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무옥, 그가 왔다 달빛은 맑을 대로 맑았다. 한 자루의 검(劍)이 거꾸로 꽂혀 있듯, 장쾌하고 삼엄한 웅자로 버티고 있 는 정봉(頂峯)은, 애무하는 듯 퍼부어지는 월광(月光)에 뒤덮였다. 팔월(八月)의 십오야(十五夜). 달빛이 가장 밝다는 중추(仲秋)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거성(巨城). 언제부터인가 대륙천하의 하늘로 군림했던 거대한 성이 있다. 중원백도의 힘이 모여 이룩한 천하제일의 세력 검황성. 바로 그 곳이 존재하기에 마도는 분루를 삼켜야 했고, 백도는 평화 속에서 문파를 보전할 수 있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검황성. 하나 그 곳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힘이 약화되었고, 급기야는 성을 이룩한 백도인들에게조차 배척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 성의 일대에는 전운(戰雲)이 일어나고 있다. 산(山)이 움직이고, 바다(海)가 몰려들 듯이, 수없이 많은 무림인들이 거성 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핏빛의 능선이 흘러가듯이, 쌍검을 등에 메고 있는 무사들은 대오를 일사불 란하게 갖추며 거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팔로(八路)에서, 거의 오만(五萬)에 달하는 무사들이 성을 향해 질풍노도처 럼 몰려가고 있었다. 길이란 길은 모두 다 차단이 되었고, 길이 아닌 곳이라 하더라도 인해장벽 에 의해 뒤덮여 버렸다. 모든 벽은 사람의 벽으로 뒤덮였고, 거대한 성은 여덟 마리의 천리혈룡(千 里血龍)에 의해 똬리당하는 듯 뒤덮여 가고 있었다. 한 대의 팔두마차(八頭馬車). 팔로로 거성을 향해 다가가는 오만여 무사들의 뒤쪽에는 지극히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있었다. 마차는 굴러다니는 아방궁이라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일대에는 유난히도 미끈하게 생긴 청년검사들이 백여 명 둘러서 있다. 이들은 야릇하게도 얼굴에 지분을 바르고 있었다. 탐화옥랑수(探花玉郞手). 매우 묘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들은 일대로 몰려온 수없이 많은 무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이질적인 자들이었다. 이들이 바치는 것은 충성과 무공이 아니었다. 이들은 번갈아 가며 사내를 바치고 있었다. 탐화옥랑수들의 수는 오백(五百). 한데 이들에게는 기이한 전통이 있어, 누구든 간에 탐화옥랑수로서 일 년 이상을 머물지 못했다. 이들은 젊고 아름다운 상태에서 입문(入門)하고, 늙고 추악해져서 탈퇴를 한다. 요요(妖妖)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 여인. 그녀는 꽤나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흑무(黑霧)에 뒤덮인 거대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도망자도 없다고? 으음, 저 안에 있는 놈들이 모조리 동귀어진(同 歸於盡)할 작정이라니!" 차가운 눈빛을 폭사해 내는 여인의 열 손가락에는 종류가 각기 다른 보환 (寶環)이 끼워져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비단 의자에 앉아 있고, 그녀의 등 뒤로는 최근에 탐화옥랑 수가 된 남자가 그녀의 작은 어깨를 조심스레 안마하고 있었다. 탐화옥랑수란 바로 이 여인의 색노(色奴)들이었다. 비찰단에서 가장 탁월한 활약을 보여 장차 마교총림의 후예로 지목받고 있 는 여인, 검난향(劍蘭香). 검황성을 난국으로 이끌었던 그녀가 지금, 검황성에서 이십 리 떨어진 곳으 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오만을 이끌고 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삼만이 도착할 것이다. 검황성은 오 일 안에 떨어질 예정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저항이 심해 이십 일이 지나가는 데에도 마교총림은 검황성을 격파하지 못했다. 검황성은 부서졌던 기관(機關) 매복(埋伏)을 모조리 회복시킨 상태였다. "알 수가 없다, 저 곳은!" 검난향은 머나먼 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성 안에서 온갖 황음한 짓을 다 저질렀었다. 중원사성이 안배해 놓은 모든 것들을 파괴시켰으며, 사형제지간을 이간질시 키고, 검황성의 명예마저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었다. 그런데에도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웅좌를 지키며 고고히 그 곳에 서 있었 다. "미친 자식들! 저 안에 있는 놈들은 모두 미친 자식들이다. 