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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장 실연(失戀)당한 사람들
그것은 곧 백방생의 공력이 상승경지(上乘境地)에 올랐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일시에 전신의 주요 수십개의 혈관들이 터져 나가며
시원하게 융통되어 전신의 진기가 매우 부드럽고 맑으며 허(虛)해지게
되었다. 소위 유실반허(由實返虛) 자진귀박(自眞歸樸)이라고 불리우는 것
이다. 이제 주화입마의 위험성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진기를 뜻대로 사용할 수
가 있다고는 해도, 일단 세맥들의 상처가 있는 한은 그 공력의 일부밖
에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력은 사갑자이나 내공은 이갑자이고 게다가 사용가능한 것은 결국
일갑자의 무공(武功)이라..., 정말 엉망진창이요 알 수 없게 되었군!)이
미 비지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한 백방생은 문득 그렇게 넋놓고 중얼거
렸다. 하지만 앞으로 길을 열어 놓았으니 잘만 하면 터전을 닦아서 상달
(上達)로 가는 길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백방생은 지쳐서 쓰러지듯 침상위에 누워 잠을 잤다. 이윽고 다음날 아
침에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비급보따리와 병장기, 귀중품
등을 모조리 챙기고 아래로 내려가자, 일층의 반점(飯店)에서는 황진의
가 이미 식사를 시켜서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진의는 그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안색이 매우 좋아 보이는군요. 간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
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지 못했소. 어서 밥이나 먹고 태평객잔으로 가 보도록 합시다."
이 호화객점인 영춘빈관(迎春賓館)은 하나같이 최고급의 물품만 취급
하기 때문에 음식의 맛도 몹시 훌륭했다. 황진의도 이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지 매우 풍성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먹는
백방생의 마음은 그다지 편안하지가 못했다.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연
신 뭐라고 투덜댔고 흡사 모래를 씹는 듯한 표정이었다. 황진의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저 약간의 음식만 먹었을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백방생은 먼저 가까운 금포(金鋪)에 들러서 황금
십만냥에 달하는 금표를 더 찾았다. 그는 이번에는 황진의가 보는 앞에
서 공공연히 인출을 했는데, 그가 금표뭉치를 확인하고 나서 돌아오는
것을 보고도 황진의는 거의 이렇다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쇠로 만든 조각인형과 같은 모습이었다.
태평객잔(太平客棧)은 모두 삼층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중급
의 객점이었다. 두 사람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에는 객점에는 사람들이 거
의 없었고 대개는 옆의 피진주루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 객점에는 따
로 반점이 없으니 그쪽으로 식사를 하러 간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약간 허탈해진 기분으로 다시 객점을 나와 피진주루를 향해 걸었다.
헌데 두 사람이 미처 피진주루의 앞에 이르기 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백방생은 아주 득의에 찬듯한 기분나쁜 웃음소리를 듣고 신형을 멈춰
세우게 되었다. 그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그 음성이 매우 귀에
익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니나 다를까? 백방생은 그 쪽을
바라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니 저 자가 왜 저기서 웃고 있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상(大路上)이었다. 백방생이 그 사람을 찾
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남궁검상(南宮劍常)이
었다. 남궁검상은 한 명의 청의검사(靑衣劍士)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는데
대번에 그의 득의에 찬 기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방생은 이미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으므로 즉시 그쪽을 향해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 청의무사는 남궁검상의 수하인 듯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고
있었는데 아부의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검상은 말했다.
"좋아, 틀림없다면 내 즉시 가서 만나 봐야지. 그녀는 무공도 높고
또한 절세미인이며 당금의 무림의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은 존재이니
당연히 나에게 이로울 것이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이 일을 누구에게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 청의무사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예, 그 여자가 혹시 너무나도 지루해서 벌써 가버렸을 지도 모르겠습
니다. 그러니 어서 도련님께서는 그곳으로 가 보십시오."
남궁검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향해 한번 더 웃었다.
"요사이 그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더니 내 미리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흐흐, 이것은 바로 내가 출세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
다."
말이 끝나자 남궁검상은 청의무사를 보내고 나서 혼자서 한쪽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쪽은 피진주루와는 반대방향이었다. 백방생은 그
것을 보자 왠지 일이 궁금해 졌다. 그는 남궁검상이 대체 어떤 여자
를 만나려는가 하고 추적하고 싶어졌다. 그때 옆에서 그 광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던 황진의가 왠지 입가에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저 놀러가는 것이 아닐테니 우리는 일단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백방생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오."
