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3장 신력이냐 마력이냐
아이는 그 사람을 보고 히히 웃으며 말했다.
"아까 왔다갔죠? 그랬잖아요?"
아이는 그의 머리에 있는 옥패괘(玉牌)와 손가락에 낀 세 개의 금반지, 그리고 허리에 달려 있는 옥패(玉佩)를 보고 히히 웃으며 또 말했다.
"여기 와서 떼어 냈다가는 다시 달고……."
이때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 왔다. 뒤이어 가까이에서 말소리도 들려 왔다.
"아버님, 여긴 아닐 거예요. 곡삼 아저씨가 설마 주점까지 하시겠어요?"
그러자 누구인가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들어가 보자꾸나. 매사에 신중해야 실수가 없는 법이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앞서 들어온 사람은 얼굴이 옥같이 맑고 깨끗한 젊은이인데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쌍지팡이를 짚은 절름발이였다. 그 사람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관영아, 바로 이곳이다."
그러자 젊은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정말 모든 게 눈에 익어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아요."
젊은이는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곧장 벽장으로 달려가 비밀문을 열려고 했다.
쌍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그를 말렸다.
"관영아, 그만둬라. 여기에 딴 사람이 있다!"
그의 말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끼여들었다.
"그만두라고? 왜 내가 있어서 방해가 되오?"
쌍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그 사람을 살펴보더니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굴 보고 하는 말씀이오?"
"당신은 오호 폐인(五湖廢人)으로 자처하는 태호 귀운장의 장주 아니시오? 저 젊은이는 당신의 아들 관영이고 태호의 호걸들이 두령으로 섬기고 있는 자가 아니오, 당신은 황약사의 문하에 있다가 사매와 사제가 도화 도주의 경서를 훔쳐 가는 바람에 그 사건에 연루되어 황약사에게 쫓겨났지 않소."
그의 말에 육승풍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래서요?"
"당신이 도화도 사람이라면 나에게 인사쯤은 해야 할 것 아니오?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그는 허리춤에서 시커먼 물건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육관영은 달려가서 한바탕 싸우려고 했으나 육승풍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렸다.
"구천인 선배님이셨군요. 판영아, 이분이 바로 철장방의 구 방주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
관영은 아버지한테서 무림에 다섯 고수를 빼놓고도 구천인이란 괴걸(怪杰)이 있는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예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구천인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육승풍이 구천인에게 물었다.
"구 방주님께선 이 임안에 뭣하러 오셨소?"
"지금 천하에 인물이 부족하여 무림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소. 난 당신의 사제 곡영풍을 찾아왔는데 대신 당신을 만났으니 잘됐구려. 당신은 사형, 사제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소?"
육승풍은 그들과 함께 도화도에서 재미있게 지내던 일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 여섯 사람 가운데 매초풍과 진현풍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맙시다. 다섯째 사제는 몇 년 전에 죽었고, 풍 사제는 행방불명이 되었소. 그래서 지금 곡 사제를 찾아오는 길이오. 혹시 그를 보지 못했소?"
구천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방금 들어오는 길인데 저 애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소."
그런데 바보 아이가 불쑥 끼여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아까 왔다갔잖아요! 떼어냈다 다시 달고 그랬잖아요!"
그 아이는 구천인이 아까 머리의 옥패와 반지, 허리에 찬옥패를 시위들한테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멍청한 아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육관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저 아이가 곡 사숙님을 닮지 않았나요?"
그 말에 아이를 바라보던 육승풍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맞아! 꼭 닮았구나. 저 앤 곡삼의 딸이 분명하다. 아니, 관영아, 그런데 넌 곡 사숙을 어렸을 때 보았을 텐데 어떻게 지금도 얼굴을 기억하고 있느냐?"
관영은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버님께서 그림을 보여 주셨잖아요."
그가 도화도를 떠나올 때 황약사가 그린 그림 한 폭을 갖고 왔었는데 그것은 도화도에 있던 여섯 제자를 그린 것이었다. 육관영은 아버지가 날마다 보던 그 그림 속의 곡 사숙이 아이와 닮았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구천인이 웃으면서 육승풍에게 말했다.
"어쨌든 육 형의 사제들이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서로 소식도 모르다니 참 안됐구려. 그러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시오."