특히 환류라는 놈은 쓸개도 없는 놈이다!" 검난향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환류가 무숙아를 죽일 줄 알았는데… 으음, 그리고 풍운제검대가 반역을 한 줄 알았는데… 나의 짐작이 틀렸단 말인가?' 검난향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천하에 퍼질 소문을 생각해서… 마교총림이 쳤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검 황성을 얻어야 한다. 한데, 성은 요지부동이다. 으음, 천마인수(天魔忍手) 와 마황척살수(魔皇擲殺手)들을 오백 명 넘게 보냈는데… 모두 돌아오지 않 았다. 모두 도중에서 죽은 게 틀림없다." 검난향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누군가… 검황성 뒤에 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가 없 다. 마교총림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세력이 버티고 있다.' 검난향은 손에서 땀을 흘렸다. '생각지 않던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았다. '패엽혼 나으리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나는 십대마뇌의 말을 조롱 하며 세력을 일으켰다.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나는 몸이 갈가리 찢어져서 죽게 된다. 그분의 폐관(廢關)은 곧 끝이 난다. 그 이전, 검황성을 얻어야 한다.' 검난향은 뺨에서 사악한 기운을 흘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수한 희생을 각오해서라도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달빛으로 인해 주위가 밝아져서 진세가 흐려진 틈을 타서… 진세를 깨자!" 검난향은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검황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 했다. "좋아, 삼천(三千)을 쓰겠다. 그 정도라면 겹겹이 펼쳐진 진세를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검난향은 손을 쳐들었다. 하나의 마번(魔幡)이 쳐들려졌고, 그 순간 사방에서 십 인이 날아들었다. 핏빛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들. 이들은 마번 아래로 일제히 내려 서며 부복해 들어갔다. 이들의 몸에서는 늘 매캐한 초연이 풍긴다. 벽력화병(霹靂火兵)의 십대괴수들, 이들은 무공보다 화기술로 이름을 날리 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비찰삼호시여! 속하들을 부르셨습니까?" 열 사람은 넙죽 절을 했고, 검난향은 요요한 기운을 잔혹하게 흘리며 고개 를 끄덕거렸다. "불렀다!" "…!" "…!" 벽력화병들은 긴장을 하고 있었다. 검난향의 잔혹함은 마교총림 휘하 제자 들마저도 치를 떨 정도였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벽력화병을 부른 것일까? "소림사(少林寺)나 연월성궁(燕月聖宮)이 부서지기 이전, 검황성이 무너져 야 대총사가 우리들의 능력을 인정하실 것이다. 소림사에는 새북십삼천이 가는지라, 우리들보다 치기 이로운 상태에 있다." "…!" "…!" "연월성궁 정도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 곳은 단 여섯 시진이면 초토화될 것이다!" 검난향은 입술을 잘강잘강 씹었다. 간혹 바람이 불며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녀의 짝귀가 묘한 불균형 의 느낌을 주고 있다. "우리들은 그 이전, 저 곳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네들을 여기 부른 것이다!" 검난향은 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이란 본시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웃음 가운데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가 있다. 하나, 검난향의 웃음은 전혀 달랐다. 그녀의 사악한 웃음은 날카로운 비수 처럼 가슴을 저며 버리는 웃음이었다. "자네들 휘하에는 삼천 무사가 있다! 각(各) 인(人)이 삼백(三百) 화군(火 軍)을 거느리고 있으니까, 도합 삼천이다!" "예!" "그…그렇습니다!" "호호… 모두 가게 하라!" 검난향은 웃음소리를 크게 했다. "가게 하라니요?" "어… 어떠한 뜻으로 그러한 말을 하시는지요?" 열 사람은 당주(堂主)급이었다. 그러나 검난향에 비한다면 세 단계 아래 지 위일 뿐이다. 