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영웅에게 꽃을 "제법 예의바른 족속들이오. 헛헛… 격분한 나머지 덤벼들 줄 알았는데, 덤 비지 않다니…" 야월노인은 싱글벙글거렸다. 그는 일백팔영과 더불어 봉황대선 위로 날아들 었다. 그 사이 봉황천의 인물들은 단장화와 더불어 선실 안으로 들어갔고, 패배하 기 전에는 상상을 하지 못했던 장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싸움이 있으리라 여겼던 야월화의 무사들이 놀랄 정도로 봉황천의 무사들은 침묵을 지켰다. 꼭 한 사람. 봉황천의 수석원로(首席元老)가 되는 대해존야(大海尊爺)만이 무옥을 찾았 다. 야월은 그가 무옥을 암살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봉황천 사람들은 진정한 무인이었다. 그들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 이었다. 대해존야는 세 가지 물건을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 그것은 하나의 철궤로, 그 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기진이보(奇珍異寶)가 가득 들었다. 자패신주(紫貝神珠), 혈묘안석(血猫眼石), 창궁뇌령주(蒼穹雷靈珠), 혈하정 (血霞晶), 오행옥령주(五行玉靈珠)… 철궤 안에 들어 있는 기진이보는 금액으로서는 측정하지 못할 정도의 가치 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봉황천이 중원에 치루는 예물이었다. 두 번째. 그것은 하나의 나무갑으로, 그 안에는 천여 개의 환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자패분(紫貝粉)과 오풍초(烏風草)를 주약(主藥)으로 하여 만든 봉황피독단 (鳳凰避毒丹). 그것은 봉황천이 잡은 강남무림계 인사들에게 먹여진 산공독(散功毒)에 대 한 해독약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물건. 그것은 중원에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봉황천을 꺾은 위대한 승리자에게 보 내는 예물이었다. 천년화(千年花)라고 불리는 한 송이 핏빛 꽃. 그것은 무옥에게 바쳐지는 봉 황천의 예물이었다. 대해존야는 세 가지 물건을 내려놓으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제 돌아갈 것이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대륙무림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될 것이오. 물론, 우리들이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역겨워 포 위 공격하겠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오. 패자(敗者)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니 까!" 대해존야가 참담한 투로 말하자. "깨끗한 패자에게마저 악랄하게 굴 중원인은 하나도 없소!" 무옥은 미소로써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고맙소! 그대는 대륙의 영웅이오!" 대해존야는 장읍을 취했다. 무옥, 그는 대해율법(大海律法)을 깨뜨린 것이다. 대해에서 일어난 팔십팔개도(八十八個島)의 연합세력은 머지않아 정식으로 와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봉황천은 영원한 봉파(封派)에 들어갈 것이다. "단장화는?" 무옥이 슬쩍 묻자. "선실 안에 계시는데… 안에서 문을 잠그셨소." "으음…!" "그분을 죽일 작정이오?" "아니오." "고맙소. 사실, 그분은 이미 모든 내공을 잃으셨소. 무대협(武大俠)의 검강 (劍剛)은 그분의 내공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소!" 대해존야는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이 대해의 인물이라면, 역사는 달라졌으리라!' 그는 무옥을 힐끗 바라봤다. "그분은… 나오지 않으실 것이외다. 문을 안으로 담그신 채 소복(素服)으로 갈아입으셨소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율법에 따른 행동이오. 그분은 뵙 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말씀을 남기셨소!" 대해존야는 하나의 수건을 내밀었다. 땀에 찌든 수건, 수건의 양면에 각기 다른 글이 적혀 있었다. <막아 보시오!> 바로 무옥이 쓴 글이다. 수건은 무옥의 수건이었다. 수건의 뒤쪽. <그대는 영웅! 그대에게 천년화(千年花)를 드리고 갑니다. 그리고 오백 척의 선박을 그대에게 드립니다. 모든 것은 대해율법에 따르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필체. 그리고 그것은 단장화가 봉황천의 일인자로써 마지막 임무 를 다하며 쓴 글이기도 했다. 단장화는 의식을 잃었다가는 선실 안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봉황천의 천녀(天女)이지 못했다. 패한 이상, 그녀는 죄인(罪人)에 불과했다. 