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 립 정 신 》
(이승만 지음 / 박기봉 교정)
■ 《 독 립 정 신 》 ■
[ 20대의 청년(이승만)이 옥중에서 저술한 우리 민족 최고의 명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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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것이 곧 제 집을 편안하게 하는 법인 줄을 알아서, 온 사회를 유지하는 것을 공번된 이익으로 삼는 것이 곧 국민 된 직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국민들은 곧 제 몸 하나만 보전하면 그 사회는 없어도 살 수 있을 줄로 알며, 제 몸에만 이로우면 온 사회가 위태하여도 자기 홀로 편안할 줄로 여기는데, 가령 천하(天下)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산다면 낙(樂)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는 곧 야만시대에 하등사회(下等社會)의 원칙이다.
그들은 각기 제 입과 제 몸과 제 계집까지는 겨우 생각할 줄 알지만, 그 외에는 돌아보는 것이 없어서 형제끼리도 곧 서로 목숨을 결고 싸우는데,
백성의 생각이 이렇듯 천박하게 되면 사사로운 은혜와 사사로운 원수만 중히 여기고 공번된 은혜와 공번된 원수는 중히 여길 줄 몰라서, 천만가지 일에서 이해(利害)와 시비(是非)를 뒤바꾸어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마음이 사사로운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론한다면 누가 참으로 사회 일에 이로울 사람인지, 어떤 일이 참으로 사회에 유익한 일인지 비교해 보지도 않고
다만 자기와의 관계가 친밀한지 서먹한지[親疏] , 사이가 먼지 가까운지(遠近)에 따라 개인만을 위하는 중에 큰 사회는 스스로 결딴나고 말 것이니, 이 어찌 위태하지 않겠는가! 이는 사회를 유지할 줄 모르는 폐단의 근본이다.
ㅡ제24장ㅡ
백성의 마음(精神)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 中에서
● 추 천 사 ●
국민다운 국민이 되려면 읽어야 할 책
ㅡ대한민국사랑회 회장 김길자ㅡ
물을 마실 땐 그 원천을 생각하고, 과일을 먹을 땐 그 나무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지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마시고 있는 물의 원천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자기가 먹고 있는 과일 나무의 뿌리를 파헤치고 줄기를 베어버리려고
덤비는 자들이 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다. 이 건국일은 어느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하늘에 새겨져 있는 날짜이다.
한민족 5천년 역사에서 최초로 백성이 주인이 된 나라, 최초로 신분의 족쇄가 사라지고 모두가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나라, 자신이 땀 흘려 수확한 것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경제체제의 나라, 자유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다.
소수의 양반 지배계층을 제외하면 백성의 심중팔구가 문맹에다 무지렁이로 천대받으며 살아가던 나라, 가난은 나라도 구제해 주지 못한다면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보릿고개를 넘으려다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연달아 나오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당연시하던 극도의 빈곤국(貧困國), 그런 나라의 국민들이 반세기 만에 세계와 소통하고, 세계를 유람하고, 세계로부터 떳떳한 대접을 받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굶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다 누구의 공로인가?
건국 직후 북한 김일성 집단의 남침으로 초토화된 맨땅 위에 천둥벌거숭이로 서 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무식하고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나라가 불과 반세기 만에 자유가 넘치는 나라로, 무역 대국으로, 부국(富國)으로 우뚝 섰는데, 이것은 다 누구의 공로인가?
이것은 바로 자유와 민주, 공화와 시장경제의 이념과 가치로 이 나라를 건국하고, 산업화와 공업화, 수출입국의 경제정책을 굳은 신념으로 관철시켜 경제를 발전시킨 우남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두 분의 공로가 아닌가?
이 두 분의 선각자, 선지자, 천재야말로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마시고 있는 물의
원천이자 따먹고 있는 과일나무의 뿌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은 이 두 분의 공적을 기념하고 두 분에 대해 감사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배은망덕한 국민이란 소리를 듣기에 딱 좋은 짓들만 하고있지 아니한가?