두 사람은 이윽고 남궁검상의 뒤를 멀찍이 떨어져서 추적했다. 남궁검
상은 무공이 이미 제법 상당하기 때문에 자칫 눈치 채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왠지 남궁검상은 한가지 일로 마음이 들
떠 있는 지 뒤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몇 번의 골목길을 돌아가자 하나의 허름한 술집이 나타났다. 그 술집은
주머니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곳으로 자연 시설이나 분위기가
깨끗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남궁검상이 그 곳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
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궁검상은 한번 실내를 두리번 거
리더니 이내 싱글벙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따라서 그 주루의 앞에 바싹 다가가서 내부의 광경을 살폈
다. 백방생은 혹시 남궁검상이 그에게 친근한 듯이 보이던 사천당문(四川
唐門)의 소서시(笑西施) 당리(唐莉)와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그가 이전에 본 바에 의하면 당리는 용모나 무공 등이 뛰어
나고 대단히 똑똑하며 당찬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은밀히 만나 혼인하기 이전에 무슨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런 광경을 일부러 훔쳐보는 것이 과연 정인
군자(正人君子)다운 행동일까?
그러나 막상 실내의 광경을 바라본 백방생은 그만 깜짝 놀라서 얼굴색
이 변하고 말았다. 지금 실내에서 남궁검상과 자리를 마주하고 있는 사
람은 눈부신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당리는 보통 누런 황색의 옷
을 잘 입는 여자였다. 물론 그런 당리라고 해서 한번쯤 그런 값비싸고
아름다운 백의를 입어보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백방생이 어찌 그 백색의 의삼속에 숨겨진 그녀의 자태와 냉
오한 기질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백방생이 꿈
속에서도 그리던 진소유였다. 백방생은 갑자기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이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백방생은 불현듯 자신의 손에 와 닿는 한줄기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바로 황진의였다. 그녀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그녀는 전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도 우유부단한 거죠? 당신은 이렇게 허약해서 나중에
영웅(英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겠어요?"
백방생은 그녀의 눈빛을 본 순간 겨우 마음이 다소 진정되어 새롭게
안쪽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백의관음(白衣觀音), 그러한 별호에 걸맞게 진소유의 모습은 마치 더러
운 분위기 가운데 고고하게 피어 있는 한 떨기의 순백한 연꽃과도 흡사
했다. 사실 그녀가 일으키는 냉엄한 기질은 은근히 장내를 압도하여 강
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비록 소서시 당리가 아름답고 똑똑하다고
는 해도 결코 그녀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방생은 비로소 아까
남궁검상이 그토록 득의에 차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숨어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남자가 할일이 아니다!)
백방생은 문득 그렇게 결정하자 즉각 혼자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궁검상은 한참 입가에 득의에 찬 미소를 떠올리며 진소유에게 속
삭이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방생에게는 도무지 그러한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단단히 어떤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멍한 상태에
서, 백방생은 갑자기 그들의 탁자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소
유와 남궁검상은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듯이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
다. 백방생은 그렇듯 멍한 상태에서 진소유를 향해 말했다.
"나와 얘기 좀 나눌 수가 없겠소?"
아마도 백방생의 목소리는 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치는 것으
로 들렸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백방생은 밖으로 나와서 골목길에
진소유와 함께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방생은 문득 스스로 탄식했
다.
(이 애욕(愛慾)의 사슬은 정말 무겁고도 질긴 것이다. 나는 어째서 여
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백방생이 계속 멍하니 서있기만 하자 진소유는 답답한 지 싸늘한 표
정으로 질책하듯 말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얘기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요? 어째서 그렇게 꿀벙
어리죠? 갑자기 입이 얼어 붙기라도 했나요?"
진소유의 싸늘한 음성은 마치 차가운 얼음물과도 같아서 그의 심화
(心火)를 대번에 씻어주는 듯 했다. 백방생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강남(江南)에 다녀왔소."
진소유는 입가에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요? 어쩐지 그동안 보이지 않길래 난 죽은 줄로만 알았지요.
그래 나를 보자고 한 것이 고작 그런 말을 하기 위함이었나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줄 것이 있소."
진소유는 냉소(冷笑)했다.
"당신은 계속 저에게 주기만 하는 사람이로군요. 대체 이번에 저에게
주려는 것은 어떤 물건이죠? 돈인가요 아니면 무슨 사랑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줄 것은 돈도 사랑도 아니고 그저 열두권의 무공비급이오.?
