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을 두 부분으로 나눠 앞 부분만 붙잡고 다시 써 보았습니다. 퇴고라기 보단 다시 한 편의 글을 쓴거라 다시 퇴고를 해야겠지요.. 두 번째 엄마 간병 이야기는 너무 할말이 많아요. 나중에 천천히 나눠 쓰려구요.
제목은 아직 못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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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여름, 새벽에 자다 옆집에서 들리는 통곡소리에 잠이 깼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누군가의 곡소리를 듣자 뭔지 모를 무서움에 소름이 돋고 어깨가 뻣뻣해졌다. 엄마를 부르며 겨우 입을 뗐는데 이내 엄마가 새벽예배 드리러 교회에 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더 무서워졌다. 설상가상 갑자기 코피까지 나서 입고 있던 메리야스에 피가 뚝뚝 떨어져 뭔가 더 정신없고, 혼자 있는 상황이 못 견디게 두려웠다. 코피만 대충 막은 후, 울먹이며 입은 옷 그대로 집에서 나와 엄마를 찾아 교회로 뛰었다. 달리면서도 도대체 무슨 소리가 싶어 옆집 쪽을 바라보니 새벽인데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타지로 일하러 가신 옆 집 아저씨가 돌아가셔 급하게 집으로 모셔왔던 시각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그 시각만 되면 갑자기 자다가 깨어나는 것이다. 몸에 그날의 통곡이 각인이 된 것인지, 누군가의 죽음을 소리로 접한 경험이 강렬했던 것인지 그 날 이후 나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엄마가 새벽에 예배 보러 간 후, 혼자 잠이 깨면 교회에 찾아가 서성이는 일이 잦아지자 엄마는 예배 보러 가기 전에 나를 깨워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꽤 긴 시간을 엄마를 쫓아 새벽부터 교회에 가 방석을 덮고 몰래 누워 시간을 보냈다.
죽음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이 새겨진 건 그 날 새벽이었지만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자랐다. 엄마에 대한 나의 첫 기억마저도 장례식 후 장지까지 갔다 올 때 엄마 등에 업혀 동네 아줌마들을 바라보던 것일 정도이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50대 이후의 사람들만 남은 동네에서 초상났다는 소리는 꽤 자주 들었던 소리였다.
나의 고장인 신안군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80년대 중후반까지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초상이 난 집에 가서 자리를 함께 했다. 남자들은 삼베같은 색의 천막들을 마당에 치고 망석을 깔며 사람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고, 여자들은 대부분 먹을 음식을 장만했다. 특히 첫 날은 팥죽을 쑤어 다 같이 먹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 먹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신나게 뛰어가 먹었던 팥죽은 더없이 달콤하고 맛났다. 우리들에겐 평소에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가득했던 날. 생각해보니 장례를 치르는 그 기간 마을은 더없이 풍요로웠고 평화로웠던 것 같다.
우리 고장은 독특한 장례 풍습이 있는데 밤이 되면 밤새 불을 환하게 켜놓고, 마이크를 대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잔칫집처럼 흥겨워 부르는 노래라기 보단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남은 자들에게 다시 힘을 주는 노래라고 할까. 나는 그 노래들이 울러 퍼지는 밤은 오히려 무섭지 않고 좋았다. 그런데 외부 도시에서 우리 학교로 근무하러 오신 선생님께서 밤새 노래 부르는 장례 문화가 엄청 이상하다며 놀랐다고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다. 나는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럴 수 있구나 갸우뚱거렸던 게 떠오른다.
초상이 난지 3일이 되면 상여가 나간다. 아주 화려한 꽃상여. 그렇지만 또 뭔지 모르게 무서웠던 상여를 마을 장정들이 메면 그 위에 등뼈가 굽어 큰 혹같이 불거진 등을 가진 할아버지가 올라탔다. 그리고 마을을 돌면서 상여소리를 선창하면 장정들이 후창을 했다.
“어~ 어~ 어어어어어. 어라이 영차, 어야요.”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야~어야~”
구슬프면서도 힘찬 노래가 울리 퍼지는 상여 뒤로 가족이 따라가고 그 뒤로 마을 사람들, 어린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닌다. 한참 마을을 돌다 (윗동네와 아래동네를 연결해주는) 마을의 가장 큰 소나무가 서 있는 마당에 상여를 내려놓고 쉬는데 그 때가 절편과 여러 음식이 든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다. 유독 절편을 좋아했던 나는 그때 엄마 옆에 앉아 꼭 먹고 다시 친구들과 뛰어 다녔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해진 마을의 장례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때 부터는 마을 사람들은 목포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상여소리를 부르며 상여 위에 올라갔던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마을에는 상여를 맬 장정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2017년 8월, 우리도 목포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 엄마를 모셨다. 3일째 되던 날, 운구차량과 함께 배를 타고 섬을 들어가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못 들어갈까 걱정이 되었다. 마을에서 이제는 몇 분 안 계신 어른들, 어릴 적 엄마와 함께 나를 키워 주다시피 한 아주머니들(지금은 할머니들)이 기다리신다고 하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다행히 무사히 섬에 들어가 마을 회관에 잠시 들려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보자마자 눈물이 줄줄 나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 긴 세월 함께 지낸, 서로의 고통을 알아봐주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포옹이었다.
장지까지 함께 따라와 주신 아주머니와 어른들을 바라보노라니, 엄마를 외롭게 보내드리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분들은 한 평생 이런 장면을 몇 번을 보고 살았을까. 저 쪽이 내 자리다 하며 웃으며 말씀하시던 사촌 큰엄마의 말씀이 아직도 떠오른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던, 한없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날. 굽어진 허리로 하얀 머리수건을 쓰고 엄마와의 마지막을 함께 해준 마을 사람들 덕에 나는 울음을 비로소 그치고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첫댓글 고치니까 훨씬 좋네요. 신안에 있는 한 마을의 장례 풍경에 관한 글. 역사적으로 남길 만한 민중사라고 생각해요. 짬짬이 자료도 찾아보고 기억이나 에피소드도 떠올리며 살을 붙여보세요.
네!! 어제 합평하며 쌤이랑 묘선님이 인상깊다 말해준 덕에 더 붙잡고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도 글감이 될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참 많더라구요. 자료도 좀더 열심히 찾아가며 더 살도 붙여나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