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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10.19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 일대의
남로당 당원과 합세하여 여수, 순천 지역을 점거하고 일으킨 반란.
한 때는 '여순 반란'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서 공식 명칭에서는
여순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또는 '여순병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순천을 빼고 '려수 군인 폭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민족끼리에서도 사용하는 표현이다.
북측에서 려수 '군인' 폭동이라고 명칭을 붙인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수와 순천에서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수, 순천에 주둔하던
군부대의 병력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
<남부군>을 쓴 이태가 신동아에 기고한 실록의 제목도 이것이다.
사건의 직접적 발단은 제주 4.3 사건 일부 진압 임무를 하달받은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동족상잔"이라며 지휘관을 사살하고 장병들을 선동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공산 세력의 침투 및 미군이 그 침투를 통제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창군 과정에서 지켜본 미군의 특징은 '선서'를 무척 중시하는 것과 구타행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선서를 단순한 요식행위로 여기는 경향이지만 그들은 달랐다.
경비대에 입대하는 장병은 미군정 당국 및 곧 수립될 정부에 충성할 것을 빠짐없이 선서했다.
미군은 이 선서를 의심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좌파이든 우익이든 전력을 불문하고 선서라는 의식을 거치면 일단 충성스런 군인으로 간주됐다.
이 때문에 경찰에 쫓기던 좌파 성향의 세력들이 상당수 군에 입대해 도피처로 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중략)
여순반란 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선서 한 번으로 군에 들어와 터를 잡은 좌파 세력이 정부수립 2개월 만에 폭동을 일으켜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었다.백선엽, 2009, 군과 나, 시대정신,400-402
한편, 한국군의 반란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미군철수와 한국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 주한미군은 1948년 초부터
한국군의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시켰다. 그리하여 병력자원에 대한 면밀한
검열히 불가능해, 좌파 세력이 대거 군대에 유입되었던 것이다.
(중략)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적 침투와 공작 · 선동에 기초한 것이지만, 급격한
병력의 확충이 초래한 허점에서 자연스레 비롯한 면도 있다.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미군정청 군사국의 한국인 고문 이응준이
국방경비대원 모집대상자들에 대해 신원조사를 실시하라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내에 파벌이 형성될까봐 우려한 군정당국은 그에 대해
향후 정보기구를 활용하겠다면서 반대했다.
그 결과 국방경비대의 각 연대별로 진행된 모병과정에서 좌파계열 군사단체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대거 입대하게 됐다. 게다가 미군정청은 ‘불편부당, 정치적 중립’이라는
입장을 내세워 국방경비대원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수준에서 단지 그들에게
국내 치안확보에 전력하라고만 당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당초 미군정의 생각과 달리 국방경비대에 발을 들여 놓은 좌파의 세포들은
여러가지 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일찍부터 조선로동당의 국방경비대
침투를 감시해왔던 미 군정청 방첩대는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국방경비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을 계획했다.
미군정청 방첩대는 사전에 각 지역지부에 담당국방경비대와 남로당과의 관계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국방경비대 내의 좌파성향의 세포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서상문, 2005, (알아봅시다!) 6·25전쟁사 . 제1권 , 배경과 원인,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117쪽
14연대 창설
해방정국 당시 군에는 크게 3개의 좌파 조직이 있었다. 박정의가 총책이였다.
하나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 남로당 지방 도당에서
관할하는 병사들의 조직인 ‘병사 소비에트’, 마지막으로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북로당(북한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경상남도 일대에 조직한 ‘인민혁명군’이다.
남로당에서 군 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조직을 만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장교들의 인사행정은 모두 서울에서 하며 인사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남로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할한다.
러나 사병들의 경우 지방에서 모집하고 인사이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방당에서 관할한다.
서로 선을 다르게 하면 보안상 유리하다.
이 때문에 남로당은 장교 조직과 병사 조직을 별도로 조직, 관리했으며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는 같은 부대 소속임에도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 조직인 인민혁명군은 무려 1593명에 달하는 지하세력으로 콤 서클,
병사 소비에트와 달리 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런데 일선 행동대가 상부의 지령도 받지 않은 채 임의로 ‘대구 10.1 사건’에
편승하였다가 일망타진되어 47년 초 붕괴되었다.
북로당의 침투에 반발한 남로당 측에서 인민혁명군 조직을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에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인민혁명군이 붕괴되자 북로당 조직부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내무국 정보처에서는 강진을 대표책임자, 정보처 요원 김일광을 실질적 총책으로 한
제2차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 관계 세포조직을 내선으로 하고 남로당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 사회주의자와 그밖에 청년단체 계통 조직선을 외선으로 한다.
여순사건의 두 주역인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지창수 상사는 ‘병사 소비에트’에
소속되어 있었고, 김지회 중위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출신 공작원으로,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에 입교한 북측 공작원이다.
김지회가 ‘콤 서클’에 침투 할 때는 좌파장교들은 그를 남로당으로 알았고
병사 소비에트는 김지회를 우익 장교로 알았을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였다.
김지회는 국방경비사관학교 시절부터 교육생들을 콤 서클로 포섭하였고
1연대 2대대장 부관을 거쳐서 전남 광주에 창설된 제4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2차 인민혁명군의 실질적인 총책인 김일광에게서
김지회 중위가 이끄는 콤 서클을 인민혁명군과 합작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여기에 부록으로 평양학원 항공중대를 졸업한 공작원 최일주 일병이
김지회의 당번병 명목으로 항상 그를 따라다닌다.
김지회의 연락책 겸 감시역이였는데, 여순사건 초기때는 김지회는 배후에서
지휘하고 최일주가 대신 ‘병사 소비에트’를 지휘했다.
정리하자면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는 남로당 계열이었고 적색 장교들의
조직인 ‘콤 서클’도 자신들을 남로당 중앙당 소속으로 알고 있었으나 북한 공작원인
지휘관 김지회 중위에 의해 ‘인민혁명군’으로 소속이 변경되게 된다.
