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2)
아브라함 이야기는 12장부터 18장까지 이어진다. 어느날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말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꿈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고향을 떠났다.
고향은 편안함이 있는 곳 꿈에도 그리는 곳이다. 친구도 많고 그 누구를 만나도 어색함이 없는 곳이다. 이러한 고향을
떠나 어디로 가는지 목적도 없이 그냥 하느님만 믹고 길을 나섰다. 타향살이를 해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안다.
지방색이 강한 곳에서는 그곳에 20년 30년을 살아도 타향사람이라고 '왕따' 를 시킨다고 들었다. 내가 아는 어떤 교수가
어떤 섬에 가서 살아 보겠다고 이사를 갔는데 그 마을에는 아직 수세식 화장실이 없던 때였다. 그는 시골집을 사서 개조를
했는데 집 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었다. 그런데 옆집에서 밖에 화장실을 만들고 그것을 쓰라고 시비를 걸었다. 이유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물이 동네를 더럽힌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괜한 트집이었다. 정화조가 있기 때문에 더러운 물이 흘러
나가지 않는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말한 사람은 마당가에 돼지를 키우면서 더러운 오물을 마구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의 집 수세식 화장실을 옮기라고 우겨댔다. 동네 사람들도 한 통속이 되어 우겨대니 견뎌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교수는 이사를 하였다. 이것이 타향살이의 설움이다.
아브람은 타향살이가 어럽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아브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팔자' 신자라고나 할까? 하느님의 용사였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그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자식이 중요
하나 하느님보다는 귀중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께서 우리더러 네 집에 있는 땅 문서를 갔다 하느님께 바치라든지 네 자식을
하느님께 바치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 하느님이 미쳤다고 할까? 아니면 무슨 말씀이라도 다 따르겠다고 할까?
아브람이 살던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어 부인과 함께 이집트로 갔을 때였다. 이집트인들이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를 보고
첫 눈에 반해버렸다. 그 소문이 파라오에게까지 전해졌다. 파라오가 그녀를 오게 하여 보니 과연 대단한 미인이였다.
그래서 그의 아내로 삼고 아브람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다. 아브람이 자신은 사라이의 오빠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브람이 아비멜렉 왕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라이를 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비멜렉도 사라이를 데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둘 사이는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라이를 아내로 삼은 파라오에게 많은 재앙이 생겼다. 그래서 그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캐보다가 아브람과 사라이가 부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라오는 사라이를 내보내며 어서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네겝으로 갔다. 사라이는 미인이기는 하였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였다. 그래서 자기 종 하가르를 아브람과 동침하게 하여 아기
를 낳아 대를 잇게 한다. 사라이의 남편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였다. 남편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서 다른 여인을 남편의 품에 안겨 준다
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막상 하가르가 아기를 갖자 제 주인을 업신여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하가르는
쫓겨나게 되었다.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도 과거에 비참하던 때를 돌아보면 오늘의 건강이나 부귀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겸손한 사람이라야 이 세상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으로 바꾸어 주시며 계약을 맺으셨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
대신 하느님께서는 후손을 밤하늘의 별처럼 주시겠다는 계약이었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태어나면 할례를 받는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 갔을 때 주님께서는 이 두 고장이 너무 죄악으로 가득하여 멸망시킬 결심을 내보이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흥정을 하였다. "의인이 마을에 쉰 명 있어도 쓸어버리시겠습니까?" 로 부터 시작하여 "열 명이 있더라도
파멸시키겠습니까?" 까지 여쭙자 주님께서는 "열 명만 있어도 파멸시키지 않겠다." 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 고장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남자들은 정상적인 성을 즐기기보다 변태적으로 변해 있었다. 사회의 풍조가 그러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
의 뜻이 아닌 죄악 속에서 악취를 풍겨대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시대에도 풍기문란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동성끼리의 사랑은 흔한 이야기가 되고 있다. 스와핑이라는 새로운 낱말도 등장
하고 있다. 어디 인간으로서 낯을 들고 다닐 수 있는가? 개들이 비웃고 새들도 비웃을 것이다.
"이 인간들아 정신 차려라." 하고 속으로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