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차나무 [ tea-plant, 茶─ ]
측막태좌목 차나무과의 상록교목 또는 관목
차나무에는 변종이 많으며, 이들 변종은 그 모양이 각기 크게 다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재배되는 소엽종은 자연 상태에서도 높이가 2∼3m이고, 인도 아삼 지방의 대엽종은 높이가 15m에 달하므로 재배할 때에는 가지치기를 하여 높이가 0.5∼1m 되도록 한다.
뿌리는 아래로 곧게 뻗고 깊이가 2∼4m이며, 곁뿌리는 길이가 15∼20cm이고, 가는 뿌리가 많다. 잎은 품종이나 위치에 따라 변이가 크지만 어긋나고 길이 6∼20cm, 폭 3∼4cm의 긴 타원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끝과 밑 부분이 뾰족하다.
잎의 질은 단단하고 약간 두꺼우며 표면에 광택이 있다. 품종에 따라 잎 빛깔의 진하고 엷음에 차이가 있고 주름에도 변화가 있으며, 빛깔도 녹색·자주색·황색·갈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어린잎이나 어린 싹의 뒷면에는 부드러운 털이 있다.
꽃은 10∼11월에 흰색 또는 연분홍색으로 피고, 잎겨드랑이 또는 가지 끝에 1∼3개가 달린다. 꽃받침조각은 5개이고 둥글며 길이가 1∼2cm이고, 꽃잎은 6∼8개이며 넓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고 뒤로 젖혀진다.
수술은 180∼240개이고, 수술대는 길이가 5∼10mm이며, 꽃밥은 노란 색이다. 암술은 1개이고, 암술대는 3개이며 흰색 털이 빽빽이 있고, 씨방은 상위(上位)이며 3실이다. 열매는 삭과이고 둥글며 모가 졌고 다음해 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가을에 익기 때문에 꽃과 열매를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다. 열매가 익으면 터져서 갈색의 단단한 종자가 나온다.
(두산백과)
차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관목.
학명은 Thea sinensis L. 이다.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심고 있는 나무로 가지가 많이 갈라진다. 1년생 가지는 흰색이며 잔털이 있고, 2년생 가지는 회갈색이며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며 피침상 장타원형으로 표면은 녹색의 엽맥이 들어갔고 뒷면은 회녹색으로 맥이 튀어 나왔으며 양면에 털이 없다. 꽃은 10∼11월에 피고 지름 3∼5㎝로서 흰색이며 향기가 있고 1∼3개가 액생(掖生:잎이 붙어 있는 자리에서 꽃이 남)하거나 가지 끝에 달린다. 열매는 다음해의 가을에 익으며 종자는 둥글고 단단하다.
원산지는 중국의 쓰촨성(四川省)·윈난성(雲南省)·구이저우성(貴州省)으로부터 미얀마, 인도의 아샘지방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의 허황옥(許黃玉) 공주가 종자를 가져와서 김해의 백월산에 있는 죽림 내에 심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828년(흥덕왕 3)에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현재는 경상남도 하동군과 사천시, 전라남도지역의 장흥군·영암군·보성군·구례군·순천시·광주시 등이 주산지이며, 집산면적은 총 850㏊에 달한다.
총생산량 중 일부 수출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량이 홍차 또는 녹차용으로 국내에서 소비되고 있다. 번식력이 강하고 병충해에 강하므로 재배상 어려움은 적다. 기후조건은 북위 40°이며, 연평균기온이 13℃ 이상이어야 좋다. 강우량은 1,300∼1,500㎜가 적당하며, 높이는 200m 이하에서 좋은 생장을 보인다.
경사도는 30°까지 계단식농지로 재배가 가능하다. 토양의 산도는 pH 4.5∼6이 적지이며 사질 양토가 좋다. 번식방법은 실생법·삽목법·취목법·분주방법 등이 있다.
실생법은 10월중에 채취한 종자를 그늘에 말려 다음해 봄까지 노천매장한다. 다음해 봄 3월에 노지에서 꺼내어 조파(條播:줄을 맞추어 씨를 뿌리기)를 한다. 복토는 젖은 모래로 두껍게 하는 것이 좋다. 파종 후에는 볕가림을 해주고 발아한 뒤에는 제초 및 솎음으로 생장을 촉진시킨다.
삽목법은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건전한 가지를 선택하여 3∼5㎝ 정도의 길이로 삽수를 만든다. 삽수를 묘상에 삽목할 때에 잎의 하나는 지면에 거의 닿게 꽂아준다. 그 뒤의 관리는 실생법과 동일하다.
이렇게 하여 생산된 묘를 다음해 봄에 식재한다. 약 5년 정도 생육하면 형태가 고정된다. 수고 1m, 포기둘레 1.2m 정도로 임면이 넓고 평탄하여 측지가 잘 밀생된 반 원통형이 가장 좋다.
생육을 촉진시키고 수확량과 제차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시비를 해야 한다. 차나무는 일반적으로 질소의 요구도가 높은데, 이 때 너무 많은 질소를 시비하면 차의 향기가 저하된다.
차나무는 어느 정도 병충해에 강하지만 심한 해를 받을 경우 수엽량이 떨어지고 제차품질도 저하된다. 해충은 멸구·떠물·여자벌레·비리·엽권충·풀쐐기·개각충류 등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차잎이나 어린순, 또는 나무줄기에 기생한다.
