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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뿌리찾기와 족보
1.경주 김씨(慶州 金氏) 탄생
현재 180만 육박, 국내 성씨 중 4번째로 많아.
신라계 김씨 본관만 356개 동조이성도 9개.
성관 역사 길고 복잡. 분파 놓고 법정다툼도.
신라왕·김부식 비롯 근·현대 김홍집 등 배출
우리나라의 김씨는 가야계(김해김씨)와 사성 김해김씨(시조 김충선)를 제외하면 대부분 신라계 김씨이다.
신라계 김씨는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며, 전체 인구는 김씨 인구 1072만명(2010년 인구센서스) 중 630만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뿌리이면서 다른 성씨를 쓰는 안동권씨, 수성최씨 등 9개 본관의 인구를 더하면 700만명이 넘는다.
2.신라계 김씨의 갈래
'신라김씨 총연합대종원'에 따르면, 신라계 김씨의 본관은 총 356개이며, 다른 성씨를 쓰고 있는 성관은 9개(감천문씨·강릉왕씨·곡산연씨 광주이씨·수성최씨·안동권씨·영양남씨·철원궁씨·태안사씨)이다.
그중 경순왕을 뿌리로 삼는 본관은 총 179개이며, 177개 본관이 대보공 김알지를 뿌리로 삼고 있다. 그 외의 본관에는 내물왕(안성김씨), 태종무열왕(강릉김씨 등 4개), 신무왕(광산김씨 등 9개), 헌안왕(광주이씨 등 4개), 희강왕(성주김씨), 문성왕(선산김씨 등 2)을 시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계 김씨의 분화는 경순왕 이후로 판단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현재 김부식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신라삼성연원보에 따르면 경순왕의 후예라고 주장된다).
즉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본관은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본관의식이 생겨나고, 본관별 가계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대보공 김알지나 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후대에 자신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
3.경주김씨의 갈래
신라계 김씨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본관은 경주김씨이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경주김씨는 총 173만6798명으로 김해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에 이어 4위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경주김씨는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鍾)을 시조로 하는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아들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대안군파(大安君派),
경순왕의 후예이지만 중간 세계가 실전(失傳)된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대장군파(大將軍派),
경순왕의 아들 김은열의 후손인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하는 태사공파(太師公派),
같은 김은열의 후손인 김장유(金將有)를 시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
5개 파가 주종을 이룬다.
이들은 또다시 후세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지파가 생겨났다.
영분공파는 강릉공파·검교공파·두계공파·밀직공파·병조판서공파·부사공파·수은공파·시어사공파·옥구참공파·월성부원군파·참찬공파·판삼사사공파·평장사공파·현감공파로,
대안군파는 경파·백촌공파·병판공파·부산파·성천파·시랑공파·시중공파·예조판서공파·익화군파·차호공파·참판공파·청원파·평창파·호정공파로,
대장군공파는 감사공파·계림군파·공호공파·동지이판공파·봉산파·부제학공파·연동파·정수공파·춘고공파·판윤공파·현령공파·만호공파·경재공파·망주헌고파로 분파되었다.
또 태사공파는 전서공파·판관공파·좌랑공파·사승공파·공평공파·우재공파·송재공파로,
판도판서공파는 감사공파·공조판서공파·금제공파·사인공파·식암공파·장암공파·직장공파·진사공파·참교공파·참의공파·충암공파로 분파되었다.
이렇듯 경주김씨는 역사가 오래된 성관으로 대단히 복잡하여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일례로 같은 경주김씨 분파끼리 법정다툼도 벌어진다.
대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가 자신들의 파조(派祖)를 경순왕의 후예로만 알려진 대장군 김순웅이 아니라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김일·金鎰)라고 주장하는 대동보를 제작 배포하자,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종회 측에서 대동보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것이다.