그녀는 신화를 깨어 버린 대역죄인일 뿐이었다. 선실은 어두웠다. 그녀는 기침 소리를 내며 벽을 보고 있었다. 본시 창이었던 곳은 꽉 막혀 있었다. 내공마저 잃은 그녀인지라 어둠을 뚫어 볼 수는 없었다. 하나, 그녀의 눈은 지금에야 가장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를…"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여인이었으나, 단 하나만은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 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그녀의 초연(初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무엇인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잔(盞). 수정(水晶)으로 되어 있어, 안의 액체가 들여 다보인다. 잔 안에는 핏빛의 술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제… 여한은 없다. 사실, 단장화의 생활은 권태로운 것이었다!" 단장화는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그녀의 왼쪽 귀에는 귀걸이가 걸려 있었 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빛이 없는 붉은 진주였다. 혈진주(血眞珠). 단장화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봉황천의 물건이다. "이제… 이것을 써야 할 때다!" 단장화는 조심스레 귀걸이를 떼어 냈다. 왜 귀걸이를 떼어 내는 것일까? "꺾인 단장화에게 주어지는 것은… 혈주(血珠)이다! 그것은 바로… 대해의 마지막 율법이다!" 단장화는 혈진주를 혈주 안에 떨어뜨렸다. 순간. 끄르르… 끄르르…! 혈진주의 혈주 속에서 흰 거품을 무한히 뿜으며 용해되기 시작했다. 한 잔의 술잔을 쳐드는 여인.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웬지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에 가득 번지는 웃음에는 군림(君臨) 이상의 뜻이 담겨 져 있었다. "아름다운 대지를 봤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사를 봤으며, 이 세상에 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손이 천천히 쳐들린다. 그리고 끊어질 듯 가는 독백이 흐른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여자(女子)라는 것을 느꼈다. 여자라는 것을 느꼈 다는 것은, 내게도…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 로!" 단장화는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잔(盞)은 그녀의 입가로 다가갔고, 그녀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 다. "묘한 무리들이외다. 중원을 피로 씻을 듯이 몰아닥쳤다가는, 저리도 조용 하게 물러나다니…" 야월은 갈대숲에 있었다. 그는 무옥의 오른쪽에 있었고, 무옥 뒤에는 일백팔 명이 학익검진(鶴翼劍 陣)을 펼치고 서 있었다. 봉황천이 물러났다고는 하나, 이들은 단 한 치도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누군가 접근해 온다면 일백팔 개의 검에서 검화가 피어 오르리라. 누군가 검의 그물을 뚫고 들어온다면 백여덟 개의 몸뚱이가 그것을 막아 내 리라. 야월화의 일백팔 살수들. 이들은 더 이상 자객이 아니었다. 자객에서 영웅으로 화신한 일대호걸들은 무옥을 더욱 존경하게 된 듯, 흠모 의 눈빛을 쉬지 않고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무옥을 향해 존모의 빛을 내뿜던 풍운제검대의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을 빨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무옥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기 도 했다. "하여간… 이제는 하나의 싸움이 남았을 뿐입니다. 마교총림의 무리들과 싸 우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야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야월화가 강남을 구하는 일에 큰 활약을 했다는 데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 무옥은 웬일인지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한 송이 핏빛 꽃이 놓여 있다. 봉황천이 그에게 남긴 천년화. 그것은 천 년을 두고 향기를 잃지 않은 신비 한 꽃이었다.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의 영혼을 잡아끄는 기이한 힘이 한 송이 꽃 안 에 숨어 있다.' 무옥은 천년화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 야월화의 무사들은 봉황천이 잡아다가 풀어 준 강남무림계 고수들 에게 해약을 먹이고 이것저것 사정을 설명하느라 바빴다. 