이들 해충은 유산니코틴·석유유제·석회유황합제·제충국분제 등의 살충제로 박멸할 수 있다. 병해로는 떡잎병·백성병·적엽고병·백문우병 등이 있는데 주로 잎과 뿌리에 발생하여 피해를 준다. 방제는 석회유황동액과 목회액 등으로써 소독하여 구제한다.
품종은 인도의 아샘종, 미얀마의 산종, 중국의 대엽종과 소엽종 등 네 종류가 있다. 우리 나라에는 대엽종·소엽종과 이들의 잡종이 식재되고 있다.
차나무의 잎은 차 생산에 사용된다. 차잎은 카페인·타닌·질소·단백질, 비타민 A와 C, 무기염류 등을 함유하고 있어 각성작용과 이뇨·강심·해독·피로회복 등 인체에 이로운 약리작용을 한다.
차나무의 종자는 화장품과 식용으로도 이용되며, 종자의 착유박(搾油泊)은 비료나 가축의 사료로도 쓰이고 비누의 대용이 되기도 하는 등 그 효용가치가 막대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차나무는 다년생 상록 관목으로 원산지는 중국의 쓰촨 성, 윈난 성, 구이저우 성으로부터 미얀마, 인도의 아삼 지방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잎은 광피침형 또는 장타원형이며 표면은 광택이 있고 뒷면은 연한 녹색인데 긴 타원형에 둘레에 톱니가 있고 약간 두툼하며 윤기가 있고 질기다.
꽃은 백색이나 붉은 무늬가 있는 것도 있는데, 잎겨드랑이 또는 가지 끝에 1~3개가 달린다. 꽃받침 조각은 5개이고 둥글며 길이가 1~2㎝이고, 꽃잎은 6~8개로 넓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며 뒤로 젖혀진다.
수술은 황색인데, 그 숫자가 200여 개에 달하고, 암술은 1개로 암술대는 3개이며 흰색 털이 빽빽이 있고, 씨방은 상위이며 3실이다.
열매는 삭과이고 둥글며 모가 졌는데 다음 해 봄부터 자라기 시작하여 가을에 익기 때문에 꽃과 열매를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다. 열매가 익으면 터져서 갈색의 단단한 종자가 나온다. 뿌리는 수직으로 하향 생장하며 가는 뿌리가 많은데 약 산성토양에서 잘 자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락국 김수로 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가 종자를 가져와서 심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828년(흥덕왕 3)에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현재는 경남의 하동군과 사천군, 전남의 장흥군, 영암군, 보성군, 구례군, 순천시 및 광주광역시 등이 주산지이며, 총생산량 중 일부 수출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량 국내에서 소비된다.
차나무는 어느 정도 병충해에 강하지만 심한 해를 받을 경우 잎의 양이 적어지고 차의 품질도 저하된다. 찻잎은 카페인과 타닌, 질소, 단백질, 비타민 A와 C, 무기염류 등을 함유하고 있어 각성작용과 이뇨, 강심, 해독, 피로 회복 작용을 한다. 차나무의 종자는 화장품과 식용으로도 이용되며,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비료나 가축의 사료로도 쓰이고 비누의 대용으로도 쓴다.
(경전속의 불교식물)
꽃과 열매가 만나는 차나무
차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꽃과 열매가 1년 만에 만난다. 그래서 차나무를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 한다. 나무의 꽃은 대부분 봄에 볼 수 있지만, 자귀나무, 능소화, 배롱나무, 무궁화처럼 여름에 피는 나무도 있다.
그러나 가을 혹은 초겨울에 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봄과 여름에 꽃이 피는 나무에는 여름과 가을에 익은 열매를 볼 수 있다. 가을과 초겨울에 꽃이 핀다면 겨울 혹은 봄에 열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나무가 바로 10월~11월에 꽃 핀다.
물론 차나무 외에도 녹나뭇과의 참식나무, 소나뭇과의 개잎갈나무, 장미과의 비파나무, 두릅나뭇과의 팔손이 등도 가을에 꽃 핀다. 그런데 이중 개잎갈나무와 참식나무는 꽃 피는 즈음에 열매가 익지만, 비파나무와 팔손이는 다음 해 5~6월에 열매가 익는다.
흰빛을 띤 다섯 장의 차나무 꽃은 우리에게는 백의민족을, 군자에게는 지조를, 여인에게는 정절을 상징한다. 더욱이 다섯 장의 꽃잎은 녹차가 지니고 있는 쓴맛(苦), 단맛(甘), 신맛(酸), 매운맛(辛), 떫은맛(澁) 다섯 가지 맛으로 드러나지만, 이 다섯 맛은 너무 힘들게도(澁), 너무 티내지도(酸), 너무 복잡하게도(辛), 너무 편하게도(甘), 그리고 너무 어렵게도(苦) 살지 말라는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차나무의 열매는 동백나무의 열매와 닮았다. 차나무의 열매는 차나무의 꽃, 즉 운화(雲華)가 영롱하게 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익어 간다. 차나무의 열매는 딸을 시집보낼 때 예물로 보내기도 하고, 며느리에게 씨를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혼례를 마친 신부가 친정에서 마련한 차와 다식을 시댁의 사당에 바친 것도 직근성(直根性)의 차나무가 옮겨 심으면 쉽게 죽기에 개가하지 말고 가문을 지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세상을 바꾼나무)
차와 불교, 세계 최초의 차 전서 『차경(茶經)』
차와 불교의 관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단어는 차선일미(茶禪一味)다. ‘차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도 출가 후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적 선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라는 입장에서 일상에서 해탈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석가모니의 이러한 방식은 초기 불교 이래 중요한 덕목이었다.