육승풍은 앙천대소를 했는데 그 웃음 소리는 비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보시오, 구 방주. 난 죽을 때까지 도화도 사람이오. 내가 어찌 당신과 어울려 도화도의 명성을 더럽힐 수 있겠소?"
그 말에 구천인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육승풍, 황 약사한테 쫓겨난 당신을 도화도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러자 육승풍은 탄식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사부님이 내치셨다 해도 우린 도화도 사람이오. 나를 죽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로 하여금 사문을 배반하게 할 수는 없을 거요."
그러자 구천인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좋아, 그렇다면 네 놈을 없애 버릴 테다!"
말을 마친 그는 의자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두 눈을 감고 연공(練功)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신의 내력을 모으자 입과 코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르더니 이윽고 귀와 눈에서도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육승풍 부자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내공으로 신기(神氣)를 운행시키고 왕중양, 황약사 정도 되는 자들이라면 신공(神功)을 운행시킬 때 머리로 흰 김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코와 입에서 연기가 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공력을 하찮게 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공의 운행을 끝마친 구천인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온몸의 관절들에서 마치 콩을 볶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다.
"육승풍, 내 수하로 들어오지 않겠다면 먼저 장으로 나를 세 번 때려라. 내가 너의 장에 맞아 죽지 않는다면 널 죽여 버릴 테다."
육승풍은 여전히 오연한 기개로 대답했다.
"구천인 선배, 당신의 무예가 하늘에 닿는다 해도 내 마음을 바꿀 순 없소."
구천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좋아. 네가 먼저 세 장을 때려라. 그런 다음 선배의 무예를 보여 주마!"
그는 육승풍 앞에 와서 섰다. 그들간의 거리는 다섯 자밖에 안되었다.
육승풍은 황 약사한테 무예를 배울 때에도 인의도덕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나보고 먼저 세 번 때리라고 했으니 기회를 이용해 보자. 저자한테 사부님의 연위갑(軟 甲)이 없는 바에야 세 번을 맞고도 상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육승풍이 신력을 모아 앞으로 달려가며 팍팍팍! 하고 세 번이나 강타를 보냈으나 구천인은 몸을 약간 휘청거렸을 뿐 그 자리에 태연히 서 있었다. 육승풍은 깜짝 놀랐다. 구천인이 이런 공력을 갖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스승인 황 약사보다 더 무서운 공력을 갖고 있는 듯싶었다.
구천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날 세 번 때렸으나 난 너를 때리지 않겠다. 대신 너희 둘에게 환약을 줄 테니 동시에 먹어야 한다. 이제부터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되는 거야."
육승풍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당신이 곡 사제를 처치했소?"
육승풍의 질문에 구천인이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놈이 내 말을 듣지 않길래 죽여 버렸지. 너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꼴이 될 것이다."
육승풍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아들을 보고 말했다.
"관영아, 우리는 이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말을 듣는 수밖에 없어."
육관영이 아버지의 기색을 살피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분명히 도망가라는 눈치였다. 자기가 구천인한테 손을 쓰면서 시간을 끌 테니 그 틈에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육관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육승풍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우리 풀이 여기서 죽는 게 좋겠다."
육승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때 밖에서 야멸찬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 어귀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걸 보니 그 사람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천장을 보는 바람에 얼굴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녀가 바로 철시 매초풍이란 사실을 알았다.
매초풍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 사람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말했다.
"구천인, 우리 도화도 사람을 못살게 굴려는 생각은 이제 버리는게 좋아요. 내가 오늘 육 사제와 함께 당신을 없애 버릴 테니까."
매초풍을 본 육승풍은 내심 망설였다. 그는 죽이고 싶도록 매초풍이 미웠지만 그녀가 도화도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구천인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이 사문의 명성을 위해 결사적으로 싸우겠다고 하는 걸 보면 양심을 저버린 것 같지는 않구나. 잠자코 구경이나 하자.'
구천인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매초풍, 육승풍, 이러지 마라. 너희들의 사부인 황약사도 모함을 당해 죽었는데 너희들끼리 무슨 사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거냐?"
육승풍이 놀라서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오?"
"왜 아니겠느냐? 황약사는 왕중양 문하의 전진교 일곱 제자들 손에 죽었어!"