검난향이 명령을 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야 한다. "이 일대에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기문대진이 펼쳐져 있으며, 신비한 고수들이 검황성을 돕고 있다." "…" "신산귀계(神算鬼計)에 따라 그 파해법을 연구한 결과, 파해법은 오직 하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태워 버리는 것이다!" "예… 에?" "그, 그럼 기문대진과 더불어 폭사하라는…?" 벽력화병들은 입을 딱딱 벌렸다. 검난향은 팔짱을 끼며 표독스럽게 그들을 쏘아봤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꼭 죽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으면 불기둥 가운데에서 도 살 수가 있다. 하나 하지 않겠다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명 아래 … 꼭 죽게 된다. 아마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검난향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내라면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반할 수밖에 없다. 하나, 지금 그녀의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역겹게 보였다. "매우 간단한 이치이지! 죽고 산다는 것은…!" 삼천 개의 그림자, 이들은 하나의 명에 따라 검황성 쪽으로 쏘아진 화살처 럼 치달리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삼천 명의 무사들은 자신들이 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치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범하지 않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헤헤… 기분이 좋은데?" "어르신네들이 하사한 단약을 먹자, 힘이 폭발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붉은 까마귀떼처럼 날아오르는 자들. 이들은 몸을 날리기 이전, 단약을 하 나씩 먹었다. 그 단약은 몸에 정말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복용하면 내공이 강해지고, 정력도 좋하진다던가? 쓰으으… 쓰으으…! 삼천 무사는 제일진(第一陣)으로 나섰고,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제치며 앞 쪽으로 돌진해 가기 시작했다. "와아아…!" "우우… 우우…!"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정봉(頂峯)을 휘어 감는 검은 안개 속으로 날아들 기 시작했다. 진풍(陣風)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곳, 일대에는 검황성의 기문대진이 펼쳐져 있다. 무사들은 용기백배해 그 곳을 향해 덮쳐 들었고, 한순간. 콰아아아앙-! 천지가 개벽하듯 벽력성이 토해지며 무시무시한 불기둥이 삼천 군데에서 일 어났다. 수십 길로 일어나는 불기둥들. 그것은 삼천 무사의 몸뚱이가 화탄과 더불어 터지며 일어나는 불기둥이었다. 삼천 무사는 몸에 화탄을 품고 들이닥쳤기에 가공할 진세에 부딪치며 박살 이 나 버린 것이다. 폭죽이 하늘로 쏘아지며 요란히 터지듯이, 이십 리가 들썩이며 검은 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쩌어어억-! 단애(斷崖)가 무너져 내리고 나무숲이 시커멓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황성을 보호하던 십여 개의 기문대진 가운데 아홉 개가 찰나적으로 초토 화되어 버린 것이다. 새벽이 되어 갈 때, 다시 두 개의 기문진이 붕괴가 되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교총림의 무사들. 이들은 가증스럽게도 검황성의 무복 을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마교총림의 무사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검황성의 무사 자격으로 다가선 것이다. 이들은 천하강호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검황성의 고수들 차림새를 하고 검황성 쪽으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거대한 성, 성은 이제 무너져야만 하는가?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천천히 검(劍)을 등에서 끄르고 있는 사람. 깡마르기는 했으나, 꽤나 장대 한 체격이다. "성은 이제 백척간두에 섰네. 아마도 나보다는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걸세! 막아 보려 했으나… 우리는 독에 당한 상태이고, 저들은 우리들의 장 단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네!" 천천히 검을 끄르는 사람, 그는 오랫동안 검황성을 피폐케 하는 데 주역이 되었던 뇌천후(雷天侯) 무숙아(武叔牙)였다. 