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폭풍의 계절 일대가 여명(黎明)으로 타오르면서 무림 사상 가장 지리하고 참혹한 혈전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소림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라면, 야월화의 활동이 원활해지며 승산은 야월화 쪽으 로 기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웅보전 앞에서 벌어지는 싸움만은 달랐다. "초극어형(超剋御形)-!" 츠으으읏- 츳-! 허공에서 무수한 빛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소리보다 빠르다는 초극어형검이 나, 지금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달단양은 비지땀으로 전신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새북십삼천 중 십이 인이 시전하는 십이표향진(十二飄香陣) 안에서 삼혼과 더불어 싸우고 있었다. "카아아- 카아아-!" "크크- 크크-!" 세 명의 마인들, 이들의 몸에는 자상(刺傷)이 그득했다. 그것은 최근에 생 긴 것이었다. 냉동되어 이백 년을 살다가 깨어난 자들, 금강불괴보다 단단하다는 이들의 신체에 흔적을 남긴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간 한 조각 이었다. 천마무후가 혈혼의 팔을 무기로 삼지 않았더라면, 승패는 벌써 결정지어졌 을 것이다. 주위는 차차 밝아져 가나, 일대만은 어두웠다. 삼혼의 몸에서 일어나는 가공할 마의 기운은 일대를 자시의 어둠보다 더한 어둠 속으로 뒤덮어 버렸다. 천살마겁영(天煞魔劫影). 죽음의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피어 오르고 있다. 거기에 스치기만 하면 돌 이고, 쇠고 녹아 버린다. 새북십이거두는 진세를 일으켜 그것이 외부로 확산되지 않도록 막고 있었 다. 그들도 탈진한 상태였다. 그 중에는 팔이 끊어진 사람도 있고, 다리가 잘린 사람도 있다. 하나, 이들은 중원에 저지른 일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절대 물 러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내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녀석… 왔느냐?" 천마무후. 그는 무엇인가를 느끼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몸에는 상흔이 무수하고, 코와 입에서 는 핏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혈혼은 그의 머리 위에 있고, 사혼은 그의 등 위에서 천폭마강살(天爆魔 煞)이라는 가공할 마공을 발휘하고 있다. 흑혼(黑魂), 그는 달단양의 검강에 퉁겨져 오 장 날아올랐다가는 몸을 핑그 르르 돌리며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아무리 후려쳐도 몸이 부서지지 않는 자들, 이들의 몸에는 보검 조각이 수 없이 박혀 있다. "카아아- 카아아-!" "끄으으- 끄으으-!" "꺼꺼- 꺼어어-!" 악마의 포효 소리가 충천하고, 가공할 마의 기운이 일대를 뒤덮었다. 휘리리리링-! 검은 안개가 폭풍과 더불어 달단양을 휘감을 때. "녀석, 너를 느낀다! 너의 혼(魂)을!" 달단양은 상체를 휘청이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백만 대군과 단신으로 싸운 후처럼 그는 물 먹은 솜이 되어 밑으로 떨어져 내렸고, 삼혼이 그 뒤를 따랐다. 츠으으읏-! 검붉은 기류가 달단양을 휘어 감는 그 순간이었다. 장공(長空)에 하나의 연이 걸려 있듯이, 그림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언제 나타났을까? 무옥(武玉), 그는 두 손을 한데 합하며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어깨에서 신기를 흘려 내고,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무옥. 그는 달단양과 십 장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이제는 됐다, 나의 친구!" 그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상반신을 가볍게 틀었다. 그는 무게가 없는 연기처럼 찰나의 순간, 십 장을 이동하여 검은 바람이 휘 몰아치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내게 맡겨 다오!" 흰 손, 그 손은 너무나도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바라무를 추듯이 두 손은 너울너울 흔들리기 시작했고, 소리도 나지 않는 가운데 이상한 기운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혈혼과 사혼, 흑혼, 이들은 허공을 뚫고 움직이다가 돌연 신형의 이동을 늦 췄다. 핏물이 고인 듯한 여섯 개의 눈, 그 눈에 묘한 격동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 다. 