그의 말에 매초풍과 육승풍은 대성통곡을 했고 육관영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곡영풍의 딸 사고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나도 울어 버릴 거야!"
사고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요란하고 서글프게 울어댔다.
육승풍과 매초풍은 절세의 무예를 갖춘 사부님이 그토록 쉽게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전진칠자(全眞七子)들의 공격을 받았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옥, 구처기 둥 일곱 사람들이 일시에 황약사를 덮쳤다면 황약사가 그들 손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육승풍이 이를 갈며 외쳤다.
"관영아, 우리 가서 전진칠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자! 매초풍, 너 먼저 죽이고 떠나야겠다. 이 모든 게 다 네 년 때문이야!"
육관영은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그를 달랬다.
"아버님, 너무 상심 마시고 좀더 의논해 보세요."
그러나 육승풍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매초풍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매초풍,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아느냐? 네 년이 순진한 진현풍을 꾀어 사부님의 《구음진경》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화가 난 사부님은 우리 사형제들의 다리 힘줄을 끊고 도화도에서 쫓아 버리셨다. 난 그분이 마음을 돌리면 다시 도화도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사부님이 별세하셨으니 난 이제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이냐!"
"예전에도 그랬지만 사형은 여전히 기개가 없군요. 사형이 몇 번이나 사람을 모아 가지고 우리 부부를 못살게 구는 바람에, 결국 몽골의 대사막까지 쫓겨난 우린 그곳에서 별의별 어려움을 다 당했고 남편까지 죽고 말았어요. 지금도 사부님을 위해 어떻게 복수할 것이냐를 생각해야지 그렇게 울면서 지난 일이나 들추면 뭐하겠어요? 그런다고 내가 저지른 짓을 되돌릴 수가 있어요, 아니면 사부님이 살아나시겠어요? 우린 전진칠자를 찾아내야 해요. 사형 다리가 정 불편
하면 제가 업고 가겠어요."
매초풍의 조리 있는 말에 육승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매초풍. 그건 사부님의 제자다운 말이다."
이러는 와중에 문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바로 곽정(郭靖)과 황용이었다.
도화도에서 나온 황용은 바닷가에서 어부들의 은자를 빼앗은 다음 그 길로 강남까지 갔다가 사막에서 온 곽정을 만났다. 황용이 그를 심하게 괴롭혔지만 인품이 너그러운 곽정은 그녀를 친근한 대해 주었다. 곽정은 황용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담비옷을 벗어 주고 금덩이도 주었으며, 후에는 대사막에서 얻어 온 적토마 한 필도 주었다. 곽정이 이처럼 진정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자 황용도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강남에서 임안까지 오는 동안 홍칠공을 만났
다. 두 사람은 홍칠공한테 한 달 남짓 무예를 배웠는데 그에게서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법을 전수받았다.
두 사람은 요기를 하려고 주점에 들른 것이다. 주점에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황용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누가 상을 당했길래 이토록 슬프게 우시나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담뿍 담겨 있었다. 곽정과 가까워진 후로 늘 자기를 보호하고 아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황용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육승풍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니 입 닥쳐라!"
황용은 머리를 돌리다가 매초풍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곽정을 만난 후 연경(燕京)의 조왕부(趙王府)에서 매초풍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곽정과 황용은 적의 손에 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구양봉의 아들 구양극과 조왕부의 공자 완안강(完顔康), 그리고 조왕부에서 청해 들인 영지상인(靈智上人) 삼선노괴(參仙老怪)가 그녀와 곽정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다급한 황용은 매초풍을 알아보고 얼른 소리쳤다.
"매약화!"
그 바람에 매초풍은 황용이 도화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용은 매초풍에게 자기가 황약사의 딸이라는 것을 알리고 그녀에게 곽정을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매초풍은 곽정의 어깨에 뛰어올라 적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매초풍 덕택에 그 속에서 빠져 나와 도망친 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황용은 매초풍을 보고 입을 열었다.
"매 사제, 당신이 이곳에 있었군요!"
