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의 고향 산책길,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와 계당(溪堂)
송강가사를 잉태한 국문학의 요람
송강은 송강가사를 창작하여 우리 국문학을 꽃피운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한문학(漢文學)만이 숭상되던 당시의 벽을 허물고 우리글로 주옥같은 가사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민족시인(民族詩人)이었다.
조선후기에 국문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고 '서포만필(西浦漫畢)'을 남겼던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은 '송강가사는 우리나라의 이소'라고 하면서 '진정한 우리 글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이 세편뿐이다'고 송강 정철의 송강가사를 극찬하였다.
그러나 송강이 이처럼 우리 국문학을 꽃 피울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만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일찌기 송강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후원하며 가르쳤던 가사문화권에서 만난 위대한 스승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에 가사문화권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송강은 우리 국문학을 꽃 피울 위대한 문학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을가?
옛 창평현이었던 담양의 가사문화권은 송강가사로 인하여 우리 국문학의 요람이 되었다.
창평현(昌平縣)이 송강의 고향이 되기까지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의 고향을 물으면 누구나 옛 창평현(昌平縣)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송강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0살이 되면서 을사사화로 온 집안이 몰락하는 비운을 겪는바람에 서울을 떠났고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16살이 되던해, 귀양이 풀린 아버지를 따라 창평(지금의 담양 가사문화권)으로 내려왔다. 창평과의 첫 인연이었다.
송강은 창평에서 나주목사를 지냈던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선생을 은인과 스승으로 만나면서 또 한번 운명이 바뀌게 된다. 송강은 사촌의 권유로 환벽당에 머물며 결혼도 하고 뒤늦은 학문에 몰두하며 청춘기를 보냈다. 송강이 26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어 27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기까지는 10년여를 머물렀으며 서울에 다시 온것은 어려서 서울을 떠난지 실로 17년만이었다.
송강은 정유침의 4남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큰 누이가 인종의 숙의가 되고 셋째 누이가 종실의 계림군에게 시집가서 궁중을 자주 출입하며 어린시절의 명종과는 소꼽친구가 되는 등 비교적 화려했지만 을사사화는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을사사화는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새로 임금이 된 명종은 나이가 어려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小尹)일파가 인종의 외숙인 윤임(大尹)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100여명의 선비가 죽거나 다친것이다.
을사사화에 송강의 매형인 계림군이 역모죄로 처형되었고, 장형인 자(滋)가 귀양지에서 32세로 죽었으며 중형들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은둔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송강의 아버지는 유배지를 전전하였다. 송강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유배떠나던 아버지를 따라다닌 것이다.
창평으로 내려온 송강은 그 해 여름, 순천의 처가로 내려가 은둔하고 있던 중형(仲兄)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때는 여름이라 송강은 무등산기슭으로 환벽당 아래 용소(龍沼)의 맑은 물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다. 한편 환벽당에서는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선생이 낮잠을 잤는데 꿈에 강에서 용이 꿈틀대는 것을 보고 이상히여겨 냇가에 누가 있는가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송강과 사촌의 만남은 이렇게 전설이 되었다.
송강은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은인이며 스승인 사촌외에도 면앙 송순,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 등 기라성 같은 학자 문이들을 스승으로 공부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등 벗을 만났으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과 평생의 교유(交遊)의 도(道)를 이루었다.
일동삼승(一洞三勝)의 경관이 빼어난 지실마을
송강이 공부하던 이곳은 지실마을은 환벽당(環碧堂)외에도 서하당 김성원이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식영정(息影亭), 그리고 소쇄처사 양산보(瀟灑處士 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원림 소쇄원(瀟灑園)이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고 알려진 곳, 송강이 머물던 지실마을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 곳이다.
송강은 이곳에서 성장하여 벼슬길에 나선 후 참으로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살았다. 그는 만년에 네번이나 낙향했는데, 그때마다 이곳 담양의 가사문화권으로 내려왔다. 송강이 큰 스승들과 다정한 벗들을 만나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마음껏 호연지기를 기르며 가장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곳이다. 그는 훗날 시인으로 대성할 수 있는 역량을 여기서 길렀으며 송강가사를 잉태하고 창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가사문화권 국문학의 요람이기도 하다. 송강이 송강가사를 지었고 특히 식영정에서는 석천 임억령과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이 늘 시회를 열었다. 사람들은 네 신선들이 노니듯하다하여 사선정(四仙亭)이라고도 했다.
