具益均 선생은 1908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신의주고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됐다.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3년간 도산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영어·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해 도산 선생에게 새로운 사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33년 그는 중국 광둥 중산大 교수로서 혁명 운동가 양성에 힘썼으며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세 차례 일경에 체포당했다. 광복 뒤에는 진보당·통일사회당 등 정치 활동과 무역업을 했다. 1983년 도미했다가 2005년 귀국해 2006년 「도산 안창호 혁명사상연구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島山과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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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10일 서울 강남 도산공원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 순국 70주기 추모식에서 具益均 선생이 부축을 받으며 분향하고 있다. |
具益均 선생이 도산 안창호를 만난 것은 1929년. 평안북도 명문 신의주고보 4학년생인 그는 학생회 회지인 「信友誌(신우지)」 사건으로 체포됐다. 잡지 창간호가 불온 출판물로 규정돼 창간호 편집장이었던 그가 구속된 것이다. 1929년 신의주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제대에 지원한 그는 「신우지 사건」 주모자로 지목돼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후일 사상범이 될만한 젊은이는 대학진학이 금지되던 시기였다.
具益均 선생은 그해 4월 중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인천에서 배편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신의주고보 선배인 張竹植(장죽식·의사)의 하숙집에서 머물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金朋濬(김붕준: 1888~납북) 선생의 집으로 옮겼다.
具益均이 신의주학생사건 주모자라는 소문이 퍼지자 임시정부 인사들과 500여 명의 동포들은 그를 「소영웅」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김붕준 선생은 具益均을 좌익이라며 모질게 「구박」했다고 한다. 당시 韓偉健(한위건), 具然欽(구연흠), 曺奉岩(조봉암)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呂運亨(여운형)과 같은 기독교계 좌경인사까지도 상하이에서는 기피인물이었다고 한다.
『김붕준 선생댁에 1년간 머물면서 밥 먹을 때마다 이념 문제로 다퉜어요. 「소련놈의 ×으로 만든 놈」이라는 욕설을 하자 김붕준 선생의 따님들이 「도대체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뭐길래 그러시냐」고 아버지를 말렸어요.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은 대부분 완고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분들이었어요』
크게 낙담해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具益均을 김붕준 선생은 도산에게 데리고 갔다.
『도산 선생은 초면에 날 반갑게 맞아 주셨어요.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선배들로부터 공산주의 서적을 받아보고 진보 사상에 심취했다는 사실, 상하이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실망했다는 것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선생께서 진노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젊은 사람이 의식 있고 똑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산 선생은 그에게 『한국 혁명은 잃어버린 옛 나라를 찾아서(조국광복)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자(민주복지사회 건설)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들은 잃어버린 옛 나라를 찾는 일에만 열중하는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잃어버린 옛나라를 찾는 일이나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도산 선생은 한국 청년들이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고, 중국의 국공합작 전선에서 공산당에 가담했다가 蔣介石(장개석)의 쿠데타에 의해 많이 희생당했다고 했어요. 도산 선생은 「우리가 주체 세력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역량을 증대해야지, 일본 정권이나 중국 혁명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에는 복잡한 요소가 많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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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김붕준 선생의 광둥 자택에서 열린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기념대회. 왼쪽부터 김덕모, 고영선, 김효숙, 김붕준, 노영재, 구익균, 김정숙, 양우조 선생. |
흥사단에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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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51세의 도산 안창호는 서른 살이나 차이가 나는 具益均을 『흥사단에 들어오라』고 했다. 도산은 영어·일본어·중국어에 능통했던 具益均을 비서로 「특채」한 것이다. 당시 흥사단의 사무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車利錫(차리석) 선생이 담당하고 있었다.
1929년 하반기, 도산 선생의 권유로 흥사단에 입단한 具益均 선생은 흥사단 원동위원부 단원 50여 명과 함께 한 달에 두 번씩 월례 모임을 갖고 사회주의 연구를 시작했다.
