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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회고는 ‘대열 반세기 여정’ 회고록의 회고
2021년 한해를 오늘로 마감하는 개인적인 소회는 한마디로 ‘영광스러웠다!’이다. 임관50주년을 맞이한 육사 제27기 동기생들의 결정(結晶) ‘대열’의 54년 자랑스러운 역사를 담는 회고록 ‘대열반세기의여정’의 편집에 매달렸던 것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편집진으로 참여해 여러 동기생들로부터 수시로 감격스럽고 과분한 격려와 칭찬을 받았지만, 대열 반세기의 역사를 종합 수록해낸다는 소임 자체가 역시 역사에 남는 개인적인 영광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대열 동기생 그 누구에게 맡겨도 이뤄낼 일인데 그 같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니. 전직에서 유사한 업무를 수십 년 하기는 했었지만, 이런 기회를 갖게 해준 2021년 대열회장단에게 조아려 감사할 일이다.
편집진이 구성되고 편집회의를 시작한 건 2월초부터지만, 2021년 대열회장 성유경의 편집진위촉전화를 받고 응하며 바로 회고록의 방향과 목차구상에 들어간 것이 2020년 12월9일. 이후 회고록 편집에 몰두해왔다. 1월초 대열홈피 공지에 첫 구상안을 올렸지만 2월4일 첫 편집회의엔 참석 못했다. 2월2일 고관절 골절로 입원한 아내의 병상보조의자에 쪼그려 앉아 수정 보완한 편집(안)을 편집진 단톡방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 퇴원이후 3월29일 2차 편집회의부터 12월10일 회고록 발간완료까지는 어떻게든 함께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보람을 느낀 것은, 회고록의 편집방향이 편집진 동료들과 수차의 협의를 거쳐 다듬어졌지만 최초에 개인적으로 구상했던 거의 그대로가 반영됐다는 점이다. 누군가 참고로 가져온 26기 선배들의 회고록문집을 우리의 회고록 완성 이전까지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우리 대열만의 이야기를 담고 대열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이후 편집과정은 5차의 대열홈피게재 ‘회고록 발간경과 보고’에 상세하게 전한 바 있어 반복하지 않겠지만, 대열 회고록은 육사도서관에 비치돼 생도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퇴역한 선배들이 생도시절을 회고하며 평생 견지해온 육사정신세계의 원천인 육사의 교육철학을 다시 음미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임관 후 현역시절과 퇴역 후로도 병과별로 또는 특수 분야와 사회 각계에서 위국헌신과 진충보국의 길로 활약했던 모습들이 다양하게 망라돼 있음을 보고 감명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회고록의 내용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도와주는 과정에서 감동했던 동기생들과의 이야기이다.
편집진 동료로 집필 담당 이택호와 전인구, 영상 담당 구재림과 김형욱은 각자의 편집소임을 의당 다했으니 고맙다 어쩌다 할 일이 아닐 진 모르지만, 곰곰 생각하니 다들 참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제1부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을 담당한 이택호는 고질적인 소화기 장애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평생 육사교수로서 견지했던 육사교육의 목표와 정신에 대한 철학적 지론을, 교훈과 사관생도신조의 분석 등을 통해 담아내, 현재의 육사생도와 선후배들 모두 새삼 육사출신으로서 자랑스러운 자기존재의 가치를 자존하게 만든 명작을 집필해 냈다.
제2부 현역시절 활약을 주무한 전인구는 모두 잘 아는 대로 하루 3개 이상의 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정에도, 달필인지라 담당 현역시절개관과 공병 병과 약사의 집필은 물론 개별적인 회고담도 여러 편 작성했고 편집회의소집, 각종 섭외와 출판사 선정 등의 성가신 일들도 늘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정신과 넓은 아량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동영상 담당 구재림은 대열의 역사를 106편이나 되는 대작의 동영상으로 만들어냈다. 책자편집방향 협의와 문장윤문 및 교정에도 동참했고, 대열 홈페이지가 간직한 동기회의 역사와 낚시동호회의 집필도 맡았다. 동영상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다면, 사진선정과 보정, 자막생성과 배경음악 선정, 타임라인에 맞춘 사진과 자막과 음악의 삽입 등 깨알 같은 신경을 동원해야하는 동영상 한 편을 편집하는 데, 얼마나 많은 날과 체력과 시력이 소모되는지 알 것이다. 70대 중반의 노안과 체력으로 그걸 해 내다니, 출판사 알선에도 나서고 USB 선정 구입 및 디자인까지도 감당해 냈으니, 그저 감탄하고 감사할 일이다.
