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무라이(侍 さむらい)란?
사무라이(일본어: 侍, さむらい)는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武士)를 뜻하는 것으로 12세기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한 무사계급에 소속된 사람을 지칭한다.
본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이후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 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였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浪人)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
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와 도적질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사무라이들은 일반적으로 심지어
근현대의 민중들 보다도 월등한 군사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필요에 의해서 낙수 효과를 주기도 했다.
2. 사무라이의(侍 さむらい) 어원(語源)
「사무라이」는 16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단어로, 막부 시대에는 「사부라이」(サブライ), 조금 더 올라가
헤이안 시대에는 「사부라이」(サブラヒ)(ハ행전호때문에 ヒ(히)는 イ(이)로 발음되었다)로 각기 발음되었다.
「사부라이」는 일본어 동사 「사부라우」(サブラフ)(ハ행전호때문에 フ(후)는 ウ(우)로 발음되었다)의 명사형이다.
「사부라우」라는 단어는 이미 나라시대에 「사모라후」(サモラフ)라는 단어 형태가 등장하고 있어 이것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 여겨진다.
「사모라후」는 엿본다, 살핀다는 뜻의 동사 「모라후」(モラフ, 候)에 접두사 「사」(サ)가 붙여진 것으로
「모라후」는 다시 지킨다, 엿본다는 뜻의 동사 「모루」(モル, 窺・守)에 존재・계속이라는 뜻의
조동사(동사성 접미사라고도) 「후」(フ)가 붙여져 나온 단어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듯 「사모라후」의 원래 뜻은 상대의 모습을 가만히 엿본다는 뜻이 되지만, 나라 시대에는 이미
귀인의 옆에 붙어 그 모습을 엿보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사모라후」가 헤이안 시대에 모음 교차를 일으켜 「사무라후」가 되고, 나아가 자음 교체를 일으켜
「사부라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부라후」는 「侍」라는 한자의 훈으로도 쓰이고 있는 데서도
보이듯 헤이안 시대에는 오로지 귀인의 옆에서 모시는 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주군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으로써 훗날 조정을 섬기는 관인인 동시에
상급 귀족을 섬기는 하급 기능직 관인을 가리키게 되고 그 기능직 관리의 한 축을 이루었던 부시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초기에는 부시(무인)뿐 아니라 법관이나 음양사 같은 중하급 기능직 관인도
모두 '사무라이'라 불렸고 굳이 부시(무인)라는 특정 직책의 계층만을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헤이안 시대의 「사부라이」는 그 뒤 「사부라이」→「사무라이」 등의 어형
변화를 거치게 되지만, 지위와 상관없이 군사 관련 직능을 가진 자, 즉 부시 전반을 侍 (さむらい)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에도 시대의 일로, 그 전까지는 귀족이나 쇼군 등의 가신인 상급 부시들에만 한정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3. 사무라이(侍 さむらい)의 발전
원래는 유력 귀족이나 여러 다이후(大夫)를 섬기는, 사무라이혼(侍品)이라 불린 통상 위계 6위 정도의
하급 기능직 관인층, 즉 귀족과 연줄이 있는 국가 레벨의 지배계층의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실무자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조정을 섬기는 관인이면서 동시에 상위 귀족・관인층을
섬기며 조정의 실무직을 맡았던 신분이 바로 「사무라이」이며, 출세한다 해도 귀족의 말석인 5위
정도까지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실무라는 것도 말 그대로 조정의 국사 전반에 관련된 것으로 굳이 무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업무가 존재했고 각각의 업무를 가업으로 계승했으며, 후세에 이르러 차츰 무예를 직능으로 하는 부시(武士)를
가리켜 사무라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면서 사무라이(侍)=무사(武士)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무사 또한 초기에는 다이후 신분의 군사 귀족과 사무라이 신분의 일반 부시라는 두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귀족과 연결된 지배층이던 사무라이 신분보다 낮은, 본래는 백성의 신분이었던 지자무라이(地侍) 등도
부시 취급을 받으면서 이들 백성 출신의 지자무라이와 구별해, 「사무라이」는 「상층 부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여기서의 상층이란 엄밀하게는 발생기의 무사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전투에 나갈 자격과 권리를
갖춘 무사를 말한다.
17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어 단어를 포르투갈어로 해석한 사전인 《닛포지쇼》(日葡辞書)는 부시(Bushi)나
모노노후(Mononofu)는 각각 「무인」(武人), 「군인」(軍人)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어 있는 한편으로
사부라이(Saburai)에 대해서는 「귀인 또는 존경받는 사람」(貴人、または尊敬すべき人)으로 번역하고 있어,
이 시기 사무라이라는 이름이 부시 계층 안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무라이들은
여러 특권을 받았으며 이 특권을 침범하거나 모방하려고 하는 닌자나 야쿠자 같은 천한 신분의 전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래서 닌자들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일본의 다른 전사 집단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따라서 사무라이가 무사 신분을 거의 독점하게 되었으며 사무라이가 아닌 자는
무사로서 출세하기 어려웠다.
