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는 경성에 진주하는 주체가 미군임을 확인한 직후부터 미군과의 교섭에 대비하는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은 미군에게 제출할 13개 항목의 희망사항을 작성했다.
그것을 짧게 요약하면 비록 일본이 항복은 했지만 여러 이유로 조선의 치안과 행정은 계속 총독부가 담당해야 하며, 미국은 공산주의자가 절대 다수인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6일 찰스 해리스 준장을 대표로 하는 37명의 선발대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조선총독부의 재무국장 미즈타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마당에 '잔인한' 미군으로부터 받을 '능욕'을 상상하며 미국 선발대를 영접하기 위해 나갔지만 미군으로부터 '악수'와 '착석 권유'와 같은 정중한 대우를 받으며
미군이 자신들을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하러 왔다는 점을 간파했다.
선발대는 조선인에게는 오히려 경멸의 빛을 보였지만 일본인에게는 한때 적이었지만 같은 위치에서 전투를 한 군인으로서의 동질감,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지배자로서의 동질감을 보이는 듯했다.
그날 밤 미군 사령부 주둔을 위한 사전준비 회담이 이루어졌다.
미군 사령부가 사용할 사무실과 미군 장교 및 2000 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숙소와 병원, 창고등의 시설 제공 문제, 그리고 일본군 사령부의 대전 이전 등이 합의되었다.
7일 오전 10시부터 본격적인 회담이 엔도 정무총감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해리스는 엔도가 요청 사항을 말하기도 전에 총독부가 오매불망하던 발언을 스스로 쏟아냈다.
조선총독부가 지금처럼 행정의 실무를 맡고, 미군은 이를 감독만 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것이다.
이는 미군이 총독 통치, 즉 일본의 식민 지배를 연장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엔도는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문서로 확인받고 싶어했지만 해리스는 자신에게는 이 건에 관한
결정권이 없다는 말로 문서화 요구를 피했다.
엔도는 화제를 돌려 "38도선 이북으로부터 다수의 공산당원이 잠입해 있다. 최근 1주 내 정보에 따르면 총독, 총감, 군사령관, 참모장 등이 그들의 테러 목표물이 되고 있다"며 남한 내의 혼란과 공산주의자의 위협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높였다.
미군 선발대는 호텔 안에서 일본인들과만 어울리며 조선인의 접견은 거부했다. 그들은 일본 관리, 장교들과 함께 연회를 가지며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미국인에게 일본인은 어느새 적국인이 아니라 우호국의 국민으로 변해 있었다.
-미군 선발대가 입성하던 날 일본의 요코하마에서는 미군정을 선포하는 통칭 맥아더 포고령 제1호가 발효되었다.
이는 미군정이 9월 7일 경성에 진주할 것으로 예상하여 발효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하지가 입경한 9월 9일 포고되었다.
맥아더는 포고 제1조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인의 관할을 받는다." 로 미군이 직접 한반도를 통치하는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한다는 전제 아래 시작된 맥아더의 포고에는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독립시킬 결정"을 언급하였지만
"주민은 본관의 모든 명령과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시 복종하여야 하며,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어 엄벌에 처한다..." 등으로 미군이 본질적으로 점령군이라는 인식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적국이었던 일본에 첫발을 디딘 8월 30일 "일본인이 대단한 성의를 가지고 일에 협력하고 있다"는 우호적 연설을 하였던 맥아더는 조선에 대한 포고에는 새로운 지배자의 엄하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드러내었다.
포고문 제2조에는 정부, 공동단체의 고용인 등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여 일제시대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행위자들이 미군정에 고용되어 합법적으로 새 질서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미군의 이러한 억압적인 포고의 이면에는 일본 제17방면군과의 '전문 플레이'가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미 제24군에게 최상의 정보 제공원이자 조선 상륙에 큰 도움을 준 상대는 일본군이었으며 미군은 익숙지 않은 점령 업무에 나선 자신들을 성심성의껏 도와준 일본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일본을 적이 아닌 귀중한 협력자로 느끼지 시작했다.
반면 미국에게 조선은 적국인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적국과 동등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을 일단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1945년 8월말 맥아더는 하지에게 조선인은 "적국민이지만 해방 국민으로 대우하라"는 훈령을 내렸지만
하지는 9월 4일 제24군단 장교들에게 "조선은 미국의 적"이며 따라서 "항복의 제규정이 조선에 적용된다"고 말하여 훈령에 따른 시정은 무시되었다.
물론 맥아더도 자신이 내린 포고에서 자신이 내린 훈령을 무시한 셈이었다.
9월 7일
미군정의 조선선발대로 도착한 해리스 일행은 일본인과 호텔 연회를 즐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군정 시행에 따른 회담을 진행하였지만
실제 군정의 당사자가 될 조선인들은 접촉이 거부당한 채 맥아더의 억압적 포고문을 받아야 했다.
첫댓글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해 식민지에서 분단국가로.
남북한 모두 양진영의 군사,경제식민지로 계속해서 삥뜯기고 있는중(현재진행형)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력으로 되립하지 못했기에 감수해야할 게 너무 많았어요.
여기까지만 읽으면, 우리 나라의 앞날이 참 암담해 보입니다... 해방이되 해방이 아닌...
내일 글에는 더 열받고 슬픈 사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