장강은 묵묵히 흘렀고, 허공에는 달이 떠오르고 있다. 저 먼 곳, 달빛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안개의 바다가 있고… 그 안으로 오백 여 척의 배가 움직여 가고 있었다. 바다로 들어가는 봉황천의 사람들. 그들은 소문과는 달리 사리판단에 정확 했고, 무림 예법에 밝았다. 무옥은 여전히 천년화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그의 두 눈에서는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있다, 글씨가 있다.' 글씨라니? 천년화의 꽃잎사귀에 글씨가 적혀 있단 말인가? 핏빛의 꽃.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을 흘리는 옥골(玉骨)의 줄기(莖)는 길이가 일곱 치이 다. 그 위에 아홉 개의 꽃이 피어나 있다. 무옥은 꽃술 가운데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말할 수 없이 강 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있다, 글씨가!" 무옥의 얼굴은 홍옥 사과로 익어 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글이 있다는 것일까? '나의 내공은 대결 이후, 더욱 강해졌다. 혼신의 공력을 다한 결과, 오히려 내공이 막강해졌다. 아아, 그 전이었다면 글씨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옥은 꽃술 가운데에서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이 글씨를 보는 자, 천년겁(千年劫)을 깬 사람이리라! 그리고 그대로 인해 대해의 율법은 깨어지리라!> 과두문으로 적힌 글이다. 과두문이란 고대문자로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꼬불꼬불하고, 올챙이같 이 생겼기에 올챙이 글자라고 불리는 글자이다. <노신은 봉황무혼(鳳凰武魂)! 봉황천의 초대천녀(初代天女)이다! 노신은 중 원인(中原人)이다!> 봉황무혼이라는 사람이 남긴 글. 그 글은 매우 기묘한 방법에 의해 숨기어져 있어, 내공이 극강하지 않다면 발견하지 못하도록 안배되어 있었다. <봉황천의 뿌리는 사실 중원이다. 한데 노신이 봉황천에 중원을 피로 물들 이라는 율법을 남긴 이유는, 중원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아아, 이 꽃이 결실(結實)을 맺는 순간 노신은 중원을 용서하리라! 아마도 천 년이리라! 이 꽃이 결실을 맺는 데 필요한 시기는! 이 꽃의 결실은 이름하여, 천년혈정(千年血精). 그것은 바로 혈사주(血死酒)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독약이기도 하다! 이 글을 발견하는 자, 봉황천의 진짜 주인이 되리라. 그대에게 진짜 꽃을 주겠노라! 바로 단장화(斷腸花)를!> 너무나도 놀라운 글이었다. 봉황무혼(鳳凰武魂) 감리화(坎離花). 그녀는 고대의 인물이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뭇 남자들에게 농 락을 당해야 했고, 그러는 가운데 무림계와 중원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중원에 한을 품고 동해(東海)로 갔고, 그 곳에서 고대 기인인 봉황 삼신군(鳳凰三神君)의 진전을 얻을 수 있었다. 비파겁(琵琶劫), 초혼겁(招魂劫), 만화겁(萬花劫). 그녀는 삼대겁경(三大劫經)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백팔무 적신공(百八無敵神功)을 창안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걸린 시일이 일 갑자. 그 사이 중원의 숙적들은 모두 다 죽 었다. 그녀는 복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절세고수가 된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원망했고, 운명을 저주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모든 진기를 다해 하나의 심령화(心靈花)를 피워 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천년화. 그것은 그녀의 피(血)와 영혼을 먹고 자라난 꽃이었 다. <이 글씨는 나타나는 즉시 사라질 것이다. 이 글씨는 봉황심령진기(鳳凰心靈眞氣)에 의해 전하고자 한다. 그것은 봉황 천에도 남기지 않았던 최후(最後) 겁결(劫訣)로, 죽어 가는 이 순간 깨닫게 된 최후의 심득이다!> 봉황무혼 감리화는 위대한 기인이었다. 그는 무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세 가지 절기는 검장 초(劍掌招)도 아니고, 경신보법(輕身步法)도 아니었다. 봉황천하만리혈(鳳凰天下萬里血), 화조등천영겁멸(火鳥騰天永劫滅), 천상천하제일화(天上天下第一花). 세 가지 초식 구결이 빠른 속도로 나타난다. 마치 환상처럼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구결들. 그것은 기문육가에도 없는 가공할 음파절기(音波絶技)들이었다. 일컬어 삼겁후(三劫吼). 봉황혈후(鳳凰血吼), 화조혼후(火鳥魂吼), 천상화후(天上花吼). 