미 책을 일기 시작했는데
오래잖아 고금을 통해 두루 막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빼어난 자질을 보며
말 타고 활쏘기를 잘했으며 칼쓰기 또한 매우 좋아했다.
조조는 아들들을 어릴 때부터 전장에 데리고 다녔는데
특히 맏아들 앙이 장수와의 싸움에서 죽은 뒤로는 둘째 비를 항상 곁에 두었다.
☆☆☆
이번에도 조비는 아비를 따라왔다가
성이 떨어지자 앞서 달려들어간 것이었다.
"원소의 집이 어디냐?"
조비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먼저 원소의 집부터 찾았다.
백성 하나가 겁먹은 얼굴로 원소의 집 쪽을 가리켰다.
질풍같이 말을 달려 원소의 집에 이른 조비가
칼을 빼어들고 말에서 내리니 장수 하나가 막아서며 말했다.
"승상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원소의 집안으로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그를 꾸짖어 물리치고
칼을 뽑아든 채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무리 조조의 명이 엄하다 해도
그 맏아들 조비가 하는 짓이니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조비가 후당으로 들어가니
두 부인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조비가 칼을 빼어들고 원소의 집으로 뛰어든 것은
그들 일족에 대한 오랜 원한 때문이었다.
아버지 조조가 그들 때문에 겪는 고통과 손실을 곁에서 보아오는 동안 자라난 원한이었다.
그런 조비라 아낙네라 해서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칼을 들어 막 찍으려 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붉은 빛 같은 것이 번쩍하며 두 눈 가득 찔러온 것이었다.
두 부인 중 하나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으로,
조비는 순간 까닭 모르게 손목에서 힘이 빠져 칼을 내리고
좀 나이든 쪽을 향해 더듬거리듯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원장군의 처인 유씨올시다"
나이 든 부인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원상의 어미인 그 유씨였다.
조비는 다시 그 곁에 있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냐?"
"둘째 아들 원희의 처인 진씨올시다.
원희가 유주를 지키러가자 저 아이는 멀리 가는 게 싫어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조비는 그 젊은 부인 곁으로 끌리듯 다가갔다.
경황중이라 거친 옷에 얼굴은 흙먼지를 덮어쓰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그러나 까닭을 알 수 없는 힘이 조비를 끌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헤치고 소매로 그 얼굴의 흙먼지를 닦게 했다.
옥으로 깎은 듯한 살결에 꽃 같은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까, 실로 나라를 기울이게 할만큼 미인이었다.
조비는 비로소 조금전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게 했던 그 붉은 기운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만했다.
산발한 머리 틈으로 별빛처럼 새어나온 그 눈빛이
열 여덟 소년의 마음을 흔들어 그토록 현란하게 비치었던 것이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진씨의 외모는 정말로 전대의 서시나 왕소군에 비해 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조는 진씨를 본 뒤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아들 조비에게 주면서도 측근에게 아까운 듯 말했다고 한다.
"이번 싸움은 비 그놈을 위해 한 것 같군!"
또 3부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인 조비의 동생 조식도
그 형수를 사모하여 그의 작품 중의 어떤 것에는 그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비는 한 전리품으로 생각해도 좋을 그녀를,
그것도 한번 남의 아내였던 여자를 일생 사랑했으며
뒷날에는 황후로까지 올려 세우고 또 그녀의 아들로 태자를 삼았다.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일들이다.
어쨌든 조비는 진씨를 보자마자 무엇에 홀린 듯 칼을 칼집에 되 꽂은 뒤,
전보다 더 심하게 더듬거리며 두 여인을 안심시켰다.
"나는 조승상의 아들이다. 그대들 집을 지켜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는 스스로 마루에 올라 그녀들을 지키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조조도
여려 장수들을 거느리고 기주성 안으로 들고 있었다.
막 성문을 지나는데 허유가 말을 달려오더니
채찍으로 성문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조조를 불러 우쭐거렸다.
"아만아, 네가 나를 얻지 못했으면 어찌 이 성문으로 들 수 있었겠느냐?"
아만이란 조조의 어렸을 적 이름이었다.
어릴 때부터의 친구였던 허유로서는 감격에 겨워한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으나
아랫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조조의 위엄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 경박한 말이었다.
거기다가 그 말속에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데가 있어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끈했다.
오소를 급습하도록 권해 관도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것이나
장하의 물을 끌어들이도록 권한 것이 기주성을 떨어뜨리는 데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하북을 얻은 것이 허유 한 사람의 공일 수만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