황용은 곽정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 그것은 매초풍의 남편 진현풍이 곽정의 비수에 찔려 죽었기 때문이었다. 매초풍이 남편의 복수를 하려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곽정은 황용의 눈짓을 매초풍한테 인사하라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매초풍은 자신한테 인사한 사람이 멍청이 곽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사부님 때문에 비통에 잠겨 있었으므로 그에게 눈돌릴 틈이 없었다. 매초풍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면서 통곡했다.
"사부님, 사부님!"
이 세상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난 무예를 잘 닦은 뒤 도화도에 가서 당신과 겨루기로 결심했었어요. 내 실력을 보여 드리고 사부님을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원이 없을 거예요. 그때 가서 사부님이 날 죽인다 해도 달갑게 죽었을 거예요.'
매초풍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을 위해 기필코 복수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황용이 깜짝 놀라 매초풍을 붙잡고 물었다.
"뭐라구요?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어요?"
그제야 황용을 알아본 육승풍이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네가 바로 황용이로구나. 얘야, 나와 함께 전진칠자를 찾아가자. 그 놈들이 사부님을 살해했다는구나!"
그 말을 들은 황용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버지……."
황용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곽정이 급히 그녀를 안아 일으키며 불렀다.
"용이, 정신차려요!"
육승풍이 다가와 황용의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을 몇 번 누르자 깨어난 그녀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를 찾아 주세요……."
모두들 황용의 애끓는 호소에 또 눈물을 흘렸다.
매초풍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용아, 사부님은 이제 안 계신단다. 내가 널 데리고 복수한 다음 사부님 묘 앞에서 자결을 하겠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구천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내 말을 듣는다면 내가 자네들을 데리고 복수하러 가겠네!"
그러자 매초풍은 화를 발칵 냈다.
"네 놈이 뭐 말라 비틀어진 놈이냐!"
그녀는 4, 5장이나 되는 긴 채찍을 꺼내더니 곧장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채찍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더니 곧바로 구천인의 얼굴에 떨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구천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들어 소리쳤다.
"너희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매초풍이 발로 걷어차자 구천인은 그대로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모두들 구천인이 매초풍에게 왜 그토록 꼼짝없이 얻어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육승풍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매초풍이 사부님의 《구음진경》을 훔쳐다가 무예를 닦아서 구천인도 매초풍을 당해 낼 수가 없단 말인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구천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용이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녀가 미친 것이라고 생각한 곽정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용이, 용이, 왜 이러오?"
황용은 웃음 띤 얼굴로 일어나더니 구천인 앞에 섰다.
"구 방주님, 다들 방주님의 무예가 괜찮다고들 하던데 우리한테 좀 보여 주실래요? 방주님께서 우릴 데리고 복수하러 가시려면 재주가 좀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구천인은 잠깐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황 괴물의 딸이로구나. 날 믿지 못하겠다면 너한테 보여주지!"
구천인은 바닥에 있던 벽돌을 주워 들더니 두 손으로 그것을 비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벽돌이 가루가 되어 푸시시 떨어졌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구천인은 또 오른손에 술잔을 들고 가볍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틈에 술잔 바닥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곽정이 그것을 집어 보면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런 공력은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이 든 사람이 너희들을 속이겠느냐?"
구천인은 모두들 감탄하자 우쭐해져서 품에서 시커먼 물건을 꺼내었다. 그것은 철장이었다.
황용이 웃으면서 다가가 물었다.
"구 방주님, 아버님 말씀으로는 이 철장이 병장기이자 신물(信物)이라고 하던데 한 번 만져 볼 수 없을까요?"
그 말에 구천인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러나 황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에이, 한 번 만져 보는 게 어때서요?"
황용은 재빠른 솜씨로 철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구천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철장방주의 신물을 어찌 너 따위 계집애가 함부로 만지느냐? 빨리 내려놓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줄 알아라!"
황용은 철장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더니 곽정풍에게 말했다.
"오빠, 나도 절기 하나를 새로 익혔는데 이 철장을 먹어 버릴 수 있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곽정은 믿기지 않는 듯 의아스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한 곽정은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용이, 그러지 마오!"
황용은 철장의 손가락 두 개를 바작바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삼키면서 말했다.
"철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인 줄은 나도 몰랐어요. 오빠, 이 철장이 참 맛있어요. 오빠도 한입 먹어 봐요."