사진담당 김형욱은 일찍이 대열의 졸업앨범을 스캔해 대열 홈피에 올려 동기생 모두 생도시절 추억의 사진들을 공유하게 해준 고마운 주인공이었으니, 당연히 영상편집위원으로 위촉될 터였다. 처음부터가 아니라 김석휘 등의 추천에 의해 추가로 위촉된 것이 오히려 미안할 일이었다. 50년에 걸쳐 퇴락된 옛 사진 자료들이 생생하게 보정되어 회고록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올릴 사진의 선정과 배열 및 디자인에 대한 자문도 아끼지 않았다. 사진 보정도 얼마나 까다롭고 힘든 일이란 건 아는 이는 알 것이다. 나중 편집진끼리 하는 말 “안 모셨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과연 그랬다.
성유경은 대열 회장이면서도 편집진의 일원이었다. 회고록 목차구성과 항목 별 제목 및 문장 작성까지 협의하며 세부적인 집필 과정에 참여했으며, 특히 동기생간 위화감 조성이나 보안상 문제가 있을 부분을 방비하는 철저한 감수자의 역할을 다했다. 편집 내용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메모해서 외출이 여의치 못한 내 사정을 살펴 우리 집 근처까지 오거나 수시 전화를 통해 함께 논의하고 수정하는 정성과 열정을 다했다. 임관30주년 당시 회장으로서 소식지 ‘대열’의 임관30주년 특집을 제작했었고, 대열 홈피를 운영하기 시작했었다는 새삼스러운 경력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회고록 편집진들이 편집과정 내내 동기생들의 관심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코로나 상황에서의 비대면 회고 페스티벌 마당으로 삼아 대열 홈피에 개설한 ‘특집-대열 반세기 우리들 이야기’방에 초기부터 편집 진행과정과 수록할 편집진의 글 및 동기생 일반의 기고들을 계속 올리고, 단톡방 ‘대열공식알림방’과 ‘대열카톡방’에도 올려 확산되도록 한 ‘신의 한수’ 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회고록의 편집에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도와주었거나, 편집진의 기고청탁에 부응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동기생들의 덕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편집을 도와주는 동기생들과 연락을 가지며 편집에 도움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는 더 소중한 소득을 챙길 수 있었다. 오래만이거나 임관 후 처음대화를 나누었다 볼 수 있는 친구들의 전화번호와 메일주소가 내 전화기에 차곡차곡 쌓여갔던 것이다. 안면(?)을 트면서 많은 동기생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편집진에 선임되던 처음부터 늘 과분하게 격려해준 이광형은, 대열 홈피 회고마당에 옛 생도시절 사진도 제공해 생도시절 편집 컷으로 요긴하게 사용하게 해 주었고. 청와대파견 동기생들 약사 대표집필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 일찌감치 글을 보내와 한 없이 고마웠는데, 11월5일 육사발전기금 1억원 출연의 주인공으로서 모교의 감사행사에 참석했었음에도, 그 같은 영예로운 사실을, 출판사교정도 완료해 넘기고 난 뒤에야 인지하는 바람에 대열연보에 추록하지 못하는 실수가 있었으니, 보은을 결례로 대신한 꼴이 되어 지금도 못내 미안하고 미안하다.
김석휘는 나도 고려하던 김형욱을 영상편집위원으로 추천하면서 회고록을 경제성과 편의성 등이 훌륭한 USB로 제작하자는 참신하고도 모던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으며, 이후로도 발간 부수 등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든든한 후원을 보내주었다.