진소유는 그 말에 비아냥거리던 태도가 약간 달라졌다. 백방생은 즉시
허리에 차고 있던 괴나리봇짐과 같은 책보따리를 꺼내어 진소유에게 건
네주었다. 진소유는 그것들을 보자 갑자기 안색이 달라졌다. 당연히 그
녀에게 몹시 익숙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약간 흥분한 듯 백
방생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얻었죠?"
진소유는 지금 겨우 절정경지였다. 당연히 앞으로 배워야할 부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남해보타도를 재건시키려면 그
것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보물(寶物)이었다. 그녀는 당시 남해보타도
로 달려갔으나 이미 사문은 멸문당하고 그 비급들도 또한 찾을 수가 없
었었다. 백방생은 그 비급들만큼은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
오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나는, 우연히 강남에서 한 비구니를 만나게 되었소. 그녀는 나이가 많
고... 어쨌든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하더구
려. 당신이 그것을 갖고 안갖고는 마음대로 하시오."
진소유는 다소 의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당신이 나의 사백이나 사숙을 만났단 말인가요?"
백방생은 공연히 자세히 말했다가는 마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므로 대강
얼버무렸다.
"모르겠소. 당시는 워낙 촉망중이어서. 당신이 만약 그것을 갖지 않겠
다면 나에게 도로 주시오. 내 지금 불태워 버리겠소."
그런데 진소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예요. 요새 무학상(武學上)의 의문점이 많았는데 이 비급들을 가
져다 주니 고맙군요. 어디서나 무공은 늘 필요한 것이니까요. 당신은 오
랜만에 제법 좋은 일을 한 셈이예요. 이 비급들은 내가 가질 것이니 일
부러 신경써서 태울 필요는 없어요."
백방생은 그녀가 의외로 그렇게 말해 주자 실로 한가지의 짐은 덜어
낸 셈이었다. 진소유가 얼른 보따리를 도로 싸서 자신의 허리 안쪽에
차는 것을 보다가 백방생은 다시 말했다.
"그 석륭안과는 헤어진 것이오? 어째서 그 남궁가(南宮家)의 이공자
(二公子)와 사귀는 것이오?"
진소유는 모처럼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다가 그말에 이내 표정이
다시 냉랭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싸늘하게 백방생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 이전에 이미 뭐라고 했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
나요? 내 이번에는 비록 좋은 일을 해서 당신을 그냥 두고 있지만, 그
렇다고 해서 감히 나의 일에 간섭을 하려는 것인가요? 그렇게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겠나요?"
백방생은 그만 다시 기분이 암담해 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내 처지를 잘 모르겠소. 그게 어쨌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말을 하고 나서 그녀의 발길이 날아올 것을 예상했다. 아니
오히려 기대했는 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의 발길에 맞아 갈비뼈 등이 몇
개 부러진다고 해도 마음만은 후련해 질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
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소유는 이번에는 거칠게 나오지 않고 오히려 부드
럽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럼 당신은 아직도 나에게 사랑을 원한다는 말인가요?"
진소유의 눈빛은 기묘하게 반짝이고있었다. 흡사 그 검은 바다속에 무
한한 보석의 마력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그 갸름하고 가냘프
게만 보이는 그 얼굴에 어떻게 저런 강한 기질(氣質)들이 어울릴 수 있
을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그 부드러운 시선을 받자 백
방생은 마치 뼈속까지 녹는듯 하여 정신이 완전히 흐물흐물해 졌다.
백방생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소. 나는 이번에 돈도 많이 벌고, 또한 몸도 치료하여 그것
을 바탕으로 하여 좋은 일도 한번 해보려고 하오. 당신이 만약 그 남궁
검상을 사귀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오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진소유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당신은 남들처럼 그렇게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요. 나는 물론 목적
이 있지만 그것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역시 당신은 앞으로
도 나를 멀리하는 게 좋아요. 이것은 비급을 가져다 주었기에 내가 해
주는 마지막 충고예요."
백방생은 그녀의 그런 진심이 깃든 듯한 정색을 한 말을 듣자 가슴이
더욱 벌겋게 달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언성을
높여서 소리쳤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겠소. 나는 언젠가는 당신을 반드시 내
아내로 맞아들일 거요?"
진소유는 그 말에 안색이 다시 심하게 찌푸러져 버렸다.
"당신이 만약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
을 거예요. 마음대로 해요!"
