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은 짝수 2회 깃꼴겹잎이고 작은잎이 매우 작으며, 잎자루가 편평하여 잎처럼 된 것도 있다. 턱잎은 가시 모양이다.
꽃은 황색 또는 흰색이고 두상꽃차례 또는 원기둥 모양의 수상꽃차례를 이루며 달리고 양성화 또는 잡성화이다. 꽃잎은 5개이고, 수술은 10개이며, 암술은 1개이다.
밀원식물이며, 열매는 편평하고 잘록잘록하거나 원통 모양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원산지인 꽃아카시아(A. decurrens var. dealbata)는 분처럼 흰 빛깔의 잎에 황색 꽃이 피고, 와틀나무(A. decurrens var. mollis)에서는 타닌을 채취하며, 삼각아카시아(A. cu1triformis)와 타이완 남쪽에서 자라는 상사수(相思樹:A. confusa)는 홑잎이고 가로수로 심는다.
인도와 미얀마에서 자라는 아선약수(阿仙藥樹:A. catechu)의 심재(心材)에서는 카테큐(catechu)를 추출하여 지사제·염료·수렴제 및 타닌재로 이용하고, 이것을 약으로 쓸 때는 아선약이라고 한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아라비아고무나무(A. senegal)의 나무 껍질에서 나온 유액이 마른 것을 아라비아고무라고 하는데, 약으로 쓰거나 접착제로 사용한다. 아라비아아카시나무(A. arabica)에서 흘러나온 유액은 아라비아고무 대용품으로 사용한다.
흔히 말하는 아카시아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아까시나무(Robinia pseudo-acacia)를 가리키고 아카시아속의 식물이 아니다.
□ 아카시아는 아까시나무의 잘못 쓰인 말이므로 수정해야......
서울 근교의 어디를 가나 아까시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서 흔히 눈에 띄기 때문에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까시나무가 자라는 곳은 길가, 밭둑 같이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아까시나무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과수원 길이라는 동요 속에서는 아까시를 아카시아로 잘못 부르고 있다. 아까시나무와 아카시아는 같은 콩과식물이지만 그 속(屬)은 완전히 다르다. 아까시나무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낙엽교목이다.
원산지에서는 키가 20~30m나 자라고 가슴 높이 지름이 2m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까시나무는 참으로 고마운 나무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값진 나무임에 틀림없다.
우선 아까시나무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학명 로비니아 쉐도우 아카시아(Robinia pseudo-acacia)는 16세기 스페인의 로빈 대령이 이 식물을 유럽에 전했으므로 식물학자 린네가 그의 이름을 따 속명을 로비니아(Robinia)라 했다. 뒤의 종소명 쉐도우 아카시아(pseudo-acacia)는 아카시아를 닮았다는 뜻이다. 즉 로빈 대령이 갖고 온 아카시아 비슷한 나무라는 뜻이다.
아까시란 가시가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로비니아(Rhobinia)를 일컫는 우리말이고, 아카시아(Acacia)는 열대성 관목을 지칭하는 라틴어 속명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적은 것은 분명 잘못된 표기이다.
아카시아는 열대성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 밖에서는 살 수 없다. 온실에서나 가꿀 수 있을 뿐이다. 또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아까시나무를 아카시라고 적고 있는데 이것도 잘못되었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도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적고 대중가요에서도 대부분 아카시아로 노래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조차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가르치는 것은 정말 문제이다.
로비니아를 아카시아로 하면 진짜 아카시아는 뭐라고 적을 것인가?
□ 가장 먼저 식재한 곳은 경인 철도변의 절개지
아까시나무를 우리 나라에 도입하여 처음 식재한 곳은 경인 철도변과 용산의 육군본부 자리이다.
1910년 결술국치가 있은 얼마 후 독일 총 영사 크루거가 아까시나무 묘목을 들고 초대 총독인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찾아갔다. 당시 노량진과 제물포간의 경인 철도 변에 심을 수종에 대해 테라우치가 자문을 구했기 때문이다. 크루거는 중국 산동성의 독일령 청도(靑島)에 자국에서 옮겨와 심은 아까시나무가 잘 자란다고 했다.
테라우치는 중국으로부터 수만 그루의 아까시나무 묘목을 들여왔다. 경인 철도변에 식재한 것을 본 당시의 프랑스인 불어교사 에밀 마텔은 번식력을 걱정하여 산지에는 심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자는 전국의 헐벗은 산에 아까시나무를 심어 화목으로 쓰도록 한 것이 대량식재하게 된 동기이다.
