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장 난 해후/이 선-
해후 역 1번 출구 시커멓게 잠든 남자
잔뜩 쪼그린 주림이 정강이를 타고 흐른다
누구에게 주먹을 날렸는지 어디
고꾸라졌는지
반숙란처럼 푸들푸들 부풀어 오른 한쪽
눈두덩에 거즈를 붙였다
남루한 행색이 스치기만 해도
냄새가 스밀 듯한데
지나가는 날 흐린 시선쯤 진작에 털어냈으리
나는 곁눈질을 하며 계단을 밟았다
어느 생이었나, 내 사랑이었던 것 같아
유월 숲을 걸으며 우리 바라보던 눈동자에
녹음이 깊었으리
먼 길 돌아 어찌하여 여기 보이지 않는
계절의 문턱을 넘는가
아늑한 잠에 빠진 당신 곁을 지나가는
내 발길은 폐허처럼 갈 곳 없이
천 년을 건너온 어느 고장 난 해후
다시 천 년 멀어진다
<2> -허물어진 나의 거미줄/이 선-
널 보고 말았어 욕실 한구석 가랑잎 같은 거미줄 떨궈 놓
고 집유령거미 너 누굴 기다리는 거니 네가 좋아하는 날파
리는 보이지 않아 여기 조금 누추하지만 잘 지내길 바라
무얼 그리 생각하니 마냥 우두커니 무얼 먹고 사는 거니
어젯밤 내가 가져다준 마른 새우 부스러기가 그대로구나 미
안 미안 내가 착각했어 깨끗이 치워줄게
갈 데 없어 화단 길을 걷다 왔어 잠깐 발 좀 씻을게 아니
너 언제 바닥으로 내려온 거야 샤워기 방향을 틀어 간신히
물살을 돌렸어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수채 정말 위태위
태했어 내가 가까이 오면 조심하렴
나 함정에 걸린 거야 양치를 하다 말고 문득 네가 궁금해
졌어 아니 보고 싶었어 살금살금 다가갈래 네 몸빛 닮은 상
아색 타일 벽 타고 머나먼 실크로드 순례길을 가는 거니 나
는 조용히 미소를 보내지 조심해서 다녀와
오줌 마려워 한밤중에 잠을 깼어 실눈으로 실낱같은 너를
찾을래 저기 플레이아데스성단이 흐르는 천장 모서리 희미
하게 떠 있는 너는 조무래기 꿈속인 듯 널 바라보며 나 실없
이 웃음 짓지
좋은 아침이야 이 가슴이 출렁, 손끝을 갖다 대도 네가 움
직이질 않아 배고파 죽은 거니 수명대로 살긴 산 거니 어두
운 암실에서 마지막 네 곁을 지켜준 건 차가운 바닥이었구
나 화장지 곱게 접어 염을 해줄게 옷 한 벌 없이 나의 집유
령거미 허물어진 나의 거미줄 은하
슬프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우리의 비밀 우리의 약속 너
는 집유령거미 나는 집 유령 사람 잊어버려 여기 희끄무레
남아 있는 집 유령 은하에 대해 이제 저 너머 명주 실타래
M101 은하에서 더 행복하길 바라 출렁이는 나의 은하
<3>-사월의 라일락/이 선-
그날도 라일락이 피었지
움푹 팬 눈으로 문을 나섰을 때
꽃은 지고 없었지
다시 핀 라일락은 이제
다시 핀 라이락이 아니다
침몰하는 배가 담장에 걸려 있다
술렁이던 창가, 돌아오지 못한
꽃숭어리 숨결들이
돌아온 사월의 담벼락 저만치 아픈
몸을 뒤척이며 꽃잎들이 잠꼬대를 한다
나도 깨어날 수 없어
라일락이 피었다고
라일락이 피었다고
<4>-목련 바라밀/이 선-
하늘에는 맑은 성좌
땅에는 널브러진 피고름 역사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당신과 나의 바라밀다 까마득히
하늘에는 꽃이 피고
땅에는 꽃이 지고
<5>-손수건/이 선-
풀밭 길을 걷다 물든 마음 한 자락 펼쳤다 접었다가 주머니
에 넣었다 꺼냈다가 고갯마루 해가 지고 달이 지고 어느 날
문득 보이지 않아 어디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잎새였나 빈손
에 감겨드는 바람이었나 고단한 이마 수그리면 갈비갈피 해
가 뜨고 달이 뜨던 가방 속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손끝에
드리운 그림자 당신의 마음속 손수건 하나
<6>-가로수길/이 선-
우거진 매미 소리
지나가는 푸새 밭 나비들이
가다 서다 하며 같이 간다
끝 간 데 없이 빠져드는 사왕천(四王天)
여기는 눈부신 그늘과 향기와
노래가 엉겨도는
내게는 너무 먼 나라
돌아보면
빠져나온 남섬부주(南贍部州) 도가니
아파트 단지가 아득히 들려온다
가도 가도
물들 수 없는 나,
싱그러운 잎사귀 달고
머리 짓누르는 사바로
그만 발길을 돌린다
<7> -태양의 정원/이 선-
만 년 동안 열리지 않는 정원이라니
꽃비에 나부끼는 주인공은 없었다
눈부신 햇빛이야 모사꾼이라지만
서성거리는 성문 밖 연인들아
녹슨 자물쇠처럼 침묵하던 꽃들이
깔깔거린다 그늘진
바위에 기대 있다가 날 저무는
언덕 기슭이나 걸어보자고
땅거미 지는 성곽길 남겨진 연인들아
태양의 눈동자 같은
막대 사탕 하나 들고
멀어져 가는 소쩍새 연인들아
<<이 선 시인 약력>>
*충북 음성 출생.
*충북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9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밤 두 시 십분쯤』, 『목련 바라밀』.
*2020년 제26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23년 인천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수혜.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