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0
유럽에서 가장 멋을 부리는 남자들로는 이탈리아 남자가 제일 먼저 꼽힌다. 그다음이 프랑스 남자들이다. 그래서 보통 영국 남자들은 멋과는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영국 남자들도 은근히 멋을 부린다. 단지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자들처럼 노골적으로 멋을 부리지 않을 뿐이다.
영국 남자들한테는 멋을 부리되 그러지 않은 듯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정장 복장을 할 때 그렇다. 이 점이 드러나도록 신경써서 옷을 입는다. 영국인들의 특성처럼 눈에 띄지 않게 멋을 부려야 제대로 된 ‘영국신사’ 반열에 들어가는 셈이다. 왜 멋을 더 부리는 이탈리아 신사나 프랑스 신사라는 말은 없는데, 유독 ‘영국신사’라는 거의 고유명사 같은 단어가 있을까.
▲ 2017년 개봉한 ‘킹스맨’ 두 번째 작품 ‘골든서클’의 한 장면. / 뉴시스
‘킹스맨’이 보여준 정장의 철학
사실 영국과 신사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영국신사’는 문법을 정확히 따르자면 ‘영국 신사(English Gentlemen)’로 두 단어를 떨어뜨려 써야 맞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국신사’는 한 단어의 고유명사처럼 느껴진다. 또 영국신사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들의 친절, 예의, 정중함 같은 품성보다는 복장부터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많다. 그런 영국신사를 가장 잘 그린 영화가 2014년 처음 나온 후 2017년, 2021년 후속작까지 나온 ‘킹스맨’ 시리즈다. 이 영화 시리즈 1편 ‘비밀요원(The Secret Service)’은 영화의 주 무대인 영국에서는 ‘쪽박은 아니고 소박’ 정도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613만명의 관객이 드는 ‘대박’을 쳤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유독 대히트를 친 데도 영국신사에 대한 한국인의 환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밀정보요원으로 등장한 정장을 잘 차려입은 미남배우들의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다. 영화에 등장한 “예의가 신사를 만든다(Manners maketh man)”는 대사도 한국인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한국 언론과 인터넷 글 여기저기에 아직도 영국의 오랜 지혜가 담긴 이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예의가 신사를 만든다’고 하지만 영국신사 하면 복장부터 떠올리는 태도는 여전하다. 친절, 예절, 예의 같은 인성보다 산뜻한 복장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이다. ‘킹스맨’ 영화에서도 “양복 정장은 현대 신사의 무기이다. 그리고 킹스맨은 새로운 기사이다(A suit is the modern gentleman’s armor. And, the Kingsman agents are the new knights)”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또 곧 이어 “그리고는 아울러 킹스맨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입는 신사복과 우리가 소지한 무기보다는 뭔가를 더 가져야 한다. 그건 바로 위대한 선을 위한 희생을 할 각오이다”라는 대사도 나온다. 영국인들에게는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공자왈 맹자왈 같은 소리다. 실제 영국인들 중 킹스맨을 보다가 손이 오그라들어(cringe) 중간에 포기했다는 경우도 봤다. 영국인 입장에서는 노골적인 애국과 도덕, 예의 운운이 정서에 맞지 않고 유치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킹스맨들은 비밀정보원이기에 앞서 멋진 영국신사들이다. 무엇보다 산뜻한 정장이 영국신사의 필수라는 점을 강조하는 존재들이다. 사실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의 복장이 더욱 중요한 사회 구성 요인으로 자리 잡아 왔다. 이는 대영제국을 유지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이 군인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군인에게는 군복이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함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군복이 바로 일치, 권위, 권력, 규율 같은 군을 유지하는 모든 요소를 대변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 특히 영국 남성들은 군복뿐만 아니라 각종 제복을 입었을 때 가장 멋있다고 정평이 나 있다. 요즘에도 영국인들 사이에는 소방관, 경찰, 해난구조요원 같은 제복 입은 직업이 가장 존경받는다. 동시에 영국신사들이 입는 양복마저도 제복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 영국 맞춤 양복점의 성지인 새빌로 거리에 있는 양복점에서 재단사들이 옷 치수를 재고 있다. / europeanceo.com
맞춤 양복점의 성지 새빌로
영화에서도 킹스맨의 비밀 본부는 영국 남자 맞춤 양복점의 성지인 새빌로(Savile Row) 거리에 있다. 영화에서 맞춤 양복점 안으로 들어가서 재봉실을 지나면 바로 비밀 본부가 나온다. 정장을 갖춰 입은 신사가 맞춤 양복 가게들을 출입하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비밀 본부 소재지로는 더할 나위 없다. 이 새빌로 거리는 실제 영국인들이 대대로 맞춤옷을 해 입던 양복점들이 지금도 상존하는 곳이다. 지금의 60대 이상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로부터 ‘사비루 양복’이란 말을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사비루’가 바로 새빌로의 일본식 발음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도 멋쟁이 남자들은 새빌로에서 맞춤 양복을 해 입어야 제대로 된 신사 취급을 받을 정도로 새빌로 양복은 대단했다.
