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의 세계/이미영
나는 잠과 친한 편이다. 잠자리에 들어 이불을 끌어당기면 뚝딱 아침이 찾아온다. 청춘의 남자가 알약으로 잠을 청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운동을 하라는 꽉 막힌 조언을 늘어놓았다. 그 청춘은 암벽등반이 취미인데 말이다. 그는 십여 년째 사회학 공부를 하다가 사회에서 멀어져 버렸다. 사회학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청춘의 낮은 길고 밤은 짧아야 하는 법, 그의 밤은 길고 길었다. 기나긴 밤을 견디지 못한 잠이 멀리 달아나버렸다. 약을 삼키며 불러들이는 중이다. 작은 이부자리는 고단한 세상살이를 알아주기는커녕 더 매정하게 군다.
사치스러운 불면의 밤이 생각난다. 첫사랑의 그 애가 절교를 통보하던 날 난생처음 하얀 밤을 보냈다. 창밖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울다가 말다가 또 울며 지새웠다. 좋아하는 마음을 접을 수 없어 눈물이 넘쳤다. 혹시나 그 애가 다시 나를 찾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내가 미워서 울었다. 그 후로도 며칠 눈물에 젖어 잠을 설쳤다.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는 날이면 불면의 시절이 그리워진다.
금방 잠들지 못하는 요사이 밤, 눈물을 닦은 적이 없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기에 급급하다. 눈물이 속에서 흘러넘쳐 잠들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어째서 메마른 가슴을 안고 뜬눈으로 깜깜한 시간을 센다. 하나, 둘, …, 백 하나, 이백 두울, …. 아무 소용 없는 호출이란 것을 알지만 자꾸 부른다. “또~옥” 천천히 흐른다. “따~악” 선명하게 늘어진다. 시계도 눈치채고 잠이 달아난 밤을 함께 지새운다. 잠이 멀어진 밤은 이백 살 먹은 거북이처럼 기어간다.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가 펼쳐진다. 그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과 따뜻하게 끌어안는 아버지에게 환한 빛을 입힌다. 누더기를 걸치고 한쪽 신발만 끌고 돌아온 작은 아들의 어깨를 붉은 망토를 입은 아버지가 두 손으로 감싼다. 그 옆 어두운 자리에서 장남은 시선을 잃고 앉아 있다. 아버지와 탕자에게 쏟아진 조명 때문에 형의 모습은 화면에서 더욱 물러나 보인다. 어둠 속에 가려진 형 그리고 빛이 가득한 편에 서 있는 아버지와 동생의 화면 구성에서 형의 속내를 읽는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형을 컴컴한 자리에 앉히고 두 사람을 쳐다보도록 그리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거룩한 성경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 용서와 관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누가 형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기나 했을까. 묵묵히 자리를 지킨 그는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꾸 뒷전에 물러난 장남에게 시선이 쏠린다. 나도 형 같은 처지가 되기 전에는 속 좁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시동생과 시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두운 곳에 앉은 맏며느리, 나를 대입해보는 것이다.
추석을 지나며 이불을 덮어쓰고 숫자를 세어가며 잠을 불렀다. 형편이 어려운 시동생네 식구들은 추석날 아침에 느지막이 등장한다. 다시 보름이 지나고 시아버님의 기일 밤이다. 온종일 준비한 제사상을 차려 놓고 아무 연락도 없는 그들이 와주기만을 기다린다. 제사를 지내고 더 빨리 침대를 찾았다. 내 눈치를 살피는 남편을 놓아주려고 서둘러 잠을 불렀다. 잠에 빠지면 어두움은 느끼지 못하니까, 잠은 팔다리의 고단함도 금세 풀어 줄 테니까.
잠은 명약이다. 이불 모서리를 쥐고 바로 누웠다가 모로 세웠다가 배를 깔았다가 갖은 자세로 거친 숨을 고르고 있자면 녀석은 스르르 찾아와 렘브란트 그림 속 어두운 곳에 앉은 나를 밝은 곳으로 잡아당긴다. 아침이면 타들어 가던 명치 주변의 통증이 누그러지고 애써 들숨 날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저절로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만든다. 갓난아이가 자고 나면 쑥쑥 자라듯이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온몸에 붙어있던 어둠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잠에 안 좋은 점이 있다면 죽음과 닮았다는 것이다. 이 십여 년 동안 육체의 고통을 지고 산 아버지가 평안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마지막 날이었다. 신음 속에 지내시던 당신이 참 오랜만에 미소를 머금고 잠에 빠져들어 갔다. 슬펐지만 질긴 통증에서 벗어난 아버지를 축하하고 싶었다. 영원한 이별이 슬펐지만 아프지 않고 푹 주무시는 거라고 우리를 위로했다. 그래서 잠과 닮은 죽음에 위로받기도 했다.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성경을 살펴본다. (누가복음15:11~32)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있다. 그 아래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장남을 달래러 나가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떠올라 눈물이 고인다. 언제나 우리 편이던 아버지가 따뜻하게 손을 잡고 “금방 괜찮아질 거야.” 토닥여주는 것 같다. “시어머니의 마음도 아버지랑 같은 거야.” 할 것 같다.
나는 원래 잠이랑 친하다. 이불을 덮으면 뚝딱 잠에 빠진다. 울면서 보낸 밤은 눈물이 가슴을 적셔주어 통증을 남기지 않았다. 한밤중에 발견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다시 잠자리로 가게 만든다. 나는 금방 단잠에 빠질 것이다. 용서와 관용이라는 단꿈이 찾아올 것이다.
첫댓글 저는 학창시절부터 잠이 없었어요. 하루 네시간 길어도 다섯시간이지요. 지금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살았는데 나이탓인지 체력이 딸려요. 잘자는 사람 보면 엄청 부럽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성찰의 눈을 가진 분을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믿고 싶습니다. 깨어 있는 작가님의 눈에 축복을 !
저도 가끔 불면이 있었지요.
이젠 잠이 안오면 그냥 안오는가보다
하고 딴 짓합니다.유튭도 보고 잡다한 거
읽거나 서랍정리도 하고 초새벽에
요리도 합니다. 별별 짓거리로 잠과의 전쟁에서 이깁니다.
초기 불면 때 발끝 부딪기 500번
하라해서 1,000번을 부딪혀도 달아난 잠을 잡을 수가 없었는데 잠 그까이꺼
안 오면 안 자버리지 하니 까무룩.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잠이야말로 명약 중 명약입니다.
푹자고 나면 모든 게 느슨헤져서 여유가 생기고 부드러워지지요
좋은 수필 한 편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