물론, 그는 과거의 무숙아가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 보낸 영단을 먹고 본 마음을 회복한 상태였다. 검황성이 이제까지 견딘 이유는, 무숙아의 병법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무숙아 앞에는 그를 수십 번 죽이려 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철혈도(鐵血刀) 환류(桓流). 그는 오랫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안색이 꺼칠했다. "대사형은 검난향을 암살할 작정이시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 아니되오!" "류(流), 나를 막지 말게!" "…" "나는 아네. 자네가 나를 이해한다는 것을.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용서해 서는 아니되네." 무숙아는 웃고 있었다. 꽤나 처연한 미소, 그것은 아주 인간적인 웃음이었 다. "자네는 오랫동안 나를 도와 주었네. 마음 속으로는 나를 죽이고 싶으면서 도 성을 위해서, 천하를 위해서… 나를 보호해 주었네!" "으으… 으으…!" "이제는 나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네." "대사형, 더 기다려 봅시다!" "기다리자고? 무엇을?" 무숙아는 입가에 고소를 드리웠다. 그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 체념을 하는 눈빛이었다. "기연(奇緣)은 없네!" "하… 하나, 기다려야 하오!" 환류는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있었다. "류, 자네는 냉철한 사람이지. 그런데 어이해 어리석게 행동하는가?" 무숙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조(自嘲)하고 있었다. "검황성은 모든 방파에게 따돌림을 당했네. 나 때문이지. 모두 어리석은 이 놈 때문에 성이 이 지경이 되었지." "…" "아무도 우릴 돕지 않을 걸세. 그리고 우리가 싫더라도 우리를 도울 방파가 있다 해도… 틀렸네. 우리가 포위된 이상, 그들도 평범한 상태는 아닐 것이 네!" "아오. 소림과 연월성궁도 위기라는 것을!" 환류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는 과거보다 진지해 보였다. 너무나도 많은 번뇌는 그를 위대한 무사로 성장시킨 것이다. "하나, 우리는 기다려야 하오!" "어리석구나!" "그렇소. 나는 어리석은 놈이오. 남의 말을 잘 믿소. 그러하기에 지난해 봄, 대사형을 죽이지 말자는 그의 말을 들은 것이오!" 환류는 처음으로 강하게 말했다. "그… 그의 말이라니…?" 무숙아는 상체를 휘청거렸다. 순간, 환류는 격동한 어조로 힘차게 내뱉었다. "나였다면… 지난해 대사형을 가차없이 처단했을 것이오! 검황의 율법으로, 내게 주어진 명에 따라!" "으으…!" "하나 그가 만류했기에, 나는 참은 것이오. 풍운제검대가 그대를 죽이고자 할 때에도, 나는 그의 말을 믿고 기다렸소!" "대… 대체 누구의 말을?" 무숙아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 바보스럽게 만든 사람은…" 환류는 격하게 소리친다. 하나, 그는 말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할 듯하다가는 입 술을 다물고 말았다. 무숙아의 몸은 땀에 뒤덮였다. "이… 이제 알겠군… 이제야…!" 그는 상체를 휘청거렸다. 그는 슬픈 눈빛 가운데 기쁨을 지니고 있었다. "네 뒤에 누가 있는지 이제 알겠다! 성질 급한 네가… 그리도 잘 참은 이유 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다!" 그는 눈길을 위로 들었다. 그는 천장을 보았고, 다시 아래쪽을 보았다. "나는… 그 녀석이 나를 원망하며 떠나간 줄 알았었다. 한데, 그 녀석은 원 망하며 떠나간 것이 아니었다. 놈은… 오히려 네게 나를 보호하라는 부탁을 하고 떠나갔던 것이다!" "…!" "좋은 녀석, 좋은 녀석…!" 무숙아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이제는 환류의 말도, 행동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무숙아는 환류보다 강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천룡제일좌로 인정한 이상, 환류는 그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다. "녀석, 너야말로 이 곳의 성주(城主)다. 과거나 지금이나…" 무숙아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쓸쓸한 밤의 대기(大氣) 속으로 들어가는데, 목련화원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서 있 었다. 천지쌍위(天地雙衛)라 하는 사람. 이들은 바로 검황성이 여태껏 붕괴되지 않도록 한, 신비한 후원자들이었다. 이들은 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며칠 동안 굳은 표정이었던 두 사람. 