도산 선생은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는 길이 반드시 공산주의여야만 된다는 법도 없다』고 하며 『사회주의 가운데 영국의 페이비어니즘(점진적 사회주의)이나 로버트 오언의 유토피아, 신디컬리즘(노동조합주의) 등 여러 가지 가운데 한국에 알맞은 주의와 사상을 흥사단 같은 단체에서 연구해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당시 흥사단內에서 사회주의에 관한 연구는 내가 책임을 맡았습니다. 일본서적을 참고해 발표하고 참석자들에게 토론을 부쳤습니다. 도산도 앉아서 경청했습니다. 월례회가 끝나면 團友(단우)들이 모여 탁자를 두드리며 흥사단 구호를 복창했어요. 그러는 동안 나도 사회주의자가 됐어요.
연대를 따지면 「프랑크푸르트 선언」보다 20여 년이나 앞섰던 거지요. 흥사단의 사회주의 연구 결실은 무엇보다 도산 선생의 기독교적 인도주의와 진보적 정치사회 사상의 영향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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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친척들과 사냥을 나갔다가 휴식 중인 도산 안창호 선생(오른쪽). |
도산은 독립전쟁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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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가운데)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큰형 안치호씨(오른쪽)와 함께. |
具益均 선생은 『도산은 온건 성향의 계몽운동가라기보다는 적극적인 무장투쟁론자였다』고 했다.
─도산 선생을 「혁명사상가」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도산이 말하는 혁명은 「잃어버린 옛나라를 찾아서 복스러운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3·1 운동 때 국민들은 만세만 부르면 독립이 되는 줄 알았지만, 도산 선생은 「10년, 100년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전 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설계와 계획을 빠짐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 실천에 옮겼습니다.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창립할 때 「독립혁명방략도」를 구상했는데, 그 마지막 단계에서 전체 민중을 무장시켜 독립전쟁을 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은 특수 계급이 아니라 반드시 전체 민족이 함께 혁명사업을 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務實力行(무실역행)」과 「忠義勇敢(충의용감)」의 원칙으로 인격을 함양하자는 교육론은 그 전 단계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렇게 장기 로드맵을 그려놓고 몸소 실천한 정치가는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산은 좌우 통합을 추진한 정치가로 알려졌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도산의 大公主義(대공주의) 사상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大公主義를 제창한 것은 1928년경이었어요. 민족 전체의 범국민적인 평등사회를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 일부까지 포용해 超(초)계급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 자기 희생정신으로 민족과 인류에게 멸사봉공하는 사상이지요. 정치·경제·교육에서 평등한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3평등 원칙」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도산의 大公主義는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孫文(손문)의 삼민주의와 차이가 있습니까.
『중국의 삼민주의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었지요. 도산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만 주장하다 보면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자기 민족이 세계 최고라는 우월감에 빠지게 된다고 우려했습니다. 도산의 민족주의는 민족 독립이지 다른 민족을 짓누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 통일전선 형성에 앞장
3·1운동 직후 玄楯(현순·임정의 주미전권대사) 목사의 연락을 받고 도산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년 5월25일이었다. 安昌浩 선생은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3·1운동의 결실인 上海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해외 망명정부로 육성하면서 해외 동포사회와 국내를 임시정부의 통솔 아래 결집시키고자 노력했다. 처음 도산은 임시정부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서리로 정부 초창기의 조직과 운영을 총지휘했다.
『과거 신민회 미주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조직·육성했던 탁월한 지도력을 임시정부에서도 발휘했습니다. 도산은 임시정부 내무부 주관 아래 「聯通制(연통제)」를 세워 국내 비밀행정조직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具益均 선생은 『도산 선생이 呂運亨과 만주지역 대표 金東三(김동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국민대표회」에 참가한 120명의 대표들로부터 「독립운동은 단체와 이념을 초월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정책으로 한국 지도자들을 유혹했고, 崔南善(최남선)·李光洙(이광수)·崔麟(최린)·朴熙道(박희도) 등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은 시기상조라며 일본 지배下의 자치와 참정권을 주장했습니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洪命熹(홍명희) 등이 만든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가 주축이 돼 조선공산당이 창당돼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으면서 국내 지식인·노동자·농민계층에 파죽지세로 확대돼 가고 있었습니다. 한국독립운동이 두 전선에서 挾攻(협공)으로 위기를 맞자 도산 선생은 새로운 진로를 모색했습니다. 나는 1929년부터 도산의 지시로 「大獨立黨(대독립당)」이라는 비밀 정당을 추진했어요. 임시정부를 받쳐주는 조직을 만든 겁니다』
─대독립당은 왜 비밀 조직으로 갔나요.
