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동 선교와 현대판 기적 이야기
이덕주(감리교 신학대 교수)
상룡리 예배당과 마라의 쓴물
강화 교동 선교와 현대판 기적 이야기
“섬에서 섬으로 간다”
지금이야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옛날에 이 말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유배간다는 말이었다. 강화 교동으로 가는 길이 그러했다. 수양대군이 정권을 찬탄한 후 정적인 인평대군 부지를 강화로 보냇다가 그것도 불안하여 교동으로 보내 사약을 내린 것이나, ‘폭군’ 연산군이 권좌에서 쫒겨난 후 강화 본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교동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굶어 죽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교동 섬은 개성이나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 초입이어서 조선시대 삼도(삼도,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통어사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읍내리에는 조선시대에 축성된 석성(석성)의 남문이 남아 있는데 문루는 허물어져 없어졌고 화강암으로 단단하게 조성된 홍예문을 지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마을 끝 야트마한 동산에 오르면 읍내리 273번지, 유명한 ‘연산군 유배지’가 나온다.
‘연산군 우물’ 위 교동읍 교회
지금은 고추밭으로 바뀌어 연산군이 유배되어 살던 집은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연산군 유배 유적지’ 안내 표시판이 있고 그 앞쪽에 조선시대 우물이 남아 있다. 동네사람들은 ‘연산군 우물’이라 부르는 지름이 1m도 안되는 작은 우물 중간 틈에 뿌리를 박은 오동나무가 거목이 되어 우물입구를 막고 있다. 바로 이 ‘연산군 우물’ 위쪽 공터에서 강화도 목음선교가 시작되었다.
교동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은 강화 홍의교회의 권신일(권신일)이다. 권신일은 고향에서 예수를 영접한 지 3년도 안 된 1899년 교동선교를 지원하여 부인(브리스길라)과 함께 교동에 들어와 교동읍 성내, 바로 연산군이 굶어 죽었다는 유배지 뒤쪽 언덕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고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읍내에서 전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교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선비들은 권신일이 찾아올 때마다 “당신이 뭔말을 하려는 지 잘 안다. 듣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권신일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지요. 저는 장차 이 곳에 세워질 교회에 쓸 재목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이제 당신처럼 좋은 재목을 찾았는데, 내가 포기한다면 마귀 집 부엌에 불쏘시개로 없어질 것이 분명한 것을, 당신 생각에 내가 포기할 것 같아요? 그럴 수는 없죠. 내일 다시 봅시다.” 이런 식이었다. 그는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가서 전도하였다. 참다못한 교동 유생들이 교동군수를 찾아가 권신일을 추방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군수의 답은 간단하였다. “지금 서울에 임금님이 계신 궁궐(덕수궁) 바로 옆에도 교회(정동제일교회)가 있는데 아로 미루어 보면 임그님께서도 교회를 반대하시지 않고 용납하셨다는게 아닌가? 서울에서도 이러허거늘 서울보다 세 등급 아래인 군에서 어찌 교회를 내쫒을 수 있겠는가? 난 못한다.”
교동양반들도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사건을 계기로 “군수가 교회를 받아들였다.”는 소문이 돌면서 양반 눈치를 보고 교회 나오기를 꺼려하던 섬사람들이 권신일이 인도하는 주일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권신일이 교동에 들어간 지 2년만에 열가정이 등록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관계로 처음 교동읍 교회의 교인들은 읍내리보다는 섬주변 마을 출신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서쪽 해안의 멀탄나루(지금의 서한리), 북쪽 해안의 인현ㅇ나루(지금의 인사리), 동쪽 해안의 호두나루(지금의 상룡리)에서 교인들이 많이 나왔다.
이처럼 권신일이 처음 자리집고 교동선교를 시작했던 교동읍교회는 지금 폐허로 변했다. 읍내교회는 일제시대 들어 여러 가지 이유로 침체 상태로 빠졌다가 1933년 예배당을 상룡리로 옮긴 이후 다시 복구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2백여평 되는 빈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퍼져 나간 교회가 현재 12개가 되었으니 교동지역 교회들이 힘을 모아 이 곳에 교동선교를 기념하는 기념비라도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출위기를 넘긴 상룡리 예배당 종
교동읍 교회가 상룡리로 옮긴 것은 일제시대 읍내 교인들이 줄어든 대신 이 곳 상룡리에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교회를 주도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곳의 ‘박씨’ 문중 교인들은 그 믿음이나 선행에서 교동사람들의 본이 되었다. 상룡리에서 처음 맏은 박성대 ․ 박형남 ․ 박이남 3부자는 큰부자면서도 가난한 섬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전도사’ 칭호를 받았던 이들은 위기에 처한 읍내 교회를 위해 땅을 교회에 기부하여 예배당을 상룡리로 옮겨 지었다. 교회에 땅(6백평)을 기부하여 자립기반으로 삼도록 한 박기완도 그렇고, 그의 아들 박두성은 1926년 ‘훈맹정음(훈맹정음)이라 부르는 한글점자를 창안하여 지금까지도 ’맹인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되고 있다. 박영재 원로목사를 비롯하여 교동 박씨 문중에서 목회자가 20여 명 나왔으니 가히 교동의 ’신앙 명가(신앙명가)“라 할만 하다.