이에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표방하고 있는 부안김씨와 통천김씨 측도 가세를 했으며, 신라김씨연합대종원 측도 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의 대동보가 잘못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즉, 대장군공파 대동보편찬위원회가 근거로 삼고 있는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에 발행된 것으로 위보(僞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라삼성연원보가 위보임은 '경순왕에게 죽방부인 박씨와 낙랑공주 외에 석씨(昔氏) 부인이 있었다는 것'과 '경순왕의 아들이 8명이 아닌 14명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 책의 기술에 따르다 보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마의태자의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김부식은 경주 호장 김위영의 증손자로 무열왕 자손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할 것"이라며, 장군공파 대동보 편찬위원회의 대동보 제작 배포중지 신청을 기각했다. 즉 법원에서는 김순웅이 마의태자의 아들인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경기도 연천의 경순왕릉 (신라 56대 마지막왕)
4.경주김씨 분파와 연혁
경주김씨 영분공파의 파조인 김명종은 고려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다. 그의 6세손 김예겸(金禮謙)은 삼한벽상공신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문종 때 참지정사로 인재 등용에 공헌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또 12세손인 김인경(金仁鏡)은 조충과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대안군파의 파조인 김은열은 공부시랑을 거쳐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은 경주김씨뿐 아니라, (구)안동김씨 등 여러 본관으로 나뉘어졌다. 그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국 사신을 접객하는 관반사(館伴使)를 맡아보았으며,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김약선(공부시랑)·기손(평장사)·경손(추밀원부사) 3형제가 유명하다.
판도판서공파 파조인 김장유는 충북 보은에서 은거하여 생을 마쳤는데, 그 후손으로 김효정(金孝貞·정랑)의 아들인 김정(金淨)은 조광조와 더불어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36세에 사사되었다.
태사공파의 파조인 김인관은 예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으로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그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둔하였다. 특히 김자수의 8세손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 이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왔다. 특히 부마가 된 김한신(金漢藎·영조의 딸 화옹옹주의 남편)의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유명하다.
장군공파의 파조 김순웅은 고려 초에 상장군을 거쳐 대장군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그의 선조가 누구인가에 대해선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장군공파의 후손으로는 13세손 김균(金菌)이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면서 계림군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특히 계림군 후손이 번창했는데, 정승 3명과 수많은 판서급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판서 김남중(金南重),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부친 김주신(金柱臣),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서 대제학 김창희(金昌熙),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등이 그의 후손이다.
5.경주김씨의 인물들
신라에서 김씨는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총 38명의 왕을 배출하였다. 그중 첫 김씨 왕이 13대 미추왕이며, 17대 내물왕 이후로 김씨 왕권이 확립되었다. 그 후 52대 효공왕 이후 박씨에서 3명의 왕이 나왔다가, 다시 김씨인 경순왕으로 이어진 후 막을 내렸다. 경주김씨를 논하면서 신라의 38왕에 대해 거론해야 하지만, 신라 38왕은 신라계 김씨 중 어느 한 본관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경주김씨 인물로 거론하긴 힘들다.
김부식은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태조에게 귀의하여 경주지방의 호장이 되었다. 아버지 근(覲) 슬하에 4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을 했는데 3형제가 한림직을 맡았다. 그는 유교이념의 실현에 노력한 유학자였다.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고,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은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吏部事)가 되었으며,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事 上柱國 太子太保) 직도 겸하였다. 그 후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집필하였다. 말년엔 관란사를 짓고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정조시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부마인 김한진이 후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이다. 실학파 중에서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수학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후 사절단으로 북경 왕래를 하였고, 그 경험이 학문적 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9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이때 추사체라고 불리는 글씨는 물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이 완성되었다. 또한 문무왕비문을 해석하는 등 금석학 연구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김홍집은 개성유수를 지낸 김영작(金永爵) 아들로 태어났다. 천주교도이자 개화사상에 식견을 지닌 부친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규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급진개화파였던 김옥균과 대별되는 온건개화파의 수장으로 유명한 그는 1차에서 4차에 걸쳐 김홍집 내각의 수장이 되어 갑오개혁 등을 이끌었다. 그러나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단발령을 거치면서 친러파의 등장으로 내각이 무너지고, 광화문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의 발전을 위해 선진 외국과 제휴하고 교류해야 한다는 것과 점진적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문수(金文洙)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출생했으며, 국회의원 3선을 거쳐 경기도지사에 재직 중이다. 경북고와 서울대 상대에 다녔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등을 이끌면서 NL(민족해방)파에 대별되는 PD(민중민주)파를 대표하기도 했다. 그 후 장기표·이재오 등과 민중당을 결성하여 정계에 입문하였고, 신한국당과 합당하였다. 이후 3번에 걸쳐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거쳐 경기도지사에 재선되었다.