양태호는 처음부터 한국통일진흥원의 회의실 제공과 식당 예약 등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특히 코로나 pendemic 상황에서도 넓은 공간에서 대형 PPT화면으로 토의할 수 있도록 한 새 회의실을 손수 소독까지 해주는 사랑을 베풀어 주어 감격하게 했다.
김홍찬은 오랜 동기회 총무경험을 고려해 요청한 대열동기회의 개관약사를 기꺼이 멋지게 대신 작성해주어 ‘객원 집필진’의 영예(?)를 안게 되었고, 편집회의에도 참석해, 회고록 내용 중 예민한 부분의 편집 방향 및 내용과 관련해서도 탁월한 의견을 개진해 주기도 했다.
이효진은 편집회의에 참석해, 6.25전쟁초기 생도신분으로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생도1·2기 선배님들 추모특별사업을 임관 50주년 대열의 뜻깊은 기념사업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오찬을 제공했고, 박승춘도 편집회의에 나와 병과별 약사 작성 중 정보 분야 및 정보병과 구분의 의미와 강조점을 설명해주고 오찬을 제공했다. 모두 고마운 격려들이었다.
병과별과 동호회 및 지역포럼 별의 대표집필과 개별회고담 및 취미생활소개 작성 주인공들과 직접 연락을 취하며 따뜻한 격려와 응원, 상호 이해를 교분하는 기회를 가졌다. 중대별 지회활동 약사 시도와 관련해서나, 전문자격 취득 및 작고동기생 기일 및 선영 등 현황을 파악하면서는 모든 중대 지회장 및 친교 동기생들과의 통화도 많이 가지며, 새로운 인재들과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됐던 것이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전임 집필진 외에 회고록의 내용을 채우는 집필에 큰 몫을 차지한 동기생들의 활약도 컸다. 발간사야 물론 회장 성유경 몫이니 중심적으로 담당했지만, 대열 50년의 위국헌신 역사를 함축성 있게 노래한 축시를 부담 속에서도 선뜻 맡아 서두를 멋지고 뜻 있게 장식해 김종윤이 있다.
이어 임관 직전 병과별로 분류된 동기생들이 각 분야에서 분투하고 발전하면서 애국충정의 길을 걸어온 과정을 기록해 2부 현역시절 활약사를 한 눈에 알아보게 한 병과별 대표 집필자들인 보병 이화영, 포병 권안도, 통신 김호태, 정보 박승춘, 방공포병 윤용수, 공군전군 김규, 정훈 이동남, 법무 이민재가 있고, 육사교수부를 비롯한 특정분야 약사를 집필한 행정부처 박수환, 청와대 이광형, 조기사회진출 유병태 등이 각각의 주인공들이다.
이 동기생들에겐 놀라고 감탄하며 미안한 부분이 적지 않다. 대표적 예로 보병 병과 이화영의 경우인데, 가장 많은 보병동기생의 시기별 계급별 보직과 임무와 교육 과정, 매 시기 변천과정에서 발생했던 대간첩작전 월남파병 군현대화 등 제반 국방현안 진행에서 동기생들이 이뤄낸 공적들에 대해 세세하고 방대한 줄거리로 엮어 냈던 데에 놀라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뒤를 이은 포병 공병 통신 정보 등의 대표집필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아닌, 같은 병과라도 다양한 길을 걸었을 다른 동기생들이 어떤 과정과 경로로 성장해 갔는지를 놓치지 않고 적어 놓고 있었다. 숭고한 배려와 동기애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어서 감탄한 것이다.
집필 과정에서 자료조사도 했을 것이고, 동일병과 동기생에게 일일이 전화나 메일로 오류여부를 확인하는 힘든 노력과 시간의 소모를 통해 완성했을 것인데, 그 글의 작성자임을 회고록의 목차나 말미에 밝혀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미안했다. 해당병과 약사가 작성자 개인의 것으로 오인되는 일을 막고 병과동기생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하도록 하자는 취지가 편집회의에서 토로된 결과에 따른 것이니, 새삼 이해해 주기 바란다. 또한 단독 또는 2명이나 4~5명 수준의 적은 인원의 병과 약사가 수십 명 인원 병과의 약사와 분량이 같거나 넘으니 대폭 줄이자는 편집의견도 있었지만, 홀로 또는 적은 인원으로 고군분투했기에 더 애착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성심껏 작성해온 원고를 도저히 막 잘라낼 수 없었다는 고충이 따랐다. 그래서 완성책자의 페이지를 500면을 넘기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A4 원고지 5페이지 미만이란 인위적 기준을 두고, 참 많이도 잘라내기도 했다.