무옥의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곁에 있는 야월은 그가 몸을 떨고 있다는 데 몹시 의아해 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야월은 바로 곁에 있었다. 그도 천년화를 보고 있으나, 그는 천년화의 화려한 꽃술 가운데 스쳐 지나 가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무려 세 시진(時辰). 무옥은 선 채 세 시진을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실로 기이한 일이 벌어지 고 있었다. 보라! 꽃이 지고 있지 않는가? 아름답던 핏빛 꽃잎사귀는 조락하기 시작했고, 천 년 간 향기를 잃지 않았 다는 전설의 꽃은 검은 연기를 피우며 빠른 속도로 시들어 가고 있었다. 꽃이 시들다니? 사람들이 경악하는데,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년화가 스러지는 가운데, 하나의 핏빛 과일이 빠른 속도로 익어 가고 있 지 않은가? 크기는 자두만하고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과일. 그것은 바로 천년혈정(千年血精)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무옥은 모든 사람이 일세기연(一世奇緣)에 경악하고 있을 때, 오랜만에 미 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의 눈에는 전에 없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스라한 녹채(綠彩). 무옥의 두 눈에서는 전에 없던 한 가지 빛이 일어나 고 있었다. "저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야월을 보고 웃었다. "이기지 못하다니?" 야월이 깜짝 놀라자. "저같은 녀석은 백 초면 죽일 절기가 봉황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그럴 수가?" "아아, 그것은 사실입니다!" "총수가 허언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아오만, 어찌 총수의 말을 믿겠 소이까? 총수는 바로 오늘, 봉황천을 꺾지 않았습니까?" "훗훗…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봉황천에 저를 백 초에 꺾을 절기가 있 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 에?" 야월의 입이 다시 벌어졌고, 무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말하 는 대신 눈빛으로 말을 전했다. 야월은 그의 야릇한 눈빛 가운데에서 대답을 읽을 수 있었다. "설마… 총수가 그 장본인이오?" 야월의 입은 스르르 벌어졌고. "그렇소이다." 무옥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그의 입은 급격히 벌어졌다. "그럼 대해의 전설을 총수께서…!" 순간. "하여간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무옥은 천년혈정을 쥐고 신형을 가볍게 틀었다. 그는 즐비하게 늘어선 야월화의 무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노야는 휘하 무사들과 더불어 검황성으로 가십시오!" "총… 총수는?" "저는 거기 가기 이전,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단 말이오?" "죽어 가는 꽃이 있습니다. 그 꽃을 살려야 합니다!" "예?" 야월화의 살수들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이들은 미리 검황성 쪽으로 가고 있는 강북단 고수들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백 여인만이 남아 강남무림계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무옥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달(月)은 구름에 숨었다. 언제부터일까? 암울한 밤공기 가운데 불꽃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타탁- 탁- 탁-! 불이 치솟고 있는 곳은 거대한 범선의 위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데, 하나같이 백의를 걸치고 있었 다. 이들은 천천히 걷는 가운데, 원무(圓舞)를 추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며 걷는 걸음, 기이하게 움직이는 몸짓,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너무도 숙연하고 엄숙했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일대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 뿐이었다. 죽음의 춤사위, 이것은 대해율법에 따른 하나의 성대하고 잔혹한 의식이었 다. 관(棺) 하나, 그리고 여인 하나가 있다. 관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뚜껑은 열린 상태였다. 