김지회와 지창수가 소속된 제 4연대는 영암사건이 발생했던 그 부대이지만 사건에는
크게 휘말리지 않았고 각자 ‘콤 서클’과 ‘병사 소비에트’를 순조롭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각자의 상부 조직을 통해 새로 여수에서 창설되는 14연대로 이동하여
혁명군 조직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런데 4연대에서는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14연대 기간병으로 보냈는데
이에 이미 김지회와 지창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연대 지휘부에서는 불온사상 때문에 평소에 골치를 앓아온 터라, 평상시에
불온했던 다수의 병사들을 14연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48년 5월 초, 14연대가 창설되고 김지회는 신설 14연대 작전참모 보좌관,
지창수는 연대 본부 선임하사관격인 연대 인사과 선임하사관, ‘병사 소비에트’ 부책인
정낙현은 연대본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라는 요직을 죄다 차지하였다.
그리고 14연대는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주로 전남 동부 곡성군, 구례군,
순천군, 광양군, 보성군, 여수군, 고흥군 등에서 모집했다.
이 때 지원자가 부족한 탓에,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시켰다.
이 때문에 각 지방에서 좌파운동을 열렬히 하던 청년들이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면
14연대에 입대하기 일쑤였다. 남로당 전남도당 군사부에서도 예하 군당에 비밀
지시를 내려 좌경청소년들을 14연대에 되도록 많이 입대시키도록 독려하였다.
또한 각종 범죄자들도 군에 가면 무사하다는 소문을 듣고 경찰들을 피해 입대할 정도였다.
사실 국방경비대는 건군 초기부터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미군정이 전혀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이때 4연대에서는 군인들에게 VS놀이형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한 설문이었다.
여기에서 박헌영을 택한 군인들만 추려내서 그들로만 14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입대에 있어서도 사상검열 등은 전혀 없었고 충성서약과 신체검사
구두시험만으로 선발하였다며 입대 절차가 너무나 허술했던 것으로 회고하였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765>老兵이 걸어온 길-15-숙군이 뜻하는 것
여순 사건 직전 김지회의 14연대 ‘콤 서클’에는 김지회, 홍순석, 배명종, 정영길,
김남근, 신일수 중위등 주로 경비사관학교 3기들이 소속되었고 4연대 역시 비슷한 규모였다.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에는 약 80명의 하사관과 병이 소속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제주 4.3 사건으로, 여수에 주둔하면서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14연대 병영에서 남로당 계열이 침투한 1개 대대의
장병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시작한다.
14연대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제주도 출동을 예정하고 있어서 10월 초부터
다른 부대로부터 박격포와 기관총 등을 차출하여 공급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식무기인 개런드 소총과 M1 카빈, 자동소총, 기관단총을 비롯
각종 통신장비 등이 다른 부대에 앞서 우선적으로 100% 공급되었다.
그리고 종래 가지고 있던 일제 38식 소총과 99식 소총은 아직 반납하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평상시보다 2배에 달하는 6천여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어서 남아도는
소총으로 반란 후 민간인 좌파폭도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여순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 군과 경찰 사이의 알력이다.
군과 경찰의 앙금은 해방 직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민중을 가까이에서 억압한 것은 일본제국 경찰이었다.
당연히 마주치기도 어려운 높으신 분들보다 일선에서 직접 수탈하는
순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와 증오는 굉장한 것이었다.
죽하면 순사 온다는 말이면 우는 애가 울음을 그친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문제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서며 내부 실정을 아는 경력자인 순사들이
미군정 경찰로 고스란히 채용된 것이다.
즉, 왕년의 일본 순사가 그대로 경찰이 되어 버린 셈이다.
어제의 일본 순사들이 경찰 제복을 입고 거들먹대는 꼴에 복장이 터진 이들은
모조리 국군(과 그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물론 국군에도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이 즐비했지만, 이들은 하급장교나 하사관에
불과했으므로 대민마찰을 일으킬 일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장 경찰 놈들이 부대로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으로 부대원을 선동하며 벌어졌던
바로 이 여순사건의 주역인 남로당 김지회 조차 왕년에 일본군 소위였다.
일본군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군 경력자를 찾기 매우 어려웠다.
군을 재건하는 일은 군 경력자의 조언 내지는 직접적인 활약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일본군 출신자들이 군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 출신자는 그 수가 매우 적어서 본격적인 군사조직을 구성하기는 무리가 많았다.
이후 경찰과 군은 총격전(!)을 주고받을 만큼 험악한 사이로 발전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좌파분자들도 속속 국방경비대/국군에 입대했고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데다 미군정에서도 별 말이 없으니 특별한
신원조회 없이 군에서도 무작정 받아들였다.
이는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자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제1공화국 내내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경찰을 싸고 돌고 군부를 찬밥 다루듯 하자
군사지도자였던 이범석이 정변까지 모의할 정도였다.
그런데 14연대의 기간병은 군경의 무장충돌인 영암사건을 일으킨 제4연대 출신이었다.
48년 9월 24일에는 구례경찰서 직원 1명과 14연대 사병 9명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몰려든 구례경찰서 경찰관들에게 사병들이 구타당한 뒤 구금되었다.
그래서 14연대 헌병들이 구례까지 가서 이 병사들을 인수받아 왔는데,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등은 이 사건에 대해 분개하면서 언제 한번 보복하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소수설에 따르면 반란 직전 몇가지 사건이 동시에 돌아가는데
첫째로 48년 10월 12~3일경, 김지회 중위와 최일주 일병은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 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에게서
제주 4.3 사건에 파견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현상은 남로당원이기 때문에 김지회의 상급선이 아니지만 소련군정과 북로당
대표라는 신분을 겸하고 있어 김지회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은 있었다.
다만 이현상이 직접 김지회에게 지시했는지, 북로당, 즉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가 불분명해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둘째로 전라도 내의 4연대와 14연대를 관할하는 광주 제5여단 정보참모
김창선 소령은 군내 좌파 계보를 파악하여 우선 4연대 50여명을 구속하고
이어 48년 10월 16일 14연대 사병 40여명을 연대 내 영창에 색출하고
주모자급 3명은 광주의 여단 본부로 압송하였다.