이 두 분 중에서도 특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우리 민족 초유의 역사적 대 사변의큰 공적은 우남 이승만이란 인물의 사상과 철학,기독교적 신앙체험과 정치적 이념과 경륜덕이 아닐 수 없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곁단코 불가능했을 일이었음은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다.
우남 이승만을 제대로 이해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비봉출판사 대표 박기봉 씨가 교정 및 주석을 하여 이번에 출간한 「독립정신」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20대 청년 우남 이승만이 옥중에서 집필한 그의 대표 저서로서, 5천년 동안 내려오던우리나라 왕정(王政)의 역사를 공화정(共和政)으로 발바꿈시키고, 대륙문화권에 속해 있던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전통을 해양문화권으로 옮겨놓는 데 이론적 기초가 된 기서(奇書)이자, 세계화와 선진화를 지향한 오늘날의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예언서인데, 현대인들이 읽기 어려웠던 원서를 박기봉 대표가 누구나 읽기 쉽도록 교정 및 주석을 달았다.
「독립정신」을 교정 및 주석한 박기봉 씨는 이 책을 평가하기를, 조선왕조 5백년간 쓰여진 모든 책들 가운데 최고의 경세서(經世書)이자 정치사상서, 국민 계몽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 전까지의 모든 경세서들은 군왕한 사람만이 지배하고 나머지 백성 전부는 지배를 받는 왕정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전제군주인 왕이 백성을 어루만져 주는 인정(仁政)이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쓰여졌다.
그러나 우남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백성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며, 그들 하나하나가 자유, 독립, 자주, 자율적인 존재이고,
스스로 시비(是非)를 판단할 줄 아는 각성된개인이며,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나라 집"이란 단체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운영해 간다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쓰여진 최초의책이며,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도록 한 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우남 이승만의 옥중생활 5년의 총결산일 뿐만 아니라 해방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경영하고,
6.25전란 후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전 과정에서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는 정치 및 경제의 사상적 기초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우리 국민들이 자유,자주, 독립적 개인이 되고, 국가 정체성을 체화한국민다운 국민이 되기 위한 교과서로 삼아야 할 책이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하여 우남 이승만의 사상과대한민국 건국과 수호, 재건 과정에서 이룬 큰 공적을 전 국민들이 올바로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ㅡ 2018. 4. 23.ㅡ
□ 머릿말
「독립정신」의 교정 및 주석본 발행에 부쳐
본서 「독립정신」은 우남( 이승만(李承萬)이1899년(24세) 1월에 고종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후 6년째 감옥생활을 하던 중인 1904년 2월부터 6월까지 넉 달 동안에쓴 글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펴서 총론부터 읽기 시작하는순간 정신이 번쩍들면서 손에서 책을 놓기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29살의 청년이,
그것도 옥중에서, 불과 넉 달 동안에, 이런 수준의 책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승만은 여섯 살에 이미 한시(韓時)를 지어 신동(神童) 소리를 들었고, 그 후 서당에서도 항상 1등을 하였으며, 12살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과 통감절요(通鑑切要) 등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와 한시 등에도 이미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열네 살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시작했으나 1894년(19세) 갑오경장 때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 1895년(20세) 4월 배재학당에 입학,
1897년(22세) 7월에 졸업하기까지 2년간 영어 및 각국의 역사와지리, 산수, 성경 등
신학문을 배웠다.
재학 중에는 서재필 박사의 지도로 토론 위주로 활동하는 <협성회(協成會)>의 회장을 맡았고, 졸업식 때에는 졸입생 대표로 외국인 선교사와 정부 고위 대신 등 1천여 명의 하객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이란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하여 참석한 하객들의 극찬을 받았다. 그 일로 우남은 그때 이미 온 장안이 주목하는 유망한 청년으로 부상하였다.
