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오페라의 역사를 말할 때, 오페라는 작곡가의 시대, 가수의 시대,지휘자의 시대에 이어 연출가의 시대를 맞았다고 한다.그만큼, 현대의 오페라는 연출가의 재해석에 의해서 더욱 친근한 작품으로,때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탄생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제는 거의 새로운 창작이 멈춘 오페라라는 고정된 장르의 예술이 연출가의 눈에 의해 다시 해석되고 연출가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나 여전히 창작이 계속되는 장르가 된 것이다. 청각이외에 시각까지 가미된 형식이기 때문에 더욱 연출가가 활약할 여지가 다른 음악 장르보다 월등히 높다.
지난달 제 5회를 맞은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국립창극단의 '수궁가'는,우리의 창극도 서구의 오페라 연출가에 의해서 재해석되고 재탄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
수궁가를 연출한 사람은 아힘 프라이어. 독일 출신의 오페라 연출가로서 뮌헨, 함부르크, 비엔나, 잘츠부르크, 엘에이 등지에서 활약했던 그는 마탄의 사수, 마술 피리, 신데렐라, 바그너의 반지 등의 오페라를 연출하여 각광을 받았고,그 자신 오페라 연출뿐만 아니라 의상제작, 무대 디자인도 도맡아 하기로 유명하다.
서양의 오페라 연출가의 눈으로 해석된 우리 창극은 어떤 모습일까...무엇보다도 창극의 내용은 물론, 맛깔스런 고유의 감칠맛이 나는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에 어떤 연출의 옷을 입힐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우리도 웬만큼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 긴 시간을 참고 듣기도 어려울 테고,알아듣기 어렵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는 우선 창극의 해설사 역할로 전체 창극을 설명하고 진행하는 '도창'을 '마담 판소리'라고 이름을 붙이고, 5미터 높이의 리프트 위에 올라서 푸른색 긴 치마를 입고 전체 창극을 압도하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사실 소리꾼 혼자 하는 판소리가 창극화 되면서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기는 하지만,뭐니 뭐니 해도 창극에서 극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이는 도창이다.그만큼 서양의 오페라 연출가는 극의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도창의 역할에 주목했던 것이다.
사실 오페라는 별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은 아니다.그런데 간혹 가다가 오페라가 쉽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마담 판소리 역을 맡은 명창 안숙선 씨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늘 창극 전체를 아우르는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그 높은 전동 리프트에 올려 지니 그의 카리스마는 더욱 강렬하게 무대를 장악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도 밤의 여왕의 역할을 높은 리프트에 세워 여왕의 악한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연출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그는 오페라 스토리 속의 등장인물 중 하나이지 해설자 같은 역은 아니었다.
바로 오페라 연출가들의 오페라의 행간을 읽고 무대 장치나 배우들의 행동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는 경우이다.그런 경우 일반 관객이 놓칠 수 있는 수많은 복선들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아힘 프라이어도 마찬가지였다.우선 그는 '용왕이 왜 아프냐?' 라는 질문으로 연출을 시작했다.느닷없이 용왕이 아프다고 하니 자신으로서는 관객과 극의 시작 사이에 놓을 다리가 필요했다.그는 독자적인 해석으로 용왕이 무수한 페트병과 쓰레기 때문에 바닷물이 오염되어 아픈 것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시작되는 무대에도 수많은 페트병들을 천정에 매달아 바다 속에 떠도는 것으로 표현했다.등장인물의 얼굴에는 마치 청사초롱을 들고 함을 팔러가는 함진아비가 쓴 오징어 가면처럼,종이로 된 가면을 씌웠다. 가면도, 의상도, 무대도 연출가가 직접 그렸다.
자라에게 토끼 간을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리는 1막에 용왕은 노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용궁을 찾은 토끼가 꾀를 내 뭍으로 도망가는 2막의 용왕의 의상은 검은 바탕에 노란색 무늬로 바뀌어 병색이 깊어 졌음이 분명하게 표현됐다.다른 인물보다 월등히 거구인 용왕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용왕 역은 두 사람이 맡았다.
한사람이 옷 안으로 들어가 용왕의 하반신 역할을 했다.한명은 서고 한명은 드러누워 옆으로 비스듬히 괴고 누운 용왕을 표현했다.옷자락 끝으로 두 발을 내밀고 맨발의 발 연기를 익살스럽게 보여준 배우가 얼마나 덥고 힘들었을까...극이 끝난 후 무대 뒤에 가 인사를 하면서 용왕 다리 역할을 하신 분이 누구냐고 물으니,땀을 뻘뻘 흘린 배우가 알아줘서 고맙다며 나를 얼싸 안았다.
국제 페스티벌을 위해 영어로 번역된 자막이 스크린에 보였다.창극 속에 나오는 현학적인 고사성어, 한문체 문장들이 종종 영어 번역 덕분에 더 잘 이해가 되기도 했다.대체로 영어 번역은 창극의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성스러웠다.
창극을 보니, 이탈리아에서 태동된 민중 예술의 하나인 코메디아 델 라르테와 무척 흡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민중의 애환을 그리고 귀족을 조롱하며 흥을 돋웠던 코메디아 델 라르테도 배우들은 저마다 고전속의 현학적인 시 구절이나 문구를 외워 즉흥 대사를 읊곤 했다는 것이다.
우리 창극도 마찬가지였다."저놈 문자 꽤나 하네그려. 나도 이제 문자 통 깨나 열어 볼까 잉~?" 아힘 프라이어는, 수궁가를 연출해보고서 이제 새로운 레퍼토리를 갈구하는 서양 관객들에게 우리 창극이 상당히 어필할 것이라고 장담했다.아닌 게 아니라 서양인의 손으로 연출된 우리 창극을 보니,우리 창극의 음조나 발성, 극의 구성이 서양의 바로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았다.
단조로운 음조에, 대사인지 노래인지 모르겠는 레치타티보,보통 세 시간은 넘는 긴 스토리로 구성된 바로크 오페라는 종종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졸지 않게 하기 위해(?) 파격적인 연출을 하거나 아예 극의 시각적인 시점을 현대로 옮겨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이미 세계 유수의 극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연출가가 연출을 했다 하니,우리끼리 만든 작품과는 달리 서구의 극장에서 공연할 스케줄이 수월하게 잡혔다 한다.역시 우리 것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메신저가 필요했고,연출가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 냈다.
서구의 오페라 극장에 서는 우리의 창극. 과연 어떤 평을 받을까.나는 춘향전, 심청전, 흥보전 등 우리 대표적인 창극들이 차례로 오페라 연출가의 손에 의해 재탄생되는 날을 꿈꾼다. <조윤선/국회의원/국회 문방위 위원/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