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유 인 봉
봉화산 자락이 밀고 내려와 똬리를 튼 곳, 아침에 일어나면 백화산이 거인처럼 성큼 눈앞에 서 있다. 시선을 좌로 하면 남덕유산 할미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바른손을 휘이~ 저으면 듬직한 장안산이 품에 안긴다.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화양리 475-1번지 아흔이 넘은 오래된 집, 거기에 나의 탯자리가 있다.
법화산이 부채살 같은 능선을 거느리고 내려와 암탉이 알을 품은 듯한 형상을 지닌 마을이다. 성지골, 불무골, 서당골에서 솟구친 물길이 마을을 가로질러 유천에 이르고, 장안산 지지골에서 시작된 지천과 합하여 금강이 물길을 연다. 큰대(大 )자 형상을 띠고 마을 가운데에 고대 족장의 무덤인 양 알봉이 솟아 있어 붙여진 이름 난평(卵坪)마을, 거기가 고향이다. 그중 사람이 머리를 두른 자리 상지담에 나의 유년이 살고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의 어머니가 살았던 오래된 고향 집이 있다. 구십팔 호가 살았던 마을에서 상지담에는 일곱 지붕 아래 열 한 가구가 옹기 종기 모여 살았다. 아래채에도 부뚜막을 걸어놓고 살림집을 꾸몄다. 전주에서 비포장 시골길을 버스로 세 시간하고도 반이나 더 가야 하는 산골은 산자락을 개간하여 고구마나 밀보리를 심었고 더러는 담배 농사를 짓거나 고랭지 무를 심었다.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지주들의 토지를 얻어 소작하다가 쌀 계를 타거나 돈을 모으면 반듯한 논 한마지기 사는 것이 꿈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삼대독자인 아버지는 해방 전 초근목피로 입에 풀칠도 어려운 시절 북간도로 이주해 타국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을 이루고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다. 열여덟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종중 토지 한 귀퉁이를 빌려 산자락 아래 토담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고 터를 잡고 살았다. 뒤 안에는 나지막이 돌담을 쌓고 감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감나무 아래는 엎드려 입을 고개를 내밀면 입에 닿을 수 있는 옹달샘을 팠고, 감나무 앞에는 널찍널찍한 돌을 궤고 장독대를 두었다. 장독대 주변은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봉숭아를 심으셨고, 여름이면 할머니께서 손주들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 주셨다. 할머니는 증손주가 대학에 갈 때까지 고부지간에 장을 직접 담그셨다. 그리고는 이듬해 봄까지 씨간장을 늘 남겨 두셨다. 가을이면 비어있는 단지에 잘 익은 감을 담아 두셨고, 수롱골 최부잣집 산에 심겨진 고염을 얻어와 자그마한 옹기에 꼭꼭 눌러 재워 두셨다. 할머니는 긴긴 겨울밤이면 화롯불이 다 사위어갈 때까지 어둠이 깊도록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고 배가 촐촐해지면 호야 등을 잡고 장독대 홍시와 찰진 고염을 한 종발 퍼 오셨다. 본채의 정지 뒷문을 열고 나서면 곧바로 장독대를 만날 수 있었고 옆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돌로 쌓은 옹달샘이 있었다. 장독대가 있는 뒤 안에는 정지 뒷문 가까이 에 고추나 깨를 갈아내는 함지박 같은 학독이 고인돌처럼 아랫배를 궤고 있었고, 큰 방 뒷문을 열면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여름날이면 으레 어머니께서 앉은뱅이 소반에 툇마루로 점심상을 내어 오셨다. 시원한 샘물에 텃밭 오이채를 썰고 풋고추에 소금과 사카린을 넣은 오이채에 대소쿠리에 담아 둔 보리밥 몇 덩이로 허기를 채우고는 했다. 점심상을 물리신 아버지는 목침을 베고 감나무 그늘진 툇마루에서 잠깐의 꿀잠을 즐기셨다.
본채는 방문을 열면 백화산이 바라보이는 동향집이었다. 삽작은 행랑채를 통해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삽작 길을 따라 천수네 미나리꽝을 지나면 춘자네 집이 나오고 춘자네 마늘밭을 건너면 마을을 관통하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큰 재를 오르는 물길을 따라 화강암 반석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는 이를 반석이라 불렀고 자연스레 냇가 이름도 반석이라 불리고 있었다. 골골이 버들치와 가재가 살고 있었고, 초복 무렵이면 노란 나리꽃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름밤이면 반석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고 놀이터였고 잠자리였다. 대낮에 달구어진 반석이 구들장을 지고 누운 것처럼 따뜻했고, 물길을 거슬러 불어오는 밤바람에 홑이불 하나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풀밭의 반딧불을 쫓기도 하고, 별자리를 배운 아이들은 별자리를 찾다 잠이 들고는 했다.
