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와 수필
원준연
경이롭다 못해 신비로웠다.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휙 바뀌는데, 정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TV에서 본 중국 경극의 한 장면인 변검의 이야기다. 그 동작의 원리를 이제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기하기는 마찬가지다.
공연장에서 직접 서커스를 언제 보았는지는 기억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교통도 불편하던 시절, 부모님 손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공주에서 대전으로 보러 갔던 서커스와 시장의 한 모퉁이에 천막을 치고 풍장 치며 호객할 때 코흘리개 또래들과 함께 보았던 서커스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허리가 활처럼 꺾어지며 여러 묘기를 보이는 곡예사를 보고, 우리는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인지 "식초를 많이 먹으면 뼈가 유연해진대" 라는 확실하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며 박장대소하던 그때 그 서커스가 아직도 코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요즘은 서커스에서나 보던 묘기를 TV나 유튜브로 어렵지 않게 보고 즐기기 때문에 직접 공연장을 찾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게다가 직접 보고 싶어도 공연장도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연차대회에서 생각지도 않은 서커스를 직접 볼 기회가 생겨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묘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쌍철봉, 머리 위 의자 돌리기, 후프 돌리기, 모자저글링, 에어리얼실크, 생사륜 등등 어느 하나 고난도의 기술이 아닌 것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롭게 본 공연은 한층 더 고도의 기술로 진화한 변검과 변복(变服)이었다.
변검은 먼저 얼굴에 많은 가면을 쓰고 가면에 연결된 끈을 하나씩 당겨서 가면을 모자 위나 등 쪽으로 보내는 것과 미리 모자 속이나 등 뒤에 많은 가면을 숨기고 끈을 당겨서 하나씩 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얼굴의 가면과 의상이 동시에 바뀌는 묘기다. 처음이다. 옷은 순간적으로 입기가 어려우니, 처음에 여러 옷을 입고 나와서 하나씩 벗는 방법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배우의 몸이 처음 등장할때는 통통하였는데, 준비한 의상을 다 벗은 후에는 날씬한 모습과 민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면과 의상이 동시에 바뀌도록 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 뒤처리는 어떻게 한 것일까? 무대 뒤편으로 던져서 감쪽같이 처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일본 가부키 무대에 설치된 하나미치(花道)의 숫폰처럼 발아래에 구멍을 내서 처리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옷이 뒤편으로 사라지는지 밑으로 사라지는지 아무리 유심히 살펴보아도 알 수가 없다. 결국 바닥에 구멍이 뚫어진 흔적은 찾지 못하였으니, 아무래도 뒤쪽으로 처리한 것 같다. 어쨌든 대단히 창의적이고 무한한 노력의 결실이다.
이번 서커스의 공연을 보면서, 창의력뿐만 아니라 곡예사의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 어려움을 이겨내는 인내, 끊임없는 노력, 지칠 줄 모르는 체력, 불굴의 정신력과 도전 정신 등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어릴 때 보던 서커스와는 아주 많이 달라졌다. 곡예 종목도 많이 달라졌지만, 극장식 의자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오늘날까지 서커스가 이어져 내려오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변화를 꾀한 것이다. 변화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않았다면 서커스의 생명력은 이토록 길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연을 보면서 동시에 수필과 수필 환경이 오버랩되어 스쳐 지난다.
우리 연차대회도 서커스만큼이나 많이 달라졌다. 지난해에는 게임과 오락이 진행되더니, 이번에는 항구 탐방과 카페 무대에서의 무용이 등장하였다. 모두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변화에 회원들의 호응은 대단하였다. 수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보통 원고지 18매를 썼다면 지금은 15매를 거쳐 12매 정도가 대세인 것 같다. 5매 수필의 단수필도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형식도, 시(詩)에 디카시나 포토 포엠이 있는 것처럼 수필에도 포토에세이도 등장하고 있고, 만화수필이 탄생할 개연성도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계에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종이책이 주도하던 문학계도 전자책이며 오디오북 등 새로운 형태의 책이 대세인 시대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 웹진뿐만 아니라 종교방송국이 있듯이 문학방송국의 설립 이야기도 있고 보면, 수필을 비롯한 문학계의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AI나 GPT의 등장으로 문학의 생태계는 더욱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AI의 도움으로 번역부분이 상당한 탄력을 받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아날로그형 인간이라 디지털의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두려움도 느끼고 있으나, 이러한 흐름을 인지하고 따라가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서커스와 수필은 참 많이도 닮아 있다. 변화와 적응은 말할 것도 없고, 곡예사의 창의력과 뼈를 깎는 수련의 고통은 수필 한 편을 탄생시키기 위해 비유되는 산고의 고통에 다름 아니다. 관객이나 독자의 응원으로 창작의 동력을 얻는 점까지도 서커스와 수필은 마치 형제처럼 닮았다.
첫댓글 월간 수필문학, 권두수필
통권 378, 2023년 12월호
서커스와 수필은 참 많이도 닮아 있다. 변화와 적응은 말할 것도 없고, 곡예사의 창의력과 뼈를 깎는 수련의 고통은 수필 한 편을 탄생시키기 위해 비유되는 산고의 고통에 다름 아니다. 관객이나 독자의 응원으로 창작의 동력을 얻는 점까지도 서커스와 수필은 마치 형제처럼 닮았다.... (본문 발췌)
정말 수필을 쓰는 일과 서커스를 하는 일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루한 답습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것,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색채를 찾는 일, 철저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는 일...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허구가 아닌 일상의 소재에서 삶의 주제를 끌어내고 미학적인 글을 써야하는 수필의 경우는 더더욱 ....^^
쓰는 이들에게 각성을 주는 원준연 위원장님 글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열심히 올려주신 조성순 선생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