중국에 선종이 들어온 시기는 보리달마가 중국에 온 시기와 맞물려 있다. 남천축(남쪽 인도) 출신인 달마가 남조의 송나라 말에 중국에 왔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의 일이다. 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북위(北魏)의 낙양에 가서 숭산 소림사에서 9년의 면벽(面壁) 수행을 쌓았다. 그는 혜가에게 『능가경(楞伽經)』 네 권을 전수하고, 그가 달마의 심법(心法)을 터득하여 마침내 선종이 유행했다. 차와 선의 만남도 중국에 선이 자리 잡는 이쯤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달마에서 시작한 중국의 선종은 2대 혜가 뒤에 3대 승찬, 4대 도신, 5대 홍인으로 이어지다가, 6대 혜능에 이르러 중국식 선종으로 탈바꿈했다. 혜능의 등장은 후한 시기에 인도에서 들어온 인도불교와의 결별이자 중국식 선종의 출발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사의 물줄기였다. 혜능이 광둥 성 쑤저우의 조계산 보림선사에서 돈오(頓悟)의 전법 활동을 펼친 이후 혜능 선은 천년동안 중국 불교계를 장악했다. 혜능이 이끈 선종을 남쪽에서 활동했다고 해서 흔히 ‘남선종’으로, 라이벌이었던 신수가 북쪽에서 활동했다고 해서 ‘북선종’이라 부른다. 그러나 흔히 남선종을 곧 중국의 선종으로 부르는 것은 혜능의 어록으로 알려진 『단경(壇經)』 혹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 근거한 것이다.
혜능이 이끈 선종은 다시 그의 제자 신회가 죽고 난 후, 당나라 중기 및 후기에서 오대(五代)에 이르는 동안 오가(五家, 조동종·운문종·법안종·위앙종·임제종)가 탄생했다. 오가 중에서도 임제종이 가장 큰 세력을 떨쳤으며, 한국 조계종도 임제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처님께 차를 바치고, 고려시대 불교 행사인 팔관회 등에 차를 공급하는 다방(茶房)이 있었다는 것만 봐도 차와 불교의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궁중의례에서 차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상께 제사 지내는 것을 차례(茶禮)라고 부른 것도 차의 중요성을 알려 주는 사례이다.
차와 관련한 종합 서적도 불교가 성행한 당나라 때 완성되었다. 차 관련 정보를 집대성한 사람은 중국 당나라의 육우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육우를 차신(茶神), 차성(茶聖), 차선(茶仙)이라 부른다. 육우가 차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부모도 모르는 그가 승려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차를 공부해서 세계 최초의 전문서적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중기 안녹산의 난 때문이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총애를 받았던 안녹산이 755년 북쪽 지역에서 난을 일으키자 육우는 난을 피해 양쯔 강 이남으로 떠났다.
남쪽에 내려온 육우는 이곳의 차 밭을 구경하고, 차와 밀접한 물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는 답사를 통해 얻은 지식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차경(茶經)』 혹은 『다경(茶經)』은 차의 경전을 의미한다. 이 책에는 차의 생산지, 차의 도구, 차와 관련한 고사(故事) 등 차와 관련한 모든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에서도 『차경』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차경』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른바 다도(茶道)의 성립이다. 다도는 차를 단순히 음료가 아니라 수양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육우는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정행검덕(正行儉德)’, 즉 바른 행실과 검소한 덕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차의 정신은 지금까지 중국, 한국, 일본에서 계승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의 승려들이 차를 부처님에 올리고, 차를 마시면서 수도하는 모습은 육우와 다도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세상을 바꾼 나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과 차 사랑
중국 역사상 한나라 고조인 유방에 이어 두 번째로 농민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주원장은 원나라 왕조 말의 혼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나라 황제가 13년간 6명의 황제가 바뀌는 등 극도로 혼란한 시대인 1328년 가을,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아버지와 무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 2녀 중 막내였던 주원장의 어린 시절이 순탄했을 리 없다.
그는 17세 되던 1345년 황각사에 들어갔다. 그가 절에 들어간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절은 특별한 직업도 없는 사람이 혼란기에 몸을 기대기에 적합한 곳이다. 그가 절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얼마나 충실히 했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잠깐 걸식승(乞食僧) 생활을 하다가 절에 들어간 지 7년 만인 1352년, 그의 나이 24세 때 곽자흥(郭子興) 군에 투신한 점으로 보아 수도승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원장은 뒷날 그의 아들 영락제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긴 하지만, 중세 이래 남방에 근거지를 두고 처음 북벌에 성공한 주인공이다.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했다. 그 중 하나는 1왕 1연호(年號)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차 먹는 방법이다.
중국 역사에 연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한나라 무제였다. 그는 기원전 140년에 ‘처음을 세운다’, ‘으뜸을 건설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했다. 그는 5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10번 연호를 바꾸었다. 무제 이래 모든 황제들이 연호를 사용했지만, 무제보다 연호를 많이 사용한 황제는 34년 동안 14번 사용한 당나라 고종이었다. 송나라 인종도 41년 동안 무제와 마찬가지로 10번 연호를 달리 사용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기존의 연호 제도를 바꾸어 한 황제는 반드시 하나의 연호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과 대만에서 아직 사용하고 있는 연호는 황제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주원장이 제정한 새로운 연호 제도는 연호를 쉽게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황제의 시호(諡號)와 연호의 일치를 의미한다. 주원장이 사용한 홍무(洪武) 연호는 주원장의 시호인 태조(太祖)와 일치하기 때문에, 굳이 명 태조라 부르지 않고 홍무제(洪武帝)로 불러도 헛갈리지 않는다. 홍무제 이후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황제들이 주원장의 법칙을 따랐다. 간단한 법칙이었지만 아주 큰 변화였다.