송강의 고향 산책길 만수명산로
그런데 이 지실마을에는 일동삼승외에도 또 하나의 송강과 인연깊은 숨겨진 비경(秘景)과 명소가 있다. 만수동(萬壽洞)계곡과 계당(溪堂)이다. 만수동비경은 백일홍이 만발한 100여척(尺)에 이르는 만수반석(萬壽盤石)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비가오면 계곡은 와폭(臥瀑)으로 변하여 회룡고조(回龍顧祖)하며 무등영봉(無等靈峰)을 마주하는 경관을 연출한다.
이 만수동길을 송강은 만수명산로라고 명명했다. 옛 조선시대에 창평현으로 넘어가던 큰 길이었다. 그러나 이길은 1793년 창평이 옮겨간 후 나그네의 발길이 그쳐 지실마을 골짜기에 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만년에 낙향했던 송강이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 추풍병객래(秋風病客來)라고 노래하던 길이다.
또 이 길의 초입에 송강이 즐겨 찾아 술잔을 기울이던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이 있었다. 그 터가 계당(溪堂)이다. 지금의 계당은 송강의 4남 기암 정홍명이 이 집을 인수하여 1616년에 지은 것이다. 계당에는 지금도 '송강선생장구지소'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강이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젊은시절에도 자주 다니던 산책길이기 때문이다.
송강은 네차례나 창평으로 낙향했는데, 이 때 이곳 만수명산로를 찾아 만수동인가와 만수동에 있던 만일사를 찾아 몇 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만수동이웃집 벽에 부치다.(題萬壽洞隣家壁)' 2수와 만일사(萬日寺)에서 지었던 2수의 시가 전한다.
<題萬壽洞隣家壁> 만수동 이웃집 벽에 쓰다
<1>
咫尺家居倂 나 사는 집 지척에 두고
經年得一來 해를 넘겨서 꼭 한번 찾아 왔네.
東墻千挺竹 동녘 담 아래 천 그루 대나무(대밭) 그림자
依舊影侵杯 예와 변함없이 내 술잔을 찾아주네
<2>
.
萬壽名山路 만수동이라 명산의 길에
秋風病客來 늙어 병든 나그네 왔다네.
淸愁同老杜 맑은 시름 늙은 두자미(杜子美)와 같아
處處喜徵杯 가는 곳마다 술 청하길 좋아하오.
<萬日寺獨坐> 만일사에 홀로 앉아서
有客身多病 나그네 몸이 병조차 많은데
棲棲湖海間 호해의 사이에 방황하다니.
蒼茫北歸意 북으로 돌아갈 뜻은 아득만 한데
風雨滿空山 비바람만 허공에 가득하구나.
<重尋萬日寺> 만일사를 다시 찾다
一龕燈火石樓雲 법당의 등불이라 석루의 구름
往事茫茫只斷魂 지난 일 아득아득 넋이 끊기네.
惟有歲寒雙柏樹 찬 겨울 두 그루 잣나무만이
雪中蒼翠暎山門 눈 속에 파랗게 산문을 비추고 있네.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터에 지은 계당(溪堂)
송강이 만수명산로의 입구에 있던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을 자주 찾아 술잔을 기울이던 추억은 송강의 4남 기암 정홍명에게 전달 되었다. 기암은 1616년 만수동이웃집터에 계당을 지었고 지금까지 송강의 후손들이 살며 가사문화권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지킴이 역할을 하게 된것이다.
기암은 계당에서 일생을 마칠때까지 아버지 송강의 작품들을 정리하여 빛을 보게 하였고 그역시 1,100여수가 넘는 시를 남긴 대 시인이었다. 기암은 또 계당에서 사는 동안 1623년에 성공한 인조반정의 조보를 여기서 받고 기뻐했는데 이때 조보를 전하려고 달려온 전마가 지실도착 3일만에 죽었는데, 기암은 이 말을 지실앞에 후히 묻어주었다. 그 말무덤이 최근까지도 있었다.
기암의 아들 정이는 호를 송국주인이라하고 계당팔영(溪堂八詠)을 제영하였고 후에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은 차운(次韻)을 했으며, 송강의 12대손 벽서 정운오(碧棲 鄭雲五 1846-1920)는 계당팔영에 더하여 계당십영(溪堂八十詠)을 노래했다.
