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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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양음악이 함께 들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초창기에도 한국 전통음악을 교회의 음악으로 세워 보려고 노력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길선주 목사, 게일 선교사 등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흐름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해도 될만큼 사소하지 않았다. 이 글의 앞 부분은 이러한 초창기의 지도자들의 생각과 70년대 이후 일어난 교회음악의 토착화 노력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당시와 오늘의 변화된 음악환경에 비추어 생각해본다. 초창기의 사료들이 아직 충분히 검토된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논의에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교회에 수용하는 데에는 날카로운 정신적 대립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신앙 지향적인 방향>과 <민족 지향적인 방향>이다. 이 두 방향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이 두 방향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절하게 서로 보완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민족의 음악이 교회적 음악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가능성에 관해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한국 전통음악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점검하였다. 산만한 나열같은 이 부분은 이미 있어왔던 전통음악적 교회음악과 그 주장하는 바를 고려하여 어떻게 하면 더 용이하게 교회가 한국 전통음악을 수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첨예하게 찬반이 대립하기 쉬운 이 문제는 좋게 풀리는 경우에 대단히 창조적인 열매들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아직은 찬반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이러한 긴장의 전제조건이 되는 "걱정"들과 "소망"들을 교회적인 방법을 통해 풀어 보려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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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업시 깃븜으로 찬송하난 것이 팔년동안 하나님을 찻다가 오늘날 예수의 피로 내 죄를 씨심을 받엇다 하며 업대여 시로 찬숑하기를 죠선노래 모양으로 부르고....."
위의 글은 1913년 6월2일의 그리스도 회보에 기록된 것으로 천화신을 섬겼던 무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곡들이 각 지방의 민요와 흡사하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보아 민요적인 것과 비슷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찬양을 들으면 아무리 이런 종류의 노래를 교회에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경건치 못한 노래라고 비난하기보다는 그의 구원을 기뻐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음악의 토착화라고 말하기에는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사건이거나 지속적이지 못하고 개인적이고 임시적이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이 기독교와 한국 문화가 만남으로써 간헐적으로 발생했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토속적 음악들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아니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무속을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당시 각 마을마다 있었던 성황당이나 사당들이 없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속을 생각나게 하는 노래들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에 무당들은 교화의 대상이 되어 무당들이 -위에 소개한 신문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더러 기독교인이 된 사례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음악의 중심그룹이었던 세 집단, 즉 무당, 광대, 기생에 대해 기독교는 반대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변변한 음악가 그룹이 없었다는 점이 한국 교회와 전통음악의 관계를 좋지 않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교회음악의 토착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무녀의 찬양도 관계되는 것을 교회화시키는 일을 토착화의 목표로 생각한다. 즉 한국의 전통적, 토속적 음악이나 이와 관련 있는 기독교 음악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의 음악문화적인 틀이 자국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①이것이 복음수용에 더 효과적일 수 있고(왜냐하면 우리에게 체질화 되었다고 보기 때문, ②우리의 민족적 자존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수용의 효과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 교회음악의 토착화 운동은 100여년이 늦었다. 그 때에 토착화를 실행했어야 그 말뜻에 걸맞다. 왜냐하면 당시의 토착적이었던 것은 이미 그 뿌리가 상당히 뽑혀있고 다른 뿌리가 더 깊숙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토착화"란 말은 그 지역의 문화와 사람에게 맞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음악적 특성이 100여년 전과는 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든다면 서양적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다. 토착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전통음악적인 것은 오늘날 교인들에게(특히 청소년층) 다시 체질화 시켜야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새롭게 체질화시킬 수 있는 청소년층이 전통음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옛 세대에 비해 덜 갖고 있다. 이들이 살아있는 광대, 기생, 무당의 음악으로 이것을 체험한 세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구세대와 신세대가 전통을 보는 입장이 달라졌고 전통음악의 의미가 달라진 것을 본다.1)
아직까지도 우리의 노래 관습에는 전통음악적인 근본이 남아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의 주장자들은 한국의 교회에서 틀리게 불리는 것을 관찰하여 그 증거로 삼는다. 즉 틀리게 불리는 찬송가들이 주로 오음음계나 한국적 리듬음계로 변형된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음악적 체질이 국악적 틀을 그대로 갖고있는 증거라는 것이다.2)
그런데 ‘잘못 부르는’데에 나타난‘한국적 특성’이 그대로 교회음악의 한국적 방향전환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오창하는 사람들이 ‘한국적’교회음악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오창하는 옛 세대들이 갖는 음악에 관한 특이한 입장을 반영해 준다. 그래서 옛 세대들에게는 전통음악이 기피해야 할 음악으로, 신세대 들에게는 ‘민족의 음악’으로 이해된다.