1897년(22세) 7월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이듬해(23세) 1월에 주간지 「협성희 회보」를 창간하여 그 주필을 맡았으나,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 3개월 후에 「협성회 회보」를 포기하고, 4월 9일 한국인 최초로 발행하는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하였으나, 다시 4개월 후인 8월에 「매일신문」에서 손을 때고, 8월 10일에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주필 및 논설자로 활약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의회원이 되어 1898년(23세) 3월부터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대 중연설을 하였다.
그해 후반에는 여러 차례 만민공동회 집회에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끝내 고종의 미움을 사서 그해 12월 25일에 집회 금지령이 내려지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해체되었으며, 다음해(1899년: 24세) 1월 9일에 역모죄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7일 풀려날 때까지 5년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수감된 직후인 1899년 1월 30일 주시경(한글학자)이 차입해 준 권총을 휘두르며
탈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다시 수감되고, 그 때문에 그해 7월 11일의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옥중에서 보낸 기간은그 자신에게나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5년 7개월동안의 감옥생활은 개인과 국가와 세계에 대한 그의인생관, 종교관, 세계관, 정치사상을 공부하고, 생각하고, 정립할 수 있었던 기간으로서, 대학생활보다 더욱 값진 기간이 되었다.
우남이 1세기 이 전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들, 예컨대 한 국가의 쇠망과 홍왕의 원리,독립적인 개인과 그들의 모임인 '나라집(國家)'과의 관계,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 개인의 자유(自由), 자주(自主), 자율(自律), 독립(獨立), 자유와 권리, 인권, 각종 정치제도, 공화정과 법치, 기타미국의 독립선언서에 담겨있는 인권과 국가의 조직 및 운영 방식들을 우리는 현재 당연한 것으로인식하고 있고, 또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대부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나, 제도화되어 있지만, 조선조 말의 절대왕정 하에서는 이러한 개념과 이념들은 전혀 무지하거나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위험한 말들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인들의 머릿속에는 그런 관념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당시 이승만은 이러한 것들을 제도적으로 시행하고 보호하고 있는 미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하면서, 국민들을 계몽시켜서라도 미국과 같이 자유, 자주, 독립, 민주, 공화, 시장경제가 실현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바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의 행태와, 오랜 압제로 굳어버린 비굴하고 피동적인 조선 민중의 행태 및 그들의 노예사상과 습성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과 대한민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독립정신 후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과 25개 실천 세부항목 및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이념 등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이끌어준 건국이념이 되었음을, 그리고 향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이념을 담보해 줄 강령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r독립정신」에 대한 교정 및 주석ㄴ작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를 말해두고자 한다.
이승만 자신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러일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은 없어질 것이니, 나중에라도 대한의 독립을 되찾으려면 책을 써서 모든 백성들에게 독립을 회복할 방법을 알려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책을 통하여 동포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당시 상황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없는 불온사상, 즉 자유, 자주, 독립, 민권, 천부인권, 민주공화 등이었으므로, 책을 쓰는 것 자체가대단히 위험한 역모 활동이었다.
그리하여 책을 쓰는 도중에도 수시로 감방을 수색당하여 감옥 안의 거적자리 밑에다 원고를 감춰야 했고, 쓴 원고는 몇 차례 나누어 감옥 밖으로 보내서 보관하게 하는 등, 지금 기준으로 보면도저히 책을 쓸 수 없는 극악(極惡)한 상황이었다. 집필을 시작한 지 4개월 10일 후(1904. 6. 29.)에 마침내 탈고하였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쓰여진 원고였으므로 출판을 위해서는 많은 교정작업이 추가되어야 했다.