김연아(金姸兒)는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했다. 종교는 천주교이고 고려대에 재학 중이며, 세계적인 빙상선수(피겨스케이팅)가 되었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부문 올림픽 챔피언이다. 그녀는 2009 월드 챔피언, 2009 대륙간 챔피언, 2007년에서 10년까지 그랑프리 파이널 챔피언에 올랐으며, 2010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부문 챔피언에 올랐다. 현재 피겨스케이팅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그리고 종합부분에서 여자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김성회/세계일보
조선시대 조속(趙涑 1595-1668)이 그린 <금궤도金櫃圖>
<금궤도>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계림고사도鷄林故事圖>라 부르기도 한다. 윗면에 인조(재위 1623-1649)의 어제(御製)가 포함된 글이 있어 누가, 언제, 왜 그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조속은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장령(掌令-종4품)을 지내기도 했으나 문예, 서화에 전념하였다. 시, 서, 화에 능하고 영모(翎毛), 절지(折枝), 매죽(梅竹)을 잘 그렸는데, 자신의 작품에 도장이나 제목을 잘 쓰지 않아 <금궤도> 외에 그가 그렸다고 알려진 그림은 많지 않다.
< 금궤도>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그린 그림 중에 찾아보기 힘든 채색화인데, 왕의 명에 따라 고사(故事)를 그렸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긍정적으로 보는 <금궤도>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혼란스러웠던 17세기,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뿌리찾기와 족보
뿌리 없는 나무가 없다 했으니 누구나 자기 조상이 있으며, 더구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여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을 중요시하여 왔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서구문물(西歐文物)의 유입과정에서 이러한 전통문화가 많이 훼손된 면이 없지 않으나 이즈음 우리의 전통예절이나 뿌리 찾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자기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족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족보라고 하면 흔히 한·중·일(韓·中·日)이나 동양의 일부 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알기 쉬우나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의 족보가 가장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하루에 수백 명의 열람자가 도서관에 모이고 있으며, 하버드 대학에서는 한국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각 성씨의 족보를 모두 필름으로 촬영해 간 바 있다.
족보에서 자기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1. 당연한 얘기지만 우선 족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간혹 종손(宗孫)이 아니거나 종손이라도 족보가 없는 집이 있는데, 그러한 경우 낙담하지 말고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그곳에는 우리나라 각 성씨의 족보가 구비되어 있다. 그곳에서 자기 성씨(姓氏)의 본관(本貫) 족보를 찾아보면 된다.
간혹 자기의 시조나 파(派)를 모르는 사람은 있으나 거의 다 본관(本貫)은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본관도 모른다면 본인의 제적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 보면 알 수 있다.
2. 족보가 준비되었으면, 자기가 어느 파(派)에 속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파(派)를 알지 못할 경우에는 조상이 어느 지역에서 살았고, 그 지방에 어떤 파(派)가 살았던 가를 확인해야 한다. 파(派)의 명칭은 흔히 파조(派祖)의 관작명(官爵名)이나 시호 또는 아호(雅號)와 세거지명(世居地名) 등을 따서 붙인다. 이러한 점을 참고하여 본인의 파(派)를 알아야 한다.
그래도 파(派)를 모를 때는 부득이 씨족 전체가 수록되어 있는 대동보(大同譜)를 일일이 찾아 확인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선 자기의 가까운 친인척이나 아버지, 할아버지의 고향을 찾아다니다 보면 그중 누군가는 파(派)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의 친인척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본인의 제적등본을 발급받아 본인과 가까운 관계가 되는 사람들을 확인하여 그 사람들의 제적등본을 계속 발급받아 추적해 나가면 된다.
