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
- 강화도 감리교 선교 약사 -
Ⅰ. 머리말
한반도의 배꼽 위치에 있는 강화도는 본도를 포함해서 11개의 유인도와 1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본도의 크기는 길이가 남북으로 28㎞, 동서 16㎞이며, 둘레가 112㎞의 타원형 모양이며, 넓이는 411㎢이다.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강화도는 지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강화도는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길목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였고 이 때문에 서구 열강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지곤 했다. 특히 강화도는 복음이 전래되기 직전인 19세기 말에 프랑스, 미국, 일본 등과 치열한 격전으로 인해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강화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의 문이 닫혀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강화도 선교를 위한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다. 그들은 이승환, 김상임, 박능일과 같은 한국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강화도에 감리교회를 세우셨고, 강화도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셨다. 따라서 강화도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더나아가 한국 감리교회 선교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작은 지면을 통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Ⅱ. 강화도 최초의 교회와 초기 강화도 선교
1. 강화도 최초의 교회 - 교산교회
1892년 내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존스 목사는 몇 차례 강화도에 들어오려고 시도했으나 강화 유수의 거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것은 1866년 프랑스와의 전쟁과 1871년 미국과 벌인 전쟁의 결과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승환이 예수를 영접하고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3년 4월, 자신의 고향 강화도 서사면 시루미 마을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써 강화도의 첫 번째 교회인 교산교회가 세워졌다.
1893년 강화도의 첫 번째 교회인 교산교회를 개척한 이승환은 존스 목사에게 자신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존스 목사가 서사면 해안까지 왔다. 그러나 지역 유지였던 김상임의 반대로 육지에 발을 붙이지도 못했다. 그러자 이승환은 한 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 갯벌을 지나 존스 목사가 있는 배로 갔다. 그리하여 이승환의 어머니는 선상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이후 내리교회 이명숙 권사와 전도부인 백헬렌의 노력으로 강화도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 본격적인 강화도 선교 - 홍의교회
1년 후, 존스 목사로 하여금 육지에 발도 못 붙이도록 반대했던 김상임이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는 한문성경을 구해 읽으면서 십자가의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예수를 영접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친구 박능일을 전도했다.
1896년 복음을 받아들인 박능일은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홍의교회의 시작이었다. 홍의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개명된 이름 중에는 예수 믿고 하나가 되었다는 뜻에서 ‘일’(一)자 돌림이 많았다. 이것은 천주교의 세례명이나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의 이름을 따라 짓는 이름과 구별되는 강화도의 독특한 방식이다.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한 교산교회에서 시작된 강화도 선교는 홍의교회를 통해서 서도면, 삼산면, 교동면, 내가면, 양도면, 길상면, 강화읍으로 확산되며 본격화되었다.
3. 강화도 선교의 전개
1) 강화도 서부. 남부 선교(교동면, 삼산면, 서도면)
권신일과 권혜일, 윤정일은 교동도과 석모도(삼산면), 주문도(서도면)에 가서 교회를 세웠다. 강화도 서북쪽에 위치한 교동면엔 권신일을 통해서 1899년 교동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어서 1900년 서한교회와 인사교회가 창립되었다.
강화도 서남방에 위치한 주문도에는 윤정일에 의해서 교회가 설립되었다. 주문도 선교는 1893년 성공회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감리교 전도인 윤정일에 의해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윤정일은 1899년 자신의 고향인 삼산면 매음리에 교회(삼남교회)를 개척한 뒤, 주문도에 다시 돌아와 뱃일을 하던 김근영을 전도했고 1902년 김근영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김근영의 집에서 시작된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는 지역 양반인 박씨 집안의 개종으로 더욱 성장하였다. 특히 박두병, 박순병 형제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함으로 주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주문도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서 윤정일은 주문도의 느리와 대빈창에도 복음을 전하였고, 볼음도(볼음교회, 1902)에도 교회를 세웠다.
2) 강화도 중부지역 선교(내가면, 양도면)
강화도 중부지역 선교는 1897년 홍의교회 교인인 황양일이 내가면에 고부교회를 개척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이후 내가면에는 망월교회(1900), 외포교회(1903), 오상교회(1905) 등이 세워졌다.
1899년 황양일은 양도면에 상도교회(현 조산교회)를 개척했고, 같은 해 고부교회 교인인 정천일은 양도면 건평리에 건평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정천일은 당시 강화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김용하와 전병규를 전도하였다. 김용하, 전병규는 건평교회에 다니다가 1902년 11월부터 김용하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흥천교회의 시작이다. 두 사람은 개종하고 나서 마을 이름을 흥천(興天)으로 바꾸었다. 흥천(興天)은 ‘하나님을 믿어 복받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리고 1908년에는 흥천 합일학교를 세우고 인근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3) 강화읍 선교
1900년 홍의교회 교인 주선일과 허진일, 최족일, 김봉오 등이 강화읍에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를 창립하였고 1901년에는 ‘잠두의숙’(현 합일초등학교)을 창설하였다.