육승풍은 이처럼 익살스러운 황용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사부님의 딸이로구나. 하는 짓이 사부님을 닮아 괴팍스러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몇 번 올다가 금방 잊어버리다니…….'
육승풍이 점잖게 타일렀다.
"용아, 그만해라. 아버님 복수를 하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냐?"
그러자 황용이 웃으면서 말했다.
"보세요. 이 철장방주는 가짜예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믿으세요?"
그러자 매초풍이 뛸 듯이 기뻐하며 황용의 팔을 텁석 붙들고 말했다.
"그럼 사부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말이지? 응? 그게 사실이니?"
매초풍은 너무 기뻐서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육승풍은 그제야 구천인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육관영과 곽정도 알아챘다. 사람들은 일제히 구천인을 바라보았다. 구천인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황용이 그 앞을 막아 섰다.
"내가 아직 도화도의 무예를 보여 주자 못했는데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냐?"
곽정이 그녀에게 말했다.
"용이, 저 놈이 거짓말은 했지만 무예를 모르는 것 같으니 용서해 주시오."
그러자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내가 철장방의 절기 두 가지를 보여 드리지요."
황용은 구천인의 손가락에 끼여 있는 금반지 세 개를 빼서 자기 손가락에 끼었다. 그녀는 아까 일은 까맣게 잊은 듯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서 손에 술잔을 들고 구천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날 믿지 못하겠다면 너한테 보여 주지."
그녀는 손에 든 술잔을 한바퀴 돌리더니 금방 멈추었다. 구천인이 한 것처럼 술잔 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용은 또 벽돌 한 장을 가져와서 구천인이 한 것과 똑같이 두 손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벽돌이 가루가 되어 푸시시 떨어지는 것이었다.
육승풍이 그것을 보고 껄껄 웃자 매초풍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 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황용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웃으니까 황용은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초풍은 황용이 너무나 귀여워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도 없이 자란 불쌍한 것. 내가 만일 도화도에 가면 이 애와 의지하면서 살아가련만.'
이런 생각을 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살기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듯이 평화롭고 어질기만 했다.
황용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은 곽정뿐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이, 도대체 무슨 영문이오?"
황용이 손가락에 끼었던 반지를 빼면서 그한테 말해 주었다. 그 반지에는 말할 수 없이 굳은 금강석이 끼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손으로 술잔을 돌리면 바닥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고 벽돌을 잡아 비틀면 가루가 되는 것이었다.
곽정이 호기심이 나서 그대로 해보니 과연 황용의 말대로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모두들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매초풍도 처음으로 모든 시름을 잊고 크게 웃었다.
곽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구천인, 어서 물러가거라!"
구천인은 금강석이 박힌 반지를 돌려받을 생각도 못하고 얼른 달아났다.
매초풍이 황용을 보고 말했다.
"용아, 넌 도화도에서 언제 나왔니?"
황용은 가슴이 쓰라렸다. 사막에서 만났을 때 싸움터에서 황급히 도망가느라 그녀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난 중원에 나온지 오래 됐어요. 듣자하니 아버지께서도 나오셨다고 하더군요. 어디 계시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자 매초풍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건강하시길 바래. 진정으로……."
모두들 매초풍의 진심 어린 말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도화도에서 도망칠 땐 사부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사부님에 대한 정이 깊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 육승풍은 매초풍에 대한 원한이 약간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매초풍이 육승풍을 돌아보았다.
"난 가겠어요. 혹시 내가 필요하면 임안 만기주보점(萬記珠寶店)에다 옥대를 갖다 놓으세요. 그럼 내가 찾아오겠어요. 사부님께서 무사하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혹시 동생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전력을 다해 돕겠어요."
말을 마친 매초풍이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렇게 서두를 게 뭐 있나?"
들어오는 사람은 좀 전에 도망쳤던 구천인이었다.
구천인의 얼굴은 아까 창피를 당했던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잔뜩 위엄을 부리면서 주점으로 들어오더니 탁자에 앉았다.
"황약사를 찾지 못한다면 너희들부터 찾는 것도 괜찮지."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매초풍의 얼굴에 눈길을 멈추었다.
"흑풍쌍살이로군. 네 년부터 죽여 버려야겠다!"
모두들 허풍쟁이 구천인이 다시 돌아와 잔뜩 위엄을 부리자 웃음을 터뜨렸다.