『사람들은 자신이 관계하지 않으면 자꾸 나쁘게 이야기하는 법이거든요. 日帝조차 대독립당 조직을 알지 못했어요. 흥사단에 있는 사람 가운데는 도산과 나밖에 몰라요. 내가 1980년대 후반 흥사단 기관지인 「기러기」에 발표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이때 安昌浩 선생은 중국의 혁명지도자 孫文의 삼민주의와 중국혁명의 국공합작 노선을 주시했다고 한다. 그는 「민족」, 「민권」, 「민생」의 3大 원칙이 반봉건 반제의 기치를 든 중국혁명 노선이 될 뿐만 아니라 같은 역사적 운명에 처한 한국혁명의 지도이념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모두 포용했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상하이의 공산주의자들이 도산을 비판하다가도 하숙비가 떨어지면 도산을 찾아왔습니다. 도산은 그들이 오면 시계라도 풀어 줬습니다. 具然欽(구연흠)씨 같은 좌익 운동가는 자기 딸을 화신백화점에 취직시켜 달라고 도산에게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도산이 광복 뒤에 살아 계셨더라면 최소한 남북 분단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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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오른쪽에서 네 번째)과 이승만 박사(가운데). |
당파를 초월한 핵심멤버 20人
1928년 李東寧(이동녕)·金九(김구)·趙素昻(조소앙) 등은 삼평등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안창호 선생은 러시아공산당과 중국국민당 같은 전국적 규모의 한국독립운동의 핵심조직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독립당으로부터 대독립당 조직을 위임받고 그 조직에 착수했다.
『도산은 임시정부를 뒷받침하고 있던 金九 선생 중심의 한국독립당을 지방정당으로 간주했어요. 별도 조직이었던 대독립당은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전 민족을 대변하는 망명정부가 되도록 뒷받침하려는 정당조직이었어요』
具益均 선생은 『도산 선생은 이념과 지역적 분파를 초월하고 순수한 애국정신에 투철한 독립운동가들만 엄선했다』면서 『만주조선혁명당을 대표하는 崔東旿(최동오), 국어학자인 金枓奉(김두봉), 임시정부 군무부장 曺成煥(조성환) 선생 등이 들어 있었고, 소장파로 申榮三(신영삼), 申國權(신국권), 서예가 金基昇(김기승) 등 20여 명의 핵심 멤버만이 참여했다』고 했다.
『대독립당은 비밀정치 結社(결사)로서 민주정치를 내세우고 주권을 되찾아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한다는 이념을 표방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혁명적 수단으로 타도한다는 강력한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입니다. 1932년 尹奉吉 의거가 일어난 뒤 도산이 日警(일경)에 체포돼 귀국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어요.