홍무제가 단행한 또 하나의 조치는 복건 건안의 단차(團茶) 제조를 금지한 일이다. 홍무제가 집권한 지 23년 만에 취해진 이 조치도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실로 차 역사에 혁명이었다. 홍무제가 이런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도 복건성 건구현에서 생산한 건령차와 강소성 의흥현에서 생산한 양선차가 황제의 진상품으로 올라왔지만, 모두 맷돌질하여 비벼서 만든 크고 작은 용단차(龍團茶, 용무늬가 찍힌 차)였다. 홍무제는 이런 방식의 차를 금지하고 찻잎 자체를 요구했다.
이는 바로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방식, 즉 찻잎을 차 그릇에 넣어 마시는 이른바 포차법(泡茶法)이다. 홍무제의 이러한 혁명적 조치는 복희씨가 차를 마신 이래 다양한 형태의 차 먹는 방식을 일거에 바꾸는 순간이기도 했다. 홍무제가 차 마시는 방식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명사(明史)』 「식화지(食貨志)」에는 차 만드는 백성의 노고를 측은하게 여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원장이 차 만드는 노고를 측은하게 생각한 것은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나라 때는 주로 떡 모양으로 만든 병차(餠茶)를 솥에 물을 넣고 끓여서 마셨고, 송나라 때는 병차보다 모양이 작은 단차(團茶)를 잘게 부숴 물에 넣어 마셨다. 병차와 단차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주원장은 이러한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현재 한국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녹차처럼 차를 간단히 제조하도록 했다.
(세상을 바꾼 나무)
“무슨 차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은 커피, 녹차, 홍차, 대추차 등 다양할 것이다. 외국 비행기에 탑승해보면 스튜어디스가 상냥하게 묻는다. “Would you like tea or coffee?" 보통 tea를 선택하면 홍차가, coffee를 선택하면 드립 커피가 제공된다. 영어의 차(tea)에는 coffee가 포함되지 않는다.
영어의 tea와 우리나라의 차가 다른 개체인 것일까? 이는 차에 대한 의미의 적용이 각 나라마다 다양하게 쓰여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하지만 차에 대한 정의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차는 차나무의 잎을 가공하여 음료화 시킨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는 마실 수 있는 모든 음료를 차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를, 대추차는 대추나무 열매를 가공하여 만든 음료일 뿐 차라고 부를 수 없다. 차나무 잎이 없으면 차는 없다.
차의 기원은 중국
차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다. 차의 기원에 대해서 각 나라마다 약간씩 다른 이견1)이 존재하나, 중국이 기원이라는 의견이 가장 일반적이다. 차나무의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 린네 오 쿤츠(Camellia sinensis(L.) O. Kuntze)이다. 여기서 sinensis는 ‘중국의’라는 라틴어이고, camellia는 ‘동백나무’라는 뜻으로, 곧 ‘중국의 동백나무’라는 뜻이다.
차나무는 중국의 서남부 지역인 운남, 귀주, 사천 등지가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일대는 아열대기후 지대로 연중 내내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추위에 민감한 차나무가 생장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약 20개의 성(省) 200여 곳에서 수령(樹齡)이 800년 이상 된 야생대차수2)(野生大茶樹)가 계속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2004년에는 린창시 봉경현에서 수령이 3200년 된 재배형 야생대차수가 발견되어 최소 3200년 전에 차나무가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형태구조학상으로 볼 때 차나무는 백악기와 제 3기 빙하시대의 동백나무과 동백나무속 고등피자식물로, 그 시원(始原)은 거의 10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빙하기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멸종되었지만 중국의 서남부 지역은 다른 곳보다 기온이 높아 차의 생존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차 이름의 두 가지 갈래
중국이 차의 기원임을 부인할 수 없는 또 다른 증거는 바로 차 이름 자체에 있다. 세계에서 차를 의미하는 말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cha’와 ‘tea’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은 서유럽 국가들은 ‘tea’, 한국, 일본, 러시아, 이란, 티베트와 같은 국가에서는 ‘cha’로 부르고 있다. 각 나라마다 조금씩은 다른 발음으로 쓰여지고 있으나, 결국은 ‘cha’와 ‘tea’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cha’와 ‘tea’는 바로 중국의 차에 대한 방언이다.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은 차의 집산지로 중국 전역에서 만들어진 차는 이곳으로 모여 시장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진 무역, 즉 육로로 차를 수입한 나라들은 광동성의 발음인 ‘cha’에, 해로를 통해 차를 수입한 서유럽 국가들은 복건성의 방언인 발음인 ‘ti’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차를 불렀다.
차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중국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신농(神農)이 수백가지 풀을 먹다 독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어느 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그 때 바람을 타고 푸른 잎사귀 하나가 신농의 입으로 떨어졌는데, 이 잎을 먹자 정신이 맑아지고 모든 독이 해독되었다.”