황용이 헤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구 선배님, 우리한테 그 손을 한 번 더 보여 주시죠?"
그러자 육관영도 재미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구 선배님, 당신한테 철장방 방주의 신물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구천인이 흉폭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좋아, 네 놈이 보겠다면 보여 주마. 하지만 철장방의 신물을 빼앗으려 하는 놈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자 육관영은 요란하게 웃어댔다.
"구 선배님, 당신이 그 철장을 다시 내놓으면 나도 황용 아씨처럼 한입에 먹어 버리겠습니다!"
구천인은 화가 났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낼수록 사람들이 모두 놀려대면서 요란하게 웃어대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좋아, 먹는지 못 먹는지 어디 보자!"
육관영은 황용이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황용 아씨가 나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구나. 나도 아씨처럼 저 철장을 씹어 먹어서 사람들을 웃겨야지.'
그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철장 한 개를 집어 깨물었다. 그런데 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철장을 깨물다가 그만 이빨 한 대가 부러진 것이다. 이것은 부용이 먹던 가짜 철장이 아니라 무쇠로 된 진짜 철장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깜짝 놀라 구천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용이 구천인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자가 또 어디 가서 이따위 물건을 가져왔을까. 안 되겠어. 내가 본때를 보여 줘야지.'
황용은 구천인에게 다가가면서 가볍게 말했다.
"구 선배님, 전 아까부터 선배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천하에 드문 고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화산의 무예 시합 때 당신에게 중요한 일만 없었더라면 당신도 그곳에서 다섯 고수들과 승부를 겨루었을 거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왕중양이란 분이 돌아가셨으니 마땅히 한 사람을 더 넣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황용의 말을 들은 구천인은 너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피어 올랐다.
"넌 정말 총명한 아이로구나. 그래, 아버진 천하의 다섯 고수가 누구누구라고 하시더냐?"
황용은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그중에 속하고, 다음엔 사부님……."
사부님이란 말에 구천인은 귀가 번쩍 띄었다.
"네 사부님이라니? 그게 누구냐?"
"제 사부님도 모르세요? 북개 홍칠공 말씀이에요."
구천인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지."
그는 말은 못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무서운 아이로구나. 어느 사이에 북개 홍칠공을 사부님으로 모셨을까? 한 몸에 두 파의 신공을 지녔으니 그 공력을 얕보아서는 안 될 게야.'
황용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밖에도 남제, 서독이 있고 마지막으로…… 아마 선배님이겠죠."
구천인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황약사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황약사가 자기를 다섯 고수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니, 이것은 자신에 대한 최대의 칭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구천인은 재차 물었다.
"너, 그 말이 참말이냐?"
부용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한테 물어 보세요."
구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 선배님의 공력이 대단하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었지만 오늘 보니 과연 범상치 않군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우리 후배들한테 장법을 좀 보여 주셨으면 해요!"
구천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으나 황용이 이렇게 잔뜩 치켜 주는 바람에 한 번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홍칠공의 제자이자 황약사의 딸인 이 게집애 앞에서 자기 재주를 보여 주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천인은 "좋아!" 하고 말하더니 오른손으로 술잔을 비틀다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 조각난 술잔이 나타났다.
모두들 그것을 보고 또 폭소를 터뜨렸다.
"왜들 웃는 거냐?"
구천인이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술잔을 끊는 이 재주로 말하자면 그는 황약사나 홍칠공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모두들 자기의 재주를 보고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었다.
황용이 또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선배님께 또 무슨 재주가 있으신지 우리들의 안계를 좀 넓혀 주세요."
구천인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화도 문하의 사람들은 모두 괴물들이로구나. 이 놈들이 웃는 것을 보니 탄복하지 않는 게 분명해.'
그가 다시 벽돌을 집어들고 가루로 내려 하자 황용이 말했다.
"선배님, 내력으로 그 벽돌을 부수려고 그러시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 정체로운 공력은 정말 사람들을 탄복케 하지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절반만 부수고 나머진 절 주세요. 저도 해보고 싶어요."
구천인은 화가 났으나 꾹 참고 벽돌을 집었다.