또한 종친회를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조상을 찾겠다는 데 하늘인들 돕지 않을 것인가?
3. 자기의 파(派)를 알았으면 이제 족보에서 자기의 파(派)가 나와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방대한 양의 족보에서 자기가 속한 파(派)를 쉽게 찾기 위해서는 족보의 앞부분에 있는 세계도(世系圖)를 보아야 한다.
세계도란 시조로부터 분파된 계열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도표로 파계도, 세계도표, 상계도라고도 하며, 대략 분파(分派) 계도를 그려놓고 무슨 파(派)는 몇 권(卷) 몇 면(面)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세계도에서 자기의 파(派)가 몇 권(卷) 몇 면(面)에 실려있는지를 알아내어 해당 면(面, 쪽, PAGE)을 찾았으면 이번엔 자기의 세수(世數)를 알아야 한다.
4. 족보는 횡으로 단을 갈라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혈손을 같은 단에 횡으로 배열하였으므로 자기 세의 단만 보면 된다. 만일 세수를 모르면 항렬자로 세수를 헤아려야 한다.
5. 세수(世數)까지 알았으면 끝으로 항렬자를 알아야 하고 족보에 기록된 이름을 알아야 한다. 간혹 집에서 부르는 이름에 항렬자를 넣지 않았더라도 족보에 실을 때는 항렬자를 넣은 이름을 실었으니 족보에 실린 이름을 알아야 한다. 물론,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집에서 부르는 이름 그대로 실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자기 세(世)의 단(段)을 차례로 차근차근 짚어 나가다 보면 자기의 이름이 나올 것이다. 만일 자기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면 꼭 자기의 이름만 갖고 찾을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으로도 찾아볼 일이다.
족보를 보는 방법
〈출처: http://yeongyangkim.com/〉
족보를 보면 序文(서문=머리말)이 나오는데, 이는 자랑스러운 가문과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고취시키고 족보 간행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는 글이며, 족보의 이름은〇〇譜(예를 들어 庚午譜=경오보)라 하여 족보 간행 년도의 간지를 따 족보의 명칭으로 삼는다.
본문에는 始祖(시조)와 鼻祖(비조)로부터 시작하여 가로 1칸을 같은 代(대)로 하여 보통 6칸으로 되어 있는데, 기록내용을 보면 처음에 이름자가 나오고 字(자)와 號(호)가 있으면 기록한다. 이어서 출생과 시망연도가 표시된다. 20세 이전에 사망하면 夭折(요절)이란 뜻의 早夭(조요)라 표시하고 7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하면 享年(향년), 70세가 넘어 사망하면 壽(수)라 하고 旁書欄(방서란)에 기록한다.
諡號(시호=사후 나라에서 내린 이름)와 官職(관직)이 있으면 기록되고 妃匹(비필)이라 하여 배우자를 표시하는데 보통 配(배)자 만을 기록하며 배우자의 본관성씨와 그 아버지의 이름자와 관직이 기록된다.
또한 묘소가 기록되는데 소재지와 方位(방위) 그리고 石物(석물) 등을 표시하며, 합장 여부 등도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러 出繼(출후·출계)라 하는 것은 다른 집으로 養子(양자)를 간 경우이고, 양자로 들어온 사람은 繼子(계자) 또는 係子(계자)라 기록되며, 庶蘖(서얼)로 入嫡(입적)되었을 경우에는 承嫡(승적)이라고 표시한다.
옛날에는 女息(여식, 딸)의 이름은 족보에 기록하지 않고 대신 지아비의 성명을 원용하고 지아비의 본관 성씨와 자식들의 이름만 족보에 올랐으나, 요즘 들어 딸의 이름과 생년월일, 지아비, 자식들까지 올리는 족보가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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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은 아름다우며 우리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삶의 여유를 아는 당신이 되시기를.....
즐거운 휴일되시고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