진소유는 그 말과 함께 신형을 돌렸다. 백방생은 감히 그녀를 잡지 못
하고 뒤를 보며 소리쳤다.
"당신은 돈이 더 필요하지는 않소? 나는 이번에 많은 금은보화를
샀는데 그것을 가져가 주시오! 소유! 잠깐 나 좀 보시오!"
그러나 진소유는 이후 전혀 신형을 돌리지 않고 곧장 신법을 펼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백방생은 그만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넋을 잃은
듯 했다. 문득 그 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은 알보고니 위군자(僞君子)로군요. 어째서 좀더 적극적으로 그녀
에게 다가서지 않는 거죠? 그렇게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쓴다고 해서 해결
될 일이 아니잖아요."
바로 황진의였다. 백방생은 그녀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황진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정말로 그렇게 보였소?"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말한 위군자라는 말은 사실 잘못된 거예요. 바로 말하자면 거짓사
랑이란 말이죠. 저는 위군자는 참을 수가 있어도 간혹 사랑을 거짓으로
하는 사람은 참을 수가 없어져요."
황진의는 차가운 안색으로 백방생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순 그녀의
두눈에서 깊은 혜광(慧光)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저는 느낌으로 알 수가 있죠. 당신은 지금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
라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일정한 목적을 위해 그녀를 사랑하
는 척 하는 거죠."
백방생은 저도 모르게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내게 목적이 있다고?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사랑이 순수해진
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말했다.
"사랑이란 최소한 뜨거운 가슴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는 그런 뜨거운 가슴이 없어요."
백방생은 그저 넋나간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낭자는 그래서 진낭자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황진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모르죠. 그녀는 역시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는 지도 모르니까
요."
백방생은 천천히 대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황진의가 따라
오고 있었다. 백방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나에게는 따뜻한 가슴이 남아있지 않은 지도 모르오."
황진의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로 백방생이 그런
것을 시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마하니 백방생은 거짓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게 무슨 말이죠?"
백방생은 이내 자신의 성장과정과 지난날 사고가 나던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동안의 자신의 절망과 온갖 고통, 그리고
진소유와의 관계도 털어놓았다. 그는 이윽고 말했다.
"나는 요사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소. 그래서 나는 모든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또한 그렇게 비겁해졌는 지도 모르오. 나는 솔직히
그녀와 운명처럼 그렇게 가까와지게 되었지만, 그러나 겉으로는 사랑한
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녀가 정말로 내게 올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우려하고 있소. 나는 점차로 바보가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오."
황진의는 묵묵히 오랜 얘기를 듣고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작 그녀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인가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것은 잘 모르겠소. 다만 나는 한가지 일만은 후회하고 있소."
황진의는 말했다.
"그녀에게 돈을 준 일 말인가요?"
백방생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건 내가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들 중의 하나이
지.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 밤에 어째서 그녀를 갖지 않
고 그냥 보냈느냐 하는 것이오."
황진의는 시선을 백방생에게 보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그녀에게 욕정 때문에 끌리고 있다고 생각하
나요?"
백방생은 안색이 벌개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소. 이건 여자인 당신에게 말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밤
중뿐만 아니라 간혹 낮에도 그녀의 알몸을 보는 꿈을 꾼다오."
황진의는 다소 안색을 붉히며 공박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그날 그녀를 범하지 않았죠? 정당한 거래가
아니었나요?"
백방생은 말했다.
"아마도 그 때는 어떤 귀신에 씌였던 것 같소. 만일 그 때 내가 그녀
를 가졌더라면 아마도... 그녀에 대해 이렇게 미련을 두지도 않게 되었
었을 것이오."
황진의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당신의 얘기를 들으니 나도 바보가 되는 것 같군요. 당신은
그 날 절대로 귀신에 씌였던 것이 아니었어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뭐라구요? 낭자가 그걸 알 수가 있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깊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잘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왠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백방생은 말했다.
"그럼 내가 그날 일부러 그랬다는 말이오?"
황진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고보면 스스로를 멸시하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
녀에게는 일종의 위안을 느꼈을 거예요. 그녀는 당신의 부모와도 밀접
한 연관이 있으니까요. 당연히 당신은 스스로에게는 함부로 하면서도 그
녀는 잘 되기를 바랬던 거죠. 따라서 당신은 온갖 방법을 다해서 사랑을
가장하여 그녀에게 잘해주려는 거죠. 당신이 그녀를 몰래 욕정의 대상
으로 삼는 것은 그러한 행위에 대한 일종의 자기보상심리와 같은 거
죠. 즉 당신은 자신마저도 초월하여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
예요."