아까시나무로 황무지를 녹화한 예는 많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테네시강 유역의 황무지에 아까시나무를 심어 푸른 숲으로 가꾸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동부의 산악지대, 독일 서부지역에도 아까시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만들었다. 숲이 우거진 뒤로 물이 풍부해 졌고 황무지에 목장을 만들어 수많은 젖소를 치고 있다. 지금은 젓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바뀐 셈이다.
아까시나무는 꽃이 아름다워 관상수로 심어도 좋다. 중국의 대련시(大蓮市)에 가면 아름드리 가로수가 모두 아까시나무라는 데 놀라게 된다. 공원에도 거대한 아까시나무가 자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부 지방에서 가로수로 아까시나무를 심은 적이 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서울시청에서 명동으로 넘어가는 소공동 중간 쯤에는 건물 앞 조경수로 늙은 아까시나무가 심어져 있다. 해마다 꽃이 피어 그윽한 향기로 도시인의 찌든 마음을 씻어 준다.
푸대접 받은 아카시나무
우리 나라에서는 아까시나무가 매우 천대를 받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독나무인가 꿀나무’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산을 망가뜨리기 위해 일부러 아까시나무를 심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대대로 조상을 소중히 섬겨온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무덤가에서 왕성하게 자라나 조상의 묘를 침범하니 아까시나무에게 주는 눈길이 곱지 않다.
그러나 아까시나무는 황폐했던 우리 나라의 산림을 비옥하고 푸르게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고마운 효자나무이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주위에는 흙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이 있었다. 이렇게 황폐한 산에는 요즘 우리가 주로 심는 경제수종을 심더라도 잘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그 당시 심은 나무들이 아까시나무를 비롯한 오리나무, 싸리와 같은 콩과 식물이었다. 콩과 식물은 건조하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살 뿐 아니라 땅 속에 질소를 고정하여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 덕택에 이제 땅의 힘이 좋아진 곳에서는 이를 베어내고 잣나무와 같은 경제수종을 심고 있다.
아까시나무는 재질이 좋아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에서는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특히 연간 천억 원 가량이나 되는 우리 나라 꿀 시장에서도 아까시나무의 꿀이 주종을 이룰 정도로 그 가치는 매우 높다. 여러 모로 고마운 아까시나무, 이제부터라도 미워하지 말자.
아까시나무의 개발과 이용
1.서 언
아까시나무는 북미원산으로 교목과 관목 10여종이 포함된 분류학적으로는 작은 屬(속)으로 분류된다. 이들중 2개 수종만이 멕시코까지 분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미국내에만 자생하고 있다.
이중에 교목이 4종으로 삼림경영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아까시나무 뿐이다. 아까시나무는 낙엽교목으로 원산지인 미국에서는 25 m이상 자란다. 잎은 호생하며 기수 1회 우상복엽으로 1∼23개의 장타원형 소엽이 달리며 수피는 회갈색으로 골이 깊고 세로로 갈라지며 소지에는 까시가 있다. 봄에 엽액에서 길이 10∼12cm의 총상화서의 향기가 좋은 꽃이 피고, 다섯 개의 꽃잎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흰색과 핑크색이 있다. 각각의 꼬투리 속에는 수개의 종자를 가지고 있으며 가을에 성숙하고 겨울동안에도 계속 나무에 붙어있다
중요 수종 및 품종은 다음과 같다.
Robinia pseudoacacia-->아까시나무 (black locust)
R, p. var. rectissimaRaber--> 돛대 아까시나무 (shipmast locust)
R. p. f. unifolia Talou--->단엽아까시나무 (one-leafed locust)
R. boyntonii Asche----> 관목 (수고 3m정도)
R. elliottii Asche---> 관목 (수고3m정도)
R. hispidaL. ----> 관목 (수고 3m정도)
R. fertilisAsche--->관목 (수고 3m정도)
R. luxurians (Dieck) Schnied--->수고 10m정도
R. holdtii Beiss---->R. lusuriansxR. pseudoacacia와 잡종
R. hartwigii Koehne---> 관목
R. viscosa Vent---->Sticky locust, 수고 12m정도
R. ambigud Poir--->R. viscosa x R.pseudoacacia와 잡종, 핑크아까시나무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까시나무의 자연분포는 미국의 북위 35o∼ 43o 사이에 분포하는데 크게 두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동쪽지역은 중부 펜실베니아주에서 부터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북쪽 알라바마와 조오지아까지의 지역으로 서부 버지니아, 매릴랜드, 켄터키와 테네시 및 남북의 캐롤라이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남쪽은 오하이오와 동남 인디아나 지역 및 중부 조오지아에서도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서쪽지역은 남쪽 미주리의 오자크고원을 지나 남서 알칸사스와 오클라호마 동쪽 일부가 포함되며 남쪽 일리노이와 남서 인디아나에서도 가끔씩 나타난다.