여인은 눈처럼 흰 살결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죽은 듯, 몸은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웠다. 타탁- 탁-! 치솟고 있는 불기둥 쪽으로 관은 이동되고 있었다. '율법은 저주이다. 차라리… 이렇게 불살라지는 것이 슬프나, 당연한 일이 다.' '이제는… 운명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없겠지.' '아아, 관은 타고 천녀의 몸은 다비(茶毘)가 될 것이며… 그와 더불어 이 배 또한 불붙어 타 버릴 것이다.' '패한 이상,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다. 바다에서 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해율법이기에…' 배 위에 있는 사람은 바로 봉황천의 무사들이었다. 무옥으로 인해 패배한 사람들. 이들은 죽음을 마음 속에 결심하고 있었다. 몸이 차갑게 식은 여인은 바로 단장화였다. 단장화는 패배를 자책하는 의미에서 독배(毒杯)를 들었다. 그 안에는 맹독 (猛毒)이 들어 있는지라, 그녀의 몸은 얼음 덩어리처럼 차게 식어 가는 것 이었다. 한데, 그녀는 슬픈 얼굴로 식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전에 보이지 않았던 십전지미(十全之美) 절대지미(絶代之美)의 아름다운 미 소. 그녀는 미소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대를 이루었다. 어이해, 그녀의 입가에 그토록 아름다운 미소가 남을 수 있단 말인가? 독약의 고통으로도 지우지 못할 그 미소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관이 불기둥 속으로 가까워질 때였다. 삐이이이익- 삐익-! 사방에서 예리한 호각 소리가 들리면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우우… 누군가 나타났다!" "허공을 보아라! 누군가 어기배검술(馭氣排劍術)로 다가서고 있다!" "어엇? 저 사람은 바로… 무옥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검은 하늘로 돌리어졌다. 보라! 검기(劍氣)가 허공을 가로끊는 가운데, 표표(飄飄)히 날아드는 흰 그림자가 하나 있지 않은가? 땅으로 떨어지는 유성이 거꾸고 치솟아 오르듯이, 무려 오백 장 밖에서부터 검을 끌어안고 떠오른 사람은 바로 이 순간의 저주를 만든 무옥이었다. 그가 오다니…? 승자의 미덕을 베푼 그가 약속을 어기고 대해로 돌아가는 봉황천의 앞을 가 로막을 줄이야? 봉황천의 무사들은 공포를 느꼈고, 동시에 처절한 굴욕을 느꼈다. "무옥… 아무래도 불안한 게구려? 우리들을 추살(追殺)하려 들다니?" "으음, 그대는 일대영웅인 줄 알았는데… 졸장부였던가?" 사람들의 눈빛이 흐트러진다. 무옥은 모든 사람을 패배자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무옥을 존경하나, 무옥이 오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봉황천은 패배마저 승부의 미학으로 여길 정도로 완벽한 무사들의 집단이 다. 승부에서 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 자신들의 최후를 남에 게 보인다는 것은 무사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율법에 따라 죽어 가려는 사람들의 눈에서 살광(殺光)이 혁혁하게 쏟아져 나올 때였다. 돌연, 원로급 노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오오… 저럴 수가…!" "저 수법은 바로… 바로 우리의 수법이다!" "무옥이 어이해, 봉황천의 무공을 쓴단 말인가? 어제만 하더라도, 하나도 알지 못했는데?" 허름한 백포자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져 내리는 무옥의 일신 수법은 바 로 봉황천의 독문비기(獨門秘技)들이었다. "늦지는 않았군!" 무옥은 일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에서는 기이한 기도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감히 다가서지 못할 정도로 섬 하면서도, 차갑지는 않고 아주 부드러운 기 묘한 기운. 무옥은 어제의 무옥이 아니었다. 그의 무공은 전에보다 한결 늘어난 상태였 고, 전신의 신기(神氣) 또한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무옥은 관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고. "서시오!" "우리들의 최후를 방해하지 마시오!" "무옥, 부탁하오. 돌아가 주시오!" 수많은 그림자들이 무옥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혈검팔십팔 위사들. 이들은 무옥의 일검에 격파된 치욕보다는, 단장화가 자결을 했다는 괴로움 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하나하나의 무공으로 따진다면 야월일백팔영을 능가하는 사람들이다. 단장 화는 대해의 상징이고, 이들은 대해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주역들이다. 