백방생은 어리둥절해 졌다.
"그건 아까와는 얘기가 다르지 않소."
황진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까는 내가 그저 겉만 보고 판단했던 거예요. 무릇 인간의 심리를 안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은 오히려 스스로의
사랑의 감정마저 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하지만 결국 당신은 나중에 스
스로 그녀를 뼈에 사무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백방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고?)
황진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사실은 나도 말을 하고서도 잘 모르겠어요. 이럴 때는 그저 더이상
생각하지 말고 술이나 한 잔 하는 것이 좋겠죠. 자, 어서 저 술집으로
가도록 하죠."
어느새 두 사람은 피진주루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그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 술집은 이전에 특이한 기억이 있었던 곳으로 인상이 깊었다. 또한백
방생은거기에서남궁검상등의젊은이들과만날수가있었다. 게다가 증평이 뒤
따라온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문득 그 생각을 하자 백방생은 불현듯 증
평이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만일 그녀의 뜻대로 되었다면 지공과 새살림을 차리고 있을 지도 모르
는 일이다.
그렇게 추억이 깃든 주루의 이층으로 올라가자 과연 그들을 맞는 사람
들이 있기는 했다. 그들은 역시 백방생이 이전에 이곳에서 만났던 오
대세가의 젊은 남녀들이었다. 옛추억이 어린 곳에서 그 옛사람들을 만
났으니 과거의 정취가 우러날만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백방생은 오히
려 그들을 대하자 배가 아프고 무기력 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아, 저기 백공자와 황소저께서 오시는군?"
누군가가 좌중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바로 섬전권(閃電拳) 황보헌(皇甫
軒)이었다. 다행히도 남궁검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 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탁자를 하나로 합치고서 삼녀사남(三女四男),
일곱명이나 둥글게 앉아 있었다. 그곳은 창가의 전망좋은 자리였으나 그
들은 이미 더러 취기가 도도해져서 창밖의 풍경 정도는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백방생은 급히 되돌아 나가고 싶었으나 그만 그들에게 들키게 되어
그럴수도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에 다가갔
다.
"여러분이 즐겁게 식사를 하시는데 소생이 그만 방해가 되고 말았군
요?"
일순 옆에 앉아 있던 팽영(閤ㅤ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팔을 잡아서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백형! 그렇게 고지식하게 인사를 차릴 건 뭐가 있겠소? 그저 사내답게
같이 앉아서 한 잔 하면 되는 것이지."
팽영은 약간 취한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 백방생을 자리에 앉혔는데
그만 그 자리가 황보능파(皇甫凌波)의 옆이었다. 팽영은 또한 말로 적당
히 장난하듯 하여 황진의를 그 옆에 앉게 했다. 그리고는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자, 우리 이렇게 다시 새로운 손님을 모셨으니 건배를 해야 하지 않겠
소? 자, 모두 한잔씩 따랐으면 술을 들도록 하십시오. 이 끝없이 혼란스
러운 세상에 우리가 한 잔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소?"
팽영은 그렇게 말하고 나자 스스로 술잔을 들어 마시고 이어 두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좌중에서는 그처럼 석잔의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한 잔의 술만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백방생은 눈치껏 비어 있는 술잔에 술을 따라서 한 잔
들이켰다. 이 집의 술맛은 그야말로 일품(一品)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핑계삼더라도 한 잔 마시지 않을 수가 없는 풍취가 거기에 있었다. 백방
생은 손수 따라서 황진의에게도 한 잔을 권했다. 이미 술을 마시고 싶다
고 했으므로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한 잔을 마셨다.
백방생은 그녀가 다시 따라주는 술잔을 받으며 역시 가까이 있는 사
람과는 인사를 해야 하겠기에 옆의 황보능파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저는 강남에 다녀왔는데 모두들 이 곳에 계셨었
군요?"
황보능파는 약간 상기된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기이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헌데 백공자께서는 아직도 호법을 구하신다면서요? 게다가 아주
거액을 걸고 말이예요."
백방생은 다소 고소하며 말했다.
"예, 그 얘기가 여기까지 알려졌군요.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다지 거
액인 것은 아닙니다."
황보능파는 문득 전음으로 말했다.
(듣자니 저기 황소저도 일년에 오만냥의 황금을 주고 산 호위라고 하던
데, 제가 만약 호법이 된다면 얼마를 주실 거죠?)