사실 1970~1980년대 남자 양복 유행은 이탈리아 기성복들이 선도했다. ‘레디 투 웨어(Ready-to-wear)’라고 불리는 기성복은 어깨, 가슴 폭, 키만을 기준으로 대·중·소로 나눠 제작했다. 어깨에서 통짜로 내려오면서 허리 부분에서도 영국 양복과 달리 줄어들지 않아 웬만하면 몸에 맞았다. 기성복 가게에 가서 입어 보고 사면 되는 패션이었다. 몸통, 소매 같은 부분도 체형보다 크게 제작되어 편하게 입을 수 있게 대량으로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그러나 새빌로 양복은 이런 느슨한 패션의 이탈리아 기성 양복이 대세일 때도 좀 더 개인 체형에 맞게 제작된, 소위 말하는 슬림형이었다. 특히 허리 부분이 들어가고 소매는 좁게 만들어져 전반적으로 날씬한 인상을 줬다. 영국 양복은 뽕패드도 많이 들어가 어깨를 강조하는 형태여서 흡사 군복 같은 분위기의 권위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해서 영국신사들이 양복을 입으면 거의 군복을 입은 듯한 모습이다. 영국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정장 양복도 두꺼운 천을 좋아한다. 반면 이탈리안들은 얇은 천을 선호한다. 영국 옷은 어깨 부분과 소매가 합쳐지는 부분이 분명해서 군복같이 위엄을 보이는 로만(Roman) 스타일인 반면, 이탈리아 옷은 어깨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내려오면서 어깨 재봉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네오폴리탄(Neopolitan) 스타일이다.
▲ 영국 맞춤 양복점의 성지인 새빌로 거리에 있는 양복점에서 재단사들이 옷 치수를 재고 있다. / thegentlemansjournal.com
이탈리아와는 다른 영국 정장 스타일
이런 군복 같은 형태의 옷을 만드는 성지가 바로 새빌로 거리이다. 런던 중심부 고급 명품 가게들이 즐비한 올드본드 스트리트와 대중 쇼핑 거리 리젠트 스트리트 사이에 위치한 새빌로에는 맞춤옷 제작 공방이 즐비하다. 낮게는 2000~3000파운드(약 320만~480만원)로 시작해서 한 벌에 1만파운드(약 1600만원)까지 가는 고급 맞춤 양복을 만드는 공방이 널려 있다. 이런 맞춤 제작 형태를 이르는 영어 단어로는 ‘테일러드 슈츠(Tailored suits)’ ‘비스포크 슈츠(Bespoke suits)’ ‘커스텀 슈츠(Custom suits)’ ‘커스텀 테일러드 슈츠(Custom tailored suits)’ ‘비스포크 테일러링(Bespoke tailoring)’ 등 여러 개가 있다. 맞춤 양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객이 양복점으로 가서 몸의 치수를 재고 재단사가 거기에 맞추어 패턴을 제작한 뒤 양복감을 잘라 손으로 꿰매 임시 옷 형태를 만드는 가봉(假縫) 단계를 거친다. 이를 손님 몸에 입혀 본 뒤 다시 제대로 마감하면 옷이 나온다. 신사 양복은 모두 이런 단계를 거쳐야 제대로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이 된다.