이들이 왜 이리도 들뜬 표정으로 무숙 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무속아의 어깨 위로 달빛이 떨어져 내렸다. 장대한 체구를 성큼성큼 움직여 가던 무숙아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꽤나 의아해 했다. '두 사람 모두 최근 들어 인상을 경직시키고 있었는데, 어이해 지금은 환한 미소를 입가에 짓는 것일까?' 무숙아는 멈칫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장검(長劍)을 안은 사내, 그의 눈빛은 꽤나 칙칙한 편이다. 그의 옷자락에서는 늘 흙 내음이 난다. 그의 흐릿한 눈빛이 아주 가는 호흡 소리를 내고 있다. 예리한 손바닥에 묘한 차가움을 주는 사람, 그는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흑의여인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색이 아주 희고,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호선(狐仙)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여인. 그녀의 몸에서는 늘 꽃향기가 흘러 나왔다. 그녀도 웃고 있었다. 이들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이고, 이들이 없었더라면 검황성은 이 미 무너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무숙아는 깨어나지 못했 을 것이다. 무숙아는 두 사람의 묘한 미소를 보고 숨을 죽였다. '무엇인가 달라졌다. 이들의 기도가 전과 다르다.' 무숙아는 흠칫 놀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무숙아가 움찔하자, 미소를 더욱 환하게 하며 허리를 가볍게 숙 였다. "기다리시던 분이 오시었습니다!" "그분이… 오시었습니다. 일각(一刻) 전에!" "그분은 비봉(飛鳳)을 타고 오시었습니다. 그래서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 다." "그분이 오시었습니다. 보고 싶어하시던 저희들의 주인이 되는 분이 와 계 십니다. 육합지존(六合至尊)이라는 분이…!" 두 사람이 번갈아 말할 때. "그분이 오시었단 말이오?" 무숙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일대에 서 있던 풍운제검대 무사들 또한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육합지존. 그는 신비의 장막에 감춰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암중에 검황성을 돕고 있었다. 그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환류와 사 검대주가 이끄는 풍운제검대는 이미 멸살되었을 것이다. "어… 어디 계십니까, 그분은?" 무숙아의 어깨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고, 천지쌍위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목련화원(木蓮花園)의 정경이 무 숙아의 두 눈 안으로 와락 들어왔다. 꽤 먼 곳. 언제 나타났을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름한 백포를 걸친 사람의 뒤쪽에는 언제 들이닥쳤는지 모를 고수 수백여 명이 장엄한 기세로 시립해 있었다. 검황성이 이전의 검황성이 아니라 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매복에게도 들키 지 않고 수백 명이 나타났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저 사람이다.' 무숙아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검난향, 그 요녀와 동귀어진을 할 작정이었는데… 신비 속의 후원자를 보 게 되다니…' 무숙아는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다가가려 할 때. "대사형, 조심하셔야 하오!" 환류가 무숙아의 뒤쪽으로 따라붙었다. 환류는 무숙아의 오른쪽 뒤에 섰다. 무숙아는 환류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무숙아는 환류를 보며 굳은 얼굴 가 득 웃음을 지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마음 속에 흑심을 품고 있던 사람이라면, 이제까지 우리들 을 돕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숙아는 나직이 말한 다음, 걸음을 떼어 놓았다. 환류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대사형이 신비인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다. 자칫하다가는 검황성이 그의 손 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환류는 칼자루를 불끈 거머쥐었다. '우라질! 