나이가 많은 세대층에서도 전통음악의 의미변화를 시도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떠돌아다니는 가사에 민요를 붙였거나, 민요식의 성가를 개인적으로 쓰려고 만든 사람들도 이미 있었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그 세대에서 일반화되지 못했다. 전통음악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않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초기의 한국교회에서 비기독교적 종교체계와 사회적 하부계층을 연상케 했던 음악을 우리의 전통음악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토착화론은 우리 민족에게 체질화되어 있다는‘보편성’의 관점에서보다는 민족적 자존의 문제에서 볼 때에 더 큰 타당성을 지닌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경우,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의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의무는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기호 문제를 넘어 서 있고, 적합하느냐 부적합하느냐의 문제도 우선 제껴둘 수 있게 한다. 이 의무의 강조 뒤에는‘민족적 자아’가 상실되면 좋지 않다는 생각, 또는 더 나아가서 수치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3
초창기 한국교회에서는 토착화라는 명칭이 없이 이 문제가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즉 당시의 민요나 민요적인 노래들을 취하여 한국인에게 맞는 교회음악을 성립시키려던 노력이 그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한 사람 중에는 길선주 목사같은 한국인도 있었고 게일(J. S. Gale)과 같은 선교사도 있었다.
길선주 목사는 전통음악을 교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길진경 목사가 쓴 글에 의하면 1909년에 길선주 목사가 이름 있는 악사들을 그가 시무하던 평양의 장대현교회에 초빙하여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과 그 가락에 맞는 성경귀절을 선택 연구하는 데에 힘을 쓰는 한편, 교회명절과 특별행사 때마다 연주해서 교회의 아악에 대한 향심을 부추겼다"고 한다. 길목사는 이러한 음악이 수입된 찬송가들을 대체하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상당한 돈을 투자하였으나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3)
길선주 목사는 「수심가」에 맞추어 전도자로서의 심정을 노래로 남기기도 했다.4) 길선주 목사 작사의 노래는 후에 주기철 목사의 " 영문밖의 길"과 손양원 목사의 "낮에나 밤에나"처럼 그 내용이 대단히 서글픈 성격의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후의‘부흥성가’종류로서 사람들 사이에 불렸다. 즉 교회에서 공식화되지 못하고 주변으로 밀린 것이다.
게일 역시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세우고자 상당히 조직적으로 노력했고, 오늘날 토착화 논쟁을 펴는 한국인의 관점과 매우 흡사한 사고를 했다. 그는 한국인이 서양노래를 즐겁게 잘하는 것을 인정하였으나 이것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느냐 하는 의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한 한국 민요적 성격을 가진 찬송가를 한국교회가 갖기를 원했다.5)
그는 서양곡조라도 한국음악에 맞춰 부를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또한 스스로 한국의 뱃노래에 맞추어 가사를 짓기도 한 것으로 여겨진다.6) 그러나 그보다 더 적극적인 생각이 보이는 것은 찬송가 가사를 현상모집할 때에 시의 체격을 서양식의 것이 아닌 동양식의 것만을 택하라고 한 것이다.7)
게일 선교사가 지은 가사를 사용한 뱃노래는 1915년에 발간된 『창가집』에 악보로 나타난다.8) 이 악보의 음악은 그로브(P. L. Grove) 선교사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거기에 실린 곡의 선율까지 만든 것이 아니라, 화성만 붙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로브는 한국 사람들이 틀리게 부르는 것까지도 그대로 수용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미 불리고 있던 곡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한국인들이 부르는 그대로, 반음이 없는 방식으로 악보를 그렸고, 거기에 맞는 화성을 붙였다.9)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던 다른 선교사들 역시 원래 서양 찬송가만을 주장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후에 『신정찬송가』(1931)를 만들면서 한국민요적인 노래의 삽입을 주장한 쪽이 선교사 찬송가 위원들이었고, 반대한쪽이 한국인 찬송가 위원들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며 거기에 관한 기록이 이 찬송가의 서문에 실려 있다.10)
선교 초기에 신교보다 더 많이 전통음악을 사용했던 천주교도 신교처럼 전통음악과의 단절을 경험한다. 천주교가 한국에 유입될 때에는 박해받는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정체를 민요로 숨겨야 할 입장에 있었고 서양의 교회음악을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도 갖지 못한 편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취하는데 그것이 ‘천주가사’였다. 그러나 역시 천주교도 박해가 없을 때에 그 토착화된 입장을 스스로 벗어난다. 이는 전통음악을 사용하는 천주가사가 다분히 임시방편적인 조치로 생각되었음을 반증한다. 카톨릭과는 반대로 신교는 선교에 있어서 박해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민요로 자신들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신구교를 망라하여 전통음악과 교회는 그 조화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러 예술 중에서 음악은 특히 서양의 것에 취약했다. 양악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음악은 어떤 다른 예술 분야보다 전통적인 것과의 갈등을 크게 겪었다. 문학은 우리의 글로 쓰는 것이라서 신문학(신소설, 신시 등)으로 처리될 있었으며, 우리의 언어생활에 잘 맞지 않는 한문으로부터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구어체로 옮겨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는 번역 성경을 한글 위주로 만들었다. 미술에서도 서양미술이 전통예술에게 커다란 충격이 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보는 그림들 중에는 아직도 동양화(한국화)가 더 많다. 그런데 유독 음악에서만은 ‘서양음악의 지배’라고 말해도 될만큼 서양음악에 의해 전통음악의 위치가 위축되어 있다.