분포지역의 연평균 강우량은 1,000 ∼ 1,500mm로 생장기간동안의 강우량 500 ∼ 750 mm, 연평균기온 20 ∼ 27oC, 6월 평균 최고기온 30 ∼ 38oC, 최저기온 -10 ∼ -25oC로 1월 평균기온은 2 ∼ 8oC이고 무상일수는 140일에서 220일에 이르는 지역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아까시나무는 삼림 한계지역의 계곡이나 경사면 해발 1,100m 이상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서쪽 버지니아 에서는 동북부에서 보다 남서사면에서 나타난다. 다양한 토양에 적응력이 높지만 너무 건조하거나 점토질에서는 생육이 불량하고 사질양토의 느슨한 토양에서는 생육이 양호하다.
아까시나무는 1492년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이 이 나무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1492년 부터 1607년 까지 처음 유럽에서 이민해온 사람들이 버지니아의 재임스마을을 건설하는 그 기간동안의 아까시나무에 대한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아까시나무가 유럽에 도입된 것은 1601년 프랑스 Henry IV때 약초 학자인 Jean Robin이거나 그 아들 Vespasien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Peattie, 1950). Robinia는 Robin의 이름을 딴 것이다. Peattie(1950)에 따르면 locust라는 말은 Jamestown에 살았던 William Strachey가 붙였는데 그는 이 나무를 지중해 지방에 있는 주엽나무같이 생긴 Ole-World Locust Tree(Ceratonia seliqua)의 지방종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으나 이 나무의 이름인 black locust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속명이 Robinia가 되고 종명은 acacia와 비슷하다고 하여 pseudo- acacia라고 명명하였다. 신대륙 발견이후 1600년대에 유럽에 도입이 되어 현재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대면적으로 조림되고 있으며 다방면에 걸쳐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아까시나무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891년(明治 23년) 우선회사 인천지점장 사까끼가 중국 상해에서 묘목을 구입하여 인천 공원에 식재한 것이 그 효시이며, 그 후 1898년 일본 出征鐵道監部가 인천 월미도에 조림했는데 1925년 까지 5단보에 약 300본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후 총독부에서 북미 및 중국의 청도 등에서 종자를 수입하여 파종하여 전국에 보급하게 되었다. 철도청에서 보급하게 된 동기는 아까시나무는 재질이 강인하며 내부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철도침목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당시 철도침목은 밤나무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식재를 가장 많이 한 시기는 1910 ∼ 1911년부터 1916년경까지로 총면적은 수천 정보에 달하게 되었으나 거의가 실패하고 표토가 깊은 산록 완경사지 사질양토로 배수가 잘되는 곳에서만 성공하였다(임업시험장시보, 1925).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아까시나무 도입에 관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산을 망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까시나무를 심었다는 설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것은 일본에 아까시나무가 도입된 경위와 이에 대한 연구사실을 알아보므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 아까시나무가 도입된 것은 187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일본인 쓰다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든 아까시나무를 보고 종자를 가져온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1878년 4월호 농업잡지(학원사)에 "니세아카시아"라은 제명으로 또 한문명으로는 "明石屋樹" (Akashiya-no-ki로 발음)로 기재 되었다(임, 1993). 그후 植木樹幹 교수는 1907년 "니세아까시아"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도입, 형태, 산지, 임업상 성질 및 효용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 나무의 특성을 보면 재질은 내구성이 좋아 농기구재로, 그리고 토양개량 효과가 있어 사방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추천하였다. 또한 헝가리의 아까시나무에 대한 성공사례를 보고하여 아까시나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 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는 용재로는 삼나무 편백이 있고 신탄재로는 참나무가 있으나 황폐지를 녹화시키는데는 아까시나무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고하였다.
일제시대에 아까시나무에 대한 식재가 권장되어 1926-1940년 사이에 9,398만 그루의 아까시나무 묘가 생산되었는데 이것은 황폐된 산지의 녹화와 연료림을 조성하기 위한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다(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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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아 애들보여주면 도움되겠다싶네 하늘이참 이ㅃ네 즐거운하루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