1904년(29세) 8월 9일에 출옥한 이승만은 그해 말 비밀특사의 임무를 띠고 미국에 갔는데,그후 박용만 씨가 「독립정신」의 원고를 트렁크 밑창에 감추어 미국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이 책을출판했다. 한글 책의 출판을 위해 출판사를 설립하고, 한글 활자를 마련하여 책을 출판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문양목(文讓穆) 씨는 독립정신 후서(後序)에서 "저자는 이 글을 다시 교정할 여가가 없어서 모모 동지에게 맡게 임의로 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모모 동지는 또한 본문그대로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여 초본())을 변경시키지 않고 발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원고의 내용을 식자(植字)한 후 오자(誤字)를 수정하고 문장 교정까지 봐야 하는 출판의 한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원고의 집필 자체가옥중이라는 극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졌기에, 이 책은 특히 더 세심한 교정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책은 교정 교열 작업이 생략되어 읽기 어려운 책이 되고 말아 천재적 저자의 예언자적 메시지가 널리 읽혀지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저자 자신도 제2판(1917. 3. 1.)머리말에서 "저자가 지금도 시간이 없어서 이 글을 좀 교정하거나 첨부할 말이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 본문(초판본)대로 재발간(再發刊) 하오니, 이후에 고명(高明)하신 선생들이 많이 참고하여 교정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이 책의 교정 작업을 후세에 부탁하였다.
우남 이승만의 「독립정신」의 최초 원고는 고어체(古語體) 순 한글로 쓰여 있어서 현대인들은 읽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사상과 역사적 사실 및 제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 한문 어휘나 문장들은 격조가 매우 높고 유려하며, 아름답고 시적인 표현들이 많다.
처음 출판될 때 부터 편집자의 조력(助力)만 어느 정도 더해졌다면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나은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되어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천학비재(淺學非才)를 무릅쓰고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감히 자임(自任)하여 외람되지만 초판본을 바탕으로 교정(校正)을 하고 주(註)를 다는 일, 즉 교주(校註)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독자들을 자유(自由)하고, 자주(自主)하고, 독립(獨立)하는 개인으로, 국민 된자격이 있는 국민으로 재탄생시킴으로써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시 확고히 하는 데, 그리하여 현재이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 일조하게 되기를 바란다.
2018년 4월 20일
교정 및 교주자 박기봉
■「독 립 정 신」 서문(序文)■
옥중에서 보낸 지무한 세월이 어느덧 7년이나 되었다. "<이승만이 실제로 감옥 생활을 한 기간은 1899년 1월 9일부터 1904년 8월 9일까지 총 5년 7개월간> 천금(千金)같은 세월(光陰)을 허송하기 아까워서 국내외 친구들이 때때로 빌려주는 각종 서책(書冊)에 마음을
담그고고초와 근심을 다소나마 잊으려고 하였으나 이따금 세상 형편에 따라서 어리석은 창자에 울분의피가 북받쳐 오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를 견디기 위해 번역 작업에 착수, 그간 번역해 놓은 책들이 몇 가지있으나 하나도 발간하지 못하여 마음이 더욱 울적해짐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수년 동안 신문의 논설(論說) 쓰는 것으로 다소나마 마음속에 품은 뜻을 말해 왔는데,중간에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것 또한 그만두고있을 때 일· 아(日俄)전쟁이 벌어졌다. 내 비록 세상에 나서서 세상에 도움이 될 일을 한 가지라도 이룰 만한 경륜은 없으나, 지금이 어찌 남아(男兒)가 무심하게 감옥에 들어앉아 있을 때이겠는가?
이에 비분강개(悲憤慷槪) 하여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동안 만들어 오던 한영자전(韓英字典)을 그만두고 양력 2월 19일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당초에는 한 장의 종이에다 장문의 글을 써서 맺만 장 발잔하려고 했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서 중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하여 관련된 사건들을 대강대강 기록하였는데, 그 동안에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의 형을 집행한 일도 수차 있었으며. 들어오고 나가는죄수들도 여럿이었으므로, 자연히 소란스럽기도하고 또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얼마 동안중단하기도 하고, 혹은 비밀리에 쓰느라 몇 번 싸서감추기도 하였으므로, 글 쓰는 일이 자연히 계속되지도 못하였고 내용 또한 한결같지 못하였다.