교회는 그 문화가 화가와 가깝지 않았고 음악가들과 가까웠다. 한국의 초기 양악가들은 거의 교회출신임을 보여주는 반면, 문학과 미술분야에서는 그러한 전면적인 현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편으로 국악인 중에 기독교인이 적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광대나 기생으로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계층에 속했었고, 종교적 관계도 주로 불교나 무속에 가까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음악으로는 교회에 발붙이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그들이 기독교인이었다 해도). 이들의 신분적 특징은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이중으로 막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이들이 자기 직업을 포기하지 않고는 교회에 들어오기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일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 왔다고 해도 기피의 대상이 되어 활동이 어려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교회만이 이들에게 이러한 대접을 한 것은 아니었다. 즉 사대부나 평민들도 전통음악인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을 갖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점차 서양의 찬송가가 불리기 시작한 때에도 남자들은 교회음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드물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마우리(E. M. Mowry)선교사가 1913∼14년경 조직한 남성만의 찬양대는 이러한 풍토에서는 대단히 획기적이고, 이채로운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11) 1910년 이전에는 회중찬양이 아닌 대표찬양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여자들이었는데, 이들도 나이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노래하는 것은 좀 특별하게 보였다.12)
따라서 초기에는 찬양의 상당부분이 여자들의 임무였다. 이 여성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층이라기보다는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의 학생이었다. 물론 남학생들도 교회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 역할이 여학생들의 것에 비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남자들의 문화’로 특정 지워지는 기존의 한국문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당시에 교회음악의 토착화를 시도하는 것은 길선주 목사나 게일 선교사처럼 떠돌아다니는 민요에 가사를 붙이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길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에는 작곡가들이 없었기 때문에 창작적 성가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궁중음악의 전통은 누구나 다 아는 보편성을 띠지 못했고 제한된 곳의 행사를 위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작곡가들이 있을 때에도 교회음악은 작곡되지 않았다. 후의 홍난파, 현재명도 기독교인들이었지만 교회음악을 작곡한 것이 극소수이다. 이들은 전통음악에 대해서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이며, 서양음악의 매혹에 사로잡히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또한 이들이 서양식으로라도 찬송가를 작곡했다 해도 당시에 당장 공식적 찬송가책에 수록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당시에 일반 유행가나 민요 등에 가사를 붙인 ‘부흥성가’들이 계속 있어 왔으나 교회의 공식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앞의 생각들에 비추어 보면 초창기에도 토착적인 노래는 앞에 소개한 무녀의 경우와 같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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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논하는 테마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은 초창기 한국교회에 나타난 ‘애국가’종류이다. 이는 당시에 찬송가로 쓰고 있던 외국의 민요와 국가(올드 랭 사인, 영국국가)에 한국 사람들이 애국적 가사를 붙인 것들이다. 이 노래들은 독립문 완공식에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불렸고 또 윤치호의 「애국가」는 그가 "역술"한 「찬미가」(1905)책에 실리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토착화라는 말에 부합되기보다는 현실정치적 필요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당시의 우리나라가 처한 국가적 위기에 나타난 애국운동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찬미가」가 감리교 공인의 책이 못되고, 다른 찬송가책들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탈락시킨 선교사들이 우리의 애국운동을 무시했다고 후에 비판이 있게 된다.13)
민경배 교수의 이러한 비판은 애국운동사의 측면에서 보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애국적 가사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1935년에 있었던 김교신의 찬송가 비판을 민경배 교수의 비판과 비교해 보면 대단히 의미심장한 대립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김교신 역시 당시에 찬송가책 발간에 책임이 있었던 선교사를 비판한다("조선어 모르는〔아펜셀러〕박사"). 그러나 그 비판의 이유는 민경배 교수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즉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같은 "누구나 없이 조선사람 된 자는 이 찬송가를 부를 때에 일종의 흥분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을" 노래를 삽입하고 「샘물과 같은 보혈은」처럼 "영혼 속으로서" 부르는 노래는 뺏다는 것이다.14) 김교신은 사람을 흥분시키는 애국적 노래가 찬송가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생각에서는 민족성으로 영성을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견해들을 좀 더 단순화 시켜 대치시킨다면 "민족이냐 신앙이냐"와 같은 양자택일적 사고로 압축시킬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나 이러한 양극화된 생각이 언어로 발설되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왜냐면 이 중의 한쪽을 택하게 되면 신자가 아니든지 민족이 아니든지 하는 입장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사고는 바람직스럽지 않지만 은연 중에 앞의 두 예에서 드러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러한 대결구조가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해 쉽게 동원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신앙'이나 '민족'의 문제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반한다는 데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김교신과 같은 신앙중심의 사고는 '민족'의 문제가 세상적인 문제이고 종국에는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교회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민경배 교수의 경우는 세상적인 문제, 그 중에서도 '민족'의 운명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교회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탈세상적인 사고로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반면에 김교신의 입장은 '민족'을 강조하는 것이 공허해진 '신앙'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양면은 한쪽 지점을 택하면 대단히 쉽게 나올 수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갈급한 열망을 갖고 있다. 