이어 좌파성향 때문에 연대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된 김지회 중위와 9중대장
홍순석 중위도 즉각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막 부임한 박승훈 신임 연대장이 반대하자,
김창선 소령은 일단 여단으로 복귀후 다음날인 17일 김지회와 홍순석에게
광주 여단 본부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광주에 도착하면 구금할 목적이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에게는 똥줄 타는 상황이었다.
셋째로 우연히도 같은 날인 17일 고향에 휴가 갔던 병사들이 구례경찰서 형사들과
충돌했는데 빨갱이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끌려가 뭇매를 맞고 풀려나 귀대하였다.
그러자 연대에서 구례경찰서를 습격하자며 아우성이 일어났다.
연대장 박승훈은 여단본부로 부임인사를 하러 가서 공석이였고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이 대신 여단으로 보고하면서, 장병들을 진정시키고 사기앙양을 위해
일부 병력을 구례에 보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김지회와 홍순석의 여단본부 출장 명령은 흐지부지되었다.
넷째로 18일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대대는 제1대대였고, 김지회의 연대대전차포
중대도 제1대대로 배속되었다. 출동 날짜는 19일이었다.
즉, 군내 좌파세력에게는 상급선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키라고 하고 군내
상부기관에서는 그들의 혐의를 파악하여 체포 직전까지 이르렀고, 부하들은
경찰들과 충돌했지, 그와중에 제주도로 출동 명령이 떨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 연대에 대형 트럭이 4대 밖에 없어 이것으로 1개 대대의
장비를 여수항까지 운반하려면 한세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밤이 되도록 병력 이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밤 10시경 1대대는 완전 무장한 채 내무반에서 대기중이었고 2·3대대는 취침 중이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장비 선적을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었다.
이때 연대 본부 옆에 위치한 연대 근무중대에서 갑자기 총성 1발이 울리고
거의 동시에 연대 정문의 위병소에서 비상나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비상소집으로 인지한 각 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 본부 앞으로
일반 집합한 이후 연대 종합연병장으로 집결하였다.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연대 근무중대 앞을 지나는데 사병들이 그를 무조건 구타하였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조병모 소위가 “왜 장교를 구타하느냐?”라고 꾸짖자 구타하던 사병들은
총검으로 조 소위를 찔러 쓰러뜨렸다(첫번째 희생자). 조병모 소위는 반란 사병의 총에
팔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 대대본부 앞에 있던 전용인 소위에게 까지 가서 쓰러졌다.
조병모 소위를 쫒아오던 4~5명의 반란 사병은 조병모 소위를 그냥 지나쳐서 무기고와
탄약고를 지키던 보초를 쏴 죽이고 문에 잠겨있는 열쇠를 총으로 부수어 연 뒤 점거하였다.
제5중대 주번사관인 박윤민 소위는 주번사령에게 비상문의를 하러 가다가 탄약고쪽에서
쏘는 반란병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한편 규정대로 연대 전 장병들이 연대연병장에 집결했는데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뒷산에서 신호탄이 날았다. 또한 사복 차림의 민간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 와중에 지창수가 사복차림의 민간인들과 함께 연병장 사열대로 뛰어올라가 "경찰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온다."라고 선동하면서 진압파병 거부, 제주 빨치산에 호응하여
본토에 제2전선을 구축, 남북통일을 위한 조선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선동하였다.
지창수의 ‘병사 소비에트’ 소속 병사들이 연대 장병 곳곳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동조하였다.
그때 3명의 하사관이 앞으로 나서며
“지창수,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 “여러분!
우리는 엄연한 국군입니다.
불순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라며 군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반란병들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어 ‘병사 소비에트’의 특수공작책 심재호 상사의 지휘로 반란병들은 전 부대를 뒤지며
모든 장교를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발견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날 사살된 장교들은
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등
대대장 전원과 연대 작전주임 장교 강성윤,
정보주임 장교 김래수 중위, 진도연, 김녹영, 맹택호,
박경술, 민병여, 김진역, 이상술, 장세종, 이병순, 노영우, 이상기 소위등 20여명에 달했다.
동년 5월에야 창설된 14연대는 장교 충원율이 낮아 경비사관학교 5기생인 10여명의
소위들이 모두 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각 소대장직은 고참 하사관들이 맡고 있었다.
14연대 내 장교들이 대부분 살해되었을 때에야 여수항으로 수송장교 윤중위를 통해 반란 소식이
알려졌고, 이에 상황을 살피러 부연대장이 정보주임 김제주 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김제주 중위는 연대 탄약고에서 수화하다가 사살되었고, 부연대장은 연대본부까지
포복으로 기어가 확성기 마이크를 잡고 "불순분자들의 명령에 넘어가지 말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군인들은 연대본부 앞으로 집결하라."라고 절규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알 세례뿐이었다.
결국 부연대장은 차를 타고 빠져나와 여수읍 헌병 파견대로 향해 그곳에서 순천에 파견된
14연대 2개 중대를 이끄는 홍순석 중위에게 전화하여 반란 진압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순석은 상술했다시피 ‘콤 서클’의 핵심 멤버로 연대내 반란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준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김지회 중위는 연락병 겸 북측 감시원인 최일주 일병을 대동하고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실에서 나와 반란군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지회는 아직은 자신이 노출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최일주 일병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반란군을 지휘한다.
지창수 단독범행설(다수설)
10월 15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런데 사령부 명령이 군 통신망이 아닌, 일반 우체국 전보로 오는 바람에
일반사병에게도 금방 소문이 퍼진다. 출동 날짜는 10월 19일로 매우 촉박했다.
중앙당에 소속된 김지회 중위등 장교 당원들은 남로당의 기본 방침이 아직은
무장봉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중앙당으로 연락하기에도 시간이
촉박하여 일단 출동 명령에 응하기로 한다.
그에 반해 지창수 상사 등 하사관들은 자신들의 상급기관인 전남도당에
문의하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자 자체적으로 병사위원회를 열어 토론에 들어갔다.