그러나 책의 강령(鋼領) 을 자세히 살펴보면맥락(脈洛)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모두 다 '독립(獨立)'이란 두 글자를 주지(主旨)로 삼고 있다.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을 많이 쓰지 않고 일상 쓰는 쉬운 말로 길게 늘여 설명한 것은 고담소설(古談小說: 옛 이야기 책) 같이 읽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이고, 전적으로 한글[國文]로만 기록한 것은 전국의 수많은 인민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며, 특별히 백성들을 향해 많이 이야기한 것은 대한(大韓)의 장래가 전적으로 아래 인민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저 우리나라의 소위 중등(中等) 이상의 사람들이나 한문(韓文)을 웬만큼 안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썩고 나쁜 물이 들어 더 이상 그들에게 바랄 것이 없으며, 또한 이 사람들은 자기 몸만 그럴 뿐아니라 이 사람들이 사는 근처 사람들도 다 그런기운을 받아서 어찌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말이 듣기에는 너무 심한 듯하나 분명하게 증거를 조사해 보면 나의 말이 허언(虛言) 이 아닌 줄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오직 깊이 바라는 바는, 나라 안의 더욱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가장 많이 이 책에 관심을 가져서 스스로 흥기(興起)하려는 마음이 생겨 차차 행동하기를 시험하고, 남을 또한 인도(引導)하여 인심이 날마다 변하고 풍속이 고쳐져서, 아래에서부터 변화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고 죽음에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원하노라.
건국 4237(1904)년 6월 29일
한성감옥에서
죄수 이승만 기록
「독 립 정 신」 후서(後序)
박 용 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범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산다고 하였으니, 만일 이 말이 거짓이아니라면,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그 나라 백성의독립정신(獨立精神)만 완전하면 결코 아주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저 희랍의 독립을 보았는가, 그 영광스러운 결과가 어찌 하루아침에 된 일이겠으며, 또한 이탈리아의 독립을 보았는가, 그 굉장한 사업이
어찌한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겠는가. 이는 반드시 여러 해 동안 여러 사람들이 붓과 혀를 쉬지 않고 휘두르고 땀과 피를 함께 흘림으로써 수많은 인심이 다 같이 독립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 후에야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어진 사람은 자기 하나만 영웅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사람으로하여금 자기와 같은 영웅이 되고 싶어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기(氣)를 불어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어, 전국의 백성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슬프다, 오늘날 조선국의 성명( 性名: 나라 이름)이 변하고, 조선 백성의 이름이 종(노예)의 문서에 올라 있는 때를 당하여 소위 조선국의 혼(魂)이나 조선 백성의 정신은 어디 있는가? 조선이란 나라는 비록 남의 입에 물려 있더라도 그 정신은 보전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이에 학사(學士) 이승만 씨가 쓴 「독립정신」이 세상에 나오나니, 이는 우리 조선 4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부르는 소리이며, 또한 처음으로 듣는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독립정신」은 원래 우리나라를 잃은 후에 급작스레 쓴 것이 아니다. 일·아(日俄)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인천 항구에 대포 소리가 터지기 직전에 쓴 것이니,
당시 이승만 씨는 ''무술년( 戊戌年) 정변'' [무술년(1898) 정변: 1898년 10월부터 이규완, 황철, 강성형, 윤세용 등 박영효 추종자들이 일본에서 몰래 귀국하여 일본 공사관측이 제공하는 자금으로 친위대 소속 군인 150명과 자객 30명을 규합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일본에 피신 중인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 1877~1955)을 새 황제로 옹립하면서 박영효 중심의 혁신내각을 구성하려고 한 쿠데타 음모.이승만은 이 음모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윤세용이 공초에서 이승만의 이름을 대는 바람에 피신하던 중, 미국인 의료선교사 셔먼(Harry C. Sheman)의 통역사로 왕진 때 동행하다가 1899. 1. 9. 체포되었다] 수감 중에 탈옥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1899, 1, 30, 체포되고, 이 일로 1899. 7.11.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04. 8. 9.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는 날 29세 때까지 총 5년 7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에 있은 지 6년째 였고, 이사람(박용만)은 감옥에서 풀려난 지 겨우 몇 달[數朔]이 되었을 때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이 글을 써서 먼저 옥중에 함께있는 동지들인 정순만(鄭淳萬), 신흥우(申興雨),이동녕 (李東寧) 제군에게 보여주고 다시 나에게보내서 비평하기를 청하므로, 나는 감히 그 일을감당할 수 없어서 노성(老成)한 선배 이상재(李商宰) 씨에게 부탁하여 한 번 비평을 듣고 다시 교정을 본 것이다.