아아, 허공에 수만 개의 손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무검류(無劍流)! 그것은 심검류(心劍流)의 윗단계 수법이었다. 손바닥 그림자는 모든 방위(方位)를 차단했고, 은사(銀絲)가 하늘 가득 뿌 리어졌다가 하나의 그물이 짜이듯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치리리릿-! 만여 개의 실은 각기 다른 동작을 나타내고 있었다. 환영인지 신체인지 모를 무수한 손그림자, 그것은 일순 금광(金光)을 뿌리 기 시작했다. 주위가 휘황찬란하게 밝아질 때. "크으으- 크으으-!" 삼혼의 우두머리인 혈혼이 포악한 포효성을 토하며 금빛의 장막을 향해 신 형을 날렸다. "카아아아- 카아아-!" 핏빛 선이 그어지며, 벼락치는 소리가 나더니, 일대에 질풍이 일어났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뒤덮이는 듯 흙모래 바람이 일어났고, 광풍질우가 일어 나 십 리 안의 경물을 뒤흔들었다. 순간. 고오오- 고오오-! 금빛의 비(金雨)일까? 혈혼이 다가가는 하늘 위에서부터 무수한 금빛 실이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이상한 빛이 일어났다. 몸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는 수미혜광(須彌慧光), 제석대범천(帝釋大梵天) 다라밀인수(茶羅密印手). 우우웅……! 금빛의 손은 점점 확대가 되었고, 무수한 금우(金雨) 또한 범위를 넓혀 갔 다. 바로 그 순간. 금강불괴보다도 단단하다는 혈혼의 몸뚱이가 정수리에서부터 스르르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금사(金絲)는 바로 무검류(無劍流)의 유형검강(有形劍 )이었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빛줄기에는 백만 관 거석(巨石)을 일순 모래로 만들 힘 이 실려 있었다. "카아아아아악-!" 혈혼은 처절히 부르짖으며 허공에서 부수어졌고, 바로 그 순간 다른 두 곳 에서도 단말마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묵철강시(墨鐵 屍) 같던 흑혼의 몸이 부서졌고, 안색이 밀랍처럼 희던 사 혼의 몸도 으스러졌다. 보라! 허공을 가르고 움직여 가는 하나의 흰 화살을! "우우우……!" 용의 울부짖음일까? 새벽 안개 속으로 천리장소(千里長嘯)가 터져 나오며 하나의 검이 떠오르고 있었다. 스르르릉-! 비룡무는 무옥의 손에서 떠오르며 용의 울음을 토해 냈고, 장공을 향해 황 홀한 검광을 뿌려 댔다. 우르르르릉- 쾅-! 대벽력(大霹靂)! 하늘과 땅이 흰 번개로 이어지는 듯한 가운데, 광풍이 일어났다. 폭음이 잇 따라 터져 나오며 담장이 뒤흔들렸다. 만리어검(萬里御劍)이라는 가공할 수법이 시전되는 동시에, 무옥의 장소성 에는 이상한 힘이 실리었다. "우우… 우우……!" 끝없이 이어지는 장소성. 그 소리는 바로 봉황천의 겁후(劫吼)인데, 이상하게도 사람을 골라서 위력 을 발휘했다. 그 소리는 마공을 흩트렸고, 신공을 강하게 했다. "어어엇? 저… 소리가 무엇이기에… 나의 내공이 돌연 흐트러진단 말인가?" "으으… 무, 무옥이다!" "무옥이 나타났다! 삼혼이 죽고, 무옥이 나타났다!" 휘청이는 거마들, 그들의 눈에는 회한의 빛과 전율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 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파파팟- 팟-! 무옥의 장소성이 흐를 때 수천 군데에서 야월화 살수들의 검이 떴고 그와 더불어 혈화(血花)가 수없이 피어 올랐다. "크으으윽……!" "웨에엑……!" 허리가 잘려 쓰러지는 자, 그의 몸에서는 더러운 오장육부가 주루룩 흘러 나온다. 그의 몸 위로 목이 잘린 자의 시체가 쓰러지고, 그 위로 팔과 다리가 뚝뚝 끊어져 내린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피보라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천광선사는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슬픈 표정이었다. 그 는 면벽(面壁)에 들 예정이었다. 그는 소림사 내에서 대혈풍이 분 책임을 지고 이미 방장(方丈) 지위를 내놓 았다. 방장의 지위는 법광(法匡)이 이어받게 되었다. 그 일만은 무옥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광선사는 방장 자격으로 최후의 하명을 했는데, 그것은 소림사 일대에서 죽은 자들의 시신을 잘 처리하고 그들을 위해 이후 천일 공양을 하라는 선 사다운 명령이었다. "자네는 화가 날 정도로 강해졌네. 제길! 자네 앞에서 이렇게 처참한 기분 이 될 줄 몰랐는데?" 천마무후 달단양은 툴툴거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리고 무옥은 무안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이 곳은 소림하원(少林下院)이었다. 일대에는 야월화의 무사들이 즐비했고, 이들은 수십 일 간 불었던 혈풍을 마무리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소림사 일대의 전운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교총림은 소림사에서 무수한 희생을 봤고, 수많은 절정고수를 잃었다. 