환벽당, 식영정의 주인이 된 계당사람들
계당의 첫 주인이었던 정홍명과 그의 아들 정이이후 잠시 타인의 소유가 되기도 했던 계당은 송강의 고손인 수환 정흡(1648-1709)에게 다시 인수되었다. 수환은 사촌의 후손을 이어 환벽당의 새 주인이 되었던 최초의 송강후손으로 환벽당에서 살다가 잠시 진사였던 예창 조근하에게 맡기고 진안으로 옮겼다가 계당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환 정흡은 양자인 소은 정달부(簫隱 鄭敏河 1671-1754)의 뜻에 따라 계당을 인수하였고 소은은 다시 1721년에 서하당의 후손에게서 식영정을 인수하여 새 주인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환벽당과 식영정주인은 계당주인이었다.
계당은 소은의 장남 정근(鄭根 1691-1756)이 호를 아예 계당으로 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소은의 장손들로 이어지면서 당호가 계당이 되었고 가사문화권 문화유산의 지킴이가 되었다.
계당(溪堂)에는 옛부터 귀중한 문헌들이 많았으나 1902년 화제때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1950년 6.25전란중에 또 다시 많은 문헌들이 망실되었다. 다행이 벽서 정운오가 임인년 화재중에 수습한 송강의 친필 '연행일기(燕行日記)'와 사계 김장생의 수필(手筆)인 송강행장초(松江行狀抄), 의병장으로 산화한 조헌의 편지, 송강과 기암이 주고받은 편지 등 귀중한 문헌 백여점이 계당에 보존되어 오다가 2000년에 개관된 가사문학관에 전시되고 있다.
비경 만수동(萬壽洞)과 송강
옛 사람들은 지실터를 이야기할 때, 주산(主山)인 삼봉(三峰, 壯元峰 孝子峰 烈女峰)아래 백여척(百餘尺)의 만수반석(萬壽盤石)위로 청계수(淸溪水)가 와폭(臥瀑)으로 흘러 회룡고조(回龍顧祖)하는 '인간세상을 떠난 별천지' 만수동을 후장하여 정남향에 무등영봉을 마주보고 좌청룡에 발봉이 있으니 사대부가 살만한 땅(士大夫可居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만수동에는 만수반석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면 반달샘(半月井) 야석교(也石橋) 옥백소(玉帛沼) 등 아름다운 지명(地名)들이 전해온다. 일설(一說)에는 송강이 젊은 시절에 이곳에 놀러다니며 부쳤던 이름들이라고 한다.
지실의 송강 후손들
기암 정홍명(奇庵 鄭弘溟)이 1616년에 계당에 살면서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했다는 조보(朝報)를 받자 사람들은 지실터에 후손들이 살기를 권한 송강의 백부 유심(惟深)의 예언대로 와청조보(臥聽朝報)했으니 '사대부가 살만한 터(士大夫可居地)'가 맞다고 했다.
그런 이유인지는 알수없으나 기암이 송강의 후손으로는 지실의 첫입주자였고 이후 송강의 후손들이 모여들어 지금까지 영일정씨들의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1951년 11월 11일 지실마을이 빨치산들에 의하여 완전히 소실되자 송강의 후손들은 흩어지기 시작하여 오늘까지도 빈터가 많은 마을로 변하고 관광지가되면서 너무도 변하고 있어 옛모습이 사라지는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마지막 희망 만수명산로와 계당
지실마을은 점차 엣 모습을 잃어가고 여기저기 장사집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계당을 중심으로한 지실골짜기가 훼손이 적은 편이어서 이곳을 송강의 옛터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계당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송강문학관을 지어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인물 송강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연수활동, 창작실, 객사등을 지어 수학여행단이 머물게 하고, 계당을 복원하여 고향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고향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 어떨가.
또 창평으로 넘어가던 옛길을 복원하여 등산로를 만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잘 보존되고 있다는 적송림과 함께 식영정, 소쇄원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되며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삼림욕, 죽림욕장을 만들수도 있다. 뿐만아니라 마을 뒤에 감춰진 골짜기는 가재가 놀고 산새들이 노래하는 생태보전지역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계당에서는 18,000평에 이르는 모든 재삼을 내놓고 이러한 문화전략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