오호라, 조선 백성이 복이 없음인지, 내가 힘을 쓰지 않았음인지 감히 스스로 판단하지는 못하겠으나, 그동안 이것을 출판하고자 한 지가 하루 또는 일 년만 지난 것이 아니지만, 동(東)과 서(西)로 분주히 주선하고 힘을 썼으나 끝내 상당한 금액의 출판비용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끌고 미국에까지 와서 하루바삐 출판하고자 하였으나 매번 뜻하지 않았던 방해를 받아 오늘 여기서 주선한 일이 내일 저기 가면 틀어지므로, 결국에는 뜻을 포기하고 다시 이 글을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이리하여 내가 다만이 글을 쓴 사람으로부터 한만(閑漫)하다는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동포의 공적 이익[公益] 을 방해한 자라는 책망을 듣더라도 달리 변명할 곳이 없다.
아무튼, 보배로운 빛은 가려지기 어렵고 사향(麝香)의 냄새는 스스로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이 글의 아름다운 소리가 사방에 들리자 마침내 이 글을 좋아하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1년 동안 노력한 후에 비로소 이 글을 출판하게 되었는바, 그동안 이들이 얼마나 애를 썼고 얼마나 힘을 들였는지를 나는 나 자신의 지난 일을 통하여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사람이나 이 글을 출판하는 사람이나 또한 나 자신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이것이 너무 늦게 출판되어 그동안 세상 형편이 달라졌고 세상 형편이 변함으로써, 혹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재미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원래 정치상의 요령(要領) 을 많이 거론(擧論)하여 본국과 외국의 고금(古今)의 흥망(興亡)을 비교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무롯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우선 이 글을 쓴 사람은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라는것도 짐작하겠지만, 그 또한 응당 독립(獨立)하려는 정신이 들고 독립하는 사람이 되어 장차 조선에 유익한 인재가 될 줄로 믿는다.
건국 4243(서기1910)년 1월 일
박 용 만
「 독 립 정 신 」 후서(後序)
문양목
「독립정신」은 우리 대한의 국권(國權: 나라가 행하는 권력, 곧 주권과 통치권)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다. 이 책을 저술한 이의 애국하는 혈성(血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 얼마나 지극한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알 수 있을 터이므로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책을 보는 이들은 응당 이 글이 쓰여지게 된 내력[所從來]을 알고 싶어 할테니 대강 간략히 기록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 글의 저술가 이승만(李承晩) 선생은 서울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해산당한 후 옥중에 갇혀서(*I899. 1. 9.) 무수한 뇌형(牢刑: 주리를 트는 형벌)을 겪고, 서소문 안에 있는 옛 감옥서에서 칼 쓰고 차꼬 차고 수갑(手匣) 차고 일곱 달을 지낼 때에 때때로 처형당하기를 고대하였으며, 뜻을 같이하는 충애(忠愛: 충군애국) 열사들이 교형(絞刑: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과 참형(斬刑: 칼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광경을 여러번 눈으로 보고는 남보다 먼저 처형당하기를 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함께 갇혀 있던 죄수들이 신문(新聞)을 비밀리에 구해서 보고 이승만이 간밤에 처형당했다는 기사를 읽어주는 것을 본인이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그 부친께 유언의 글을 보낸 것이 세 번이었고, 그 부친은 옥문 밖에서 죽은 그의 시체를 가져가려고 밤을 새우기를 두 번이나 하였다.
그간의 크고 작은 사정들은 다 말하지 않더라도, 대강 이것으로만 보더라도 오늘날 선생께서 살아서 활동하심은 과연 천명(天命)이라 할 것이다.
