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오세훈(45) 후보가 40대 서울시장 시대를 열었다.
그는 역대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 기록도 세웠다. 1995년 민선 지방자치 시대가 열린 뒤 1기 조순 67세,2기 고건 60세,3기 이명박 달동네 소년→40대 소통령 됐다 시장이 61세에 각각 당선된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서울시장은 인구 1000만명,1년 예산 15조원,공무원 5만명을 움직이는 서울공화국 수장이다. 국방·외교만 없는 소통령에 비유되는 이유다. 오 후보는 당선 확정 후 “달라지는 정치,깨끗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아닐까 한다”며 “강북 상권 살리기와 서울 대기질 개선 등 약속했던 부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1961년 서울 성수동에서 1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가 살던 산꼭대기 달동네 집에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서는 나무 판자로 막은 사무실 한켠에서 지냈다. 오 당선자는 “이 때가 가장 고달팠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잉꼬 카나리아 등 관상용 새를 키워 팔아 용돈을 마련했다.
고등학생 때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수술 때문에 오래 결석한 친구 송상호(경희대 교수)씨에게 수업 내용을 전해주러 찾아갔다가 마주친 친구 여동생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나중에 부인이 된 송현옥(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씨였다. 그는 “아내의 모든 것이 그렇게 예뻐보였다”면서도 “이후 미팅 한번 못해본 것은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고려대 영문과에 함께 지원했지만 오 당선자만 떨어졌다. 한국외국어대에 진학했던 그는 부인과 같은 대학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1년 후 고려대 법대로 편입,캠퍼스 커플이 됐다. 5년간의 열애 끝에 1985년 결혼했다. 오 당선자가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다음해다.
그에게도 오점은 있다. 사법연수원에서 1년 낙제를 했다. 전날 먹었던 콩비지가 잘못돼 식중독에 걸려 기말시험 도중 실려나왔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1988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육군에 입대한 그는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로 차출돼 1991년 2월까지 근무했다. 1990년 윤석양 이병 양심고백 사건이 발생했던 시점이다. 보안사 근무 경력은 선거운동기간 줄곧 다른 당의 공격 빌미가 됐다.
그는 1991년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뒤 탄탄대로를 달렸다. 특히 1994년 국내 최초의 아파트 일조권 관련 소송에서 승소한 것을 계기로 대한변협 환경문제연구위원,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 위촉됐다. 환경변호사라는 기분 좋은 꼬리표가 붙은 것도 이 때다. 또 1994년 MBC 프로그램 ‘오 변호사 배 변호사’를 시작으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의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면서 일약 스타 변호사로 도약했다. 잘 생긴 외모와 차분한 말씨는 그를 대중 스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자신이 즐겨쓰는 추사유시(趨舍有時·사람의 진퇴에는 각각 그 시기가 있다)는 말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장고 끝에 한나라당을 선택했다. 한나라당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공동대표,한나라당 청년위원장과 상임운영위원. 그가 정치권에 몸담았을 때 지냈던 직책이다. 16대 국회 후반에는 검은돈의 정치권 유입을 막기 위한 정치관계법 개정을 주도했다. 이른바 오세훈 선거법이다. 2003년 말에는 정풍운동을 벌이며 5?6공화국 인사들의 ‘아름다운 퇴진’을 요구했다. 그 후 그가 먼저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정치권을 떠났다. 오 당선자는 “불출마 선언 당시 몇몇 분은 나의 진심을 오해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2004년 6월 철인3종 경기 완주,2005년 ‘우리는 실패에서 희망을 본다’ 저서 출간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반,그리고 TV CF 출연 등이 은둔생활의 흔적들이다. 정계은퇴 2년 후 그는 “경쟁력 있는 서울을 만들고 싶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정치권에 복귀했다. 그리고 당내 경선에서 단 보름간의 선거운동으로 수개월을 준비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됐다.
오 당선자는 선거운동 기간 많은 것을 벌여놓았다. 강북도심 부활 프로젝트가 첫번째이고,대기질 사업에 1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것이 다음이다. 또 서울시청사 신축 문제도 해결지어야 한다. 열린 학교,열린 한강,열린 공원 약속도 그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공약이다. 문화도시 서울을 만들겠다는 것 또한 숙제다.
그런 그가 홈페이지에 올린 4년 후 시장의 모습은 ‘떠날 때 그리운 사람,박수 받으며 떠나는 시장’이다. 그는 평생 가슴 속에 새기며 살아왔다는 ‘인자무적(仁者無敵)’처럼 적을 만들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나고 싶어한다.
서민 소년에서 스타 변호사로 그리고 역량 있는 국회의원에서 7월1일 서울시장으로의 화려한 변신을 앞두고 있다. 그의 앞엔 내년 대선과 18대 대선이 놓여 있다. 오 당선자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지만 앞으로 닥쳐올 두 번의 대선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의 역할이 존재할 것이고,그 역할을 위해 나아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영석 기자 3D3Dyskim@kmib.co.kr">3Dyskim@kmib.co.kr">3Dyskim@kmib.co.kr">yskim@kmib.co.kr">3D3Dyskim@kmib.co.kr">3Dyskim@kmib.co.kr">3Dyskim@kmib.co.kr">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