이 것은 패엽혼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참패였다. 그는 자신의 진짜 수하들을 무수히 잃고 만 것이다. "어떤가? 쉬겠는가? 가겠는가?" 무옥이 찻잔을 비우며 말하자. "쉬라니? 그게 말이나 되나? 자네를 따라 금붕(金鵬)을 타고 검황성에 가게 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 꼴을 보게 될 걸세!" "좋아, 그럼 같이 가세!" "훗훗… 이제부터는 자네의 귀찮은 식객(食客)이 될 작정이네. 천축에는 수 년 후에나 갈 작정이네!" 달단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오른팔에 흰 천을 둘둘 감고 있었다. 하 나, 그는 왼손이 건재하다면서 오른손의 부상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았 다. "자네, 가기 전 예소저(芮少姐)를 보고 가게! 할 말이 있다더군!" "아……!" 무옥은 탄성을 발하며 일어났다. 예운령, 그녀는 뜨락에 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꽤나 심각한 표 정이었다. 그녀가 무옥에게 긴히 하려는 말은 상상 밖의 말이었다. 그것은 천하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말이었다.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무엇을?" "지(芝)도… 함께 있기로 한다고!" 지(芝)… 누구일까? 그 말에 무옥은 볼을 야간 붉혔다. "나를… 색마(色魔)로 만들려 하는군?" "아닙니다. 한 미인이 한 남자를 그리워하며 평생 수절하고 사는 것을 볼 수 없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운령은 무옥의 대답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눈치였다. 무옥은 한숨을 쉬었고, 결국에 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바란다면……!" 천마무후 달단양은 검황성에는 갈 수 없었다. 그는 거기 가기 이전, 무옥을 대신해서 한 가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칠 십이로에서 일어난 마교총림의 선풍마군을 격파하는 일을 처리하는 일에 앞 장 서야만 했다. 그 일은 새북십삼천과 야월화가 달단양의 지휘에 따라 처리하기로 했고… 개방( 幇)과 소림(少林), 무당(武當)이 전적으로 돕게 되었다. 무옥, 그는 어떤 병법을 계획한 것일까? 벌써 겨울이 느끼어졌다. 이 해의 겨울은 꽤나 빨리 다가서는 것 같았다. 호북성(胡北省) 깊은 곳에 자리잡은 하나의 거산(巨山). 그 곳에는 다른 곳보다 훨씬 추위가 빨리 왔다. 바람에는 한기(寒氣)가 스미어 있고, 으슥한 곳에는 두꺼운 서리가 형성되 어 있다. 산이 높기에, 겨울이 한결 빨리 다가서는 듯했다. 성(城). 거대한 성 하나가 교교한 달빛 아래 웅자를 과시하고 있다. 검황성(劍皇城)! 일대는 풍운에 휘감겨 있었다. 검난향이 주도하였던 풍운에 비해 십 배 가 공할 풍운이 검황성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백도를 멸살시키려 하는 마교총림의 주군(主軍)은 검황성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모든 길에서, 칙칙한 전포를 걸쳤거나 몸에서 흘러내 리는 핏물의 빛처럼 붉은 옷을 걸친 무사들이 십수만 나타났다. 동쪽. 그 곳에는 노호취주(老虎取珠)라는 진형세를 시전하며 뱀이 거목을 똬리 튼 듯한 형세의 진세를 이루며 다가서는 자들이 있었다.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휘파람 소리로 상호 호응해 가면서 검황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장창(長槍)에 귀두도(鬼頭刀), 거치도( 齒刀)를 든 자들… 이들은 눈에서 핏빛을 뿜어 내고 있었다. 선풍마군들은 진군을 시작하기 이전, 마성을 발작케 하는 독단을 먹었다. 그 약을 먹으면 누구든지 피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게 되며, 몸에 크나큰 상처가 생기더라도 한참 동안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다. 가히 살인 기계들. 선풍마군은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명 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쪽. 그 곳에서는 화몽(花夢)이라는 자가 이끄는 무사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핏빛 전포를 걸친 자들. 이들 중 앞에 선 자들은 동갑(銅甲)을 몸에 걸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진세를 뚫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시전하는 진세는 폭풍비마진(暴風飛魔陣)이었다. 남쪽에서는 비몽(飛夢)이라는 자가 이끄는 무사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북쪽 에서는 취몽(醉夢)이라는 자가 이끄는 무사들이 다가섰다. 