여기의 두 방향은 충돌을 가지고 올 소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이 양쪽 거점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에게 민족에 대한 기여만을 강조하는 경우 신앙의 영적인 면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초기의 민족주의적 성향의, 민족문제의 해결을 기독교를 통해 이루어 보려고한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떠나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쪽으로 건너간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또한 순수한 민족종교로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글학자 주시경은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파악하고 이른바 '민족종교'로 귀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단지 서양의 대표 기관일 뿐, 영적인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단지 사회문제의 해결만을 그 유일한 목표로 삼을 경우 교회는 종교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사회적인 기구로 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받아드리기 어렵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를 우리나라의 음악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기구만으로 취급하면 교회가 그러한 일을 즐거이 행할 수 없도록 하는 것과 같다. 특히 교회 밖에서 교회 안의 음악을 보면서 거기에 '서양의 것'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경우 교회 안에서 공감대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교회성가를 작곡하고 다른 종교의 노래도 작곡하는 일은 위와 같은 태도로 교회를 본다고 믿게 만든다. 이런 점을 교회의 답답한 배타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교회의 동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성향에 적합한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우리의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같이 생각하지 않는 민족주의적 교회음악의 방향은 '교회적 '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영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 역시 민족적인 것을 무조건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나쁜 일방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민족 전체를 포용하고, 같이 찬양하는 방식이 꼭 반(反)교회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민족의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민족의 소망을 담는 찬양 역시 교회에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옛 무속이나 다른 종교와 관련이 있는 음악일지라도 가사가 바뀜으로 인해 그 음악의 의미가 바뀔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조금 쉽게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음악을 듣고 좋지 않은 연상작용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연상작용과 상관없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얼마든지 그런 방향의 찬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에게 교회가 서양문화만을 허용하고 우리를 드러내는 음악을 거부한다고 생각게 만드는 것은 결코 교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의 교회는 변화된 자신의 입장에 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독교 진리를 건드리지 않는한 선교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통음악을 한국교회에 접목시키려고 했던 길선주 목사의 생각은 당시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잊혀져 버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교회의 부채로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신앙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었고 3.1운동때에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신앙’과 ‘애국’의 양면을 결합한 그의 생각과 행적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모범적인 표상으로 남아 있다. 음악에서도 민족을 생각한 그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무시되었다. 또한 그 자신도 민족예술이 교회에서 금기시 되고 있던 상황을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평소에 젊은이들에게 자주 했다고 하는 말을 그의 아들 길진경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민족문화와 외국문화와의 갈등이 시작된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장차 우리의 문화를 상실하는 예언이 될 것이다. 특히 교회는 흥왕하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를 망각하고 우리의 예술을 도외시한다면 멀지 아니해서 교회가 교회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집단으로 화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외국문화와 우리의 문화의 교차로가 된 오늘의 교회가 외국문화의 산실의 전제적인 그림자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15)