尹奉吉 의사의 거사가 있기까지 20여 명의 대독립당 당원들은 흥사단 원동위원부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비밀회의를 가졌어요. 후에 대독립당은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抗日의 의미를 넣은 「對日전선 통일동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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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왼쪽)은 중국內 한인 대규모 이주와 독립운동 거점 마련을 위해 필리핀 루손섬 바귀오 지역을 답사했다. |
理想村 건설비 5만 달러 마련한 安昌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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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사망 직전 흉상 제작 조각가와 포즈 취한 도산 안창호 선생. |
─도산 선생의 理想村(이상촌) 건설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안창호 선생은 자신의 大公主義에 입각한 모범사회로 「로버트 오언」의 理想村을 건설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理想村 건설은 독립된 한국의 복스러운 사회를 독립운동 기간 중에 꾸며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상하이 근방의 지강(濟鋼)이나 만주 지린(吉林)에 광활한 땅을 마련해 실향민을 모아 논과 밭을 갈아 농사를 짓고, 어린이들과 청장년들에게 민족교육을 베풀고 군사 훈련을 시키며 독립운동의 기지로 발전시키려는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理想村 건설을 위해 필요한 財源(재원)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1924년 12월16일부터 1926년 4월까지 미국에 다시 건너가 理想村을 세울 기금을 미주동포들에게 호소해 5만 달러를 거뒀습니다. 도산 선생이 1927년 2월 만주 지린에 간 것도 理想村을 세울 만한 땅을 둘러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는 단체들이 집중돼 있었어요. 그런데 1927년 2월 「지린사태」가 터졌어요. 500명가량의 한인들에게 연설하던 도산 선생이 중국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3주 만에 석방됐지만 지린지역의 한인과 중국인들의 갈등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安昌浩, 尹奉吉 의거 미리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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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1월10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촬영한 도산 안창호. 도산은 병보석으로 출감 후 1938년 3월10일 순국했다. |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尹奉吉 의사가 의거를 하던 시각, 具益均 선생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나가 있었다. 상하이에 건너가 도산 선생을 만난 뒤로는 강연 준비, 대독립당 창당준비위원 등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도산 선생은 사전에 尹奉吉 의사의 의거를 알지 못했나요.
『뭔가 아시는 눈치였어요. 그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흥사단 단소에 나아가 安昌浩 선생과 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어요. 정오쯤 되자 「소식이 왜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세요. 점심 약속을 기다리시는 줄 알았어요.
정오가 지나면서 선생님이 초조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 「손님을 기다리시는 겁니까?」라고 여쭸더니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 해서 기다리고 있네」라며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오겠다」고 했어요. 그때가 12시30분경이었어요』
그때 훙커우공원은 尹奉吉 의사가 사열대를 향해 던진 도시락 폭탄이 폭발해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폭탄투척으로 일본군 상하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 등 많은 일본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즉사했다.
─왜 사전에 미리 피하지 않으셨나요.
『프랑스 租界(조계)라는 치외법권 지역에 계셨기 때문에 피할 필요는 없었어요. 도산 선생은 시간이 되어도 거사 소식이 없자 당시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장이었던 李裕弼(이유필)씨 집에 갔던 겁니다. 도산은 상하이 보광리에서 중국신문 號外(호외)를 하나 받아들고, 李裕弼의 장남 李晩榮(이만영·우석大 총장 역임)군을 격려하러 갔답니다.
「인성학교」 부설 청소년단원인 李晩榮군에게 약속한 격려금을 주며, 李裕弼 선생 부인이 대접하는 차를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어요』
具益均씨는 『일경이 배후를 묻자 체포된 尹奉吉 의사는 「거류민단장」이라고 답했다. 尹의사는 백범이 며칠 전에 민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李裕弼씨가 새로 민단장이 된 사실을 몰랐던 것』이라며 『尹의사의 진술을 받아 낸 일본경찰은 거류민단장 李裕弼씨 집으로 들이닥쳐 安昌浩라는 예상 밖의 「대어」를 낚았던 것』이라고 했다.
백범, 도산을 「형님」이라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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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윤봉길 의거에 연루돼 체포됐다가 1935년 가출옥한 도산(가운데) 선생과 여운형(왼쪽), 조만식(오른쪽) 선생. |
具益均 선생은 『도산 선생을 모시는 3년 동안 도산과 백범이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를 목격했다』고 했다.
『백범 김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新民會(신민회)의 일원이었고,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의 수위라도 하겠다며 도산 선생을 찾아와 간청했습니다.