하나의 문장을 둘로 나누거나 두 개의 문장을 하나로 통합하기도 했으며, 병과 약사의 잘릴 부분을 개인 회고담으로 돌려 살려두기도 했다. 데스크의 횡포라면 횡포, 재주라면 재주라 해도 할 말이 없겠다는 고백이다.
물론 알맹이는 살리고 전후 문맥에서 중복되는 부분과 보안상 문제되는 구체적 단대호와 인물 신상명세를 등을 제외하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최대한 적용해서였다.
이 같은 개별 제출 원고의 편집과정 축약은 이후의 개인 회고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하게 되었다. 그런 사정과 기준은 작성해온 원고를 대열홈피에 올리는 머리말 안내문에서도 밝히고 편집자와 집필자의 수시 통화에서 소통을 가졌다. 주인공 겨레얼 1호 박사란 독보적 글의 박정학 이외에는 그 어떤 동기생도 토를 달지 않았다. 편집진에서 어떻게 하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정말 편집 진행을 수월하게 도와주는 눈물 나는 집필 동기생들의 배려였음에 지금 새삼 다시 감사의 정을 전한다.
3부 퇴역 후 활동의 중심은 동기회 운영과 동호회 및 지역포럼 활동이고, 각 단체의 약사도 대표집필 주인공들이 있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대표집필 동기들의 노고와 활약이 컸는데, 병과별과 같은 이유로 집필자를 명기하지 말자고 한 것을, 제목 바로 아래는 피하고 말미에 밝히자는 양보를 얻어냈다. 대개의 경우 봉사의 정신으로 모임을 이끌고 있는 회장들의 글을 존중해 주고 싶은 심정에서 ‘000記’ 정도로 나마 표시하게 돼 참 다행이다 싶었다^^
제4부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개별회고담을 모은 것으로서 회고록 전체 450페이지 중 172페이지를 차지하는 최대분량을 자랑한다. 32편의 글이 실렸고 복수의 글을 썼거나, 전임집필 편진진 3명도 가담한 글을 제외하면 20명이 개인 기고자로 등장한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생도시절을 거쳐 임관 이후 지나온 국가 위기와 발전의 고비마다 위국헌신 진충보국의 애국전선 길에 섰던 동기생들의 노력과 애환, 활약과 성공의 이야기를 접하고 즐거운 심정으로 인정하고 격려하게 된다. 대열회고록 편집 소임을 맡으며 첫 번째 방향으로 잡았던, 육사 교훈이 지향하는 가치의 목적달성을 충족시킨 대열의 자랑과 자부와 자긍을 살릴 수 있는 바로 그런 내용이었던 것이다.