기독교를 ‘민족의 종교’로 그려본 사람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을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민족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생각할 때에 음악적 문제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신앙’이나 ‘민족’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지 않았고 어느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손쉬움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가지의 융합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또한 당시에 무속이나 기타 종교, 그리고 쾌락적 행사와 관련이 깊다고 간주되는 음악에서 ‘민족의 것’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면을 보았고,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립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거론된 길선주 목사의 생각과 노력은 우리나라의 교회음악사에서 전형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크게 주목받은 흔적이 거의 없다. 특별히 양악가들의 지원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악인들이 전통음악을 교회음악으로 만들려 해도 당대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가졌으리라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길선주 목사는 국악을 그 자체로 교회음악화 하려고 했다기 보다 이를 편곡하여 교회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길선주 목사는 김영환에게 전통음악의 편곡을 의뢰했으나 작곡을 배우지 않아 할 수 없다고 거절을 받는다.16)
따라서 음악을 작곡학적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고 악보가 없는 전통음악을 채보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다 해도 이는 길선주 목사의 극히 개인적인 숙제였다. 전통음악이 교회에 맞지 않는 불경건한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더 많았다.
특히 이 음악들이 불교, 무속 등과 관련이 있어서 교회에서 일반화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교회가 서양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다. 선교의 면에서도 서양 찬송가가 큰 어려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도 선교의 방향에서라기보다는 민족자존의 면에서 전통음악을 주장한 것을 본다. 그러나 ‘민족자존’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교회를 걱정하게 한다.
특히 전통음악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적극적 반대를 하지 않으면서도 ‘걱정’의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걱정의 근원적인 핵심은 ‘민족’이나 ‘한국’의 개념이 ‘기독교 진리’의 입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신학적 문제이다. 무속과 타종교를 생각나게 하는 음악이 어떻게 기독교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응답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세속적이거나 타종교적인 것이 어떻게 기독교화 되었는지를 다룬 일이 있다. 즉 세속적 유행음악과 거의 같은 복음성가 음악을 다루면서 여기에 관한 해답을 제시해 보려고 했었다.17)
그 해답의 핵심 중의 하나는 음악 역시 사람처럼 ‘거듭 날’수 있다는 것이다. 시편의 ‘소산님’의 노래, 칼빈의 민요적 시편가, 헨델의 메시아 중의 몇 노래, 영국의 캐롤들은 원래 세속적이었던 것이 ‘교회적’이 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속음악의 의미 변화는 마치 전에 어떠한 죄를 지었는가를 묻지 않고 지금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보아 용납하는 기독교적‘구원’과 흡사한 것으로 보았다.
한국의 교회음악은‘민족적인 것’이‘교회적인 것’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려면 상당한 자기극복과 이질감 해소에 노력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음악이 어떻게‘거듭 날’수 있단 말인가 하고 니고데모처럼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거듭 남’이 출생환경을 영적으로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면 음악에서도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소개한 무녀의 "죠션노래"는 중생한 자의‘거듭난 노래’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는 그 음악의 의미변화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
5
오늘날까지의 한국의 교회음악이 보여주는 특징은 서양의 교회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찬송가도, 성가대 합창음악도,‘교회음악사’와 같은 책들도 번역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음악가들이 작곡한 교회음악은 비교적 눈에 뛰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역사가 100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자라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청소년층을 중심하여 급속하게 보편화된 복음성가 운동이고, 하나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기준으로 우리의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운동이다. 복음성가운동은 음향재생기, 라디오매체, 또는 기타반주로 연주되는 형태 등을 통해 별 논의도 없이 주로 70년대에 즉각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비해 한국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으나 아직 교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복음성가나 전통음악성가는 교회음악을 논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하지만 복음성가는 이미‘실질적’교회음악이 되어 있으나 전통음악성가는 아직도 그러한 단계에 와 있지 못하다. 다만 전통음악성가를 옹호하는 입장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통음악 성가를 주장하는 측에서 볼 때에 한국교회의 음악환경은 매우 비관적이다. 이는 확고한 민족주의자가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도 한국교회의 찬송가책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수준이다. 우리의 찬송가 수가 너무 적다. 여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지나치게 전통음악적 배경을 갖지 않는 한국인의 찬송가도 많이 있는데 이것조차 거부되는 곳이 우리의 찬송가책이다. 과거 한국의 교회는 우리의 음악문화 전통과의 접촉을 어려워했다는 것을 우리의 찬송가책들이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60년대까지는 찬송가나 성가대 합장음악이 우리나라 작곡가들에 의해 -양악적인 것과 전통음악적인 것을 망라하여- 대단히 작은 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교회음악 토착화 논쟁은 별로 많지 않은 전통음악적 교회음악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음악은 많지 않고 주장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 작곡된 교회음악들을 보면 한국적이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인(5음음계, 전통적 장단) 음악의 수가 더 많다. 이제는 많은 곡들을 가지고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온 것이다.