대문이 들어서 있는 행랑채에는 돼지우리와 허청이 있었고 대문 반대편에는 광을 하나 들여놓았다. 광에는 사방 벽에 시렁을 두르고 잡다한 농기구와 곡물 포대를 넣어 두었다. 허청 한 칸을 가운데 두었는데 여기에는 아궁이 재를 모아 두는 잿간을 두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식구들이 배설한 오줌을 거름에 보탠다고 잿간에 뿌려 주었다. 잿간의 재는 이듬해 정구지 밭에 밑거름으로 뿌려졌고, 재거름을 먹고 자란 정구지는 여름 내내 우리 집 밥상머리에 반찬이 되어 주었다.
아래채는 행랑채와 마주 보고 있었다. 네 칸이었는데 본채에서 제일 멀고 바깥 칸 에 변소가 있었고 다음은 소 우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아궁이에 쇠죽솥이 걸려있는 소 우리 옆에 아랫방이 붙어 있었다. 겨울에는 소도 사람과 같이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여물을 건초와 섞어 쇠죽솥에 끓여서 먹였다. 쇠죽솥 아궁이는 불땀이 오래 가는 장작을 땠다. 장작으로 쇠죽을 끓이며 달궈진 구들장은 겨울밤이면 펄펄 끓었고, 그 방은 늘 할머니 차지였다. 손주들은 밤마다 할머니 가까운 잠자리를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이고는 하였다. 아랫방에는 남향으로 들창문을 내 두었는데 아래채 뒤에는 오래된 밤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 있었다. 가을날 밤톨이 여물고 비바람이 칠 때면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양철지붕을 요란하게 흔들어댔다. 비가 그치고 이른 새벽이면 할머니는 남포등을 들고 실하게 여문 반지르한 밤톨을 한 소쿠리씩 주워 오시고는 했다. 이 밤나무 숲은 상지담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래채 마지막 칸은 뒤지로 사용하였다. 가을에 타작이 끝난 벼를 저장해 두는 나락 곳간이었다. 뒤지 문은 납작하고 길쭉한 열 개의 판자문을 홈으로 파 놓은 문기둥에 숫자대로 끼워 사용하였다.
본채 남쪽 기둥 모서리를 돌아서면 모퉁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본채 남쪽 처마 밑으로는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이 나 있었다. 장정은 머리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숙여야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빗살문이었다. 아버지는 겨울마다 남향으로 나 있어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꿰매는 일을 하시고는 하셨다. 처마 밑으로는 쇠죽솥 아궁이에 땔감으로 쓸 장작을 가지런히 천정까지 쌓아 놓았다. 모퉁이 담장 아래에는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땔감을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나뭇가리가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가을 낙엽 지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마을 장정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나무 짐을 해 왔다. 행정에서는 점점 민둥산이 되어가는 벌거벗은 산을 보면서 산림녹화를 외치면서 산에 나무를 심었고, 산림계를 나무 짐 길목에 지켜 서서 단속하고는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전기나 기름이 없던 시절이라 온전히 땔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본채에는 방이 큰방과 작은 방 두 개가 있었다. 큰방은 여덟 자 작은 방은 여섯 자 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장방이라 하는 2평 남짓한 방이 작은 방 뒤로 붙어 있었다. 이 도장방에는 종자나 양식, 집안의 중요한 물건과 놋쇠 그릇이 시렁에 올려져 있었다. 지붕은 산죽과 억새를 장안산 깊은 골에서 실어와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렸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무겁고 반영구적이지 못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모두 함석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말았다.
농토가 없는 아버지 어머니는 눈만 뜨면 논과 밭으로 나가고 달이 뜨고 별이 돋아야만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밤길에 큰 재를 넘다 늑대무리를 만나 혼이 빠져 사나흘 시름시름 앓다 서른일곱에 돌아가셨다. 일찍 과부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칠 남매 손주를 혼자 등으로 업어 키우셨다.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등에 업혀 본 기억은 도무지 없고, 할머니 품에서들 자랐으니 할머니 남겨 둔 정이 어떠했으랴! 지금은 옛사람 모두 떠나고, 굴삭기 한 방에 옛 모습을 잃어버린 오래된 옛집이 서럽게 서럽게 그리워지는 것은, 나의 유년이 온전히 거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