강화도 중심에 위치한 이 교회는 강화읍과 강화읍 주변 지역들에서 전도하였고, 강화도 남쪽지역과 서쪽 끝 작은 섬 아차도에까지도 교회(아차도교회, 1906)를 세우는 등 강화도 전 지역을 선교의 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잠두교회의 설립은 교산, 홍의, 교동도, 주문도 등 강화 북쪽 지역과 섬에서만 추진되었던 감리교 선교가 강화도 중심부로 옮겨졌고, 이후 강화도 선교가 강화도 전역은 물론 강 건너 김포까지 확대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4) 강화도 남부지역 선교(길상면, 화도면)
길상면 선교는 홍의교회 교인 종순일에 의해 시작되었다. 종순일은 1899년 길상면에 초대교회와 선두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선두교회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선두중앙교회(1907)가 세워졌다.
1903년 강화도 최남단에 위치한 화도면에는 잠두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내리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이후 강화도 감리교회 부흥의 불길이 되었던 마리산 부흥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내리교회로부터 시작된 화도면 선교는 장화교회(1904), 강남교회(1905), 문산교회(1906), 화도시온교회(1908) 등의 열매를 맺었다.
4. 강화도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
1) 이동휘와 보창학교
1902년 강화부 진위대장으로 부임한 이동휘는 일본의 무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나라를 구할 방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잠두교회 교인이 되었다. 감리교인이 된 이동휘는 1904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있는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지역마다 학교가 세워졌고 여기에 지역 유지들의 가세로 1907년경 강화도의 학교 수는 72개나 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들은 강화도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장차 항일 운동의 동인이 되었다.
2) 피의 세례, 더리미 순교터
1907년 8월 9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이 해산되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군인들과 주민들이 합세한 무장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틀 만에 중무장한 일본군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강화읍내에 들어온 일본군들은 주민 30여 명을 학살했는데, 이때 김동수를 비롯한 4명의 감리교인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더리미 해변에서 총살당했다.
이 사건은 민족을 이끌어가는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강화도 주민들의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일본군의 계획적인 보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은 강화도 주민들의 의식 속에 깊은 뿌리를 내렸고 오히려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Ⅲ. 감리교회의 성장과 시련
1910년대에 들어서자 강화도의 감리교회들은 신앙의 열정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도의 감리교회들은 한편 부흥을 경험하면서, 다른 한편 시련과 고난에 직면하였다.
1) 마리산 부흥회
강화도에는 ‘마리산 부흥회’라는 60년간 지속된 성령운동이 있었다. 이 부흥회는 1915년 두곡교회(현 내리교회)의 권사 정윤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윤화는 내리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부흥회 마지막 날엔 교인들과 함께 마리산 정상(참성단, 468m)에 올라가서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곤 했다. 수년 동안 마리산 부흥회에 참여했던 지도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갈망으로 마음이 뜨거웠다. 결국 이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강화도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2) 1919년 강화도의 만세 운동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거국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전국적으로 2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강화도의 만세운동은 감리교인들, 특히 길상면에 있는 강화초대교회와 선두교회 그리고 선두중앙교회 교인들이 주도하였다. 유봉진, 염성오, 황도문, 황유부 등은 길상결사대를 조직했고 유봉진을 결사대장으로 세웠다. 만세운동은 3월 18일 강화읍 장날을 기해서 발발하여 강화도 전역에서 한 달간 지속되었다.
3.1만세운동으로 인해 강화도의 감리교회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예배를 인도할 교회 지도자들 상당수가 감옥에 갇히거나 피신했고, 28명의 감리교인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강화도 감리교회는 강화도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족의 고난에 적극 동참하였고, 그 결과 강화도 주민들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Ⅳ. 고난을 극복하고 부흥하는 감리교회
선교 초기 꾸준하게 성장하던 강화도 감리교회는 1901년 한국을 강타한 대기근이란 자연재앙과 1903년에 일어난 하와이 이민 열풍으로 인해 성장이 둔화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원산, 평양 등지에서 시작되어 한국 전역에 불어 닥친 성령대폭발(1903-1907)로 인해 강화도에도 부흥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고, 이어서 백만인 구령운동(1909-1910)을 통해 강화도의 감리교회들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