백범은 광복 후 귀국할 때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세력을 소외시켰습니다. 이것이 임시정부 세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됐고, 李承晩 세력에 패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얼마 전 10만원권 지폐 도안에 백범 선생을 넣기로 했습니다. 도산 선생도 후보로 올라갔지만 탈락했는데요.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도산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백범은 닷새에 한 번씩 꼭 도산을 찾아와서 앉은 자리에서 냉면을 두 그릇 비우고 돌아갔습니다. 두 분 다 냉면을 아주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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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대전 감옥에서 출감하는 도산 선생. 왼쪽엔 여운형, 그 뒤로 일본 순경이 뒤를 따르고 있다. |
도산은 그 자리에서 백범에게 군자금을 제공했지요. 도산이 백범보다 두 살 아래였는데도 백범은 도산에게 반드시 「선생님」이라 불렀고, 도산은 「백범」이라 불렀어요. 백범은 내게도 「具선생」이라고 했어요. 1932년까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은 도산이었습니다』
─그럼 백범의 특무공작도 安昌浩 선생께서 개입한 겁니까.
『백범의 특무공작은 도산 선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어요. 미국동포들이나 중국에 들른 국내 인사들은 도산 선생을 신뢰해서 그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었어요. 上海임정이 출범하면서 애국금 2만5000달러를 가져와 살림을 마련한 것도 도산 선생이었습니다.
도산이야말로 임시정부의 「호주머니」였습니다. 한 예로 유럽을 순방한 뒤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른 인촌 金性洙는 도산을 찾아 인성학교에 기부금을 전달했는데, 그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기금을 내놓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어요』
도산, 노사문제를 해결하다
─尹奉吉 의사와 도산 선생은 언제 만났나요.
『尹奉吉 의사가 박진(일명 찰리박)이란 사람이 운영하는 양말공장에서 일했어요. 임금체불이 발생하자 尹奉吉은 백범을 찾아 하소연했고, 백범은 임시정부 노동총판인 도산 선생에게 尹奉吉 의사를 데리고 간 겁니다. 도산이 화해를 시키자 尹奉吉 의사는 그의 인품에 감복했고, 흥사단 행사에 서너 차례 나왔어요. 나도 강직한 성품의 尹奉吉 의사와 「義烈團(의열단)」 문제로 숙의했습니다. 말하자면 도산이 대한민국 최초의 노사관계 해결사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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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최초의 외국인학교인 「인성학교」를 재건했다. 사진은 상하이 인성학교 제2회 졸업사진. 가운뎃줄 왼쪽 두 번째 구익균, 네 번째 선우혁씨. |
도산 구출운동
安昌浩 선생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상하이의 흥사단 멤버들과 교포들이 흥사단에 모여들었다.
『나는 그날 아침에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주었어요. 바로 그 정보가 일본 영사관에 들어갔어요. 도산이 사전에 尹奉吉 의사의 거사에 대해 金九와 공모한 것 아니냐고 일본영사관에서 추궁이 들어왔습니다. 도산 선생은 이 일로 매우 난처해졌고, 그뒤로 이 일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었습니다』
具益均 선생은 도산이 잡혀간 뒤 구출운동을 시도했다고 한다.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도산이 치과치료(치과의사 이무상)를 받기 위해 건물을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일본영사관 별관 구치소에서 맞은편 건물로 이동하는 틈을 이용해 탈출시키려는 계획이었다. 具益均 선생은 梁愛三(양애삼)씨를 통해 도산을 치과까지 모시던 田모씨와 내통하는 데 성공했다.
『田씨가 도산 선생에게 탈출 계획을 알리자 「잡히면 망신하니 그럴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도산 선생의 부인과 자식들이 미국 국적자여서 변호사를 통해 미국으로 신병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일본영사관은 「조선인호적법」에 따라 일본의 허가 없이는 國外로 나갈 수 없다고 거부해 불발에 그쳤습니다』
도산 선생은 거사 이후 3주 동안 상하이 일본영사관內 경찰서에 유치돼 있다가 배편으로 국내로 압송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6개월간의 옥고 끝에 1935년 출감한 도산은 1937년 7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150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거됐다.