4..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사무라이
일본을 천황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천황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한 것은 고대시기
'아스카시대'와 19세기 메이지유신 이후 형식적으로나마 천황의 권위가 복귀되었을 때입니다.
그 중간시기 즉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인데요 이 시기에는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막부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源義朝
아스카시대 말기에 천황이 힘을 잃고 힘있는 귀족들에 의해 지방분권체제가 시행될 때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노비계급이 사무라이의 시초가 되어 지방 무사 출신인 사무라이들은 상당 수준의 무예를
지녔으며 자신들의 극기주의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이전의 잔잔하고 세련된 왕실 문화와는
전혀 다른 절도 있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鎌倉時代の侍
5.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의 사무라이
이 시기는 선(禪)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다도나 꽃꽂이 같은 일본 고유의 예술들을
탄생시켰다. 이상적인 사무라이는 불문의 행동규범을 따르는 극기적인 무사여야 했으며, 이 행동규범은
뒤에 무사도로 정립되어 용기, 명예, 개인적 충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무사도). 이때문에
불명예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할복 자살(셋푸쿠[切腹])을 택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室町時代 腹巻をつけた武士
6. 무로마치 시대이후의 사무라이
칼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점점 신분을 떠나 힘과 권위를 얻어가겠지요. 특히 지방권력이 수많은 다이묘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각 다이묘들을 주군으로 모시는 사무라이들은 점점 양민보다는 우위에 선 지도계급을
형성합니다. 시간이 흘러 다이묘들도 전통적인 귀족계급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큰 틀에서의 사무라이가 됩니다.
지금의 일본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의 기원이 되는 큰 전쟁이 12세기에 있었는데요. 바로 겐페이전쟁(源平合戦)'이라는
유명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거치며 무사계급은 귀족계급을 누르고 실제로 일본을 통치하는 지배층 위치로 올라갑니다.
고려에서의 무신들이 4대에 걸쳐서 고려를 지배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19세기 메이지유신까지 무사계급에 의한
통치가 이어지지요. 점차 사무라이들도 다이묘들로부터 영지를 하사 받는 등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확실한 지배계급으로 상승하여 사무라이들의 최고의 전성기는 일본의 센코쿠시대(戦国時代) 때입니다
일본의 센코쿠시대에는 일본 전역에 걸쳐 군웅들이 할거하는 시대였습니다.
源平合戦古戦場
戦国時代の身分構成
온통 전쟁만 일어나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사무라이들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지요.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고 공을 세우는가 하면 그 반대로 패한 쪽은 주군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일명 '무사도'가 생겨났고 준귀족계층으로 신분이 상승함에 따라 사무라이 특유의 문화도 발달하였습니다.
전국시대의 혼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전국통일로 종결되었습니다. 그의 사후 후계전쟁 때문에 대규모의
전쟁은 몇 차례 더 있었지만 결국 '도쿠카와 이에야스'에 의해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 내전은 완전 종식되었습니다.
전쟁이 사라졌으니 일반 평민들에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하지만 전투기계로 성장하고 한평생을
전투하나로 살아온 사무라이들에겐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반 농민들에게 칼을
수거하고 확실히 농업에만 종사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서민경제가 발달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무라이들은 명맥은 유지하였지만 점점 그 위세를 잃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조선의 양반계급도 위세를 잃어가는 것과 거의 같은 현상으로 이해하면 될 거 같습니다.
戦国時代の侍
7.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의 사무라이
이 시시는 초기에 전체 인구 중 10% 미만에 불과했던 사무라이들은 사회질서를 정착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 속에서 폐쇄적인 계층으로 밀려났다.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2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250년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아래의 평화시대에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관리가 되거나 다른 생업을 가져야만 했다.
徳川家康
18세기초부터 상업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일본에는 활기찬 도시문화가 꽃피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사무라이들의 검소한 생활방식을 변화시켰다. 동시에 주로 고정된 봉급을 받고 살아가던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지위도
점차 악화되었다.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무라이 가족들이 궁핍에
시달렸다.
徳川名将有司略伝
8. 사무라이의 몰락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여 새로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출세를 열망하던 하층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1871년 봉건제도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을 때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지위도 상실되었다.
江戸後期から明治の時代に撮影された武芸者たち
이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출신들은 1870년대에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새로 창설된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다.
또한 사무라이 계급을 유지시켜 주었던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토지개혁정책에 따라 그들에게 하사 되었던 영지가
몰수되고 군인, 경관 및 대례복(大礼服) 착용자 이외의 사람이 칼을차는 것을 금지한
대도금지령(帯刀禁止令 たいとうきんしれい 1876년), 일명 폐도령(廃刀令 はいとうれい) 같은 역사적
변천에 따라 군대도 신식군대로 재편되어서 갑옷과 칼로 무장한 사무라이의 모습은 설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明治時代の廃刀令
첫댓글 좋은 노래 감상 항상 대단히 감사 합니다^^*
항상 건강 하시옵고 다복 하십시요^^*
평안한 일요일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