전통음악적 요소가 교회에 뿌리를 잘못 내리는 것은 음악의 모든 부분에 해당되지 않고 일정한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음음계적 음악의 선율에 관해서는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박재훈의 「지금까지 지내온 것」 나운영의「시편 23편」(약간 예외적 부분도 있으나 크게 보아 5음음계 음악), 김보훈의 「주만 위해」등은 교회에서 널리 불리우는 곡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들은 아주 전통적인 유형의 음악이 아니다. 이것들이 전통적 관련성을 생각하고 작곡된 것임이 분명하나 그 전통성이 상징적인 성격의 것이다. 아주 한국적인 성격의 음계인 (남도)계면조로 작곡된 찬송가들이 더러 있으나 잘 불리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렇게 보면 선율적인 면도 지나치게 민속음악적인 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해 보인다. 전통적 리듬이 대단히 강하게 드러난 음악 중에 불리는 것을 찾기가 힘들다. 또한 전통적인 타악기를 쓰는 경우에는 더욱 거부감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에 놓여 있는 오르간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는 국악적 교회음악을 상당히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 악기들이 할 수 있는 전통음악적 방법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많은 부분을 서양음악화 시킨다. 이 악기들의 이론적 바탕이 서양음악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수도 있겠으나 전통음악이 모습 그대로 퍼지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음악 쪽에서는 이 악기들을 대체할만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가야금과 같은 악기로 반주를 한다고 하면 그 소리가 회중들의 목소리에 눌려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조금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로는 피리가 있으나 선율악기라는 점과 제한된 음역 때문에 대체악기로 생각해 보기는 어렵다. 소리가 큰 타악기만으로는 더 제한된 역할만을 하게 된다.
우리의 전통음악은‘듣는 음악’으로서 상당한 취약성을 갖고 있다. 특히 음악을‘하는 것’으로가 아니라‘듣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점이 전통음악과의 접근을 막는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음악‘하는 음악’에 속한다. 따라서 불러보거나 실제로 연주를 해 보아야 그 음악의 묘미에 접하게 된다. 그래서 들려주기보다는 해보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연주와 노래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보면 우선 들어보고 좋아야 실제로 하게 된다.