도산은 대전 감옥에서 소화불량과 급성 폐결핵을 얻어 그해 12월 말 보석으로 경성대학병원으로 옮겨 요양하다 이듬해 3월10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具益均 선생은 『경성대학병원의 도산 선생 치료비는 金性洙 선생이 모두 지불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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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규 삼성출판사 회장 소장 서첩. 이 서첩에는 계초 방응모 선생과, 안창호 선생의 글이 나란히 실려 있다. |
도산을 고문으로 영입하려 한 方應謨
具益均 선생은 『당시 국내외 모든 교포들은 도산에게만 애국금을 보냈다』면서 『金性洙는 상하이에 오면 도산하고만 만나서 군자금을 전달했다』고 했다.
『그만큼 독립운동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던 것이죠. 도산은 조선일보 사장이던 계초 方應謨(방응모)씨와도 절친했는데, 계초는 도산을 조선일보 고문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李承晩(이승만) 박사는 미국 활동을 마치고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47년 4월21일 서울로 귀국했다.
『노스웨스트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오른 李박사가 4월19일 상하이에 들렀습니다. 李承晩 박사는 비서 張基永(장기영)씨를 대동하고 왔습니다. 자그마한 분이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위엄과 위신이 없었어요.
개인적으로 李承晩 박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上海이민단장으로서 그를 영접했습니다. 편협하고 왕자 연하는 그의 태도는 물론, 독립운동에서 보였던 그의 철학과 노선에 지지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李박사가 광복 후 귀국해서 취한 지도이념에 대해 나는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철저한 反蘇(반소)·反共(반공)노선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배격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 데 대해 나는 일말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具益均 선생은 蔣介石의 요청으로 李承晩 박사를 맞이하는 환영위원이 됐다고 한다. 上海인성학교 교정에서 열린 李承晩 박사 환영식에서 具益均 선생은 이렇게 환영사를 했다.
『요즘 李承晩 박사가 집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국내외 여론이 있습니다. 李박사는 國父(국부)로서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을 하는 데 최선의 역할을 다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국해서 제발 정권을 다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산과 李承晩 박사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도산 선생에게 「세상사람들이 두 분이 패가 다르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여쭤보았습니다. 도산 선생은 「나는 李承晩 박사를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었을 뿐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고 하셔요. 도산 선생은 결코 李承晩 박사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재미교포들은 李承晩 박사가 왕족이라며 일을 하지 않고 귀족처럼 지내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어서, 귤농장에서 교포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흘렸던 도산 선생을 더 존경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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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선생(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1919년 미국 흥사단빌딩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규조토 팔아 교민 3000명 뱃삯 마련
1947년 具益均 선생은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귀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具益均 선생은 백범의 지시로 광복 후 2년 동안 上海교민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上海 임시정부 요인 중 理財(이재)에 밝은 축에 속했다. 그 무렵, 한 중국인 무역상으로부터 연마제·흡수제로 쓰이는 硅藻土(규조토) 500톤을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약방을 수소문하다 규조토 물량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냈어요. 500톤을 구입해 300톤만 처분했는데, 소개 비용으로 수표 60만 달러를 받았어요. 나중에 200톤도 처분해서 큰돈을 만졌지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돼 金基昇(김기승)군을 시켜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길로 중경에 있던 김구 선생에게 미군 헬기를 타고 날아가니 놀라셨어요. 이렇게 해서 상하이에 몰려든 교민들 3000명의 귀국 뱃삯을 마련했습니다』
온화하고 거짓말 할 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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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8일, 뉴욕 유엔본부 앞 식당에서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왼쪽 두 번째)와 환담을 나누는 구익균 선생(맨 왼쪽). 권두영 박사, 송경희 비서. |