무수한 고초와 단련을 겪고 모년 모월에(*1899. 7. 11.) 종신(終身)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중에서 거의 7년 동안(*정확하게는 5년 7개월)을 지내고 1904년 8월 9일에 비로소 석방되어 감옥에서 나온 후 즉시 미국으로 와서 지금 문학사(文學士: 이승만은 1910년 당시에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가 된 것이다.
저 옥중에 있으면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다겪으면서도 충의(忠義)의 피는 몸속에서 잠시도식지 아니하여, 지필(紙筆)을 일체 엄금하는 감옥 속에서 수년 동안 제국신문(帝國新聞)의 논설을 꾸준히 써서 밖으로 내보냈으며, 주야로 학업에 몰두하는 여가(餘暇)에 갑오년(甲午年: 1894)의 청·일 전쟁에 관한 「청일전기(淸日戰記)」와 몇 가지 긴요한 글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일들은 나날이 글러가고 고루한협잡배들은 점점 득세하는 중에 신학문(新學問) 서책을 그 누가 보려고 하겠으며, 세계적인 큰 운동들에 관한 글을 누가 감히 발행하려 하겠는가, 헛되이 지필(紙筆)과 수고만 허비할 뿐이므로 번역하고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한영자전(韓英字典)을 만들기 시작하여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에 마침내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 날로 급박(急迫)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의 백성들은 캄캄한 그믐 밤중에 있어서 무슨 일이 밖에서 박두(迫頭)해 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고, 황실은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의 보호하에 들어가서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한결같이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이 어찌 장래를 보고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방성대곡(放聲大哭)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영한자전(字典) 쓰던 일을 그만두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 글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지(主旨)는 곧 세계가 돌아가는 대강의 형편을 한글로 기록하여 전국의 상하(上下)와 귀천(貴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보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선생께서는 천만고초를 겪는 중에 끓어올라 가슴에 맺힌 의담(義膽)과 충혈(忠血)을 이 책 한권에 토해냈던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전쟁이 벌어졌고, 글을 마치자 세상 형편이 완전히 변했으므로, 나라의 독립이 장차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모르게 되었으니
독립을 말하는 글이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 글이 몰수당할까 두려워서 옥중에서도 틈틈이 감추고, 드디어 선생이 옥에서 나오는 날에는 남이
혹시 이 글이 있는 줄 알고 소문을 퍼뜨리면 발간도 하기 전에 압수를 당할까봐 염려하여 깊이 간수하고 있다가 다행히 출판의 자유가 있는 미국 천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한국의 복(福)이로다.
뜻을 같이하는 벗 박용만(朴容만), 신흥우(申興雨) 양씨가 이 글을 발행하려고 차례로 애를 써서 심지어 활판(活版)과 주자(鑄字)까지 준비하였으나 미흡한 점이 있어서 끝내 출판을 시작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뜻을 같이 하는 벗 모모(某某) 제군이 동심합력(同心合力) 하여 이 글이 비로소 발행되니, 비록 형편이 변하고 때가 늦은 듯하나 우리나라 사람의 처지로는 오늘이라도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고, 내일이라도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선생은 이 글을 다시 교정할 여가가 없어서 모모(某某) 동지에게 맡겨 맘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모모(某某) 동지는 또한 본문 그대로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여 초본(初本)을 변경시키지 않고 발행하게 되었으니, 충군애국 하는 동포들은 깊이 생각하면서 선생이 이 글로써 배양(培養)하려고 한 정신을 예비(豫備)할 것으로 믿는 바이다.
건국 단기 4243(기원 1910)년 1월 29일
문 양 목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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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국에 다시금 봐야할 대한민국의 필 독서라고 생각이 들기에 《독립정신》을 텍스트로 해서 전달합니다.
ㅡ계속 올려드리겠습니다
ㅡ보시고 싶은 분께서는
*비봉출판사 [독립정신]을 서점에서 구입 정독해보시길 바랍니다.
ㅡ멸공위해 작은 행동하는 月名 홍영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