그가 벽돌을 비틀자 벽돌은 아까처럼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황용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사부님한테 배웠고 아버지도 알고 계세요. 아주 쉬운 거죠. 제가 하는 걸 보세요."
그녀는 구천인이 남긴 절반짜리 벽돌을 받아 들었다.
황용은 벽돌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면서 아까처럼 벽돌이 가루가 되어 푸시시 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벽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구천인이 무슨 수작을 꾸몄단 말인가?
구천인이 멍청히 서 있는 황용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홍칠공과 황 괴물의 제자도 별것 아니로군."
모두들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황용은 재빨리 눈알을 굴리더니 구천인에게 말햇다.
"선배님, 손가락에 낀 반지를 좀 빌려 주시겠어요?"
황용이 반지를 한 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구천인은 내심 우쭐했다.
'황 괴물의 딸도 이런 반지를 본 적이 없다니 한 번 보여 주자.'
그는 식지에 끼었던 반지를 빼서 황용에게 주었다. 황용은 그것을 받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반지가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내밀어 다른 반지를 달라고 했다. 그녀는 다른 반지를 들고 살펴보다가 또 말했다.
"이것도 아니에요."
영문을 모르는 구천인은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이 계집애가 날 놀리는구나. 하지만 두고 봐라. 네 년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
구천인은 나머지 반지를 빼서 그녀에게 주었다.
세 번째 반지까지 살펴본 황용은 하도 이상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세 개의 반지 모두 금강석이 끼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곽정이 멍하니 서 있는 황용에게 물었다.
"용이, 왜 그러는 거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이분의 반지엔 금강석이 끼여 있지 않아요."
구천인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무슨 금강석이 있다고 그러느냐? 너 지금 날 놀릴 셈이냐?"
그러자 매초풍이 비웃는 어조로 내뱉었다.
"놀리면 어쩔 셈이냐? 내 채찍에 얻어맞기 전에 조심하란 말이야!"
그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어댔다. 그들은 아까 매초풍의 채찍에 맞아 구천인의 머리에 피가 나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두들 웃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구천인의 이마는 아무 자국도 없이 말끔했던 것이다.
구천인이 벌떡 일어서더니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좋다, 너희들이 이 철장방 방주와 신물을 모욕했으니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네 놈이 우리 철장방의 신물을 깨물었으니 네 놈부터 죽여야겠다!"
그는 육관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매초풍이 채찍을 뽑아 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죽으려면 네 놈부터 죽어라!"
그녀는 아까 한 것처럼 채찍을 휘둘렀다. 그 채찍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구천인의 머리에 명중했다. 하지만 구천인의 머리는 윤기가 반들반들한 것이 핏자국 하나 없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구천인이 한걸음 내디디며 매초풍의 채찍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그와 매초풍은 채찍을 잡고 서로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채찍 끝이 뚝 끊어지면서 길이가 한 장이나 짧아지고 말았다.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이것은 그의 사부 황약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소리질렀다.
"어서 비켜라!"
그녀는 구천인이 더 이상 벽돌이나 술잔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두들 천천히 뒤로 물러났으나 구천인은 벌써 장을 내밀었다. 곽정은 황용이 그 장에 맞을까 봐 얼른 왼손을 휘둘러 몸을 돌리더니 오른손을 들어 강룡십팔장의 '견룡재전' 법수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무섭게 날아간 곽정의 장과 구천인의 장이 맞부딪쳤다. 곽정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날려 가 벽에 부딪쳐 정신을 잃었다.
곽정이 손을 쓰는 것을 보고 황용이 소리를 질러 말리려 했으나 미처 그럴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의 장이 맞부딪쳐 눈 깜짝할 사이에 곽정이 기절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곽정에게 뛰어가 부둥켜안았다.
"오빠, 오빠!"
곽정을 애타게 부르짖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떨어져 내렸다. 육승풍과 관영, 그리고 매초풍은 갑작스런 사태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구천인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공력을 보여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공력이었다.
구천인이 우쭐해진 기색으로 말했다.
"도화도 문하의 오합지졸들아,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이 순간 요란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집을 떠난 지 몇십 년인가."
그 사람은 바로 전진교의 장교진인(掌敎眞人) 마옥이었다. 마옥은 천천히 걸어와 공격 자세도 취하지 않고 조용히 구천인 앞에 섰다.