사로에서 다가서는 자들의 총수는 십삼만에 달했다. 우르르르릉- 우르르르릉-! 강한 비바람이 일어났고, 운진이 일어나서 검황성을 휘어 감았다. 검황성 주변을 휘감아 도는 거대한 기운,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진세로 인해 일어나는 기운이었다. 만리무화대진(萬里霧花大陣). 그것은 지형지세를 이용한 진세와는 격이 다른 진세였다. 만리무화대진은 사람으로써 펼치는 진세이다. 보라! 수만 명의 무사들이 대오정연하게 서 있는 것을! 풍운제검대(風雲帝劍隊), 영웅천(英雄天) 휘하 팔십팔군(八十八軍), 연월성궁의 정예인 연월검대(燕月劍隊), 뇌천장군부(雷天將軍府)의 뇌검수(雷劍手), 그리고 구파일방에서 검황성으로 모여든 사람들……. 수만 명의 무사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위를 맞춘 채 하나의 거대한 진 세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들 중 절반이 쓰러지기 전에는 진세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 진세를 이룩한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어이해, 싸우라는 명이 내려오지 않는단 말인가?" "화은(花隱)이라는 노인네가 천하맹주 무옥대협의 측근인사라 하더라도, 무 조건 그의 명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못마땅한 일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사면초가가 되고 만다." "화은… 그 노인의 병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벌써 여러 날째, 이들은 이런 상태로 머물렀다. 혈기가 넘치는 청년 검사들에게 기다리라는 명령은 죽으라는 명령보다 지독 한 것이다. 하나, 검사들은 진세에 따라 대오를 갖춘 채 기다려야만 했다.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그 누구도 거조(巨鳥) 한 마리가 빛살처럼 성내(城內)로 떨어짐을 알지 못했다. 거조 위의 그 사람에 대해서도 아직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 었다. 달빛이 밝다. 검황성의 바로 위쪽 하늘에는 진세가 없었기에, 맑은 밤 하늘 이 청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화원(花園) 가, 한 명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초조한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시진밖에 남지 않았다. 두 시진밖에……." 그는 중얼거리며 북쪽으로 걸어간다. 백여 보 내내 걸은 노인은 문득 뒤돌 아섰고, 다시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노부의 예정대로라면, 이미 와야 하는데……." 그는 초조한 기색을 미간에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화은(花隱). 그는 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가공할 병법을 쓴 장본인이었 다. 뜨락 가, 또 한 사람이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무엇인가를 기다리 고 있는 눈치인데, 화은과는 달리 태평스러워 보였다. "두 시진이나 남았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시오?" "우라질 녀석! 이 어르신네가 걱정을 하면… 진짜 걱정을 할 일이 생긴 것 이다. 한데, 뭐가 그리 태연하냐?" 화은이 역정을 내자. "핫핫… 주인이 오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쉽게 꺾이지 않소. 적어도 사흘은 견딜 수 있소이다." 웃는 사람은 검은(劍隱) 사사운(史射雲)이었다. 그는 전에 없었던 한 가지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황성의 수석 교두(首席敎頭)라는 지위였다. 그것을 그에게 전한 사람은 무숙아였다. "우라질 녀석! 네놈은 왜 그리 태연자약한지 모르겠구나! 노부야 이미 살 만큼 살았으니, 죽는다 해도 그리 억울할 것이 없으나… 네놈이야 앞날이 구만 리 같거늘……!" 화은은 끌탕을 했다. 검은 사사운은 기지개를 켰다. 그는 정말 느긋해하고 있었다. "기실… 억울할 사람은 사백조(師伯祖)외다!" "노부가 억울하다고?" 화은이 또다시 역정을 내자. "훗훗… 사실……." 사사운의 입가 미소가 기이하다. 그는 정말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가 무 엇인가를 말하려 할 때. "고약한 놈! 설마… 노부가 모르는 사이, 주인님이 여기 오시기라도 했단 말이냐?" 화은의 옷자락이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그렇소이다! 그분은 오셨습니다. 사실, 저는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한 시 진 전 여기 온 것입니다!" "한… 한데, 왜 아직 말하지 않았느냐?" "……!" 사사운의 표정은 굳어지고 있었다. 