B.C 2500년경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신농(神農)은 농업의 신, 지혜의 화신으로써 전설 속 인물이다. 신농이 실존인물이라면 차를 이용한 최초의 인물로써 차의 이용은 최소 5000년 전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차의 이용에 관한 문헌으로 동진(東晋)시대의 상거(常璩)가 쓴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주 무왕때 중국 남방 파촉지역에 향기나는 차가 있다.”와 “주나라 무왕에게 파촉지역의 차를 공납하였다.” 등 여러 기록이 있다. 파촉지역은 현재의 운남, 귀주, 사천 등지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야생대차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이다. 차를 공납하기 위해서는 차를 가공하여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3000년 전에 이미 차의 재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차의 소비는 주나라 무왕 이후로 점차적으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장강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확산되었으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780년 쓰인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적 [다경(茶經)]은 중국이 차를 주변국가에 알리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다경]은 당나라의 문인 육우(陸羽)가 기존의 서적을 정리하고, 직접 차산지를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수년에 걸쳐 정리한 책이다. 책의 내용이 매우 체계적이고 종합적이어서, 당대(當代)의 차문화뿐만 아니라 당나라 이전의 차문화도 알 수 있게 해준다. 다음은 다경에 언급된 야생대차수에 대한 묘사이다. “차는 남방의 아름다운 나무라. 한자, 두자 내지 수십자에 이른다. 파산과 협천에 두 명이 함께 안아야 하는 것도 있고, 베어서 잎을 딴다.” 파산과 협천은 중국 서남부의 운남, 귀주, 사천성 지역으로 차나무의 시원지(始源地)이며, 두 사람이 안아야 할 정도이니 차나무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다경의 또 다른 가치는 차문화의 전파이다. 다경은 중국의 일반인들에게 차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여 차문화가 성행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주변국가에도 중국의 차문화가 활발히 전파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본기 흥덕왕 3년(828년)에 중국차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고 쓰여 있다. 대렴이 중국의 차를 가져 온 시기는 육우가 다경을 편찬하고 차가 유행하여 차문화가 꽃을 피우려 하던 때이다. 우리나라의 차를 마시는 습관과 문화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성행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거리 곳곳 어디서나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차의 소비가 왕성하게 되었다.
향기로운 차의 세계
차의 세계는 무한하다. 중국은 이제 그 시작을 열었을 뿐, 문화는 누리는 사람의 것. 행복을 여는 차의 세계, 그 광활함은 마땅히 설레며 기다릴 가치가 있다. 차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우리는 차의 성분과 효능, 차의 종류, 좋은 차를 고르는 법과 보관법, 차를 맛있게 우리는 방법, 동양과 서양의 차문화의 차이 등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전세계인이 애용하는 기호음료인 차. 앞으로 여러분을 그 향기로운 세계로 안내할 茶박사, 닥터張입니다.
1) 이견: 차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원산지가 중국이라는 일원설(一元論), 중국과 인도의 두 곳이라는 이원론(二元論), 태국 북부, 미얀마 동부, 베트남, 중국 운남, 인도 아쌈 등 차나무가 생장하는 모든 지역이라는 ‘다원론(多元論)’, 미얀마의 이라와디강 발원지 중심지대나 중국의 운남, 서장지역이라는 ‘절충론(折衷論)’ 등의 주장이 있지만, 일원론을 제외한 이론들은 근거가 미약하다.
2) 야생대차수: 야생대차수(wild arboreous tea plant)는 아직 인간의 순화개량(馴化改良)을 거치지 않은 나무가 자연에서 스스로 성장, 발육, 번식하고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수령이 오래된 대차수(大茶樹)이다. 일반적으로 인적이 드문 산림이나, 산간 오지에서 생장한다. 완전한 야생형, 재배형, 야생형과 재배형의 과도기형인 과도기형 야생대차수가 있다.
세계사를 바꾼 차
차는 차나무의 새 잎과 연한 줄기를 채취해서 증기로 찌거나 햇볕에 말리는 등의 과정을 거친 후,더운 물에 우리거나 타서 마시는 음료이다. 차나무는 중국종(種)과 아셈종(種)이 있는데, 차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연평균 기온 13도 이상, 강우량은 연평균 1,400mm이상이어야 하므로 한국의 경우는 남부지방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차나무의 원산지인 중국 남부의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등지에서 시작된 차 마시는 풍습은 매우 오래되었다. 처음에 차는 약으로 마셨으나, 한(BC 202〜AD 220)나라 시기에 궁중과 귀족 사회에 음료로서 널리 퍼졌다. 차 문화는 차의 생육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진남북조(221〜589) 시대의 음료 풍습은 남차북락(南茶北酪), 즉 차 마시기는 화남지방에서 유행하였을 뿐 유목민이 장악한 화북지역에서는 유제품을 먹었다.
양현지(楊衒之)가 547년경에 편찬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남제 출신의 왕숙(王肅)은 북위에 투항했는데, 처음에는 양고기 및 유제품(乳酪)을 먹지 않고 늘 붕어국을 먹고 차를 마셨다. 수년 후 왕숙이 효문제(471〜499)가 여는 조정 연회에 참가해 양고기를 많이 먹고 유락죽을 마시니 효문제가 이상히 여겨 4가지 음식 가운데 어떤 것이 으뜸이냐고 물었다. 왕숙은 차(茗)가 가장 쓸모가 없어 단지 유제품의 노비로 어울린다고 대답했고 효문제는 크게 웃었다. 이후 북위에서는 차를 두고 낙노(酪奴)라 불렀다.”