전통음악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면, 교회에서도 더 쉽게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대중음악적 성격의 복음성가가 쉽게 교회 안에 뿌리내린 것을 보아서 짐작해 본 것이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해내려면 통용되는 음악의 보편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악이 일반 사회에서 대중화되면 될수록 교회음악으로의 전망도 더 밝아질 것으로 기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교회가 수동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양악을 퍼뜨렸듯이 전통음악의 보편화에도 앞장서는 편이 더 떳떳할 것으로 여겨진다. 국악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전통음악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대중음악 가수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이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대중가요 가수들에게 그들의 노래방법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노래하라고 말할 수 없다. 국악인들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더욱 확신 있는 찬양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교회음악이 교회에서 공식성을 갖게 되는 것은 공식적 찬송가책에 실림으로써 가능하다. 물론 교회가 공식적 찬송가책에 실린 찬송가들을‘공식적 교회음악’이라고 부르는 일도 없고 거기에 관한 확고한 규범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찬송가책이 성경에 버금가는‘교회의 책’임에도 그렇다. 찬송가책에 실리고 안 실리는 일에 전통음악적 성격이 방해가 되는지 안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인의 찬송가들이 찬송가책에 실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기존 찬송가들에 대한 방어적 경향이 많고, 또한 널리 불리는 것 중심으로 곡을 택하다 보면 새로 작곡된 것들이 귀에 익지 않아 무시당하기 쉽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개편」과「통일」찬송가에 실려있는 한국인의 찬송가들을 보면 우리 작곡가들의 찬송가들을 뽑는 과정이 달라졌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불과 몇 사람이 교파별로 사람별로 안배하는 선곡방법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토착적인 찬송가책은 더 큰 어려움을 갖는다. 지금까지 찬송가책에 실린 것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음악 토착화운동의 주요인물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토착화 성가를 찬송가책에 싣자는 주장은 자신들의 찬송가가 찬송가책에 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이는 서양식으로 작곡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우는 논의가 예기치 않는 곳으로 흘러가기 쉽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처음부터 찬송가책에 수록될 것을 주장하기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교인들이나 기관들이 그러한 찬송가책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성가들의 경우에는 널리 일반화된 관행이다. 많은 교회들이 공식적 찬송가 이외에도 별도의 복음성가책을 가지고 있다. 복음성가 역시 토착화성가처럼 많은 반대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복음성가가 부수적 책으로 전파된다고 하여 그 영향력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 비하면 토착적 성가는 개인의 작품집이거나 실험적 논의의 부산물이다.
또한 이미 있는 노래에 가사를 붙임으로써 ‘토착화 된’부흥성가들은 기도원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공인 찬송가책에 수록될 것을 탐하지 않는다. 복음성가는 주로 교회의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반면에 부흥성가는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통음악을 강조하는 토착화 주장을 받쳐주는 큰 그룹이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이 토착화 성가 운동을 교회 밖의 움직임처럼 보이게 한다.
또 상기해 볼만한 일은 「개편」 찬송가에 한국인 찬송가들이 실리기 이전에 「청년 찬송가」(1959)를 통해 널리 보편화된 박재훈의 「믿는자여 어이할꼬」와 「어서 돌아오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곡들은 공식적 찬송가책에까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찬송가 공회와 같은 기관은 공식적 찬송가 이전에 이러한 부수적 찬송가의 보급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찬송가책에 실리는 것은 확실히 모험에 속하며 좋은 결실을 예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작사가나 작곡자들에게 발표의 터가 필요하다.
이러한 여과적 중간단계를 거치는 찬송가들이 우리나라 찬송가책의‘한국화’를 더 촉진시키리라고 생각된다. 찬송가책에 실리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음악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성가대가 부르는 합창음악은 찬송가책과 같은 공식성을 주는 것이 없다. 그 선곡은 성가대 지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전형적인 전통음악적인 것은 많이 불리지 않는다. 김두완의 「본향을 향하네」, 「서로 사랑하자」 김보훈의 「엘리야의 하나님」, 박제훈의 「목마른 사슴같이」, 이안삼의 「선하신 목자」 등이 자주 불리지만, 전통음악의 직접적 수용을 보이지 않는 곡들이다.18)
물론 서양음악 유입 이후에 발생한‘가곡’들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위의 곡들도‘한국적’이라는 표현에 맞으리라고 생각하지만‘선율성’과‘서정적인 정감’을 가진 이러한‘가곡’적 방향은 아직까지는 역사적 성격의 것으로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새로운 전통’은 그 이전의 토착적 전통을 우리의 기본적 전통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위기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음악적 노력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가리킨다.
6
오늘날 한국 전통음악의 계승자는 누구인가? 국악인인가? 아니면 불교의 승려들인가? 무당인가? 기생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들 역시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전통음악을 계승하고 있지 않으며 어느 정도는 그 음악의 성격을 변질시켜 실제에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민족 전통에 대한 생각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이들에게만‘민족의 음악’을 맡기고 말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교회는 이제 그 의미가 변화되는 도중에 있는 음악을 교회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러한 방식의 민족에 대한 기여를 놓치면 안된다. 이는 단지‘문화적일’수만 있는 폐단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도 전통음악과의 접목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기독교 음악’은 곧 서양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고, 기독교가 한국음악 전통의 합당한 상속자가 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물론 이러한 전통의 계승이‘상징적인 성격’에 머무르지 않고 역동적인 싱앙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변형은 있기 마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는 더 이상 약한 교회가 아니다. 한국의 교회는 초창기의 규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소수적 국외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상당수적 중심권에 위치해 있다. 이제 교회는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전혀 교회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교회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대해 사회적 기여를 해달라고 하는 요청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수용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를 귀찮다고 여기지 말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교회음악이 우리의 음악에도 기여해 달라는 외부적 요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민족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태도가 필요해 보인다. 이 태도와 함께 길선주 목사의‘걱정’과‘소망’이 함께 한다면 더 이상 바람직한 일이 없겠다. 이 모든 일들을 이루려면 당장에 공식성을 탐하기보다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부분에서 전통음악의 교회적 수용을 추진해야 좋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식적인 찬송가들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들이 더욱 더 소중하다.