백방생은 그녀가 갑자기 전음으로 물어오자 다소 입장이 난처해졌다.
만일 함께 전음을 펼친다면 그것은 황진의를 은근히 놀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육성으로 대답했다.
"낭자께서 만일 응하신다면 일년에 황금 만 냥을 드리겠습니다."
황진의와 황보능파와의 무공의 격차등을 따져볼 때 그것은 사실 오히려
많이 생각해 준 액수였다. 하지만 황보능파는 왠지 다소 실망하는 기색
을 보였다.
"겨우 그것밖에는 안 되나요?"
백방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금액도 낭자에게는 과분한 것이오.)
팽영이 다시 다가와서 백방생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백형! 어째서 그동안 그리 격조하셨소? 우리들이야 이런 곳에서 술만
마시고 있지만 백형은 그동안 달리 세상을 구할 방법이라도 생각해 냈
다는 말이오?"
백방생은 술잔을 받으며 말했다.
"팽형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 군요."
그때였다. 갑자기 당독(唐獨)이 오른손으로 탁자를 쾅, 하고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당형!"
황보헌이 옆에서 손을 잡으며 말리자 당독은 그것을 뿌리치며 소리쳤
다.
"날 내버려 두시오? 황보형은 그래 이런 상황에서도 나더러 참으라는
말이오?"
그것을 보고 갑자기 남궁지약(南宮芝若)이 벌떡 일어서며 뾰족한 음성
으로 소리쳤다.
"그래, 네가 못참겠다면 어쩔 테야? 나에게 덤비기라도 하겠다는 말이
냐?"
당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만 고개를 돌리고 아래층으로 내
려가 버렸다.
"좋아, 내가 참지요."
백방생은 은근히 이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갑자기 이런 변괴가 생겨날 줄은 몰랐다. 황진의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모습이지만 그는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한 기분이었
다. 남궁지약도 역시 휑하니 나가버렸고 실내에는 썰렁한 기운만이 감돌
았다.
황보헌이 황진의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황소저,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는 것은 예사가 아니겠소?"
하지만 백방생은 문득 어째서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알것 같았다. 바로 지금 이자리에 빠지고 없는 남궁검상 때문이었다.
그가 진소유를 사귀고 있다는 얘기가 알려지자 이와 같은 분란이 벌어
지고 있는 것이리라. 비록 강호무림이라고 해도 여전히 정조는 중요시
되는 관념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그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만일 소서시 당리가 남궁검상과 사귀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면, 또한 그것이 양가의 합의하에 혼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
면 갑작스런 남궁검상의 변심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게다가
사천당문은 역시 자존심이 높기로 소문난 명문의 무림세가가 아니던
가? 사실 그와 같은 추측은 백방생의 자유이기는 해도, 지금 그의 맞
은편에서 혼자서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당리(唐莉)
의 얼굴만 봐도 능히 그 추측은 어느 정도 확신할 수가 있었다. 강호의
여인은 강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앞에서도 강할지가 의문이었다.
황진의는 미소하며 황보헌에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저도 늘 그런 것을 대하며 사는 걸요. 여기에 계신 이 백방
생 백공자도 실은 실연(失戀)을 당하여 항상 마음의 병(病)을 앓고 있
죠.?
백방생은 문득 황진의가 공연히 자신의 일을 끌어들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그녀 자신도 한사람을 날마다 그리워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일까?"
황보능파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백방생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어마, 백공자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세상에 그런 갑부에게
실연의 아픔을 주는 사람도 있나요?"
백방생은 고소(苦笑)하며 말했다.
"내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오. 본래 돈이라는 것은 그저 적당히 있으면
되는 거지요. 중요한 것은 그 인물의 됨됨이 인데, 나는 보다시피 이렇
게 어리숙하게 생겨 먹었으니 실연(失戀)을 당해도 마땅한 것이오."
황보능파가 말했다.
"그럼 당신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사람은 그 증평, 증낭자였나요?"
백방생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녀는 비록 떠나기는 했지만 나 역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소."
황진의가 말했다.
"그에게 실연의 아픔을 선사한 사람은 바로 진소유(陳小柔), 진낭자예
요. 두 사람은 본래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번에 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거죠."
백방생은 황진의가 그런 얘기까지 해버리자 그만 쓴 웃음을 짓고 말았
다. 이것은 백방생이 그녀를 들먹인데 대한 일종의 보복적인 행위로 여겨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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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