무옥이 비록 적이나, 이들은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다. 그가 완전한 무사이기에. 단장화에 대한 이들의 존경심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몸이 얼음처럼 식어 가는 단장화이나, 여전히 그들의 영원한 사랑이다. 쓰으으… 쓰으으…! 살풍(殺風)이 일어나는 찰나, 무옥은 아주 조용히 입술을 열며 눈에서 벽록 색 광채를 발휘했다. "비키게들! 나를 안다면!" 차고 강인한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실려 있었다. 혈검팔십팔위는 목소리에 실린 기이한 진기의 힘과 정신적인 압도감을 이기 지 못하고 다가서다가는 멈칫하고 말았다. 저벅… 저벅…! 무옥은 성큼성큼 관 쪽으로 다가갔다. 홀연히 나타난 무옥. 그는 봉황천 무사들에게 다시 한 번 패배를 안겨 주었 다. 어제의 패배는 무공의 패배이고, 지금 모든 사람이 느끼는 패배감은 정신적 인 패배감이었다. 한데 패배감은커녕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천년화의 꿈이 실현되었단 말인가?" 바로 대해존야. 그는 천년화를 무옥에게 전한 장본인이었다. "화조가 날고, 봉황의 인연(因緣)이 맺어진다는… 믿지 못할 전설이 실현된 단 말인가?" 그의 입가에는 웃음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만은 알아봤다. 무옥의 손에 쥐어진 작은 구슬이 바로 천년혈정(千年血精)이라는 것을! "저것은 바로 봉황천의 천년신표이다. 아아, 저것을 갖고 나타나는 사람은 바로 하늘이다! 우리들의…!" 대해존야는 천천히 오체투지에 들어갔다. 그는 단장화 아래 있는 사람 중에서는 배분이 제일 높다. 단장화가 자결을 택한 이상, 그가 봉황천의 실질적인 일인자라 할 수 있다. 그가 절을 하자, 다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절을 했다. 봉황대선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무옥뿐이었다. 무옥은 단장화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 죽음은… 아름답지 않다오." 무옥은 단장화의 입술을 벌렸고, 살포시 벌어지는 입술에 천년혈정을 넣어 주었다. 단장화는 가사상태였다. 이미 맥(脈)은 끊어졌다. 심장이 가늘게나마 뛰고 있고, 몸에 온기가 약간 이나마 남아 있는 이유는… 그녀가 본시 금강불괴지신이기 때문이리라. 천년혈정은 단장화의 입 안에서 녹았다. 하나, 그것은 단장화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가지 못하고 입 안에 고인 채 머물렀다. 무옥은 의술에도 대가인지라, 그러한 것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빛 때문일까?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이유는? "단장화! 미안하오. 허락없이 그대의 고결한 입술을 훔쳐야만 하겠소이다!" 무옥은 조용히 고개를 낮췄다. 그의 입술은 단장화의 입술 위에 포개졌고, 입술 사이에서 사내의 뜨거운 숨결이 흘러 들어가며 단장화의 입 안에 고였던 천년혈정액은 끄르륵 소리 를 내며 목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달 아래, 무옥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초산랑의 면구를 벗기고 난 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그는 술을 마신 듯 몸에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단장화의 몸에서도 사라졌던 열류가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추궁과혈(推宮過穴) 해 주는 것뿐이다. 배는 바다 쪽으로 가지 않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 봉황천의 영웅들은 잠깐 걸쳤던 백포를 벗었고, 이전의 무복(武服) 을 다시 걸쳤다. 허리에는 끌러 두었던 병장기가 차여졌고, 두 눈에서는 사라졌던 광망(光 芒)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옷자락에는 혈화문(血花文)이 새기어졌는데, 전과 달라진 것 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봉황천이라는 글자 대신 다른 글자가 새기어졌다는 것이었다. <영웅천(英雄天)> 모든 사람은 영웅천이라는 글씨를 옷자락에 수놓고 있었다. 수를 놓지 못한 사람은 혈서로 옷자락에 글을 새겼다. 새벽이다. 이 새벽은 정말 뜻이 있는 새벽이었다. 봉황천이 새롭게 깨어나는 새벽. 봉황천은 너무나도 묘하게 그들의 운명을 바꿔 버린 무옥의 육합세가(六合 世家) 휘하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 당사자인 무옥은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선실 안에 머물러 있었다. 불청객(不請客)으로서가 아니라, 원로회의(元老會議)에서 선택된 새로운 주 인으로서!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