결국 병사위원회는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선전 해설반을 편성해 대대별로 파병 반대 선동을 하는 한편, 위병사령부 장악조, 통신망 차단조,
장교 처단조, 무기고 점령조 등으로 병력을 나누어 먼저 연대를 장악한 후
지창수가 비상나팔을 불어 전체 부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기로 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밤,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제주도 출동을 위해 무기와 장비의
선적을 지휘하고 있었고, 장교들은 출동 장교 환송회식 중이었다.
홍순석 중위의 2개 중대는 순천에 주둔하고 있어, 여수 주둔지인 신월동에는
총 2,700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밤 10시 10분경, 이미 연대 무기고와 상황실이 장악된 상태에서 비상나팔이 울렸다.
영문 모르는 사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할 때 장교들은 환송식에서
만취하여 잠들었거나 여전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열 받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들 장교 대부분은 남로당 중앙당원이였으니 동정은 금물이었다.
먼저 지창수가 연단에 나가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는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반대합니다."라는
일장 연설을 하였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좌파사병들이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라고 고함치며 바람을 잡았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지금 경찰 놈들이 부대에 쳐들어오고 있다!"라고 외치자
우왕좌왕 하던 사병들까지 "무기를 들어라!
경찰과 싸우자!"라며 단결하게 되었다.
다만 일부 사병들은 겁먹고 총을 든 채 달아나 버렸다.
이때, 하사관을 포함한 장교 3명이 연단으로 뛰어나가 "안 돼!
뭐하는 건가?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아직은 반란은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하였다.
장교가 남로당 중앙당원인 것을 모르는 사병들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연단에 오르는 이들을 사살해 버렸다.
이어 반란군은 이미 개방된 무기고에서 무기를 들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장교와 하사관들을 찾아 죽이며 군의관 등 이용 가치가 있는 몇 명만 빼고
20여명의 장교를 살해했는데, 그중 15명이 남로당 중앙당원이었다.
지창수는 스스로 연대장에 취임하고 병사위원회 소속 하사관들을 즉석에서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빨치산 종군기자 출신의 이태가 쓴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 의하면
여순사건은 완전히 지창수 상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14연대 장교 16명중
대부분이 좌파장교였지만 극심한 팀킬로 이중 15명이 사살되었고, 사상이
불분명한 김지회만 살려두었다고 한다.
이후 지창수 상사는 순천으로 이동한 반란군 주력을 이끌고 가다가 이현상이 22일 오후에
순천에 나타나 반란군을 격려하고 “여수에서부터 회색분자 혹은 반동장교 혐의를 받고
열차에 감금당해 온 김지회의 신원을 이현상이 보증하여 풀어줌으로써 그 시각부터
비로소 김지회가 반란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며, 그 동안 당에서 애써 부식해 놓은 14연대의
수많은 장교 프락치들을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 살해해 버린
지창수 일파의 경거망동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어 각고의 노력 끝에 포섭한 좌파장교들이 죄다 팀킬당한 사실을 안 이현상은 김지회와 함께 엉엉 운다.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14연대가 제주도 파견이 결정나자 지창수 상사는 당황하였고
전남도당과 대책 마련에 대해서 상의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급박해지자 일단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이후에야 전남도당도 그 사실을 알았다고 나온다.
22일, 여수 14연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중앙당 노동부장 이현상이 봉기 지휘를 위해 순천에 도착했다.
이현상은 지창수를 만나자 먼저 중앙당에서 심어놓은 좌파계 장교 16명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야 평소 모병할 때 박헌영을 존경한다는 사람들만 입대시키는 등 평소 좌경적인
언동을 자주 해 순천역 화물차에 감금되어 있던 김지회를 만나게 되었고 이현상은 물론
지창수까지 회한의 눈물을 터뜨렸다.
이후 이현상의 지도 아래 홍순석 중위를 총지휘관으로, 김지회를 부지휘관으로
임명하여 14연대의 지휘체계를 개편하였다.
김남식의 <실록 남로당>에서는 “당시 반란 사병들에게 체포, 감금되어 총살 직전에 있던
후일의 반란군의 지휘자 김지회 중위가 지리산에 가면 나를 증명해 줄 사람이 있다.
내가 반란부대를 지휘토록 해 달라고 사병들에게 요구”하였다고 되어 있다.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에 의하면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가 "나는 여러분의 편입니다.
내가 반란군을 지휘하게 해주시오. 아니면 나를 지리산으로 데려가주시오.
지리산에 가면 나의 신분을 확인해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살아 남았다.
반란의 중심지인 전남 전역을 관할하던 전남도당이나 여수, 순천 군당들은 모두 산악에
숨어 있는 상태로 14연대 반란군과 사전에 모의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남 도당이 순천군당에게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으나
이들은 올려 보낼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은 가장 늦게 반란 소식을 알았고, 뒤늦게 라디오로 사실을 들은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에서
긴급히 간부 두 사람을 파견하여 기차로 광주까지 갔으나, 계엄군들에게 차단되어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야산대들의 현황을 점검하던 이현상이 제일 먼저 나타났다.
그는 경남 서부지구당 위원장 김상홍을 만나 상의한 후, 경남 도당 연락원의 안내에 따라
22일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홍순석과 지창수를 만난 이현상은 제일 먼저 "그런데 장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리고 총지휘권은 이현상이 넘겨 받았다.
24일에는 마산에서 진압하러 온 15연대장 최남근이 반란군에 합류하고 싶어 문의하지만
이현상은 "이승만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면 산발적인 봉기가 아닌 전면적이고
직격적인 봉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라며 돌려 보낸다.
이후에도 이현상은 산중에서 여러번 이 사건을 반란사건이라고 규정지으며
남로당의 전력을 노출시킨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각종 빨치산 문학에서도 대부분 북한의 개입설을 부인하고
지창수 상사의 단독 범행을 주장한다. 또한 백선엽의 토벌기록인 실록<지리산>에서도
남로당은 이 사건을 전혀 몰랐으며 지창수 상사의 단독범행이라고 하는 등
좌우를 통틀어 학계에서도 정설로 인정된다.