─옆에서 지켜 본 도산 선생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온화하고, 화도 잘 안 내시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이셨죠. 이북 출신인데 사투리는 하나도 안 쓰고 서울말만 썼지요. 밤 10시에 취침하고 오전 6시면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태극권이나 검술 운동을 했어요. 그외에 취미라고는 꽃 가꾸는 일뿐이었는데, 무더운 여름에 온몸이 땀에 젖도록 꽃에 물을 줬습니다. 술은 한두 잔 마시고 나면 얼굴이 빨갛게 돼서 많이 하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항상 담배를 물고 있을 정도로 담배를 많이 피웠습니다. 내가 「선생님은 왜 다른 건 다 실천하면서 담배는 못 끊습니까」라고 하면 「그렇게 애를 써도 못 끊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감옥에 가서야 끊었지요』
─도산 선생은 가족들을 모두 미국에 두고 상하이에서 혼자 지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도산은 늘 양복과 넥타이, 중절모를 깨끗하게 차려 입은 멋쟁이였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도산을 사모했는데, 어느 날 스웨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모라는 신여성이 침실로 몰래 들어와 도산이 자고 있던 침대에 누웠어요. 그러자 도산은 조용히 「불을 켜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나에 대한 열정이 있다면 그것을 독립운동으로 돌려라」 하고는 돌려보냈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내가 직접 여쭤 보니 빙긋이 웃으시며 아무 대답을 안하셨어요. 민영환·김병헌·김인식·윤치호 등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내가 여쭤볼 당시 느낌으로는 도산이 작사했다는 게 거의 확실해요. 도산은 「去國歌(거국가)」를 짓는 등 노랫말 짓기를 좋아했어요』
『장년흥사단으로 성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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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미국의 도산 안창호 가족들. 왼쪽부터 장녀 수산, 부인 이혜련 여사, 장남 필립, 차녀 수라, 차남 필선. |
─흥사단이 앞으로 어떻게 도산 선생의 혁명사상을 발전시켜야 합니까.
『현재 흥사단은 20~30代의 「청년흥사단」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흥사단은 30代 이상으로 구성된 「장년흥사단」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무실역행」, 「충의용감」이라는 도산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껏 흥사단을 출세의 사다리로만 이용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에요. 도산 선생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후배들이 잇는 길은 이길밖에 없습니다』
2007년 작고한 수필가 皮千得(피천득) 선생은 그의 수필 「인연」에서 도산과의 인연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上海로 유학을 간 동기의 하나는 그분을 뵐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었다. 가졌던 큰 기대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지 않은 경험이 내게 두 번 있다. 한번은 금강산을 처음 바라봤을 때요, 또 한번은 도산을 처음 만나 뵌 순간이었다. …(중략)… 내가 병이 나서 누웠을 때 선생은 나를 실어다 上海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겨울 아침 일찍이 문병을 오시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 장례에도 참례치 못하였다. 일경의 감시가 무서웠던 것이다.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보다도 부끄러운 일이다> (인연, 2002년)
도산혁명사상의 권위자인 李昌杰(이창걸) 국민大 교수는 『上海 임시정부를 반석에 올려놓은 지도력,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포용해 大公主義 사상을 편 사실 등은 역사에 결코 묻힐 수 없는 업적』이라고 말했다.
具益均 선생의 마지막 바람은 상하이에 있는 도산 안창호가 살던 흥사단 건물을 인수해 「도산 진흥원」으로 꾸미는 일이다. 그는 여러 차례 『흥사단 건물은 安昌浩 선생과 尹奉吉 의사가 살았던 건물이다. 상하이 흥사단 건물을 구입한다면 도산의 체취가 살아 숨쉬는 그곳을 우리 민족이 資産(자산)으로 가질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from: http://cafe212.daum.net/_c21_/bbs_list?grpid=11qTR&mgrpid=&fldid=Btqs ●
사진 : 조준우
▣ 島山 安昌浩는
1878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 활동을 벌였고, 1902년 渡美(도미)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수학했다. 이듬해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해 이듬해인 1907년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抗日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1910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 노동총장 등을 지냈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 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본국으로 송환됐다. 2년6개월을 복역한 뒤 1935년 가출옥했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됐다. 병보석된 지 4개월 만인 1938년 3월10일 서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고,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문을 열었다. from: http://cafe212.daum.net/_c21_/bbs_list?grpid=11qTR&mgrpid=&fldid=Btq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