어이해 그는 오지 않는 것인가? 신비도상의 거물(巨物)이 검황성 에 도착했거늘…' 환류는 끓어오르는 무엇을 느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그러한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랑은 남자와 남자 사이의 끈끈한 사랑이었다. '육합지존… 저 자는 어이해 하필 저 자리에 나타났단 말인가? 저 자리는 그의 자리이거늘…' 환류는 신비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근처는 달빛이 환하다. 뒷짐을 지고 있는 백의인이 서 있는 자리는 본시 이 곳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즐겨 서서 명상에 잠기곤 했던 자리였다. '저 자가 누구이기에…?' 환류의 동공이 점점 확대되어 갔다. '설, 설마… 설마…!' 그의 눈빛은 일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두 손(雙手), 뒷짐지어진 두 손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매우 섬세한 손, 그 손을 보며 환류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저 손이다. 바로… 저 손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아는 듯했다. '그다. 바로 그가 돌아왔다.' 무숙아의 신체는 경직되었다. 오랫동안 마성(魔性)에 빠져 지냈던 검황성의 천룡경(天龍卿). 그는 백의인 뒤쪽 십 보(步) 되는 곳에 신형을 세웠다. "천지쌍위를 보내어 소생을 구원해 주시어, 늘 감사하고 있었소이다." "…" "그 사이, 육합지존을 보고자 했었소. 한데, 마침 이 때 뵙게 되어 다행이 외다!" "…" "소생에게는 긴히 할 말이 있었소. 그것은 귀하께서 소생을 구한 것과, 검 황성에 얽힌 공적인 일을 혼동하면 아니된다는 말이외다. 영단을 보내 소생 을 구하신 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나, 소생은 검황성의 죄인이오." 무숙아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마도에 빠져 휘하들을 고생시켰던 무숙아. 그는 일 년에 걸친 번뇌의 여정 가운데, 대의지심(大義之心)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가를 바란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오." 무숙아는 포권(抱券)만 취했다. 육합지존을 만났다는 것은 지극히 흥분이 되는 일이다. 하나, 너무 좋아한다든가 너무 경박해 한다든가 하는 것은 무숙아가 현재 처해진 위치에 어울리지 않았다. 무숙아는 소인(小人)의 길을 벗어난 대인(大人)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은 모두 검황성을 위한 것이었다. 달빛이 밝다. 흰 옷자락 끝에 달빛이 부서지고 있다. 아주 느릿한 목소리, 그 소리는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육합지존의 목소리였 다. "대가는… 이미 받았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주 맑고 온화한 목소리. "대가를 이미 받으시다니요? 소생은 귀하에게 단 하나도 해 드린 것이 없는 데요?" 무숙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닙니다. 대가는 이미 받았습니다!" "예?" "지금… 그러한 모습이면 됩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떠나갔을 뿐입니다!" 차분한 목소리. 바로 그 순간, 무숙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기억할 수 있었다. "너… 너였더냐?" 무숙아의 얼굴은 숯불처럼 달아올랐다. 백목련(白木蓮)을 좋아하고, 늘 말이 없던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마부 (馬夫)였다가 검황성 사람이 되었었다. "너… 너였더냐? 옥(玉), 바로… 바로 너였더냐?" 무숙아의 얼굴은 땀에 뒤덮였다. "그렇습니다. 저올시다, 대사형!" 흰 옷을 입은 사람은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어른이 울다니…? 수십만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인이 울다니…? 무옥(武玉). 그는 백목련화처럼 흰 얼굴로 무숙아를 바라봤다. 무숙아의 얼굴에서 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무옥에게 온갖 박해를 가했고, 결국에 가서는 삼비(三秘)의 힘을 빌어 무옥 을 제거했던 사람이 무숙아이다. "…!"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오랫동안 서 있었다. 