여기에 김지회 배후설처럼 이현상이 사전에 여수에 도착하여 김지회와 지창수를 만나
반란을 지시하지 않고, 사건 이후에야 순천에 도착하여 반란을 지도하게 되었다.
또한 이를 도와 북한에서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 180명을 남파한 것은 사건 1달이 지난
11월 17일이었기 때문에, 북측에는 여순사건의 사전 정보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정적으로 남로당 여수시당과 주변의 군당들은 긴급회의를 열었으나 이 갑작스런
사태의 대처법을 두고 우왕좌왕했다. 서울의 중앙당은 며칠후 라디오를 통해서나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시도 내릴 수 없었다.
여수시당은 모조건 호응해 나서야 한다는 측과, 지시가 없는 가운데
지하 조직을 전부 노출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 맞섰는데, 격론 끝에
이익주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치밀한 사전계획 없이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상황이라 급속히
진압되어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에 전념하게 된다. 평양에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으며, 이후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내 좌파
세포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조작하여 박헌영과 남로당을 숙청하는 계기가 된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병사위원회, 『여수인민보』 1948년 10월 24일자
①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②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③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④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⑤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⑥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여수인민위원회의 결정서 6개 항 14연대 반란정보를 입수한 여수경찰서(서장 고인수)는
비상소집을 걸어 150명의 본서와 지서 근무 경찰관이 집합하였다.
여기에 부연대장의 연락을 받은 헌병대 40여명과 합동 작전으로 봉산지서
부근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광주 경찰청의 명령은 “경찰서 절대사수”였다. 그러나 병력차는 압도적이었으며
경찰-헌병 연합부대는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반란군은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였다.
경찰서를 빼앗은 반란군은 즉시 유치장을 열어 각종 범죄 피의자 50명을 석방하고 무기를 지급하였다.
10월 20일 여수읍의 주요 공공 건물과 요소요소에는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의 깃발이
게양되었고 오후 1시부터 중앙동 광장에는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렸다.
또한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
인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민족반역
정권의 명령에 대하여 조선인민의 아들로서의 사명하에 이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동포를 위하여 일어섰다.”라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식사는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 이용기였고, 격려사는 보안서장으로 내정된 유목윤,
세 번째로 인사말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자 14연대 ‘병사 소비에트’ 총책으로
반란의 주역이였던 지창수 상사였다.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이 내린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지시에 의해 이미 20일 오전 8시경 김지회의
지휘로 반란군 주력 2개대대(1,400명)은 기차와 화물 트럭으로 순천으로 향했고
일부는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는 지창수 상사의 주장에 의해 2개 중대만 여수에 남았다.
그 탓에 이후 여수에 진압군이 왔을 때는 이미 반란군 주력은 없었고
그때까지 날뛰고 있던 좌파세력이 조직한 ‘인민의용군’ 정도였다.
정부 당국에서는 19일 야간에 일어난 반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21일에 이르러서야 국무총리의 공식적인 담화발표가 나왔고, 22일이 돼서야
중앙일간지에 첫 사건보도가 나왔다.
김지회가 반란군을 총지휘한다는 보도는 26일자 국제신문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평양방송에서는 이미 20일 아침 6시에 제 1보로 반란의 진전 사항을
수시로 보도하며 여수·순천 지역의 좌파세력을 격려하고 남조선의 모든 애국적
인민과 국방군 장병은 여기에 호응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같은날자 ‘로동신문’, ‘민주조선’등에서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소련의 정부기관지 ‘이즈베스챠’와 ‘타스’ 통신은 북한 쪽과 쿵짝이
안 맞았는지 반란 이틀 전인 10월 17일에 이미 남조선의 ‘대구’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다가 21일날 다시 평양방송 인용으로, 남조선 여수지역에서
군대의 반란과 인민폭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서울의 남로당 중앙당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처음으로 여순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정부측에서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명이 학살당하고 1,1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하였다.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학살 자체가 발생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시기에 목숨을 잃은 손양원 목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학살을 당하는 여수의 시민들도 존재했고 좌파청년들은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들을 학살했다.
물론 깡패·양아치·부랑아들이 가세해 평상시 감정있던 사람들을 죽이거나
부자들 죽이기도 해서 민간인의 피해가 커진 측면도 있었다.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김지회의 인도로 20일 오전 순천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홍순석이 이끄는 14연대 2개 중대와 합류한다.
홍순석은 반란에 주저하는 사병 8명을 총살해 놓은 상태였다.
20일 오후 경 순천을 장악하였고, 21일에는 구례·광양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때 약 200명의 병력이 서쪽인 보성군 방면으로 무단 이탈하였다.
이들은 거의 전부 벌교·보성·고흥·화순·광주 출신이었는데, 벌교읍과 그 주변
지역에서 한풀이식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그러나 주력에서 무단이탈한 소규모 부대인지라 광주 방면에서
달려온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걸려 전멸당한다.
20일 새벽 광주의 4연대가 진압을 위해 1개중대의 병력을 급파하였지만
4연대는 위에서 이미 언급듯이 영암사건으로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던 부대이며
4연대 출신인 김지회와 지창수가 이미 붉은 조직들을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4연대는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오전 10시경 부대 안에 있던 좌파 부사관 이진범
일등상사의 인솔로,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이명은 소위, 장인호 소위 등
장교 2명과 사병 28명을 학살한 후 잔여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으로 넘어가 버렸다.
22일에는 15연대장 최남근이 자신의 반란 동참 여부를 상의하기 위해 포로가 된 것으로
위장하여 지리산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군내 조직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27일 다시
탈출을 가장하여 15연대로 귀환하였다. 이후 정체가 탄로나 총살형을 당했다
진압 작전 도중 불타는 여수 시내 불에 타 폐허가 된 여수
이에 정부는 10월 21일에 반란군이 점거한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군을 파견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일부 진압군이 반란군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로당계 중대장이 자신의 대대장에게 기관총을 갈겨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고립된 반란군의 세력은 차츰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창설되었고
진압군은 대전 제2연대, 전주 제3연대, 광주 제4연대, 부산 제5연대, 대구 제6연대,
군산 제12연대, 마산 제15연대의 전 병력 또는 일부 차출병력, 육군비행대 L-4 10대,
육군 기갑연대 소속 장갑차 20대, 해군 경비정 7척, 서울 및 각도 혼성 경찰병력
약 2개대대로 거의 1개 사단 규모였다.