새빌로 양복은 아직도 전형적인 특징이 있다. 체형에 따라 허리가 들어가고 소매가 좁다. 양복 소매 끝을 짧게 해서 와이셔츠 소매가 1㎝ 정도 나오게 만든다. 또 와이셔츠 깃도 양복 깃 위로 1㎝ 정도 올라오게 제작된다. 그러나 상의 전체는 어느 정도 길게 해서 제대로 된 양복 같은 모습을 갖추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빌로 양복은 자세하게 보아야 일반 양복들과 구별이 된다. 시쳇말로 하면 선수들끼리만 아는 양복이다. 새빌로 양복을 입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아는 양복이라는 뜻이다.
새빌로 양복에도 계급사회 영국이 녹아 있다. 새빌로 거리의 양복점들은 거의 4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래서 영국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과 그들의 가문은 대대로 새빌로에서 양복을 맞춰 입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현 찰스3세 왕을 비롯해 그 아버지 필립공, 윈스턴 처칠 같은 영국 상류층과 유명인사들이 새빌로 양복을 입었다. 새빌로 양복점에 가면 과거 유명인사들의 옷 패턴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과거에는 시골에 있는 고객들은 자신의 몸무게가 늘지 않았으면 그냥 양복지 샘플만 보내 달라고 해서 그중 하나를 골랐다. 그러면 재단사는 양복점이 가지고 있던 패턴으로 가봉한 옷을 만들어 시골로 들고 와서 입혀 보고 옷을 만들었다. 만일 체중이 늘었으면 물론 재단사가 출장을 와서 몸을 재어 만들었다. 이렇게 하니 양복은 비싸질 수밖에 없지만 옷은 반드시 체형에 맞았고 신체구조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기술이 발휘됐다. 윈스턴 처칠의 불룩 나온 배와 짧은 목도 새빌로 양복점의 단골 재단사가 멋지게 가려줬다. 마술사 같은 기술을 발휘해 처칠이 멋쟁이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세계 모든 남자 양복 패션 유행이 새빌로 스타일로 바뀌기 시작했다. 즉 느슨한 형태의 이탈리아 양복도 영국식으로 체형에 맞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나라의 양복이 몸에 맞는 슬림형으로 바뀌어 버렸다. 거기다가 상의 길이마저 짧아져 하체가 길어 보이도록 하는 게 유행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영국 새빌로 양복만의 특징이 사라져 버린 것이 사실이다.
▲ 전형적인 시골 영국 신사. / 권석하
정장을 완성하는 몇 가지 디테일들
영국신사들 옷은 색깔도 천편일률적이다. 오래전부터 영국신사들의 정장 양복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차라리 짙은 회색이거나 진한 곤색이 정장의 주 색깔이었다. 거기다가 제대로 멋을 부린 정장은 단색이 아니라 핀스트라이프(pinstripe)라고 불리는 세로 줄무늬 양복, 그것도 더블 브레스티드(double breasted) 양복이어야 했다. 상의 앞이 겹쳐져서 닫히고, 아래로 단추가 양쪽 두 줄로 달리는 양복 형태이다. 언제부턴가 영국에도 신사정장 양복이 흑색 단색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통적인 멋을 내는 영국신사는 아직도 핀스트라이프의 더블 브레스티드 양복을 입는다.