뒤이어 또 한 사람의 소리가 들어왔다.
"긴 낮을 더부룩한 머리로 뛰어왔구나."
그런데 목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구멍이 뚫리면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구천인 옆에 앉았는데 우악스런 얼굴에 시커먼 눈썹,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을 갖고 있었으며 몸매 또한 우람했다. 이 사람은 전진철자 중의 둘째 사형 장진자 담처단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해당정(海棠亭) 아래 중양의 제자들이 모이는구나!"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지더니 원숭이 같은 얼굴을 가진 왜소한 사나이가 들어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장생자 유처현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높이 외치며 들어섰다.
"연엽주(蓮葉舟) 위에 선 태을선(太乙仙)이구나!"
그는 전진칠자 중에서 무예가 제일 높은 구처기였다. 그는 문을 부수거나 천장에서 뛰어내리지도 않고, 유처현을 따라 천천히 들어와 구천인의 오른쪽 자리에 섰다. 이 자리는 가장 요긴한 자리이므로 구천인이 손을 쓰게 되면 반드시 오른손부터 쓰게 되어 있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외쳤다.
"알맹이가 없는지라 껍질을 벗어 내쳤구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런 후 한 사람이 창턱에 걸터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창턱에 앉은 것이 아니라 한쪽 무릎을 꿇고 온몸을 구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전진칠자 중의 철각선 왕처일이었다.
누군가가 또 소리쳤다.
"죽기 전엔 깨달을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두 손으로 창틀을 뜯어내더니 그 창턱에 뛰어올라 앉았다. 광녕자 학대통이었다.
부엌 쪽에서 한 여인이 나오는데 손에는 먼지털이를 들고 해골들을 수놓은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전진칠자 중의 청정산인 손불이였다. 그녀도 들어오면서 한 구절을 읊조렸다.
"문을 나서니 구속 없이 웃을 수 있구나."
마옥이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사람들이 서호(西湖)에 모였는데 하늘엔 달이 걸렸도다."
이 전진칠자들은 그들의 사부님인 중양진인으로부터 아주 무서운 진법을 전수받았는데 그 진법을 천강북두진(天 北斗陣)이라고 불렀다. 이 진을 칠 땐 사람마다 시구를 한 구절씩 읊고 마지막 시구를 마옥이 읊도록 되어 있었다. 모두 합하면 여덟 구절이 되는데 그것이 자기들의 마음을 이루는 동시에 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덟 구절이 다 끝나면 진중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시 살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전진칠자를 보고 놀란 황용이 다급하게 물었다.
"마옥,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나요?"
정신을 차린 전진칠자들을 보자 생기가 넘쳤다.
"마 도장, 무사하십니까? 지난 번에 대사막에서 만나 뵙고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구 도장, 역시 무고하겠지요? 왕 도장, 당신은 그때 입은 상처가 다 나았나요?"
곽정은 본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나 전진 칠자들 중에서 세 사람이나 알고 있으므로 인사를 하느라 말수가 많아졌다. 그는 세 사람에게 일일이 문안 인사를 했다.
매초풍이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당신들이 전진칠자들이신가요?"
그녀는 내심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대사막의 벼랑 끝에서 마옥이 강남의 여섯 괴물들을 전진칠자로 분장시켜 그녀를 물러가게 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매초풍은 두 눈이 멀었지만 귀가 아주 밝아 마옥의 목소리만 귀에 익고 나머지 여섯 사람의 목소리가 모두 생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진칠자가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이다.
육승풍은 이 전진칠자들을 보고 생각했다.
'전진교의 이 놈들이 이처럼 허장성세를 하는군. 싸움을 한다는 놈들이 시구나 읊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이처럼 귀신 놀음을 하는 건 구천인이 질겁하여 도망가게 하자는 것일 게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그는 물었다.
"당신들은 싸움을 할 때마다 이처럼 시구를 읊는 거요?"
육관영이 그 전진칠자들을 살펴보다가 끼여들었다.
"아버님, 전진칠자의 북두칠성 대진은 천하에서 유명한데, 이 일곱 사람들이 앉고 선 것을 보니 북두칠성 대진이 아니에요."
그들이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
첫댓글 즐감~~~~~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