월남전 참전, 남침땅굴 발견, 창설 특공부대 발전토대 기여, 청와대경호실 개혁, 밀레니엄시대 자립군수 달성, 한미동맹 공고화, 바른 국사운동 선봉, 동구권의 서울올림픽 참가성사 유도, 첨단 지대공미사일체계 완성 방산수출흑자 달성기여, 방공포병의 공군전군 주역, 국제평화유지활동의 개척, 향군 개혁의 의지, 자유 민주수호 예비역 기수 역할, 구국동지회의 기수, 대열홈피 통한 소통 공간의 주역 등등 말만 들어도 흐뭇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일들의 주역이 동기생이라니 덩달아 일어나는 어깨춤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런 소중한 기록의 글들을 마구 잘라내 줄였다니, 본문들이 아까워 그대로 내 컴퓨터 파일에는 버리지 못하고 저장해 두고 있다. 이 집필자와의 소통과정에서, 동기회의 명칭 '대열'의 유래를 알려주고 생도4학년 당시 OBC를 임관 전에 받으며 별동 건물에서 지내야 했던 대열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내막도 알려주었던 김용석, 그리고 옛 사진들을 지속해 제공해주고 폭넓은 이해를 보여준 김기성 등이 특히 고마움의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한편, 몇 번에 걸쳐 예고한 원고마감 시일에 맞추지 못하고 나중에 올려와 책자에는 싣지 못하고 만 사정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시기를 놓쳐 인터넷 홈피에만 올린 최주영의 <부대정문 야간 수하 요령에 ‘운전병 하차’가 있는 이유>, 역시 시기를 놓친 정훈출신 김우식 등이 퇴역 이후에도 군정신 안보교육 일선에서 헌신했던 활약사, 자료부족으로 포기한 전현철의 개성공단 체험기 등이 빛을 보지 못한 경우로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편집진의 아둔함과 미련함을 꾸짖어 주기 바란다.
부록에 편집한 ‘취미생활 멋과 향기의 주인공’ 도 해당 동기생이 자신의 글로 작성됐다. 3부 퇴역이후 활동의 마지막 ‘다양한 취미생활’ 아래로 취미생활 동기생들의 향기를 두어, 청장년 현역시절 군복무나 사업, 직장업무에 매진하던 바쁜 중에도 짬을 내, 자기 내면의 소양을 계발(啓發)하여 취미생활을 가짐으로써 자칫 건조해지고 무의미해질 일생에 향기를 더해온 존경스러운 인물들을 찾아내 소개하는 종합 기사를 올린 뒤의 구성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고 다양한 취미생활의 주인공들이 나타나지만, 글로 표현하기 번거러워 끝내 철저한 은둔 야인으로 남고 만 동기생들이 더 있음을 알지만, 정해진 기간에 다 모시고 동기생 모두 그 향기에 취해보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래도 덕분에 회고록 표지와 날개에 두 동기생의 서예작품을 모시어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취미생활 기록을 찾는 과정에서 얻어진 귀중한 소득이라 위안을 삼는다.
부록의 전문자격 동기생과 먼저가신 동기생들의 현황을 파악하면서도 감회가 깊었다, 어찌 이리 많은 동기생들이 학위를 받고 전문자격을 획득했는지 이런 동기생과 어깨를 나란히 함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자신의 게으름을 깊이 반성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은둔하고 있던 한 동기생이 완전한 농부로 전원생활 속에 은둔하고 있음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작고한 동기생이 지난 11월 현재로 29명이었다, 회고록 편집에 들어선 올해만도 4명이 앞서더니 기어이 12월에 또 한 명 유명을 달리해 기어이 30명을 채우고 말았다.
새삼 슬퍼할 일이 아니고, 대열 동기생 모두 해당하는 이 연조에선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제이든 일어날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 길나서기 전에 모두 힘을 모아 만든 우리의 회고록 ‘대열 반세기 여정’을 읽으면서 보람차고 영광스러웠던 추억을 즐기고, 건강한 나날을 동기생들과 함께 이어나가면 그것이, 또 하나 노년에서 제일의 보람이고 낙일 것이다.
이것이 세밑에 동기생들에게 보내는 송구영신의 인사이기도 하다
4시간도 안 남은 대열반세기 회고록과 함께 한 올해를 보내면서, 미루고 미루다 늦어버린 회고록에 대한 회고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오류가 있거나 부족한 부분은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란다. 인터넷 홈피의 글은 바로 바로 수정할 수 있느니 다행이 아닌가?
대열의 회고록 ‘대열 반세기 여정’의 탄생에 함께 하고 도움 주신 동기생과 모든 동기생들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2021, 12.31 김명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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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고록의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라고 할걸세. 후배들이 우리의 추진경과를 보고 깜짝 놀라고 있네.
고마운 일일세!
역시 김명수
말이 필요없다.
퇴역후의 안보강연활약 회고담 올릴 기회 주지도 못했는데~그래서 미안하기만 한데~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