환류는 싱글벙글거렸고, 풍운제검대고수들은 돌아온 총검대주(總劍隊主)를 확인하고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바로… 바로 총검대주시다!" "와아아… 바로 무옥 대주이시었다!" "프핫핫… 저분이 쉽게 쓰러질 리 없다고 여겼으나… 푸핫핫… 이리 빨리 보게 될 줄이야!" "대주… 무정(無情)하시오. 어이해, 그 사이 연락조차 아니 해 주시었소!" 수많은 호한(豪漢)들의 옷섶이 눈물에 젖었다. 무옥… 그는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고 떠났고, 돌아온다는 말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그는 처음부터 이 곳 사람이었다. 그가 강호에서 벌인 모든 일은 이 곳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 일이었다. 백도제파가 모여 이룩한 위대한 대지, 검황성. 그 곳이 허물어졌기에 중원이 사대마류의 공세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풍운제검대주 무옥… 그가 돌아온 이상, 성은 이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돌 아갈 것이다. 군마(群魔)를 베고 마도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그 모습 그대로. 풍운아 무옥, 그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빠르게 검황성 내에 퍼져 나갔다. 환 호성도 없이 아주 은밀한 가운데… 그리고 검황성의 무사들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무숙아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한 후에야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너는 언제나 천하제일(天下第一)이었지. 질투가 날 정도로!" 그는 인상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이런 때에는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네녀석은 가장 통쾌한 복수를 한 것이다. 벌레보다도 추악한 나를 되살린 것으로. 그러나 나를 막을 생각은 마라. 나는 가야 한다. 나를 막지 마라. 나는 지금도 너의 거대(巨大)함에 질투를 느낀다. 진심으로…!" 무숙아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갈 수 없습니다, 대사형은!" 무옥은 무숙아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그러 나 무숙아도 이제는 기죽지 않았다. "나는 갈 것이다. 빚을 갚아야 하기에!" "갚을 빚은 없습니다!" "있다!" "다 사라졌습니다! 저는 대사형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녀석! 하나, 나를 벌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무 옥, 나를 막지 말아 다오!" 무숙아는 위로 떠올랐다. 그는 비룡재천(飛龍在天)으로 구 장을 떠올랐고, 운룡회천(雲龍回天)으로 방향을 꺾으며 성문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옥이 그를 쫓아 날아오르려 할 때. "가지 마십시오. 저분은 돌아오실 테니까요. 대사형은 이전의 대사형이 아 닙니다. 제가 압니다. 이제는 제가 대사형을 보증하겠습니다!" 환류가 무옥을 가로막았다. 언제 갖고 온 것일까? 그의 손에는 주호가 하나 들려 있었다. 정든 사람들끼리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필요하지 않다. 한 번의 눈짓과 한 번의 웃음만으로도 모든 것이 통한다. "녀석, 고생이 많았다!" 무옥은 환류의 손을 쥐었고. "핫핫… 술을 사야 합니다. 형(兄)은 저를 취(醉)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좋아, 사겠다!" "언제 사겠습니까?" "한 시진 후, 너를 취하게 하겠다!" "훗훗… 그럼 한 시진 사이, 검난향 휘하 오만 고수를 물리칠 수 있다는 말 입니까?" "그렇다!" "형은 과거보다 더 오만해졌군요?" "녀석! 내 휘하에 봉황천이 변한 영웅천(英雄天)이 있고, 야월화(夜月花)가 있다면 나를 오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무옥은 환류의 손을 꽉 쥐었다. "형… 형은… 거짓말도 늘었구려?" 환류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야월화나 봉황천은 단일세력으로는 검황성을 능 가한다. 그들이 무옥의 휘하라니…? 환류가 비지땀을 쏟을 때. "그뿐이 아니다. 지금 소림사로 가고 있는 불한당(不漢黨)들도 사실은 나의 친구들이다!" "예? 소림에 가고 있는 불한당이라고요? 그럼 천마무후(天魔武侯) 휘하 역 시 형의 휘하란 말이오?" 환류는 넋 빠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녀석, 잔소리가 늘었구나!" 무옥은 오랜만에 한점의 암울함도 없이 웃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