북위에서는 이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희롱하였고, 조정 연회에서 차를 준비해도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당나라 시대에 기후가 온난해져서 차 생산이 늘고, 숙종(756〜762)이 금주령을 반포하자 술 대용으로 차를 마시면서 차 마시는 풍습이 중국 전역에 유행하게 된다. 승려, 도사, 문인이 중심이 되어 차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육우(陸羽, 733〜804)는 [다경(茶經)]이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를 만들었다. 이후 차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격식을 갖춘 하나의 예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차를 마시려면 도자기가 필요하다. 송나라가 도자기를 대규모로 생산하여 외국에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차가 주변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차를 수입해간 고객이었고, 동시에 도자기도 대량으로 수입했다. 이후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적자를 만회하고자 도자기를 직접 생산했고, 중국의 차나무를 인도, 실론으로 가져와 심어 그 지역의 생태 환경을 크게 바꾸어 버렸다.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전쟁(1840〜1842)을 일으킨 것이나, 1773년 미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은 모두 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처럼 차는 세계사를 바꾼 엄청난 물건이었다.
차의 도입 시기
우리 역사상 언제부터 차를 마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차나무의 한반도 자생설, 가야 허황후의 차 도입설, 고구려 초기 구다국(句茶國)의 차 생산 주장 등이 있으나, 신빙성이 부족하다. 차 도입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신라 사신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632〜647)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차나무의 재배는 828년이 시작일 수는 있지만, 이 보다 앞서 신라에서 차를 마신 기록들이 보인다. 신문왕(681〜692)에게 설총(薛聰)이 지어 바친 [화왕계(花王戒)]라는 이야기에는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당시에 차가 정신을 맑게 하는 용도로서 왕의 일상적인 음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742〜765)때 활약한 향가의 대표적 작가인 충담사(忠談師)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에 모신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다가, 경덕왕을 만나 차와 향가 한수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늦어도 7세기에는 차를 마셨을 것이 분명하다.
신라보다 앞선 백제의 차 문화
그런데 최근 신라보다 앞서 백제에서 차를 마셨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차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은 백제가 자리했던 전라도 지역이다. 백제는 차나무를 재배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었고, 차문화가 발달한 중국 화남지역의 나라들과 교역이 많았다. 게다가 백제지역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달리 중국제 자기(瓷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가운데 주전자(注子)와 주발(碗)은 차를 마시는 용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차는 찻잎을 분말로 간 다음 쌀가루로 쑨 풀과 섞어 덩어리차(차병:茶餠)를 만들어 말린 후, 차를 마실 때에 이것을 찧고 빻고 뜨거운 물을 부어 국으로 만든 후 파, 생강, 소금 등을 타서 먹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차를 빻는 돌절구인데, 풍납토성과 몽천토성 등에서 발견된 바 있다. 또한 차를 담아두는 주전자, 특히 닭머리 모양이 장식된 도자기 주전자(鷄首壺注子)는 백제의 수도뿐 아니라 지방 수장의 무덤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들은 백제 시대에 차 마시기가 유행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백제에서는 이미 3〜4세기에 차를 마시는 문화가 도입되어, 왕실과 중앙 귀족은 물론 지방의 수장들도 차를 즐겼다.
고구려에서도 차를 마셨을까?
백제 사람들이 차를 마셨다면, 고구려에서는 어떠했을까? 고구려 지역은 백제에 비해 기후가 추워 차를 재배할 수 없는 곳이다. 또한 고구려는 백제와 달리 차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가 많았다. 따라서 기후와 지리, 대외관계의 여건상 차 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다. [책부원귀(冊府元龜)]의 기록에 따르면 645년 백암성(白巖城)이 당나라군에게 함락되자, 백암성의 어른들과 스님(僧尼)들이 승리한 당태종에게 이락(夷酪- 유제품의 일종)을 바쳤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에서는 차 공양을 수행의 방법으로 여겨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셨다. 하지만 차 문화는 스님들이 퍼뜨린 것이 아니라, 기존의 차 문화를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4〜6세기 북중국에서도 차 문화가 덜 발달된 만큼, 북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에서 스님들에게 차를 공양하는 풍습이 당장 생겼다고 볼 수는 없다.
400년 무렵에 만들어진 무용총(舞踊塚)의 널방 북벽에는 무덤 주인공이 스님 두 분을 접대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 그림을 차와 과자를 대접하는 장면으로 보려는 이들도 있지만, 차에 어울리는 과자는 7세기 당나라 시대에 와서야 등장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교류하면서 차를 알기는 했겠지만, 백제와 달리 차 문화가 발전하지는 못했다. 고구려 지역에서 중국 자기의 출토가 적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차 문화의 전성기, 고려
발해의 경우 당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던 만큼 차를 수입해서 왕실과 귀족이 마셨을 가능성은 있지만, 차를 재배한 기록은 없다. 7세기 이후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두만강 북쪽의 노성(盧城)지역에서 발해인들이 벼를 재배하기도 했지만, 차를 재배하지는 못했다. 발해는 위도(緯度)가 높아 차나무를 재배하고 이를 수확해 차 문화를 즐기기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었다.
차 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고려시대였다. 고려시대 연등회행사 때에는 왕이 태자 이하 신하들에게 차를 하사하였고, 신하들은 차를 내린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차를 마시고 인사를 했다. 성종(成宗) 9년(990년)에는 임금이 5품 이상 신하에게 차 10상자, 9품 이상 신하에게는 5상자 등을 하사한 바 있다. 또 왕이 총애하는 신하들이 죽었을 때 차를 하사하기도 했는데, 995년 최량(崔亮)이 죽자, 왕이 쌀 300섬, 보리 200석과 함께 뇌원차(腦原茶) 1,000상자를 부의(賻儀)하기도 했다. 상례에 이렇게 엄청난 차를 준 것은, 상례를 치르면서 손님을 대할 때 많은 차가 필요할 만큼 당시 차 문화가 성했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하고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사람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는데, 송나라의 납차(臘茶), 용봉사단차(龍鳳賜團茶)를 귀하게 여겨 송나라 상인에게 많이 구입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사신에게 차를 대접할 때에 사신이 다 마시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깔본다고 여겨 불쾌히 여기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차를 다 마셨다고 한다.