화은은 사사운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고, 사사운은 그답지 않게 한숨이라는 기이한 숨소리를 냈다. "후우! 주인이 예정대로 오시었다는 말을 하게 되면, 또 하나의 말을 해야 하기에… 그리고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 이리도 머뭇거린 것입니다!" "무… 무슨 말을?" "어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화은은 일순 석상이 되고 말았다. 화은과 어은은 이백여 년 간 친구처럼 지내 왔다. 두 사람 사이는 형제보다 도 친한 사이였다. 화은은 어은이 죽었다는 말에 몸을 덜덜 떨며 얼굴을 일 그러뜨렸다. "그가… 죽었군?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니……!"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서! 본시 주인님이 말씀하시겠다는 것을 제가 만류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아아, 모두 대지의 뜻이겠지. 사람은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로 돌아가는 것 이 숙명이니까!" 그는 눈물을 글썽이다 못해 뺨을 뜨거운 눈물로 적셨다. '고약한 중놈! 같이 죽자더니, 혼자 죽는군.' 화은은 탄식을 하다가 눈을 떴다. "한데, 주인은 어디 계시냐?" "지금 무숙아 대협과 회의 중이십니다. 곧 여기 오신다 하셨습니다!" 사사운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 화원 안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들어서고 있 었다. 그는 바로 희대의 풍운아 무옥이었다. "화은 덕에 검황성이 살았소이다!" 무옥은 전에 없던 대인의 풍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소림사에서 기연을 얻은 후, 무공에서의 성취보다도 정신적으로 거대하게 성장했다. 그의 눈에서는 미묘한 지혜의 빛이 끝없이 흘러 나왔다. 그는 자신이 지내 온 일을 이야기한 후, 팔짱을 끼며 눈길을 허공에 돌렸 다. "저 하늘에 진세가 없음을 알고, 나는 화은이 왜 일대에 만리무화대진을 펼 쳤는지 알게 되었소!" "아시었습니까?" "그렇소!" "노부가 뜻한 네 가지 비의(秘意)를 모두 아셨습니까?" 네 가지 숨은 뜻, 그것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만리무화대진에는 특징이 있다. 첫째, 허공(虛空)이 빈다는 것이고… 둘째, 전적으로 수비형의 진세라는 것 이며… 셋째로는 진세가 발휘되는 지역이 지극히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넷째, 힘으로 그것을 뚫는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나… 무수한 희생을 감수한다면 가능하다는 것이 만리무화대진의 특징이었다. "화은은 나를 기다렸소. 그러하기에, 하늘을 비워 둔 것이오!" "그렇습니다! 봉황천의 감옥교(甘玉巧) 낭자께서 주인에게 거조가 있음을 알고, 하늘을 비워 둔 것이지요." 화은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옥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둘째, 화은은 피가 덜 흐르기를 바라고 있소! 피를 많이 흘릴 작정이었다 면, 천살극혼진(天煞極魂陣)이나 윤회능마참혼쇄진(輪廻凌魔斬魂碎陣)을 시 전했을 것이오!" "그, 그렇습니다!" "셋째, 화은은 마교총림의 무사들을 모조리 죽이기 보다는… 잡아서 선인으 로 되돌리기를 바라고 있소!" "……!" 화은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은은 이 곳을 이용해 천하의 다른 장소를 구하는 위대한 계획 을 하고 계시오!" 무옥은 고개를 화은 쪽으로 돌렸다. "헛헛… 주인에게는 속일 것이 없군요." 화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만리무화대진을 시전한 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화은은 마교총림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잘 알지 못했다면, 아마 도 만리무화대진 같은 수비형의 진세가 아니라 공격형의 진세를 취했을 것 이다. "이 곳은 그물입니다. 무수한 눈 먼 고기가 잡히는……!" "역시 짐작대로군!" "문제는 사몽(四夢)입니다!" "으음……!" "그들만 제거된다면, 주인이 타처로 가신다 하더라도… 능히 이 곳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호계를, 비밀리에 나아가서 마교총 림의 비밀분타(秘密分舵)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 게 됩니다! 속하는 주인이 오시는 대로 그것을 재가받을 작정이었습니다. 그 후, 어은을 찾아가서 차나 한 잔 같이 나누어 마시려고 했지요." 화은은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정은 곧 사라졌다. "물론 그 녀석은 중의 신분으로 죽었으니, 지금쯤 꽤나 즐거울지 모르지 요." 그는 애써 밝게 웃었다. 바로 무옥을 위해서! 진시(辰時)가 될 때. 