그에 반해 반란군은 김지회의 14연대 주력 2대 대대 1,400명에
홍순석의 2개중대, 4연대 1개 중대등 1,600명 중대였다.
진압군 중 4연대는 21일 새벽 구례방면으로 북상하던 홍순석의 부대를 순천
북방 약 8km 지점 서면 학구리에서 격파하였다. 진압군의 첫 승리였다.
그 바람에 홍순석 부대는 이미 광양방면으로 이동하던 김지회와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부터 순천탈환 작전에 들어가 22일 오전 순천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한편 광양방면으로 이동중인 김지회는 22일 오후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서
마산에서 출동한 15연대와 대치중 연대장 최남근과 만나는데 그는 이현상과 만나
자신의 행동 지침을 듣기 위해 포로로 가장하여 입산한다.
이때 군내 지하세력을 유지하라는 지령을 받고 탈출을 가장하여 하산한
최남근은 이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총살당한다.
이 때 진압군은 여수, 순천을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김지회의 반란군 주력의 목표는 지리산 입산이었고 이에 전투를 회피하며 빠져나갔다.
사실 원래 진압군의 작전은 지리산 입산 차단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19일에 일본으로 갔고, 20일 새벽 기타 주요인사가
모인 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지도를 보면서 반란군은 진압군에게 몰리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이라며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진압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천시가지 수복작전은 21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장갑 수색중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L-4 정찰기들을 상공에 띄우고
제3연대, 제12연대등이 공격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반란군의 저항은 미미하였다. 여수와 마찬가지로 순천에 도착한
반란군들은 순천을 장악한 즉시 빠져나갔다.
순천에 남은 반란군의 숫자는 미상이지만, 벌교출신 한모 상사의 지휘하에
150명이 벌교로 후퇴하여 벌교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으로 봐서
여수에 남은 2개 중대와 비슷한 규모로 추측된다.
순천의 완전 수복은 10월 23일 오전중에 이루어졌다.
반군토벌 사령부는 11월 13~14일 순천현지에서 군법회의를 열어 검거된 폭도 피의자
458명중 101명을 무죄석방, 79명을 징역 20년, 79명을 징역 5년, 102명을 사형에 처했다.
또한 전남 학무당국은 이에 관련된 순천지방 초등학교 불순교사 61명을 파면하였다.
23일 오전 9시 40분 함포 사격을 지원받아 5연대가 여수 수복작전을 개시하였지만
반란군의 저항이 거세 실패한다.
24일 두번째 공격은 송호성 장군이 직접 지휘를 맡아 여수 인구부(연등동 일대)에서
펼쳐지나 이번엔 매복에 걸려 송 장군이 부상을 당하고 그렇게 후퇴하게 된다.
25일부터 박격포로 화력 지원을 받는 12연대가 주공을 맡게 되고 결국 27일 여수를 탈환한다.
하지만 이때 이미 대다수는 지리산이나 벌교 등으로 도주한 이후였다.
하루 쉬고 24일 아침 여수 수복작전이 개시되었다.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인 송호성은 이승만, 이범석과 다르게 온건한 진압을 주장했다.
당시 부산일보에서는 25일 직접 교전중의 여수읍내까지 출동하여 상황을 시찰한
육군 총참모장 宋虎聲장군은 동 시가전투가 반군진압작전으로부터 완전한 봉기시민
소탕으로 변하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였는데, 동 장군은 시민의 그 같은 저항의식을
의외로 생각하고 동시에 금반 전투의 막대한 물적 손실을 개탄하였다.
동 장군은 공격에 앞서 3차례나 삐라를 뿌리는 등 반군측과 양민을 분리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는 반도측 보안대의 방해로 말미암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25일의 제1일 공격에서 장갑차를 중심으로 한 전투부대가 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건물 안으로부터의 사격이 여전히 맹렬하였음
부산신문 1948년 10월 31일 1960년대 일본 역사학자는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여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 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하야시 히데키(林英樹), 內側 見 朝鮮戰爭 民族問題硏究會 編 朝鮮戰爭史 評論社 ,
1967, pp.16 ~ 17
이명박 정부 시기의 진실화해에서는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진실화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37쪽 등으로 평가했다.
반란군측은 김지회-홍순석이 곳곳에 남겨놓은 안내원을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반란의 주력부대가 여수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고 이에
차단선을 풀고 여수만 노리게 되어 반란군들은 큰 피해 없이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여수의 무장 폭도 분자들도 지창수를 따라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고 정작 여수에는 북한군이
진하여 오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던 여수인민위원장 이용기 등 일부 좌파분자들만 남게 된다.
뒤늦게 진압군사령관을 송호성에서 김백일로 교체하고 25일, 근처에 차단선을 펼치고 있던
군부대까지 싹싹 긁어와 여수를 향해 진격한다. 물론 여수에 14연대의 주력부대는 없었다.
전날 매복당했던 미평리를 무혈 점령하고 여기에서 신중하게 하룻밤을 보낸 후
26일 아침 여수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장갑차들이 돌진했고, 여수에서는
약간의 무장폭도들이 남아 있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해상의 LST 선상에서 여수로 상륙하는 5연대 1대대의 박격포가 12연대
수색대를 강타해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지루한 시가전이 지속되었지만 진압군은 시내 중심부를 속속 탈환해 나갔다.
시가전 끝에 27일 오전, 여수남국민학교에 진압군사령부가 설치되며 완전 수복이 이뤄진다.