차는 외교상에서도 중요 예물로 사용되어, 고려는 거란, 금, 원나라에 차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예빈시(禮賓寺)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차를 내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다방내시(茶房內侍)’ 제도를 마련해 차에 대한 제반 일을 맡게도 했다. 1159년 의종(毅宗)이 현화사를 방문했을 때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정자(茶亭)을 설치해 임금께 차를 바치기도 했다. 사찰에서는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다촌(茶村)을 두기도 하고, 차에 필요한 그릇과 기와를 직접 구워 사용하기도 했다.
사찰만이 아니라 정부에서도 차 생산을 집중 관리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시대에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장인집단들의 행정 구역인 ‘다소(茶所)’가 21개소나 기록되어 있다. 장인들에 의해 차가 전문적으로 생산되었던 만큼, 차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또한 차 마실 때 필요한 각종 다구(茶具)와 다기(茶器)의 제작이 왕성해져 자기(瓷器)문화도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차를 파는 다점이 있었다
요즘 거리에는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차를 파는 다점(茶店)이 많았다. 왕실과 사원을 중심으로 유행한 차 문화는 민간으로도 널리 퍼져 일반 백성들도 돈이나 물건으로 차를 사거나 마실 수 있었다. 차의 생산이 많아지면서, 차가 대중화되었던 것이다.
996년 성종이 철전(鐵錢- 금속화폐)을 만들어 보급하자, 1002년에 한언공(韓彦恭, 940〜1004)은 상소를 올려 화폐 유통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목종(穆宗, 997〜1009)은 “다점, 주점(酒店), 식미점(食味店- 고려시대의 상점) 등의 점포에서 전과 같이 화폐로 교역하는 외에는 일반 백성의 교역에는 베와 쌀을 사용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고려시대에 다점은 주점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이 작은 돈을 갖고 가서 흔하게 이용하는 곳이었다. 고려의 길에는 관리 등이 쉬어갈 수 있는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차가 유명한 원을 다원이라고 했다. 다원에서는 기녀가 차를 달여 내오기도 했으니, 국영 다방이었던 셈이다.
차례는 차를 올리는 의식
매년 설날이나 추석에는 조상님께 아침 일찍 제사를 지내는 차례를 지낸다. 본래 차례(茶禮)는 뜻 그대로 차를 신이나 조상님께 올리는 의식이었다. 신라 충담사의 경우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공양을 했다. 차는 궁중음식으로도 각광을 받아, 국가 의식에서는 차를 올려는 진차의식(進茶儀式)이 따랐다. 진차의식은 술과 과일을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이다. 고려시대 연등회, 팔관회 등에서 진차의식이 행해졌고, 사신이 왔을 때, 왕자의 책봉이나 공주를 시집보낼 때 등의 의식에도 차례가 행해졌다.
차 소비의 감소
차례에 차를 대신해 술을 올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차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 가격이 비싸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불교를 배척한 탓에 사찰의 재정형편이 나빠지면서, 사원 주변에 있던 많은 차밭이 관리가 안 되어 차의 생산이 줄어들었다. 또 1480~1750년까지 기온이 크게 떨어진 소빙기를 맞이해 차 생산이 잘 되지 않기도 했다. 전북의 고부(정읍시), 고창, 무장(고창군) 등은 조선시대 차 산지 가운데 가장 북쪽인데, 17~19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차 생산을 볼 수 없었다. 차나무는 기온이 -13 ℃ 이하로 떨어지면 추위 피해(寒害)를 입게 된다. 따라서 기후가 추워지면 작황이 크게 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청나라에 공물로 보내는 차의 수량이 늘면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에 대한 세금은 늘어났다. 그러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내야하는 차 생산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양반들도 차에 대한 세금 때문에 차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차 한 홉과 쌀 한 말, 차 한 말과 무명 30필을 바꿀 정도로 차의 가격이 비싸지면서 결국 차의 소비량이 줄고 말았다.
차 문화의 중흥
차 문화가 중흥하기 시작한것은 기온이 다시 높아지고,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부터다.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중 차를 즐기기 시작하여 차와 관련한 많은 시를 남겼다. 초의선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통달하여 당시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동다송(東茶頌)’등을 지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주장했다. 또 1785년경에는 이덕리(李德履, 1728~?)가 차에 관한 한국 최초의 전문 저작인 [동다기(東茶記)]를 짓기도 했다. [동다기]는 차의 효능을 설명하고, 차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여 차를 중국에 수출하며, 그렇게 얻은 수익을 국방 강화에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한국의 차 문화는 ‘다례(茶禮)’라 한다. 일본의 ‘다도(茶道)’, 중국은 ‘다예(茶藝)’는 크게 보면 모두 예절을 지키고, 차를 마시는 일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행위를 일컫는다. 다례는 차를 매개로 하여 스스로의 몸을 다스리고, 상대를 배려하며 존중하는 마음과 행동을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를 다례의 기본으로 삼는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오랜 세월 우리 겨레에게 사랑을 받았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19세기 들어 다시 되살아났지만, 일반화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차의 보급은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해, 1990년대 이후 건강식품으로 저변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차의 종류도 많아지고, 품질도 좋아졌으며, 생산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011년 발표된 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이 평균 마시는 차와 커피 소비량은 60g 대 1,800g으로 그 차이가 크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차 문화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야초차는 녹차와 동일한 것이다
산나물은 제철에 나는 것을 먹어야 좋으며 때가 지나면 잎이 세어지고 맛이 떨어져 식용하기에 거북하다. 그러나 몸에 좋은 산야초(산나물)를 1년 내내 저장해두고 수시로 섭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는데 바로 야초차를 덖어 만드는 것이다.