이런 역사를 lsls 상룡리에는 비교적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박두성이 어려서 살던 집은 터만 남았지만 이 마을의 첫교인 박성대의 토담집 고택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교동읍교회가 1933년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지은 예배당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초가집이었는데 1970년 지붕만 양펄로 바꾸었을 뿐 앳날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8칸 건물로 예배당 출입문이 좌우 양쪽으로 나 있어 남녀출입을 구분했던 옛날 교회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예배당 안은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고 일제시대 상용했던 강대상과 의자는 물론 화개산에서 산상집회를 할때마다 교회청년들이 지고 날랐다는 ‘아기 오르간’도 그대로 남아있다.
예배당 앞뜰 종루에는 옛날 종이 그대로 매달려 있다. 종소리는 맑고 시원했다. “세번이나 사라질 위기를 넘긴 종입니다. 일제말기 놋그릇 공출때 일본경찰이 와서 교회종을 떼어 본도로 실어가려고 나루터까지 끌고 갔는데 어떤 노인이 ”당신네 예배당 종을 떼어 가니 하나님이 노하셔서 배를 뒤집어 엎을거요“하였답니다. 그 말을 듣고 겁에 질린 경찰이 종만 나루터에 두고 갔답니다. 전쟁때도 두 번이나 그런 식으로위기를 넘겼답니다.” 예배당을 지키는 박용호 권사의 설명이 재미있다. 그는 교동읍 교회 첫 교인 박성대전도사의 증손자다. 상룡리 예배당은 교동읍 교회가 1979년 포구쪽으로 옮겨 가면서 비게 되었지만 박씨 집안에서 잘 관리하여 언제 가 보아도 깨끗하다.
박용호권사는 이 곳 예배당과 생가를 잘 복원하여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는 각종 고본과 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여 교동선교역사자료관으로 활용하고, 박두성생가도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매 년 수백명씩 이곳을 찾는 맹인들에게 역사와 자연 체험의 장소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현대판 ‘마라 쓴 물’의 기적
사실 박용호 권사가 고향 상룡리 예배당을 떠나지 않은 배경에는 ‘현대판 기적’이 있었다. “아버님(박영재목사)께서는 목회하시느라 일찍이 집을 떠나 외지로만 다니셨지요. 저라도 고향을 지키겠다며 이 곳에 남아 농사를 지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어서 숭어양식을 하려고 양어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1990년 11월 아버님을 모시고 예배당 앞 뜰에서 기공예배를 드린 후 어느 곳에 시추공을 팔까 하다가 예배당의 강대상을 놓았던 곳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지요. 100m를 파고 들어가도 물이 나오지 않아 모두 다른 곳을 파자고 하는데 고집을 부려 수백m를 더 파고 들어갔더니 거기서 뜨거운 물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 맛이 짜고 써요. 그래서 처음엔 바닷물이 올라온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분 분석을 해보았더니 바닷물이 아니었어요.”
한 모금 마시니 짜고 썼다. 맛도 맛이려니와 목욕하는 법도 까다롭다. 이 물로 목욕할 때는 비누나 샴푸같은 세제를 사용해선 안된다. 주인의 경고를 듣지 않고 몰래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간 머리칼이 갈라지고 뻣뻣해져 후회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신경통 ․ 관절염 ․ 위장병 환자들 가운데 목욕하고 효험을 본 사람들이 늘어났다.
“온천 영업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요. 여기가 민통선 안이라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어요. 물을 좀 많이 뽑아 올리려 구경이 큰 파이프를 박고 작동을 하면 여지없이 고장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치료 효능이 있는 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지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마라의 쓴물’(출애굽기15:23)이 생각나더군요. 이 물도 쓰고 짠 것이 먹기는 곤란하지만 치료하는 효능만은 아주 대단합니다. 그래서 ‘마라 쓴물’이라 부르기 시작했죠.”
온천이 터지자 동네사람들은 “조상 잘 둔 덕에 후손이 복받았다.” 고 입을 모았다. “그 유명한 신축년(1901년) 가뭄때 섬사람들이 굶어 죽게 될 지경이 이르자 증조할아버님이 직접 고깃배 여섯척을 끌고 전라도까지 가셔서 곡식을 사다가 교동 동면 다섯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셨답니다. 훗날 그 일로 나라에서 오위장(오위장) 벼슬을 받으시고 주만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답니다. 그때 일을 기억하고 계시는 마을 노인 분들이 온천이 터지자 조상님 은덕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선조들의 하나님’이 주신 기적의 물이었다. 상룡리 ‘마라 쓴물’ 온천이 소문이 나면서 방문객이 늘어나자 교통편의를 위해 4년 전부터 강화 본도 창후리 선착장 부근에 분점을 개설하고 ‘온천 물’을 배로 실어 나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교동까지 들어가지 않고 창후리 ‘마라 온천탕’에서 목욕을 할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오늘 우리 가까이에서 재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