그리고 2진으로 도착한 경찰부대는 동료 경찰과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고, 1차 진압군경의 피해 규모를 10배 이상 상회하는 대규모 보복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 이후 12월에 화순·나주 민간인 학살사건도 벌어졌는데 2016년 12월에 돼서야
국가의 책임, 배상을 인정하였다.대법 “화순·나주 민간인 학살사건 국가가 배상하라”
48년 11월 중순 지창수가 이백여명의 잔여 병력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오면서
총 6백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조계산 방면에도 2백 명이 가 있기는 했지만, 최초 14연대 반란군과 4연대 일부 병력, 이에 동조하는
좌파세력까지 합쳐 4천명에 달하는 수의 병력이 작살나 열흘 남짓만에 겨우 1/5 밖에 남지 않았다.
나머지 병력 중 4백명은 진압군과 싸우다 죽고, 2천8백명은 생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있었다.
49년 1월 10일까지 진행된 군사재판에서 410명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바로 집행되었으며
568명은 종신형으로 대전교도소 등지에 분산 수감된다.
기타 병사들은 10년 이상 중형을 받고 수감되다가 6.25가 터지면서 전부 총살당한다.
지리산 입산 이후 반란군은 빨치산화하였다.
기존의 14연대 반란군 출신들만이 아니라 남로당 중앙에서 보낸 이현상이
사령관이었으며 구례군당(위원장 최규복)등 지방 좌파 세력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규복과 박종하가 지리산에서 14연대 반란군에게 사상 교육을 하기도 하는 등,
당이 군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 2년 후의 일이지만 이현상이 이들 부대를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끌고 남하할 때 편제를 보면 사령관 이현상, 총참모장 박종하(전 구례군당 유격대장),
정치위원 여운철(전 충남도당 위원장) 승리사단장 이진범(14연대 하사관 출신)으로 구성된다.
즉 반란군 14연대 색깔이 많이 약해진다.
소설 <남부군>의 저자 이태가 전북도당에서 전속된 부대가 승리사단 서울부대
(부대장 14연대 사병 출신 김금일)였는데 다른 빨치산 부대와 달리 승리사단은
일본군한테서 배운 국군 특유의 악습이 남아 있어 구타와 폭행이 잦았다고 한다.
용어도 빨치산식 어투가 아닌 국군식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지방 유격대와 달리 여성이 적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지아의 소설 <빨치산의 딸>에 의하면, 정지아의 부친이자
주인공인 유혁운(본명 정운창)은 곡성군당 소속이며 여순사건시 14연대
반란군이 인민군이 곧 내려와서 해방시켜 준다는 말을 믿고 기뻐한다.
그러나 며칠만에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도망가자, 조직이 전부 노출된
상태라 할수 없이 대거 입산하여 도당, 군당, 면당 별로 빨치산화하여 투쟁한다.
당시 지방 조직원들이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의 할 것은 이들이 전부 14연대에 합류해서 남부군이 된 것이 아니라, 여수-순천지역에
있다가 14연대를 따라가거나 지리산이 있는 구례군당 정도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군당/면당원들은 해당 군/면 지역 안에서만 활동하는 빨치산이 되었다.
명령 계통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을 뿐, 이현상 부대와는 별개였다.
그러나 상호 협조 관계가 되어 구례군당 유격대장 지리산 호랑이 박종하, 또는
<빨치산의 딸>의 저자 정지아의 엄마이자 구례군당 소속 이옥자(본명 이옥남)처럼
소환 형식으로 이현상 부대로 넘어가기도 했다.
여수군에서 활동한 남로당 여수 지구 위원장 이용기는 반란 일주일 후
여수 근교 석천사 뒤 마래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반란군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살한 것이 의문인데, 아마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각지에서 다른 국방군도 호응하고 38선에서 인민군이
내려오기로 굳은 약속이 되었다는 말만 믿고 있었지만 결국 아무일도 안 일어나자
비로소 기만당한 것을 알고 참담한 심정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여수지구 위원들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48년 10월 중순에서 11월 초순 사이에 14연대 반란군 600여명에 여순지역의
좌파폭도들을 합쳐 대략 1천명 정도가 광양 백운산, 지리산에 입산하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후 국군의 적극적인 진압작전과 민심 이반, 약속된 북의 지원군 부재 등으로 이들 세력은
급격히 약체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이현상이 반란군을 정규전처럼 운용하는 실책으로 그 해 말에는
350명, 사건 겨우 반년만인 49년 4월, 고작 2백명 정도만이 남아 지리산 일대에 분산 고립되었다.
이후 지리산에서 유격활동을 펼치던 반란군은 진압군의 승전으로 열세에
몰리면서 그 잔당이 한국전쟁 때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다.
반란의 주역 지창수는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입산하라는 이현상의 명령을 어기고
2개 중대를 여수에 잔류시켜 지역 방어에 매달리다가, 48년 11월 이후 지리산에서
이현상에게 '금싸라기 같은 봉기군 주력의 분산과 무모한 지역점령으로 인한
희생의 책임'을 물어 호된 비판을 받고 모든 지위가 박탈되었다.
이후 의기소침한 상태로 대열 후미를 따라다니다가 49년 2월 지리산 기슭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국군 토벌대에 의해 발목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교전 중에 생포되면 그자리에서 총살되는게 보통이었지만 반란의 주모자라
정식 군법회의에 가게 된다. 그러나 지씨 가문은 광주의 이름난 부호로,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고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50년 8월 중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숙청된 것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소식 없는 북의 지원군,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대규모 군경토벌군의 압박으로 인해 반란군이 전의를 상실하자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는 설이 있다.
1949년 4월 9일 새벽 2시 30분쯤, 김지회·홍순석 일당 29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 금판정에서 술집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군경과 맞닥뜨려
홍순석을 비롯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은 포로로 잡혔다.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이들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김갑순 일등상사는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을 생포하였고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 6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여서, 처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케 했다.
빨간 스웨터의 여대장으로 알려진 김지회의 처 조경순도 생포 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한국전쟁 직후 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이때 공을 세운 3연대 3대대는 전원 1계급 특진되었고, 김갑순 상사는 상금 100만원과 훈장을 탔다.
6.25 직전에는 이현상 휘하의 제2병단(일명 지리산인민유격대)은
겨우 70~80명이 남았고, 이후 구대원으로 불리며 남부군의 주력이 된다.