야초차를 음료대용으로 1년 내내 언제든지 식물의 좋은 영양소를 우리 몸에 공급한다는 것은 경제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건강증진 방법이다. 아울러 몸에 좋지 않은 가공음료를 피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야초차 역시 녹차의 범위에 속하며 야초차와 녹차를 별개의 것으로 보면 안 된다. 녹차가 곧 차나무 잎으로 덖은 것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다. 녹차라는 용어의 근본 의미는 덖은 차 잎을 더운물로 우려냈을 때에 식물 본연의 푸른(녹색) 빛깔인 엽록소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렇게 덖은 잎이 더운물에 풀어지면서 녹색을 띠고 있어야만 잎 자체에 함유되어 있는 풍부한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은 채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잎으로 덖음차를 만들었더라도 우려냈을 때 녹색을 띠는 것은 모두 녹차로 불려지게 된다. 차나무 잎으로 녹차를 덖어내었으면 그것을 다시 월출차니 설록차니 하는 고유한 상표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야생식물의 잎으로 녹차를 덖었으면 그 식물 이름을 따서 민들레차, 질경이차, 꿀풀차······ 등등으로 갈라놓는다.
다시 되풀이하지만 어떤 식물의 잎으로 차를 만들었든지 우려내었을 때 녹색 잎이 살아나면서 본래의 영양소가 재생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넓은 의미의 녹차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차는 녹색의 잎이 살아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발효하여 만든 차이다. 녹차는 덖어서 만드는 것으로 그 방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녹차로 만드는 재료는 거의 차나무 잎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야생식물의 영양가가 높고 약효도 있어 야초차의 애용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차나무 잎을 재료로 삼는 제다(製茶)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최초로 「다경(茶經)」을 저술함으로써 그 이전부터 즐겨 마셔왔던 차의 세계를 정립시켜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에도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겸이 828년에 귀국하면서 차의 씨앗을 갖고 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것이 시초이다. 일본에 차가 전해지기는 그로부터 100년 이후가 된다.
차를 마시는데 차나무 잎의 재료가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은 여타의 식물에 비하여 건강상 효능이 있고 맛이 썩 좋은 것으로 정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나무 잎에는 카페인이 평균 1~3퍼센트 정도 함유되어 있으며 신경흥분, 혈액순환촉진, 이뇨작용, 피로회복, 각성작용이 있어서 더욱 기호품으로 삼게 되었다. 차는 본래 약의 일종으로 애용해왔으며 중국에서는 물맛이 나빠 다른 식물의 잎이나 열매를 첨가하여 마시기 시작한 것이 차의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하튼 약용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 또는 감칠맛 있는 물을 마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식물의 잎과 뿌리와 열매, 씨앗을 활용해왔다. 그러면서 차나무의 잎이 가장 좋다는 것으로 선조들의 오랜 경험에 의해 정착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녹차하면 곧 차나무 잎으로 만든 것을 항상 내세우게 되고 기타의 식물 재료로 만들어진 차는 대용차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초차 역시 대용차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산야초로 만드는 차는 차나무 잎으로 만드는 제다법과 동일한 순서에 의해 덖어진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이 야초차는 건강차로 그 효능이 차나무 잎으로 만든 녹차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건강증진과 성인병 예방을 위해 훨씬 효과적이다.
차나무 잎의 녹차는 야생의 것으로 덖은 것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시판되고 있는 녹차는 재배된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재배식물과 야생식물은 영양성분을 따질 때 현격한 차이가 있다.
재배된 것으로 만든 녹차를 가지고 두뇌활동촉진, 피로회복, 알칼리성 체질로 개선, 항암작용, 당뇨병·고혈압 예방, 니코틴 및 주독 해소, 피부미용효과, 머리를 맑게 하고 기억력 향상, 치아보호 구취제거, 노화방지, 중금속해독······ 등등에 효과가 있다는 과장선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한 효과를 얻으려면 식용하는 야생식물로 녹차를 덖어 마시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다만, 야초차는 입맛에 생소하여 거부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차나무 잎의 녹차에 맛을 붙였다가 야초차를 마시면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야초차에 차나무 잎의 녹차를 혼합하든지 또는 생강을 첨가하여 마시면 구미를 돋운다. 그러나 야초차를 마시는 습관이 들면 그 독특한 향기와 맛이 썩 좋은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산야초 가꾸기의 취미를 즐기면서 산간에 야생하는 식용식물의 잎으로 손수 녹차를 덖어내어 온 식구들이 좋은 음료로 애용하는 과정은 참으로 보람된 일이다. 그러면서 다도의 경지를 깨닫게 된다. 손수 녹차를 덖어보지 않으면 다도의 경지를 터득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몸에 좋은 산야초)
첫댓글 차나무 잎 꽃 열매 다 약이되는 나무이지요
잘 보고갑니다
차나무 향기 잘 맡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