최초 수록: 교회와 신학 21집, 1989. 5. 12. 369-392쪽.
1) 젊은 세대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주로 (국악)의 개념으로 만난다. 이는 원래의 이 음악이 갖는 상관성과는 멀어지고 <민족의 음악> 으로 정리된 때문이다. 홍정수: 『미학적 음악론』 정음문화사. 1986. p.192-223.
2) 예를들어, 문성모: 한국전통음악에서 본 찬송가 틀리게 부르기의 원인분석↗「교회음악」1987봄호 p.18-24 매우 흥미로운 이 논문은 틀리게 부르는 것을 틀리게 불렀다고 해서는 안되고 "다르게 부른 것이요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문승의「찬송가의 오창 및 그 내용분석」 「교회음악 41호-42호, 1986여름호∼가을.겨울호」은 같은 현상들을 광범위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3) 길진경: 『靈溪 吉善宙』종로서적, 1980 p.218. 이 책에서 말하는 ‘아악’이 어떠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아마 ‘정악’이나 ‘궁중악’에 가까운 것이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저자가 ‘아악’과 ‘창극’을 다른 곳에서(p.212)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길선주 목사는 도움이 된다면 불교적 음악과 무용까지도 수용한 모습을 보여준다(1918년 장대현 교회의 성탄절 전야에는 아악 연주와 여승의 북춤이 있었다는 것이다. p.268)
4) 이 노래(츄풍석음가)는 「예수교 회보」 (1912. 10. 8 권41호)에 실려 있다.
5) The Korean Repisitory 1896. 9. p.377.
6) 「그리스도 신문」 1901.5.9. 지은이와 이름은 없으나 그런 경우 대개 편집자 게일의 것으로 추정된다.
7) 「 예수교회보」 1913.1.28.(제 4권 제 4호)와 그 다음호 (2.4 제 4권 제 5호)에 두 번 현상모집이 실림.
8) 백부인(白婦人, Mrs. Becker), 안애리(安愛理, Mrs. Baird): 『창가집』 평양 야소교서원 발행. 제1부 11번 곡 Boat Song.
9) 앞의 책: 제2부 10번곡 Old Hundred.
10) "죠션 구곡을 찬미로 사용할가하난 문뎨도 잇섯스나 됴치못한 샤회와 관계가 잇스니 불합하다고 죠션인위원의 반다ㅣ로 즁지하니라."
11) 어떤 책들은 1909년에 마우리 선교사가 한국에 온 이후에 장대현 교회에서 성가대를 육성하고 숭실전문학교의 합창부와 취주악부를 조직했다는 원진희(「교회음악약사」 대한기독교서회 1978.p133)의 기록을 오해하여 그 해로부터 곧장 성가대가 세워진 것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마우리 선교사 자신은 "about 1913 or 1914"라고 말한다. 길진경(각주3에서 인용된책 p.220}. 그 정확한 연대는 검증할 필요가 있다.
12)
13) "언필칭 토착신앙의 표현이 찬송의 참뜻이다 하다가도 그 당시 이 서러운 겨레의 구원에 눈물짓던 교회의 솟은 신앙의 언어를 그 찬송가에 안실어 결국 따로 발행했던 선교사들의 성실성 여부를 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민경배: 한국교회 찬송가의 변천과정→「예배와 음악」 대한 기독교서회. 1975. p47.
14) 「찬송가의 변혁」 ↗『성서조선』 1933. 6. p.120
15) 길진경(각주 3의 책)p.253.
16) 김영환은 당시에 장대현교회의 교인이었고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었음. 길진경(각주 3의 책)p.218.
17) 「교회음악, 예배음악, 신자들의 찬양」 ↗『교회와 신학』 제19집 1987. p.415∼445
18)홍정수: 『교회음악개론』 장신대출판부 1988. p.83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