이때의 14연대 반란군 출신은 이영희(남부군 부사령관), 이진범(남부군 승리사단장),
김흥복(2대 승리사단장. 이후 81사단으로 개편), 송관일(승리사단 관일부대장),
김금일(승리사단 서울부대장)등으로 지휘관이 된다.
공식 기록에는 반란군은 392명이 사살되고 2,298명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지리산유격전구 사령관 이현상 역시 토사구팽당한다.
이현상은 5년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행세하다가 남로당
출신의 김일성 절대지지파로부터 출당 및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산중고아가 되어
홀로 지리산을 배회하다가 1953년 9월 군경토벌대에 의해 사살당한다.
당시 북에서는 박헌영과 남로당이 숙청될 때라서, 대한민국 내 박헌영의 오른팔인
이현상은 김일성에게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이태의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을
보면 북한에서 내려와 그를 암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김지회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이현상은 51년말 군경의 1차대공세로 남부군이 다 작살나자
100명 밖에 안남은 병력으로 '김지회 부대'와 '박종하 부대'로 부대를 재편한다.
이후 김지회 부대만은 이현상의 직속으로 끝까지 그를 지켰지만, 남로당 숙청으로
이현상이 숙청될 때 김태규를 부대장으로 하고 이름도 995 부대로 바꾸어 전남도당
구례군당 산하로 소속을 변경해 버린다.
995부대는 53년말 군경의 2차대공세때 김태규가 투항하면서 끝난다.
14연대 반란군과 남부군도 이로써 완전히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진압이 완료된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는 군부의 숙군이 본격화되었다.
현역 군인의 약 5%가 갈려나갔는데, 억울하게 붙들려간 사람도 한두명이 아니었다.
나중에 석방되어 고위장성을 역임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무고하게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받아 장애를 입은 사람도 숱하다. 신원조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엉망이던
군부를 다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남로당에서도 북한에서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남로당은 지상파 라디오 뉴스를 듣고 비로소 사건 발생을 알았다고 할 정도.
우발적으로, 게다가 사병 위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의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군 내부에 세포조직을 키워 세력화하려고 했던
남로당은 이 사건 이후로 군 내부의 좌파계열들이 모조리 색출되어 군 내부에서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타격이 매우 컸다.
한국전쟁 종전 후 북한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공방이 일었을 때 만주파를 제외한
연안파, 남로당파, 소련파는 이 사건의 귀결을 매우 아쉬워했다는 후문도 있다.
박헌영의 입버릇이던 "인민군이 남진하면 20만 명의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 이라는 게 사실이 되었을 테니...
하지만 나중에는 되려 남로당계를 숙청할 때 빌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남로당 거두 박헌영의 재판에서 박헌영이 "여순사건은 내가 미군과 짜고
대한민국 군 내의 세포조직을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일으킨 것이다.
그 이유는 내 사상적 기반이 나빴기 때문이다."라고 자아비판식으로 했던 진술이 기록돼 있다.
헌데 당시 박헌영은 1946년에 홀로 월북해 북한 내에서 입지가 약했기에 정치 기반인
남로당을 통해 입지를 강화할 속셈은 있었어도 미군과 내통하고 섣부른 반란 유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령 아바이는 정치 경쟁자들을 어떻게든 숙청하려고 했기에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진술을 이끌어낸 것이다.
여순사건으로 군내 좌파세력이 색출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을 통해
숙청된 군인은 전체 군인의 5% 정도이다.
이 숙군작업을 통해 반공성향의 군문화가 정착되었다.
한편으론 당시 군의 파벌 가운데 만주군 출신들이 대거 중요 보직에
포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한다. 한편 숙군작업은 반공 이데올로기 확립과 좌파세력을
척결한다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확고한 군 장악 목적도 있었다.
그 결과 반국가 세력들도 좌파들과 같이 대거 숙청되었다.
그러나 여순사건은 이후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대학살의 전주곡이었을 뿐이었는데
사건이 일어난 여수 지역도 아니고 근처인 순천 지역도 아니고 저~ 멀리 있던
지역의 좌파세력들까지 여순사건과 관련있다고 학살당했다.
위로 올라가는 보고의 상당수에 따르면 여순 세력들이 출몰했다고.
부족한 인지도 이 사건이 지닌 파급력에 비해서 인지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는 대구 10.1 사건(일명 대구폭동)도 마찬가지이다.
수십 년 후에 비슷한 지역의 전남 광주에서 발생하게 되는 5.18에 비해서 피해 규모,
희생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여순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남로당의 지창수, 김지회라고 곧바로 답할 사람의 비율은 높지 않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은 현대사의 다른 사건인
보도연맹 학살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상세히 강의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초중고 시험에서 출제되지 않는다.
대법원 2019. 3. 21. 선고 2015모2229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재심을 개시하였다.
이 사건은 전남 순천 시민인 장씨 등은 1948년 10월 국군이 반란군으로부터
순천을 탈환한 직후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사형당했다.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군과 경찰이 438명의 순천지역
민간인을 내란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는 결론을 냈고,
장씨의 유족 등은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1심인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당시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내용과
증거요지가 기재되지 않았고, 순천 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 등에 비춰보면 장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검찰이 "유족의 주장과 역사적 정황만으로 불법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항고했지만, 2심인 광주고법도 "장씨 등이 불법으로 체포·구속됐다"며
1심의 결정이 옳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사건을 기각했다.
이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2020. 1. 20. 선고 2013재고합5 판결
그리고, 2020년 1월 20일 오후 2시 19분,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무죄가 72년 만에 확정되었다.
법원,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무죄선고'판사의 눈물'…여순사건 피해 유족에 고개숙인
재판부 김정아 부장판사 "위법한 공권력 더 일찍 명예로움 선언 못 해 미안"
무죄판결을 내린 광주지법 순천지원 김정아 부장판사는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립니다" 며
김 부장판사를 비롯한 배석 판사와 검사, 법원 직원들은 모두 일어나 장환봉씨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또한 그는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아직도 멀고도 험난하다며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건과 같이 고단한 절차를 더는
밟지 않도록 특별법이 제정되어 구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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