무옥은 검황성의 연무장 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검은 사사운이 서 있고, 그의 왼쪽에는 철혈도 환류가 기세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는 무옥이 소림사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이용한 거조가 날개 를 접고 서 있었다. 새는 이 장(丈)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새 곁에는 몸집이 작은 미인이 있었 는데, 바로 검옥교였다. 그리고 무옥 앞에는 팔천 무사가 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전원 백포(白袍). 이들은 가슴에 철검을 한 자루씩 안고 있었다. 풍운제검대(風雲帝劍隊), 바로 검황성의 지주(支柱)들이다. 이들의 무위는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들은 고금에서 가장 강한 세 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모두 흥분된 눈빛이고, 모든 사람의 시선은 무옥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 다. 무옥은 뒷짐을 진 채 사람들을 쓸어 봤다. "여러분들은 이로(二路)로 나누어지게 될 것이오!" "……!" "……!"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천하맹주가 된 무옥, 그는 강호계에 우뚝 선 거인이었다. 하나, 풍운제검대 사람들에게는 거인이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흑사검대(黑獅劍隊)와 풍비검대(風飛劍隊)는 검은의 지휘를 받게 되는데, 해야 할 일은 암도(暗道)를 통해 성의 외곽에서 나타나 이 곳을 포위한 자 들 중, 괴수들을 제압하는 일이오!" "으음……!" "드… 드디어……." 사람들 중 반 정도가 흥분한 숨소리를 냈다. 무옥은 눈에서 신광을 폭사해 내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마성이 골수에까지 스미어 회개하지 못할 자가 아니라면 죽 이지 말라는 것이오." "아아……!" "후후… 역시 총검대주시다. 적과 싸우는 데에도 도량을 발휘하시는 분은 총검대주뿐이시다. 그 이유는,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용행검대(龍行劍隊)와 뇌궁검대(雷穹劍隊)는 환류의 지휘에 따라 강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오!" 무옥이 말했고. "훗훗……!" 철혈도 환류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그는 최근 사사운의 특별 지도 아래 몇 가지 신검초를 새롭게 터득했다. 그 는 과거에 비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마교총림의 외단을 격파하는 일이오. 그 일은 야월화와 영 웅천 무사들과 긴밀한 협조 아래 이루어질 것이오!" 무옥이 말할 때. "우우우……!" "휘이익- 휙-!" 장소성 소리, 휘파람 소리가 풍운제검대 뒤쪽에서 들려 왔다. 그 곳, 만여 무사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감옥교 휘하 영웅천의 무사들. 그리고 초산랑 휘하 야월화의 살수들. 풍운 제검대에 버금 가는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다. "야월화는 안내를 맡고, 영웅천은 비조를 대령할 것이오." 무옥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미소는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미소였다. "마교총림은 세력을 너무나도 드넓게 펼쳤소. 결과, 그들의 본거지는 확연 히 노출이 되었고… 칠십이로에서 일대 준동하는 통에 비밀단(秘密壇)의 세 력은 전에 비할 수 없이 작아진 상태요. 다시 말해, 패엽혼은 고금에서 가 장 끈질긴 세력이던 마교총림의 허점을 드러냈다는 말이오!" 무옥은 무사였고, 학자였다. 더욱이 그는 기문육가 비전의 병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대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계략을 발휘하려 하고 있었다. "이미… 나의 친구 천마무후 달단양이 십파고수들과 더불어 칠십이로의 마 도인들을 처단하기 시작했소. 우리들의 일은, 그들이 일을 마치기 이전에 끝내야 하오. 그래야만이 검황성 사람임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무옥은 그렇게 말하며 사사운을 봤다. "염려 마십시오!" 사사운의 입가에는 자신있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무옥은 이어 환류를 봤고, 그는 말 대신 칼을 쳐들어 보였다. "진세는 일각 후, 거두어진다. 일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무옥도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진정한 강자(强者)의 웃음이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