거기에 더해 제대로 된 영국신사는 명품 상표가 바깥에서 보이는 넥타이는 절대 매지 않는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챌 수 있게 자신이 속한 클럽이나 출신 학교 무늬가 들어간 넥타이를 맨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단순한 단색 넥타이나 사선무늬 넥타이를 맨다. 손목시계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차던 기계식 시계를 찬다. 물론 전통 있는 고급명품 시계이면 더 빛나긴 한다. 모양도 둥근 모양에 줄은 반드시 흑색이거나 갈색 가죽이어야 한다. 롤렉스나 카르티에 같은 고가의 명품 손목시계를 차면 졸부 취급을 받는다. 집안의 가구가 대를 이어 내려온 손때 묻은 고가구가 아니고 새로 만든 고급 가구이면 무시를 당하듯이 말이다. 영국의 중산층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손으로 가구를 샀다(bought his own furniture)’이다. 마거릿 대처 정부 시절 장관이던 앨런 클락이 동료 장관 마이클 헤즐타인이 자수성가한 졸부라고 비웃었을 때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영국신사의 정장이 완성되려면 기본에 몇 가지 디테일이 또 더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와이셔츠는 소매 끝이 접히는 더블 커프(double cuff)를 해야 한다. 거기에 커프링크스(cufflinks)까지 차야 하는 식이 그런 디테일이다. 이렇게 영국신사의 멋은 이탈리아 남자와 프랑스 남자들의 멋처럼 색상이 화려하거나 디자인이 요란하지 않아 금방 눈에 띄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멋을 부려야 한다. 영국신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은근하게 멋을 부리는 반면 이탈리아인들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규칙을 깨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국신사들에게는 정장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멋도 있다. 바로 시골 영국신사들의 일상 복장이다. 이건 눈에 띄는 정도를 지나 정장과는 완벽하게 다르다. 보통 홈스펀이라고 부르는 트위드 상의(tweed jacket)가 영국신사들이 가장 애호하는 일상복이다. 체크무늬라고 하는 격자(格子)무늬 상의에 역시 격자무늬 셔츠를 입고, 격자무늬 두꺼운 모직 넥타이를 맨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트위드 모직 천은 영국신사들의 대표 평상복의 양복천이다. 보통 에드워디안 패션이라고 부르는 트위드 상의는 몰이꾼을 이용해 말을 타고 사격하면서 동물 사냥을 하는 영국 최상류층이 입는 복장이다. 트위트 양복 상의의 팔꿈치에 가죽이나 다른 색의 천을 덧대서 멋을 부리기도 한다.
거기다가 하의는 눈에 띄는 걸 극히 피하는 영국신사답지 않은 화려한 색깔의 코듀로이 바지이다. 화려한 색깔도 보통 색깔이 아니다. 눈에 확 띄는 선명한 분홍색과 노란색, 심지어는 밝은 진홍색 바지도 용감하게 입는다. 지극히 영국적인 상의들과 확연하게 대비되는 하의는 묘하게 극과 극의 조합으로 잘 어울린다. 이렇게 영국신사들은 ‘말을 놀라게 하지(frighten the horses)’ 않아야 한다는 표현과는 완벽하게 다른 기상천외의 멋을 부린다. 해서 이런 복장을 한 영국 남자를 보면 전통을 지키는 시골에 농장과 장원을 가진 전형적인 시골 영국신사라고 보면 틀림없다.
이런 멋을 이어가는 새빌로 거리 3번지에는 한때 비틀스가 세운 애플 레코드 사무실과 지하 녹음실이 있었다. 그 녹음실에서 희대의 명곡 ‘렛잇비(Let It Be)’가 녹음되었다. 또한 1969년 1월 30일 비틀스의 유명한 지붕 꼭대기 공연이 이곳에서 있었다. 경찰에 의해 허가받지 않은 야외공연이란 이유로 중단되었지만 존 레논은 “나는 우리가 오디션을 통과했다고 희망한다”라고 만족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새빌로에는 맞춤양복과는 관련이 없는 영화팬과 비틀스 팬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 ‘핫하고 힙한 영국’ 저자 입력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